#언더독#약자의정의#선전,선동
※ 이 글은 <월간샤밧> 니산월호에 게재되었던 내용입니다. 여러 독자분의 요청으로 블로그에 다시 게재합니다.
언더도그마(underdogma)에 갇힌 우리들
가자지구의 테러단체 하슬라믹 지하드가 가자지구 병원에 미사일을 떨어뜨리자, 온 세상은 바로 이스라엘의 공습이라고 넘겨짚었다.
야만적인 대학살과 강간•민간인 인질납치등 잔혹한 테러에 대응하여 자국민을 보호하는 이스라 엘에게 전세계가 책임을 추궁한다.
기자들은, 증거를 보지도 않고 아기들을 참수하고 여자들을 강간하며 무차별로 살해하는 단체들 을 인용해 보도했다.
하마스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전 세계에 사실인냥 오보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짜뉴스를 조장하고 거짓을 부추길 뿐이다. 전세계가 테러범들은 거짓전술에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런 진실 앞에서 눈을 감은 채 하마스를 지지하는 것일까?
반유대주의란 거창한 민족주의적 용어의 이면에 있는, 우리 마음속의 일그러진 진실을 들여다 본다.
TV를 보면 인기 절정의 톱스타도, 아이돌 그룹 가수들도, 사회적인 이목을 집중받는 유명인들도 대다수, 지난 시절 ‘눈물 젖은 빵’을 먹던 시절 이야기를 한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인 애 플의 스티브 잡스도,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도 모두 허름한 차고에서 창업했음을 강조한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은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을 앞다퉈 펴낸다.
왜 그들은 모두 힘들고 어려웠던 약자의 기억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대중은 힘센 사람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대중들은 보잘 것없는 주인공들에게는 열광한다. 다윗과 골리앗은의 싸움에서 골리앗의 편을 들기는 여간해서 쉽지 않다. 더구나 골리앗은 성경적 사유가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악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언더도그마’라 한다.
‘언더도그(underdog)’란 싸움에서 지고 꼬리를 내린 개처럼 객관적인 열세를 보이는 약자다. ‘언더도그마’는 약자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선하고 고결하며, 강자는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사악하다고 믿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 이라크전쟁 당시 크리스천 피스메이커팀이라는 기독교 평화운동단체가 이라크에서 반전시위를 하던 중 이라크군에 인질로 잡혀 한 명이 총살을 당했다. 나머지 인질들은 수개월 후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비판했던 다국적군에게 구출됐는데, 석방 후에도 이들은 강자인 다국적군에게 모든 책임이 있으며, 약자인 이라크군은 선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서도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여론은 약자인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 방송 회면에 이스라엘 민간인 거주지역을 향해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을 보면서도 약자로서의 정당성과 면죄부를 준다.
언더도그마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중은 무명의 언더도그 참가자들이 참가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열광한다. 국내도 각 방송국마다 유사한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청자를 끌어 모은다.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권의 언더도그마 전략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TV에 나와 풀빵장사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욕쟁이 할머니의 장터국밥을 먹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말까지 자신이 ‘거대야당과 언론권력’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라고 호소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부산 지역에서 문재인 후보가 속한 민주통합당이 언더도그였는데, 새누리당은 더 약해 보이는 27세 정치신인 손수조로 맞불을 놓아 ‘언더도그’ 경쟁을 벌인 적도 있다. 진보정당이 거대여당에 대한 심판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스캔들에는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도 언더도그마로 해석된다. 언더도그마는 때론 실패한 자는 칭찬하고, 성공한 자는 처벌하는 대중의 심리다.
그렇다면 과연 약자는 정의로운 것인가? 우리 사회가 현실적으로 강자에게서 정의로움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음은 사실이다. ‘갑질논란’에 ‘갑’이 대다수 강자인 것도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가진 자들에 대한 갖지 못한 자들의 증오 또한 대단하다. 이 증오는 물론 가진 자들이 실질적으로 갖지 못한 자를 억압하는 현실에서 비롯된 "실체로서의 증오"도 있지만, 그저 자신보다 가졌다는 이유 자체만으로도 증오하는 "추상적인 증오"도 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에서도 이는 여실히 나타난다. 이야기 속의 악역인 놀부, 스크루지는 늘 부자다. 반면 주인공은 늘 선하고 가진 것이 없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더이상 진보할 수 없는 궁극의 경제체제로 자리잡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못 가진 자의 가진 자에 대한 증오는 극심해졌으면 극심해졌지 덜 하지는 않다. 물론 그 배경에 많은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극심한 부의 편중, 분배정의 실종 등, 사회적,정치적 많은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갖지 못한 자의 마음속에는 가진 자들에 대한 선망도 있다. 갖지 못한 자는 자신들이 속한 부조리한 사회에서 소소하게 자신들의 지위를 높여가며 언젠가는 그들 자신이 가진 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들만의 리그’를 비판하지만, 언젠가 자신 또한 그들 안에 들어가기를 바라며 노력한다. 혹은 어디선가 영웅이 탄생하여 이 부조리한 사회에 한바탕 혁명을 일으켜주기를 원한다. 그럼으로해서 변화된 사회에서는 자신들이 평등한 위치보다는 강자의 역할로 올라갈 수 있기를 믿고 희망한다.
결국 정의의 문제, 선악의 문제는 강자와 약자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 결정 날 수 없다.
약자의 악함도 강자의 선함도 분명 존재한다. 언더도그마는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철학이 아니고, 교육이나 교류를 통해 전파되는 것도 아닌, 세계 도처에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다. 우리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 언더도그마 주의자가 어떻게 사람들을 속이고, 국제문제를 왜곡하며 권력을 얻으려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얼마나 왜곡된 사회적 통념과 편견으로 사회 현상을 바라보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프랑스혁명 시기의 철학자 알렉시스 드 또끄빌(Alexis de toguevillo) 은 "프랑스 사회는 평등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어, 자유가 평등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침범한다면 기꺼이 언제라도 자유를 포기할 것이다."라며 경고함과 동시에 당시 프랑스 사회를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억압하는 '민주의 이름으로 둘러싼 다수의 폭정' 즉 '민주적 전제주의'라며 비판하였다.
작가 마이클 프렐은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열망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본성을 이성과 합리성으로 감싸고 이겨 내는 방법을 알기에 인간은 고귀하다 할 수 있겠다.
"국가 아이텐티티가 언더독과 맞아떨어지면 그 나라 국민에게서 언더도그마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IMF 외환위기 등 치열한 현대사를 거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언더독 성공 스토리'의 표본이 바로 우리나라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가 '약점과 어려움을 열정과 노력으로 극복하는' 사례에 플래시 라이트를 터뜨리기 좋아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린 단지 '언더독' 상태인 그 자체의 사람을 선호할 뿐, 그가 '언더독 신화'를 이루는 순간부터 그를 반기지 않을지 모른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는 근본적으로 언더도그마와 다르다. 매일 수 없이 행하여지는 이 사회의 부패함과 부당함을 향한 외침과 저항 또한 때때로 그것이 진정한 정의 실현을 향한 제대로 된 몸짓인지, 아니면 단순히 '언더도그마 현상'에서 비롯된 맹목적 반감일 뿐인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하겠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각인 돼 있는 언더도그마를 걷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진실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월간샤밧>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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