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기자
김성철 교수님은 죽음은 허구(虛構)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 김성철 교수(동대학교 명예 교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맨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원전에는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갖는 이유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방법은 2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개념의 방식과 체험의 방식이 있습니다.
개념(槪念)의 방식은 중관학적(中觀學的) 방식입니다. 공(空)을 논증하는 방식이 중관학입니다. 죽음이 있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숨쉬고 있으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연기한 개념입니다. 죽음과 삶은 서로 대립한 개념으로 죽음이 있어야 삶이 있고, 내가 살아 있으면 죽음이 없는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삶과 죽음이 의존적으로 발생한다. 이 의존적 발생을 불교 용어로 연기 했다고 말한다.
머릿속에서는 삶과 죽음을 떠 울리 수 있어요. 그러면 실제 삶과 죽음이 있는 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도 삶과 죽음이 연기한 것인데 내가 태어나전 나와 내가 죽은 후의 나를 절대 체험하지 못합니다. 탄생 전에 무(無)의 상태와 죽은 후의 무(無)의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유(有)를 체험하는 순간일 것이다. 왜? 서로 의존하지 때문이다. 그런데 탄생 전에 무(無)를 체험할 수 없고 죽은 후에 무(無)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유(有)를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유(有)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살아 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생각 속에서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실제 사실은 아닙니다. 생각 속에 불(火)이 뜨겁지 않듯이 생각속의 개념은 가짜입니다. 그렇듯 생각 속 개념은 실제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죽을 것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개념에 머리에서 만들 것이지 실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중관학적 개념입니다.
다음으로 체험적으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이런 가르침에 근거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으려면 살아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해야 가능합니다. 어제 나와 지금의 내가 같아야 합니다. 10년의 나와 같아야 하고, 30년 전 나와 같아야 합니다. 즉 ‘변하지 않은 내가 있었는데 없어져다.’고 할 때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을 살펴보니까? 없다. 내 몸은 찰나 찰나 변하고 있다. 몸은 인연 따라 변하고 있다. 몸도 마음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나는 있을 수 없다.’ 내 몸은 매 순간 죽고 있기에 새삼스럽게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체험적으로도 죽음이라 것은 원래 없는 것이다.
출초 : 휴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