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2007년의 끝자락을 밟고 찾아간 경주. 테마여행 첫날 일정을 마치고 어둑어둑한 보문단지 내 호숫가를 거닐다 떠오른 글귀다. 눈앞에는 어둠 속에 노란 가로등 빛을 받은 정자(亭子) 하나가 물 위에 투영되어 있었다. “저렇게 명쾌하게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호숫가에 홀로 선 정자가 부러워졌다.
한 해가 저문다.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들도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려 마음먹는 시기다. 거울 대신 물에 얼굴을 비춰보던 옛 사람들은 물질의 외형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으로 ‘무감어수’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거울에 얼굴을 비추는 우리는? ‘감어인(鑒於人)’, 즉 주변 사람들에게, 타인들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신영복 교수는 권한다.
이를 악물고 살아도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엎질러진 물도 되짚어보고, 내일을 위한 새로운 숨고르기를 해야 할 때가 지금이다. 겨울의 여백이 가득한 보문단지 산책로를 따라 올해 내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는 건 어떨까?
호숫가의 정자를 보면서 올해는 마지막 날을 경주에서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보문단지
12월에 찾은 보문단지. 흐드러진 벚꽃의 향연도, 장엄한 소나무 숲의 행진도, 넋을 빼는 황홀경의 단풍도 없었다. 하지만 겨울의 보문단지는 오래된 연인이 주는 편안한 품을 가지고 있었다. 관광객이 넘치는 봄, 가을과 달리 고즈넉한 겨울의 산책로는 조용히 사색하기에 딱 좋다. 쓸쓸해 보이는 가로등에, 혹은 일부러 빈자리를 남겨둔 것 같은 벤치에 살짝 기대보는 것도 운치 있다. 가족과 함께 찾아온다면 물레방아가 놓인 분수대 옆에서 사진도 찍고, 초가지붕 아래에서 고소한 파전을 구우며 한 해를 등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다.
호수, 공원, 산책로 등 자연경관에 콘도, 온천, 음식점, 놀이시설까지 관광지로서 보문단지에 대해서는 워낙 유명하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주로 자전거를 많이 탔던 과거와 달리 요즘엔 어린이용 소형 스쿠터와 산악용 사륜 오토바이가 더 눈에 많이 띈다는 점이다. 날씨가 춥지 않아 밤늦게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한지공예 체험
보문단지 내에 있는 한지공예 체험장이다. 1인당 1만 5천 원이니 체험비용이 좀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쓸모 있는’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다. 색색의 한지를 이용해서 부채, 거울, 장신구 상자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자리에서 직접 배워서 만들 수 있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건 꽃 모양의 탁상용 전등. 모양도 모양이지만 다른 물건들보다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는 게 참가자들 반응이다. 넉넉잡아 두 시간 정도 소요되고 아이들도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외에도 다도(茶道)체험장, 선재미술관, 드림센터(과학박물관) 등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시설들이 많다.
◆석굴암
보문단지에서 차로 20~30분가량 이동하면 석굴암에 닿는다. 토함산 자락의 산책로를 따라 석굴암으로 가는 길. 새벽 4시부터 기도를 올리는 수도승들의 부지런한 싸리빗질 덕일까? 나뭇가지는 잎이 하나도 없이 앙상한데 바닥엔 낙엽 하나 널려있지 않았다. 길이 정갈하니 올라가는 이들의 마음마저 덩달아 맑아지는 듯했다.
석굴암은 신라 예술과 과학의 결정체로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아무래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석굴암 본존불상. 석굴암은 안과 밖의 느낌이 달랐다. 굴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거대한 불상을 마주하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 오묘한 미소와 후광에 압도되고 만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동굴 입구를 다시 바라보면 돔 형태의 거대한 흙더미에 소복하게 둘러싸여 있는 모양새가 마음을 아늑하게 해 준다.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위로와 위안이라고 생각한다면 불교신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보문단지에서 밤을 보낸 후 아침 일찍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의 기운을 빌려 새로운 한 해의 운을 기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불국사
석굴암에서 차로 7~8분가량 이동하면 역시 토함산 서남쪽에 불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불국토의 이상을 건축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사원으로,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을 볼 수 있다.
불국사는 계단 하나, 돌 하나에도 불교의 교리와 조상들의 과학적인 건축술이 결합한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꼭대기까지, 길과 건물 전체가 부처가 되는 과정의 고난과 역경을 표현하는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천왕문 앞의 다리가 고통이 가득 찬 인간세계를 넘어 ‘해탈’ 불국정토로 건너가는 길을 의미하는 식이다. 해설사와 함께 돌아본다면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다.
◆대릉원, 첨성대, 안압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곳곳의 거대한 고분들이 눈에 띈다. 그 중 가장 유명하고, 또 유일하게 내부가 개방되어 있는 천마총은 교육적으로도 좋은 장소이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아이들과 둘러보기 좋다. 그 외에도 대릉원에는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 23기의 능이 밀집해 있다. 주변에 있는 천문 관측소 첨성대나 안압지, 혹은 각종 석탑과 사적지들은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기에 좋다. 날씨가 춥다면 대릉원 앞에 준비된 간이 마차를 이용하는 것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이므로 방문하기 전 미리 경주시에 문의하면 해설사와 동행할 수 있다.
김희정기자 jjung@msnet.co.kr
*어서 오이소 이번 주 여행코스:대릉원(천마총 및 미추왕릉)-첨성대, 안압지, 반월성 돌아보기-보문단지(전통 한지체험 및 산책)-불국사-석굴암
●주머니 팁
▷첫날
점심 대릉원 주변 경주 쌈밥 1인분 8천 원
대릉원 입장료 어른 500원
첨성대 입장료 어른 1천 원
한지공예 체험료 1만 5천 원
보문단지 내 자전거대여 3천 원(1시간 기준)
산악자전거 중소형 1만 원/ 대형 1만 5천 원(1시간 기준)
저녁 보문단지 주변 불낙전골 1인분 6천 원
숙소 콩코드호텔 11만 원(2인실)
▷둘째 날
아침식사 호텔식당 갈비탕 1만 원
석굴암 입장료 어른 4천 원
점심식사 불국사 주변 순두부찌개 6천 원
●경험자 Talk
▷애바 시몬스(Ava Simmons·46·미국국적)=경북 방문의 해 테마여행에 대여섯 번 정도 참가했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경북도 곳곳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석굴암의 불상이 한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그 외에도 안동 하회마을이나 영덕 게 등도 기억에 남는다.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 같다.
▷이주혜(40·경기도 부천)=경주에는 여러 번 왔는데 ‘경북도 방문의 해’라는 명목으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오게 돼서 좋다. 여러 번 와도 늘 볼거리가 많은 곳이 경주라 생각한다. 숙소가 많이 추웠고, 시설이나 서비스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쌌던 것이 불만이다. 경북의 다른 지역에도 앞으로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다.
▷김승민(15·서울 서초구)=부모님들과 함께 왔다. 경주는 학교에서 단체여행으로도 와봤고 여러 번 왔지만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계속 올 기회가 생기는 것 같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 내용들을 해설사를 통해 들으니 색달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