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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0월
○장수를 보내 동학의 무리를 치다
신정희가 별군관 이규태를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동학의 무리들을 치자고 요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규태는 통위영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청주로 향했고, 공주 중군은 대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어 출발해 나아갔다.
( 참고,
일제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일본군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를 투입하였다.
1중대는 ‘동로’인 대구가도, 즉 일본군 병참선이 토하는 가도를,
제2중대는 ‘서로’인 공주가도를 서해안을 따라 전라도로 향하는 길로 남하하였다.
제3중대는 ‘중로’로 북접의 본거지인 보은군으로 진행하는 청주가도로 남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남서부로 몰아서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일본군들은 조선 정부군과 민보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을 몰살하였다.
일본군은 장차에 조선 통치에 방해가 될 항일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군은 조선을 전복시킬 수 있는 반군 세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민보군은 감히 양반 사대부에게 칼을 겨눈 상놈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함께 나란히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 김학우를 암살하다
이보다 앞서(6,7월쯤이다.) 통위사 이중용은 동학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인심이 흉흉해진 때를 틈타 군무 참의 박준양, 전 참판 이태용, 내무 주사 정인덕 등과 은밀히 의논하고, 내무 주사 박세강전 도사 박동진 등을 보내어 동학 무리와 함께 모의하여 서울 습격토록 했다.
만약 서울 백성들이 놀라 동요하고 임금님의 가마가 난리를 피해 궁궐을 옮기면, 이준용이 한편으로는 그 부하 군대로 대군주와 왕태자를 시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수하의 흉악한 무리들을 지휘하여 정권을 잡고 있는 고위 관리인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살해하여 정부를 뒤엎고 임금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 것이다.
정인덕이 그 음모를 전 주사 임진수, 의정부 주사 김명호, 우생 허엽에게 알렸고, 허엽은 음모를 자기 친구인 전북한, 관성장 이승휘에게 얘기했는데, 이승휘가 반란 모의를 신정부에 고발하였다. 유길준 등이 이승휘와 허엽을 가두고 심문했지만, 허엽은 사실대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참고, 김학우는 김홍집 내각에서 법무아문 대신 서리로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갑오개혁을 반대하는 이준용이 자객을 보내 암살하였다.)
그 후 동학의 무리는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때마침 일본은 오오토리 게이스케를 소환하고, 그를 대신하여 일본 내무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를 전권굥상에 임명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원군이 신정부와 서로 알력이 있으며, 몰래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와 장수와 내통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고 대원군이 장악한 권력을 빼앗고 그의 자택 운현궁으로 돌아가게 했다. 박세강, 박동진은 충청 감사 박제순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문에 이준용의 반역 모의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에 그의 패거리인 전동석이 먼저 정권을 잡고 있는 고위 관리 여러 사람을 죽여 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에 3일 밤 술시에 최형식에게 칼을 품고 김학우(당시 법무협판이었다)의 집으로 가서 찔러 죽이게 했다. 고치홍, 이여익, 서병규, 이영배, 김한영, 장덕현, 최형순도 차례로 그에게 손을 댔다.
……
이보다 앞서 궁궐에 있던 대원군은 자신이 부리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김학우에게 보내면서 수령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군국기무처에 있었던 김학우가 여러 사람들에게 소리쳐 말하기를, “이 어른이 다시 구습을 밟으려 한다.”하고 결국 허락하지 않았다. 대우너군을 이것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것이다.
동학 무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유길준, 기학우 등은 기회를 틈타 여러 민씨들이 잡고 있던 정권을 뒤엎고, 그들을 대신하려고 은밀히 동학 무리와 내통하여 모의했다. 또 사람을 화도 <제물항 부근에 있다>별장 김계현에게 보내 그 계획을 알리고 함께 힘을 합하자고 했으나 <당시 김계현의 부하병사는 100여 명이었다>, 김계현은 따르지 않았다. 유길준 등이 이것을 마음에 품고 있다가 서울과 지방의 관제 개혁을 할 때에 화도진을 없애버렸다.
○일본이 청나라 구련성을 빼앗다.
9월 26일과 27일,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군대가 압록강에서 전투를 벌렸는데, 청나라 군대가 도망갔다. 9월 29일, 일본 군대가 구련성에 이르렀다. 이달 10월 3일, 청나라 수비병이 어지럽게 도망쳐 흩어지자, 일본 군대가 드디어 구련성을 빼앗았다. 또 봉황성을 빼앗고 금주로 진격하자, 청나라 부도통 연순은 겁을 집어먹고 어지 할 바를 몰랐다. 제독 서방도가 스스로 전투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포대를 지키던 조희업, 복건 제독 정지위가 모두 힘껏 도와주지 않자, 서방도는 결국 고군분투하다가 크게 패해 금주를 잃었다.
……
10월 24일, 일본이 드디어 여순을 빼앗았다. 천연의 요새로서 비록 천군만마가 공격해도 결코 빼앗지 못할 곳을 불과 열아홉시간도 지켜내지 못했다. 청나라 해군 부제독 헨너켄은 “여순 항구는 산과 고개가 첩첩이 겹쳐 있어 하늘이 내린 험준한 요충지이며, 또 기계식 포대를 갖추고 있다. 만약 적이 길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막는다면, 지키는 자를 굶겨 죽이는 방법 외에는 감히 넘겨다 볼 수 없다”라고 말했었다. 그 군량과 무기는 3년은 충분히 버틸 만한데도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 홍주 목사 이승우를 겸토포사에, 지중추원사 박제관을 호서위무사에, 전라 감사 이도재를 겸호남위무사에, 선무사 이중하를 영남위무사에 임명하다.
(참고로 이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국군기무처가 다 동학농민들을 토벌하거나 아니면 회유시키는 직책들이다)
○관군과 일본군이 공산에서 동학의 무리를 공격해 격파하다.
(참고,
정교는 우금치에서 일어난 농민군의 사활을 건 두 번의 대 전투를 "관군과 일본군이 공산에서 동학의 무리를 공격해 격파하다."라는 한 마디로 정리하였다. 이 한 마디에서 우리는 당시 진보 지식인들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을 읽어 낼 수 있다.
당시 농민군은 수만 명에 이르렀지만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하였고 일본군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는 전체 약 600여 명이 이었으나 개틀링 기관총과 크루프제 야포와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한 근대식 군인이었다. 농민군 200명을 일본군 1명이 대적할 정도로 양군 간의 화력의 차이가 컸으며 게다가 겨울이어서 농민군은 혹한에 시달렸다. 수만 명이던 농민군은 전투를 치르며 3천명으로 숫자가 줄어 들었고 수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남기고 패퇴하였다. 최소한 3만 명의 농민군이 전사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아직도 전사자의 숫자는 명확하지 않다.)
○승선원 공사청을 혁파하다.
종전의 공문 반포규정도 지금부터 폐지한다. 호위 부장 및 통위사, 장위사, 총어사, 경리사의 네 자리를 모두 없앤다.(모두 다 조선의 수비를 담당했던 기관들의 대표직이다)
○ 박영효를 내무 대신에. 조희연을 순무 대신에, 서광범을 법무 대신에, 신기선을 공무 대신에 임명하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들이나 이노우에 공사의 중재로 고종에게 정변을 일으킨 대역무도죄를 용서 받았다. 일본이 갑오개혁을 완수하고자 두 번째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그들을 기용하였다.)
1894년 11월
○ 일본이 청나라 봉천을 공격하자, 수장 송경이 맞부딪쳐 싸웠으나 패배하다.
○ 일본이 청나라 복주를 빼앗다.
(참고, 전봉준이 인솔한 농민군은 11월 8일에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였다. 11월 27일 태인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봉준은 자신을 따르던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1894년 12월
○ 일본이 청나라의 우장을 빼앗다.
○ 동학의 무리 전봉준을 체포하다.
전라 감사 오도재가 동학 무리의 우두머리 전봉준을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했다. 그 뒤에 전봉준을 처형했다.
(참고, 전봉준은 12월 10일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한 전봉준은 1894년 12월 2일 순창 복흥산 피노리 마을에서 옛 동지의 신고로 지방 민병대의 습격을 받아 붙잡혀 관군에게 넘겨졌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음력)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경선과 김개남은 12월 1일에 체포되었고 손화중은 11일에 고창에서 체포되었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 종묘에 자주독립을 고하다. (홍범 14조 선포)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개국 503년(1894년) 12월 12일에 조선의 대를 이은 왕모가 감히 역대 조상 임금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생각건대 내가 어린 나이로 우리 조상의 큰 왕업을 지켜온 지 오늘까지 31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제도를 그대로 지켜 어려운 형편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그 남긴 위업을 그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든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겠습니까. 진실로 우리 조상들이 돌보아 주고 도와준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 왕조를 세우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 지도 어언 503년이 되는데, 나의 대에 와서 시운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개화했습니다. 우방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니, 오직 자주독립을 해야 우리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찌 감히 하늘의 시운을 받들어 우리 조상이 남긴 왕업을 보전하지 않으며, 어찌 감히 분발하고 가다듬어 선대의 업적을 더욱 빛내지 않겠습니까.
……
나는 이에 14개조 조목의 홍범을 하늘에 있는 우리 조상들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조상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고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니, 밝은 신령은 굽어살피기 바랍니다.
하나,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
하나,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과 외척의 본분과 의를 밝힌다.
하나, 임금은 정전에 나와서 정사를 보되 정무는 직접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재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하나, 왕실에 관한 사무는 나라 정치에 대한 사무와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하나,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와 권한은 명백히 제정한다.
하나 백성들이 내는 세금의 총액은 법령으로 정하 ㄴ비율에 다르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다.
하나,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일과 경비를 지출하는 일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하나, 왕실의 비용을 솔선하여 줄이고 절약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 관청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하나, 왕실 비용과 각 관청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제정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하나, 지방 관제를 조속히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하나,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익히도록 한다.
하나, 장관을 육성하고 징병법을 적용하여 군사제도의 기초를 확정한다.
하나, 민법과 형법을 엄격하고 명백히 재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니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하나, 인재 등용은 문벌에 얽매이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이튿날 조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 독립과 내정 개혁에 관한 일을 널리 알렸다.
○ 의정부를 개편하여 내각으로 만들다.
○총리대산 김홍집 등이 왕실의 존호를 아뢰다
주상전하는 대군주 폐하, 왕대비 전하는 왕태후 폐하,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 왕세자빈 저하는 왕태자비 전하로 부르고 전문은 표문이라 칭하자는 데 대해서 모두 그대로 승인했다.
○ 소의문 밖에서 동학 무리의 우두머리 김개남의 시체에 다시 참형을 가하다.
(참고, 김개남은 12월 2일 강화 진무영의 군사에게 사로잡혔으나 이도재가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즉결 처분으로 머리를 베어 죽였다. 그리하여 12월 16일에 김개남의 시체를 서울러ㅗ 가져와 참형을 가하고 시체를 이틀간 거리에 매달아 전시를 하였고 다시 전라도 지방으로 보내 전시하게 하였다.(고종실록 31년 12월 2일, 16일, 25일)
○ 순무영을 혁파하다.
남쪽 지방의 동학도가 차례로 평정됐기 때문이다.
(참고, 순무영은 순무사의 임시 군영으로 고종 31년 동학교도 등을 토벌하기 위하여 설치하고 신정희를 양호 순무사로 임명하였다.)
○ 일본이 청나라 개평성을 격파하다.
이 달 14일 청•일 양군이 개평성 밖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4시간 만에 일본 군대는 개평성을
빼앗았다. 또 금주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청나라 군대는 장성 밖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전 조선을 공황상태로 몰고 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끝났다.
⌜대한계년사2⌟를 읽으며 동학농민군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넑혔다. 대원군과 농민군 지도자들의 관계를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다.
정교의 ⌜대한계년사2⌟는 김옥균이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것으로부터 시작함으로서 1월에 있었던 고부 농민봉기는 누락한다. 그리하여 그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기술은 자연스럽게 3월에 있었던 무장에서의 1차 동학농민군의 무장봉기부터 시작된다. 그는 봉기의 원인을 제공한 부패 관리 조병갑, 이용태, 김문현의 탐욕을 고발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들의 전투나 조직, 그들의 거사 동기 등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이었을까? 그 기술이 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구한말 관료로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하며 조선의 개화를 위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던 정치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일본군의 조선 상륙과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조선의 청나라와의 관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갑오개혁의 내용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고종을 인질로 삼은 사건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조선의 농민들의 제2차 봉기도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1년간 계속된 동학 농민들의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저항과 반봉건 세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부패한 관료와 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개혁정신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이나 평가 없이 친일 개화파들이 만들어낸 홍범 14조를 끝으로 1894년 마무리하고 1895년 역사 기록으로 넘어간다. 아마 식민지 시대에 역사를 기록하는 한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의 관계 그리고 갑오개혁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사건에서 드러난 세 개의 얼굴을 임을 가늠할 수 있도록 기록해주었음이 감사하다. 식민지 시대에 역사 기록의 1910년 한일늑탈 이후로 이리(익산)로 낙향해서 살았으며 1925년 사망하였다.
나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몇 가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제우 사망이 1864년인데 짧은 3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록들이 말하는 대로 교도들이 몇 백만이 될 수 있겠는가?
당시 조선 인구가 1,100만 명도 안되는데 인구 3,4명 중의 1명이 동학교도라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
사망자가 최소한 3만 명에서 30,40만 명이라고 하는데 과연 가능한 숫자인가?
2차 봉기 때 삼례에 집결한 숫자 1만 명 정도라고 하였는데 과연 삼례가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들과 순 동학도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2차 봉기 때 함경도를 제외한 전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일어나 일본군과 관군과 전투를 벌인 실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본군과의 전투가 대부분의 조선 반도에서 일어났고 전본준 장군이 이근 우금치전투와 태인전투 이후에 있었던 종곡전투, 대둔산전투, 연산전투, 장흥전투, 진도전투를 치룬 동학농민군들은 누구인가?
제 1차 봉기에 무장투쟁을 도가 아니라며 반대한 북접이 제 2차 봉기에 참여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북접의 지도자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연합해서 우금치전투를 이끌어간 손병희는 어떻게 조선의 관군과 민보군과 일본군의 살벌한 칼날을 피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수 천 수 만 명이 움직이는 동학농민군들의 무기와 의식주 해결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대원군과의 동학 지도자들의 관계가 농민군 봉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고종이 인질로 잡힌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동학 지도자들은 조선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을까?
김개남의 경우는 그런 의지가 있었고 손화중이 선운사 뒤 암벽에서 비결을 꺼낸 뒤 거사 도모에 참여했다고 하는 것은 정씨의 출현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등
대원군과의 관계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의 북상 원인이 되었을까?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찾아서 정교의 ⌜대한계년사2⌟와 황현의 ⌜매천야록⌟과 ⌜오하기문⌟까지 읽게 되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어떤 의구심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2차 봉기가 전 조선적으로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배경과 이유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권력다툼으로 조선의 상황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지만 조선의 상놈들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과 고종을 위협한 사건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침략만행에 분노하며 일제와 싸워서 일본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과 위기감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반봉건, 반부패의 구호를 멈추고 척왜양이를 부르짖으며 무장 투쟁으로 항일전투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통해서 조선을 보며 한국을 본다.
일본과 청나라를 보며 오늘의 중국과 일본을 본다.
동북아 삼국이 함께 살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나의 의구심이 다 정리될 때까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탐구고자 한다.
2024.4.18.화,묘시
우담초라하니 수정하다.
참고문헌
정교 저, 조광 편, 변주승역주,⌜대한계년사2⌟,소명출판,2004년
정교 저, 조광 편, 변주승여주,,⌜대한계년사1⌟,소명출판,2004년
P.S
정교는 동학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술을 하면서도 당시 농민들이 처해진 상황이나 동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 기술에 인색하다. 그의 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기록이 ⌜대한계년사1⌟에 나온다.
역사는 동학농민혁명에 대원군이 개입된 것을 부정하거나 침묵하고 있지만 정교는 대원군의 관련설을 밝히고 있다.
⌜대한계년사1⌟권에 1893년 여름 4월
○ 선유사 어윤중을 보내어,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 무리들을 널리 깨우다
철종 장황제 14년(1863년) 계해년에 경주의 최제우<어릴 적 이름은 최복술이다>라는 사람이, 사악한 도로써 무리를 불러모아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의’라는 열세 글자의 주문을 외고, 붓을 들어 귀신을 내리게 하고 칼춤을 추며 하늘로 날았다. ‘동학(東學)’이라 이름하여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여 속이니, 경상도에 명하여 잡아 보내도록 하고 조사한 끝에 처형했다.
이때에 관리와 유생들이 최시형 등이 유생이 올리는 상소라 칭하며 글을 대궐에 바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 무리 수만 명을 불러, 서울에서 모임을 갖고 모반을 괴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추대하여 했는데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에 관리와 유생들이 최시형을 베어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그 무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이어 보은<충청도에 속하며, 서울에서 3백 80리이다>에 무리를 모아 진을 치고 웅거하였다. 성을 쌓고 깃발을 세워, ‘서양을 물리치고, 왜놈을 물리친다’고 칭하였다. 여기적서 호응하여 세력이 점점 커졌다. 이에 어윤중에게 빨리 달려가 민심을 무마하도록 했다. 이어서 윤음을 내려 널리 깨우쳤다.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 무리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 역대 훌륭한 임금님들께서 모범이 될 만한 교훈을 크게 드러내시어, 떳떳한 도리를 밝혀 사람이 해야 할 길을 세우고, 정학(正學)을 높이어 나라의 풍속을 이끌었으므로 사농공상들이 각자 그의 직업에 편안히 종사한 지 이제 어언 5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세대가 지나면서 풍속이 투박하여져, 취향이 제각기 다르므로, 터무니없는 무리들이 저주하는 술책으로 온 세상을 속이고 꾀어 우리 여러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다. 술에 취한 듯 넘어진 듯 치달리는데도, 붙잡아 줄 수도 깨어나게 할 수도 없다.
…생략…
너희들은 지금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깃대를 꽂아 서로 호응을 하면서 감히 ‘의병을 일으키자’는 글자를 써서, 혹은 통문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방문(榜文)을 내걸기도 하며 인심을 선동하고 있다. 너희들이 비록 사리에 어둡고 고루하다고는 하더라도, 어찌 세계의 대세와 조정에서 맺은 조약을 들어보지도 못하였는가? 그런데 감히 말을 핑계 내어 화를 빚어내려 했으니, 이것은 의병을 일으키는 행동이 아니라 곧 난리를 일으키는 짓이다.
…생략…
또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여 곤란하고 괴롭게 만든 탓이다. 탐관오리들은 곧 징계를 할 것이다. 나는 백성들의 부모된 자로서 백성들이 스스로 불의에 빠진 것을 모니 불쌍하게 여겨져 몹시 슬픈 생각이 드는데, 어찌 어두움을 깨우쳐 밝게 인도할 길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에 호군 이윤중을 선무사로 임명해 내 대신 그곳으로 급히 보내어 이 윤음을 널리 알리는 바이다. 이 또한 형벌을 시행하기에 앞서 먼저 교화를 시키는 뜻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서로 알려 해산하도록 하라.
협박을 당하여 억지로 따라간 무리들은 모두 양민이다. 지금 만약 그 괴수를 잡아 바치거나, 그 정보를 몰래 알린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라 큰 상을 줄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뉘우치지 않고 해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가 마땅히 큰 처분을 내릴 것이니, 너희들은 확실히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고쳐서 스스로 국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했다.
이에 도둑의 무리가 물러가 흩어졌다.
○ ‘척사윤음’을 전라도와 충청도에 내리다.
(앞의 척사윤음과 같은 내용이지만 일부 문장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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