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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청소년 평화 교류단 ‘맞선’, 그 짧지만 긴 이야기.
시작은 단지 우연일 뿐이었다. 김지현 선생님의 ‘너 해볼래?’ 란 단 한마디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그때 난 단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네’ 애초에 꿈이 사학자였던 나로서는 ‘근로 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주관하는 데다, 한일 양국 간의 평화 및 근로 정신대 문제 등 과거의 역사 문제 청산을 기치로 내건 이 프로그램이 내겐 큰 흥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 학생들을 만나며 토론과 교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면에서, 평소 일본 학생들은 한국과의 역사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지,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 대해 궁금했던 나는 이 프로그램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2월 4일, 광천동에 위치한 시민모임 사무실에서의 면접 날이었다. 정말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버려서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면접에 통과한 것을 보면 괜찮게 답한 것 같다.
12월 10일엔 같은 장소에서 교류단의 첫 만남 및 회의가 있었다. 그 곳에서 당시 근로 정신대에 끌려가셨던 양금덕 할머님을 만나 뵙고, 한 영상을 보았다. 그 영상엔 근로 정신대가 무엇인지, 근로 정신대에서 혹사당하셨던 할머님들이 직접 말씀해주시는 장면이 나왔다. 난 모두가 분노, 그리고 형용하지 못할 그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우는 아이까지 있었다. 우린 이 영상을 통해 우리가 프로그램에 왜 참가했는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또, 우리 교류단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바로 ‘마주보고 서다’라는 의미의 맞선.
12월 11일엔 2차 회의가 있었다. 시험 하루 전이라 부담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당장의 내신보다 이번 프로그램이 더 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의에 참가했다. 2차 회의는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전대 후문에 위치한 한 라이브 카페에서 있었는데, 우리를 이끌어줄 배주영 선생님은 광주에 오는 일본 학생들이 ‘5.18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많아 우리 맞선이 그를 소개해줘야 한다고 하셨다. 이에 따라 발표할 부분을 분담하였고, 나는 5,18 구 묘역, 망월 묘지를 맡았다.
12월 17일, 18일엔 문화전당역 근처에 위치한 ‘희망’이라는 곳에서 회의를 열었다. 가장 중요한 안건으론 바로 맞선 2기의 단장, 부단장 선거. 난 단장에 지원했지만, 아쉽게도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자신이 맡은 발표 부분을 서로 읽으면서 확인하고, 정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12월 20일 역시 ‘희망’에서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애초에 12명이던 맞선의 인원에 맞춰 일본 아이들 역시 12명이 오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7명으로 인원이 줄게 되어 맞선 2명에 일본 아이 1명이 한 그룹을 이루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아이들 끼리 파트너를 선정했는데, 제비뽑기 결과 난 박솔 이란 누나와 파트너를 맺게 되었다. 나를 떨어뜨리고 단장이 된 누나여서 그런지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또 일본 아이들이 광주에 도착했을 때 쓸 환영 인사용 피켓, 송별회 때 부를 노래들에 대해 의논하였다.
12월 23일 ‘희망‘에서 마지막 사전 회의가 있었다. 28일 있을 한일 청소년 토론회에서 이야기할 것들, 자유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회의하였고, 각자의 발표 점검 및 송별회 때 부를 노래, Dream High와 Must Have Love를 연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난 노래엔 영 재능이 없어 처음엔 자신이 없었지만, 다른 얘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안심했다(?)
대망의 12월 26일. 프로그램의 막이 올랐다. 1시 까지 상무지구의 무각사로 이동해야했는데, 다른 아이들과 먹을 과자와 음료수를 사가다 보니 살짝 늦었다. 무각사에서 마지막 발표 점검을 마치고, 환영식 때 사용할 피켓을 제작하고, 노래를 연습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일본 아이들이 오기로 한 시간인 6시가 다 되었다. 시민 모임의 차로 송정리 광주역까지 이동했다.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일본 아이들이 도착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숙소인 무각사로 돌아가 같이 저녁을 먹으며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 그리고 관련된 분들의 말씀을 듣고, 양국의 청소년이 짧은 소개 인사를 하였다. 내 일본 파트너는 도카이 중학교 3학년의 센다 다케히로라는 아이였다. 분명히 내가 형인데 그리 동생 같지 않았다. 일본인에 대한 내 선입견때문었을까, 내가 알던 ‘일본인‘과는 분명히 다른 일본인이었다. 배려심깊고, 착하고, 순진한. 그런 아이였다. 소개를 마치고 숙소로 이동했지만, 그냥 잘 수가 있나, 한국과 일본 아이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과자 파티를 했다. 비록 언어적 장벽이 있었지만, 그런 대로 서로 이야기도 나눠가면서 그렇게 첫 날의 밤이 깊어갔다.
다음 날엔 새벽 예불을 드리러갔다. 숙소가 무각사, 절이다보니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는데, 새벽 4시부터 일어나자니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비몽사몽한 채로 예불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먹었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몸을 쉬게 할 여유도 없이 바쁜 일정이 시작되었다. 먼저 우린 운정동에 위치한 5.18 묘지를 답사하러 갔다. 구 묘지가 첫 코스였는데, 내 발표 순서가 처음인 데다가 해야 할 부분도 굉장히 많아 부담감이 컸다. 망월 묘지에 대한 설명,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석에 대한 일화, 행불자들의 사진, 내 고등학교 선배이신 고 이한열 열사님의 묘역.. 그럭저럭 발표를 마치고 나니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다음 신 묘역으로 이동했는데, 5.18 항쟁 당시 돌아가신 여러분들의 묘역에 참배하고 난 후 고 김혜옥 할머님의 묘역 앞에서 일본 아이들의 사물놀이를 관람했다. 고요한 신 묘역에서의 일본 아이들이 연주하는 꽹과리 소리, 장구 소리.. 아주 인상 깊었다. 모든 참배가 끝난 후 전남대학교를 답사하고, 점심을 먹은 후 도청, 금남로, 자유공원 등을 순서대로 둘러보고 나서 다시 무각사로 이동했다. 우린 숙소 건물 3층에서 일제의 강제 동원에 관한 영상과, 그에 대한 양금덕 할머니의 증언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난생 처음 보는 많은 수의 카메라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영상을 보는 동안 치밀어 오른 여러 복잡한 감정, 그리고 양금덕 할머니의 말씀에서 묻어나오는 원통함에 당황스러움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양금덕 할머니께 질문을 여쭤보기도 했다. 당시 내 마음 속엔 할머니께서 그 때 과연 얼마나 아파하셨을지, 얼마나 억울하셨을지 잘 가늠이 가지 않지만, 더 이상 원통해하시지 않게 우리가 바꿔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바꾸겠다는 의지를 할머니께 보이고 싶다, 그런 일념뿐이었다. 할머니와의 시간이 끝난 뒤 저녁, 무려 삼겹살을 먹으러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무각사에서 내내 절식, 채소만 먹던 차에 드디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지만.. 내가 앉은 테이블엔 손님인 일본인 두 명,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선배 한명. 결국 고기는 내가 굽게 되었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은 고기를 굽고, 그렇게 적은 고기를 먹어본 적은 처음이다. 다행히도 스태프 형 누나들께서 챙겨주셨지만.. 뭔가 씁쓸한 저녁을 마치고 타케히로가 한국의 마트를 둘러보고 싶다기에, 홈 스테이 장소인 내 집으로 이동하기 전 다른 조와 같이 대형 할인 마트를 둘러보기로 했다. 카트를 끌며 일본 마트와 다른 점, 일본 음식, K-pop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밤이 너무 깊어버렸다. 하지만 카트는 텅텅, 타케히로한테 뭐 사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 ‘Just window shopping'. 물론 실제로 산 건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카트에 많은 것을 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트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내 집으로 이동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홈스테이에 두근거리기도 하고, 과연 어색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내심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엔 내 친형이 있었다, 문제는, 직업이 문제. 아무래도 군인이다 보니, 일본과의 관계에 굉장히 민감한 면이 있는 내 형이었다. 사실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형은 어디서 연습했는지, 저녁인사 ’곰방와‘를 외치며 반겨주었다. 심지어 웃으면서. 그렇게 급속도로 가까워진 우린 음식, 음악과 같은 가벼운 얘기부터 정치, 경제까지 폭 넓은 이야기를 했다. 숨 가쁜 두 번째 날도 이렇게 흘러갔다.
세 번째 날인 28일, 이번 프로그램에서 가장 취지에 맞고,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 한일 청소년 토론회가 있었다. 전날 영상을 시청했던 바로 그 무각사 숙소 3층에서, ‘교류란 무엇인가,’ ‘교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일 교류단 사이의 대화의 장을 열었다.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대충 정리해보자면 이런 이야기였다.
“교류란, 서로 ‘아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일 간의 교류를 위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서로에 대해 정확히 알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적어놓고 보니 되게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K-pop등 대중 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문화 교류, E-pal등을 통한 직접적인 교류. 서로의 역사 교과서를 교환해보는 활동 등 굉장히 구체적인 방안들도 많이 나왔었다. 의미 깊었던 활동이 끝난 후 한국의 문화를 체험해보러 대인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 미션이 주어졌는데, 바로 대인 시장 안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내 그룹은 다른 그룹과 같이 중국집에 가 짜장면을 먹었는데, 맛이 너무 별로여서 솔직히 일본 아이들에게 창피했다. 그런 대로 그릇을 비우고 나서 나전칠기를 만들어보는 활동을 했는데. 어째.. 일본 아이들이 역시 손재주는 나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활동 도중 갑자기 모 방송사의 인터뷰 프로그램이 들어와서 또 한 번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일본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방송을 촬영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문화 체험을 마치고, 대망의 ‘한 일 청소년 교류 프로젝트’. 즉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내 그룹은 다른 한 그룹과 함께 광주의 중심가, 충장로로 이동했다. 타케히로를 위해 아트박스에서 노트를 사다주기도 하고, 노리존에 가서 한바탕 신나게 놀면서 서로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특히 일본엔 타가디스코가 없어서 더 재미있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역시 훌쩍 가버려 아쉬움을 남기고 저녁 식사를 하러 무각사로 다시 돌아왔다. 식사 후 송별회에서 서로 활동하며 느낀 점들을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괜히 가슴이 찡했다. 하지만 마냥 우울해하는건 우리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내 맞선 단원들이 준비한 대망의 무기인 합창곡을 신나게 불러준 후 과자와 치킨을 깔고 마지막 파티를 벌였다. 롤링 페이퍼를 써가며 서로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도 해보고, 타케히로에게 내가 준비했던 선물인 우정 목걸이를 걸어주니 타케히로도 내게 일본에서 가져온 선물을 주었다. 겉을 보니 일본 과자인 듯 한데, 아까워서 아직 뜯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일 교류 단원, 스탭들 모두 어울리며 새벽까지 놀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새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마지막 날인 29일엔 감기 기운에 들렸는지, 잠을 잘 못자서 그런 건지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비몽사몽한 채로 아침을 먹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배웅해주러 광천 터미널로 이동했다. 기념 촬영을 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가 돼서야 진짜 우리가 헤어지는 거구나, 하면서 프로그램이 끝났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쉬워서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저 가는 버스를 멍하니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다. 다들 한참을 그렇게 아쉬워했다.
3박 4일, 사전 회의 날짜까지 포함하면 거의 10일 동안의 교류 기간 동안, 너무나도 느낀 점이 많아 다 적기는 힘들 것 같다. 처음의 나는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그런 평범한 한국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었다. 우리가 아는 일본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번 프로그램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한일 과거사 청산, 즉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정당한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는 것이지만, 난 그에 앞서 먼저 교류, 즉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그 문제다. 먼저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교류가 가능한 것일까, 교류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과거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한다라는 쪽이었다면, 지금은 먼저 교류를 해결해야한다라는 입장에 서고 싶다. 우리는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이렇다보니 작은 오해도 크게 부풀려져서 가뜩이나 일그러진 서로의 감정을 더욱 구겨뜨리고, 왜곡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추구하는 한일간의 역사 문제 청산을 이룰 수 있고, 나아가 진정한 대동아 공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길었지만, 짧은 시간이었다. 또, 뜻하지 않게 매스컴을 많이 타게 되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해서, 정말 소중한, 고마운,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망설임없이 지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센다 타케히로, 나를 많이 배려해줘서 고맙고, 맞선분들, 모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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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지 올릴건데, 먼저 여기에 올리는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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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분 만에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탁월한 감성에 박수를 보냅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 번도 수정안한걸 그대로 올려버려서;; 문장 구성부터 내용까지 고칠게 태반이네요. 호흡도 너무 긴 듯 하고.. 완성되는 대로 다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