友石書室記
우석서실기
寓於物者無物以非可樂也役於物者無物而非可蔽也夫心無外物之累而超然 自適則物之接於耳目者隨其所寓而莫非可樂也豈物我之有間哉石之爲物雖 麁頑無知而其賦於形者大小奇怪有萬其態無非可玩而可寓故自古愛玩而取 資者各以其趣頗多有記其見於經則詩所謂節南山之巖巖取其高且截也書所 謂靑州之貢泗濱之磬取其怪且淸也易所謂介如之貞取其堅且確也各取一端 而義實相舍至若朱夫子武夷詩所云居然我泉石則又托之於山水淸閒之趣矣 雖其所取所寓之有不同其欲資之爲我有則未始不同也金雅有鎭以友石扁其 居室有鎭以寶白堂先生之顯裔早襲家學習聞義理之說故雖當世局之大變而 篤守先範不易乎世其於詩與易所稱高截之態貞堅之志庶可以無愧矣然則君 之取資於石者其意可知矣惟因此而益玩其理勵其志以克其實者亦在乎勉之 而己詩云他山之石可以攻玉君之屬余爲記者益致其力而又取資於他山 也豈可以昏耄辭哉以是爲記
光復後四十九年 甲戌 流火節 綾城 具 玹 識
사물에 의탁함은 아무 물건도 없으니, 즐겁지 아니하고 외물에 부림을 받는 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므로 가릴 수 없다. 대저 마음은 외물이 없으니, 초연히 유유자적하여 눈과 귀가 사물에 접촉하더라도 붙어 있는 곳에 따라 즐거워할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사물과 내가 틈(간극)이 있으리오. 돌이란 물건은 비록 무디고 거칠어 알 수는 없지만, 그 형상은 크고, 작고, 괴상하고, 기이하여 일만 가지의 형태를가지고 있어, 어느 것 하나 즐길 만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 것을 나의 좋아하는 바로 삼는다면 애초에 같지 않음은 없다.
옛 고사(古事)에 자고로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즐기는 사물을 각각 그 취향에 대한 기록이 경전(經典)에 나타난 것이 많이 있는데, 곧 시경(詩經)에 이르길‘절남산(節南山) 암암(巖巖)은 높은 것을 취하고 끊어 놓았다고 하였고, 서경(書經)에 이르길청주지공사빈지경(靑州之貢 泗濱之磬’은 청주의 공물(貢物)은 사수(泗水)물가에서 나오는 돌로 만든 경(磬)이라 기록하고, 역(易)에 이르기를 ‘개여지정(介如之貞)’은 그 절개(節介)가 돌과 같아 정(貞)하니 강건함과 확고함을 각각 취하였다.
일단, 의성 실업(實業)의 가택(家宅)을 일컫는 따위는 주(朱)선생의 무이(武夷) 시(詩)에서 이르길‘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은 즉 한가롭게 산수가 맑은 곳에 의탁(依託)함을 취한 뜻이다.
유진 군의 아호는 우석(友石)으로 편액(扁額)은 그의 거실(家宅)이다. 유진 군은 보백당(寶白堂) 선생의 드러난 후손(顯裔)으로 일찍이 가학(家學)을 익히고 들어 그의 의로운 주장이 지금 세상이 비록 크게 변하였는데도, 선대의 규범을 마음속으로 굳게 지켜서 시대(世上)에 따라 변하지 않은 것은 시경(詩經)과 주역(周易)에서 일컫는 것과 같아, 그 모습이 고절(高截)하여 다행히도 그 뜻을 곧고 바르게 하여 남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고로 군(君)의 아호(雅號)를 돌(石)로 취한 뜻을 알만하다.
생각건데, 이로 인하여 그 이치에 더욱 완미하고 권면(勸勉)하여 그의 뜻을 실업에서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부단히 힘쓸 뿐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길타산지석(他山之石)’을 거울 삼아 지덕(知德)을 닦아 군(君)의 일가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내가 글을 쓴 것은 더욱 힘을 다하고 다른 사람의 언행을 취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기를 바라며, 내가 이미 늙고 혼몽하여 사양한 끝에 이 기문을 쓴다.
광복후 49년(서기1994년) 갑술 유화절(7월) 능성 구현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