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아의 세계 - 미키 시게오
1. 한 페이지 요약 및 견해
<태아의 세계>의 저자 미키 시게오는 일본 최고의 해부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이다. 많은 저서 가운데 <태아의 세계>는 그의 목소리를 오롯이 전해들을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자,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생명 진화의 역사를 과학적 상상으로 규명한 책이다.
저자는 ‘생의 근원 원리’ 즉 ‘생명 기억’을 으뜸 화두로 삼는다. 제1부에서는 생명 기억을 일상생활에서 더듬어 회상하고, 제2부에서는 실험으로 생명 기억을 재현해 보이며, 마지막 제3부에서는 그 생명 기억의 근원을 파헤치는 과정을 ‘사이언스 로망’에 가깝게 그려냈다.
미키 선생은 생명의 근원을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생명에는 저마다의 파동이 있고 일정한 흐름을 타고 움직인다는 것, 즉 저마다 고유의 리듬을 품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리듬은 곧 커다란 우주의 리듬과 이어져 있어서 영원히 돌고 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키 선생의 한없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상상의 참모습이다.
“모든 생물은 태곳적 우주의 리듬, 생명의 근원적인 리듬을 품고 있는 소우주이다. 연어가 몸속의 신비로운 기억을 더듬어서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인간도 본디 대우주와 공진하는 생명 기억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미키 선생이 정의하는 ‘리듬’의 생명관이다. 그는 서구 근대 과학이 배제한 인간과 자연의 살아 있는 자연 감각을 중요시해서, 그것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자연 감각을 일깨워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또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인간이 자연계 속에서 갖춘 고유한 리듬을 상실한 결과라고 소리 높인다.
지구에 존재하는 어떤 종족도 그 종족다운 형태가 정해지기까지 여명의 시대가 선행되기 마련이다. 미숙한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그 종 본래의 모습이 완성되는데, 종의 근원적인 형상, 즉 원형의 완성에 따라 종족 발생의 이야기는 하나의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의 고생물학이 가르쳐주는, 5억 년에 걸친 척추동물의 자연사를 보면, 맨 처음 시작을 알리는 고생대의 ‘어류 시대’에 모습을 드러낸 원구류(圓口類)부터 긴 세월의 진화를 통한 바다와 육지에 모두 적응한 ‘척추동물의 상륙’ 이야기의 주인공인 양서류(兩棲類). 중생대의 ‘파충류’, 중생대 초부터 모습을 드러내 신생대와 함께 찾아온 ‘포유류’의 시대는 알프스 조산운동으로 불리는 거대한 지각 변동의 영향으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몇 억 년의 긴 시간과 끊임없이 변형되는 공간 속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적응하고, 진화한다.
<태아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품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미키 선생 평생의 연구와 관찰 그리고 그의 과학적 상상을 통해 태아를 대상으로 한 자세한 실험 과정을 소개한다.
이 책을 통해 필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들의 원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태아의 얼굴에 감도는 찰나의 동물의 모습 속에서 한 인간의 생명 안에는 지나간 수억 년 지구 생명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별을 지닌 소우주 같은 존재가 아닐까?
2. 나를 확장시킬 책 속의 내용
p 17
최근 대뇌생리학에서는 인간의 뇌를 좌우 반구로 구분하고 좌뇌는 논리를 관장하는 로고스의 뇌, 우뇌는 감성을 관장하는 파토스의 뇌라는, 좌뇌와 우뇌의 기능 분화를 과학적으로 밝혀냈습니다.
언뜻 듣기에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뇌와 이어져 있는 좌우 눈과 귀, 특히 손이라는 말초 기관의 활동을 관찰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감각기관의 모양은 좌우 대칭이지만, 그 활동은 전혀 다릅니다. 즉 뇌와 같은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예를 들면 책을 펼쳤을 때 오른쪽 페이지에서는 활자를 먼저 읽고, 왼쪽 페이지에서는 그림을 먼저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인간의 오른쪽 눈은 글자를, 왼쪽 눈은 도형을 더 쉽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화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수화기를 오른쪽 귀에 바짝 대고 귀를 쫑긋 세우며 귀 기울여 듣습니다. 하지만 목소리 자체를 듣고 싶을 때는 왼쪽이 더 낫습니다. 멜로디도 마찬가지고요. 손과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글자 자체는 오른손에 적합하게 생겨났고, 그림을 그릴 때는 역시 왼손이 활약할 때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좌뇌와 우뇌의 분업화 이론은 간질 치료를 위해 좌우 반구를 절단했을 때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로, 충분히 노벨상을 탈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연구입니다.
p 21
머나먼 뱃길 저편에 내 영혼의 고향이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p 24
피로 맺어진 관계는 탯줄을 끊고 독립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뒤에서도 소개하겠지만, 산모의 혈액은 유즙이 되어 이번에는 아기의 입을 통해 흡수되고, 다시 유즙은 혈액으로 바뀌어 신생아 온몸 곳곳에 전파된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말은 이런 혈액의 참모습을 훌륭하게 포착한, 조상들의 예리한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에 맞닿은 문제와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항상 피의 세계를 거론하는 것이다.
p 26
그리움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에 지난날의 저기가 살포시 하나로 포개졌을 때 지극히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감정이다. 인상 이미지와 회상 이미지가 오버랩되었을 때의 정감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그리움의 중첨은 동시적 상기에서 볼 수 있는 상,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생멸과 변화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인 오온, 즉 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세 번째 상의 표출과 일맥상통한다. 덧붙이자면 상의 산스크리스트어인 samjna는 sam 즉 싱크로나이즈의 syn과 jna, 즉 know을 합성한 단어라고 한다.
p 28
육지와 바다의 명료한 대비가 달빛의 차가움과 햇빛의 따스함을 아우르며 선명하게 존재한다.
p 35
동물에게는 의지가 없다. 있는 것은 본능적인 충동뿐이다.
p 38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성경의 한 구절인데 ’눈에 붙어서 시력 장애를 초래하던 비늘이 떨어지듯이‘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되다., 눈이 확 트인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이처럼 ’눈에 붙은 비늘‘이라는 말은 있지만, ’혀에 붙은 비늘‘이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p 50
포유동물의 구강 점막은 2억 년이라는 긴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동안 모유의 맛을 생명의 밑바닥에서 맛보고, 욕구를 다양한 입술소리에 위탁하여 표현해왔다. 그렇게 인류가 입술소리를 매개로 하여, 풍요로운 마음과 강렬한 자아에 조금씩 눈을 뜨지 않았을까?
p 52
기억이란 본디 생명적인 것으로 인간의 의식적인 차원을 훨씬 초월한 것이다. 우리는 기억의 참모습을 토대로 해서 일종의 마음가짐으로써 ‘생명 기억’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여기에서는 기억이라는 상형문자가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보자.
먼저 기억이란, 억을 기록한다는 뜻으로 이 억이라는 한자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저 가운데라고 한다는 풀이가 나온다. 즉 억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혹은 공복도 만복도 아닌, 덜하지 더하지도 않은 중간 상태를 본뜨고 있다. 따라서 온도나 위의 존재 자체를 억은 망각하고 있는데, 일상생활을 떠올려보면 하루 대부분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억의 상태로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 전에, 이미 육체가 스스로 억의 상태로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억의 상태를 오늘날의 사례로 조망해보면, 기온이 올라가면 치부 혈관이 열리고 혈액이 몸의 표면으로 확장되어 공기가 냉각되는 효과가 난다. 이때 혈관 확장을 돋는 것이 무더위를 식히는 술 한잔이다. 한편 기온이 떨어지면 피부 혈관은 수축하고 혈액이 내장으로 모여서 체온 발산을 막는다. 이때 피부 혈관의 감도를 높이려면 건포마찰로 대표되는 피부 단련을 하면 된다. 이렇게 더위, 추위를 느끼는 피부 감각이 혈관 민무늬근의 확장, 수축이라는 일종의 내장 운동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평균 상태의 체온이 유지된다. 이것이 이른바 신경성 조절이다.
p 55
쾌를 맛보려면 우선 불쾌가 선행되어야 한다.
p 56
맛을 들이다
p 64
지구에서 생명이 태동한 곳은 30억 년도 훨씬 넘는 고대의 바닷속이라고 한다.
p 71
오늘날 지구의 바다에서 번성하고 있는 물고기들은 상어류를 제외하고 모두 부레를 가지고 있다. 개중에는 소화관과 이어진 주머니처럼 생긴 부레도 있다. 이는 모두 허파(폐)의 흔적이다. 분명 부레는 예전에 아주 잠깐이라도 어류가 공기 호흡을 했다는 사실을 대변해주는, 문신과 같은 증거는 아닐까? 어쩌면 이 물고기들은 상륙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p 78
결국 우리는 머나먼 고생대뿐 아니라 태아의 시대에서도 같은 바닷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바다와의 인연은 상륙 이후에도, 출산 이후에도 혈액을 매개로 여전히 진행되는데, 이는 다른 육상 동물에도 모두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은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머나먼 바다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지구 생물의 궁극적인 고향인 바다의 상징으로 망설임 없이 소금의 결정을 꼽을 수 있다. 소금, 이것이야말로 바다의 진수이자, 지구에 서식하는 생물의 마지막 생명의 무늬를 대변하는 증거 아닐까? 언젠가 우주 생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모두 축제를 개최할 때, 지구 생물의 기치를 흔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것밖에는 없지 않을까? 지구를 대표하는 이들은 모두 고향의 심벌마크인 소금의 결정을 가슴에 달고서 당당히 행진하리라. 이는 분명 지구의 함수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소금은 지구 위의 생명을 지금도 지탱해주고 있다. 따라서 바닷물에서 소금을 추려내는 행위는 가장 엄숙한 생의 영위다. 이는 고향 강바닥을 목표로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고향을 향한 ‘생명적인 회귀’를 상징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닐까?
p 88
인간 태아와 동물 태아가 발생 방식 면에서 불가사의할 만큼 흡사하다는 점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마치 주문과 같은 헤켈의 구절이 얼굴을 내밀고, 등 뒤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인체의 성립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동물의 태아 세계도 그냥 지나치지 못 할 것이다.
p 97
몇 년 후 내장과 체벽의 양대 순환이 이른바 철천지원수 사이라는 것을 나는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되었다. 이는 예를들면 마음이 따듯한 사람은 손이 차다는 사실, 혹은 입욕은 식후 30분이 좋다는 상식의 학문적인 근거가 되는 이해인데, 이런 깨달음도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먹물 중입의 혹독한 추억이 무의식의 기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p 117
'성의 영위‘란 다음 세대의 생을 제쳐놓고서는 아무것도 논할 수 없다는 사실
p 118
문제는 어느새 나 자신의 문제로 치환되어 있었다. 나의 뇌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일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더는 묵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 자체를 무의식적으로도 회피해온 행위, 바로 태아의 목을 자르는 일이었다.
해부학의 세계는 ‘절단’ 행위를 토대로 성립된다. 그 당시에 이미 20년의 세월을 해부학과 함께한 나였기에, 무엇인가를 자르는 행위에 관한 감수성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무뎌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태아 해부만큼은 내 몸이 거부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p 130
중생대에서 신생대로 돌입하는 알프스 조산운동
p 131
태아의 얼굴에 감도는 것은 분명 동물의 모습이었다. 연골 어류의 옛 모습이 순식간에 파충류의 얼굴로 바뀌고 드디어 포유류의 생김새로 변한다. 닭의 발생에서 살펴본 ‘찰나의 상륙극’과 흡사했다. 닭의 경우 눈부신 변화상이 몸의 내경에서 관찰되었다면, 태아의 경우 외경, 더욱이 얼굴이라는 가장 친근한 모습에서 찰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p 136
갈라파고스의 이구아나, 코모도 섬의 코모도왕도마뱀
p 137
어떤 종족도 그 종족다운 형태가 정해지기까지 여명의 시대가 선행하기 마련이다. 미숙한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그 종 본래의 모습이 완성되는데, 종의 근원적인 형상, 즉 원형의 완성에 따라 종족 발생의 이야기는 하나의 절정을 맞이한다.
p 142
보통 가문의 전통의 유구하다는 것은 대대손손 일정한 토지에 뿌리내리고 가업을 이러나가는 집안을 뜻한다. 반대로 가문의 전통이 짧다는 것은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직업을 가진 집안을 가리킨다. 이른바 분가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이런 분가가 크고 작은 규모로 이루어진다. 천만 년 단위의 대규모도 볼 수 있는데, 이때 지구는 우주적인 규모로 일종의 탈피를 거듭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동적인 팽창과 이에 따르는 냉각 등 여러 현상을 언급할 수 있는데, 완만한 지표 변동과 함께 새로운 시류를 흡수한 분가 체제가 점차 확립하여 동물상의 중심이 새로운 가계로 옮겨진다. 진화와 이어지는 내용이다.
p 144
세상에는 어류의 대표 주자로 잉어, 양서류의 대표로 개구리, 파충류와 조류의 대표로 각각 뱀과 닭, 그리고 마지막 포유류의 대표 주자로 인간에 가장 가까운 원숭이를 선택해서 이를 일렬로 나란히 세우는 방식으로 동물의 진화를 설명하는 습관이 있었다.
비교해부학이란 현존 동물을 계통적으로 해부해서 상동기관을 비교 검토하는 학문이다. 이때 종족별로 가계가 오래된 종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비교를 통해 인류 발생의 머나먼 저편까지 사람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쳐간다. 이는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밤낮으로 지층을 파헤치는 고생물학의 세계와 본질적인 면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p 145
꼬리 없는 양서류인 개구리는 ‘변태’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이는 진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바로미터로 관찰되는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상륙의 재현이 모두 부화한 후, 이른바 올챙이로 자립을 시작한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달리 표현하면 생활을 영위하면서 변태해나가는 것이다. 이는 같은 알이라도 육지에 부화하는 파충류나 조류가 알을까기 이전에 이미 ‘꿈을 꾸면서’ 부모의 유산인 노른자위에 의지하여 변신을 마무리 짓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p 147
비교발생학의 묘미는 바로 이런 점에 있으리라. 상륙 재현의 형상이 양서류- 파충류- 조류로 진행하면서 명확하게 변모한다. 지금까지 소개했듯이, 양서류는 현실 생활을 하는 가운데 변태하는 반면, 파충류는 알 속에서 하나의 ‘추억’으로 변신을 되풀이한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반쯤 발을 들여놓은 상태라고 할까? 파충류의 상륙 재현에서는 현실의 세세한 행위는 생략되고, 그저 전체의 흐름을 나타내는 ‘모양새’만 상징적으로 연출된다. 따라서 파충류의 경우 ‘형상화’라는 단어가 곧잘 어울린다.
나아가 조류가 되면, 형상화가 더욱 진척되어서 꿈의 흐름은 좀 더 빨라지고 모든 것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말 그대로 명색뿐인 행위 가운데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의 깊이가 깃들여진다. 이와 같은 일련의 흐름을 한자 서체에 비유했을 때, 먼저 양서류의 흐름이 정확하게 정자로 쓰는 해서라고 한다면, 파충류는 약간 흘려 쓰는 행서, 조류는 가장 흘려 쓰는 초서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계통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포유류나 인간은 초서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 149
'기형‘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이면에는 반드시 고대의 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할 수밖에 없으리라. 예를 들면 어떤 심장 기형이라도 마지막에는 고대 형상에 다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시내 모 대학병원에 보관된 표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해당 병원에서는 수술 후 짧은 생을 마감한 유아들의 기형 심장을 표본으로 모아 두었는데, 이 가운데 허파정맥이 없는 심장이 다수 들어 있었다.
p 158
우리의 조상들은 바다와 육지 사이를, 아마도 상상을 초월하는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맴돌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아기들의 허파정맥이 보이는 기기묘묘한 형상이 그간의 사정을 여실히 대변해주는 것은 아닐까? 분명 ‘기형’의 기奇는 보통 사람의 가치관을 훌쩍 뛰어넘는 단어에 부여하는 표현임이 틀림없으리라.
곤충 채집망을 비스듬하게 세워서 잠자리를 쫓는 남자아이의 눈빛에서 옛날 수렵 시대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낚시대에 전해지는 물고기의 근육 수축에서도 옛날 옛적 감각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또 우리는 첫눈 내리는 들판에서 강아지와 뛰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에서 대빙하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지 않는가? 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은 어른이 되어서도 눈 덮인 겨울 산으로 등을 떠민다. 그렇다면 이런 움직임은 ‘무슨 목적이 있는가?’라는 현대 사회의 인과 질문에서 무의식적인 탈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유치원 정글짐에서 오르락내리락 무리 지어 노는 아이들, 철봉, 링운동, 안마운동, 평행봉에서 보여주는 체조 선수들의 훌륭한 ‘팔 곡예’ 등은 신생대 제3기의 수상생활에서 단련된 ‘브래키에이션’의 부활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 162
“난세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p 173
식물은 태양을 심장으로 삼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순환로인 모세관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식물의 몸이 자연스럽게 열려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식물을 꼼꼼하게 관찰해보면, 잎의 표면은 동물의 장관과 간, 허파꽈리의 내면에 해당하고, 뿌리털의 말단은 장관 내면에 솟아나 있는 융모에 해당한다.
p 177
생물의 근원적인 양대 본능이라고 하면, ‘개체 유지’와 ‘종족보존’을 꼽을 수 있다. 개체 유지는 잘 먹고 몸을 쑥쑥 키우는 일이고, 종족 보존은 온 힘을 기울여 자손을 만드는 일이다.
p 180
괴테의 심안에 비친 식물의 자연, 그것은 바로 생물 본래의 모습이었다. 시인은 한해살이풀의 생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식물의 세계에는 싹을 내서 잎을 무성하게 키우고 점차 성장해가는 ‘생장 번성’의 모습과 이어서 봉오리를 내밀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나가는 ‘개화 결실’의 모습이 있다. 생장은 확대, 그리고 개화는 수축의 모양새다. 이 박동적인 생의 두 얼굴은 ‘자연의 지도’를 따라 식물이 어떤 한 가지를 쌍극으로 변신시킨 결과가 아닐까 싶다고 괴테는 말했다.
p 182
최초의 떡잎이 시작되고 최후의 열매를 완성하기까지 항상 점진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 세계에서는 하나의 형태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이 한 단계씩 상위 형태로 진입하여 마침내 자연의 절정을 이루는 양성 생식에 도달한다.
이렇게 모든 식물은 때가 되면, “억누를 수 없는 충동과 강인한 노력으로 꽃을 피우고, 사랑의 행위에 몰두하기” 마련인데, 이 자연의 흐름에는 가끔 정체 현상이 나타난다.
화려한 망설임
p 186
선악과를 먹은 이성인에게 식의 세계란, 분명 굶주림의 공포를 초래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이성인에게 성의 세계란, 도덕과 연관된 것을 각자 눈앞에 들이대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일종의 대체품이었다. 고전 그리스의 관능과 크리스트교의 계율, 두 세계 사이에서 최고의 시인을 인도한 것, 그것은 한해살이풀의 생을 지탱한 하늘의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 194
모든 생물 현상에는 파동이 있다. 이는 각각의 움직임을 곡선으로 나타내면 그 곡선에는 크기와 상관없이 파형이 그려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루가 있으면 골이 있고, 골이 있으면 마루가 있듯이 마루와 골은 완만하게 옮아가면서 교대한다. 이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반대로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다고 달리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파동에는 반복이 당연히 존재한다. 마루라면 조금씩 형태가 바뀌면서 마루의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 주기로 되풀이된다. 보통 반복이라고 하면 똑같이 되풀이를 연상하지만, 자연계에는 동일한 반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유사하더라도 둘 사이에는 반드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수면에 이는 물결 모양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p 196
자연은 인간의 눈에만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선사한다고 했던가
p 197
지구 생물의 몸에는 7일 주기로,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파동이 살포시 다가오는 것일까? 가족을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냈을 때 그 충격은 분명 7일 단위로 조금씩 멀어진다. 이는 육체 감각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질병 치유도 마찬가지다. 7일째마다 한 꺼풀씩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약은 흔히 일주일 치를 처방한다. 인체 활동에서는 7일째 극한 상태를 맞이하고 여기에서 탈피하여 8일째부터 다시 새로운 자세로 출발하는 하나의 큰 흐름이 존재한다. 유대인은 육체 감각을 반영해 7일째를 완전한 휴일로 정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일주일이라는 단위는 일부 인간이 멋대로 결정한 사회 법칙이 아니다. 이미 세포의 원형질 수준에서 만장일치로 정한 만고의 진리다. 그리고 이 주기는 여성의 생리 주기처럼, 현대인의 몸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p 204
앞의 ‘분절 가능성’을 ‘분극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생활 속에서 가지각색의 대비를 마주하거나 배합을 즐기는 것은 우리의 생활이 리듬의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대변해주는 것이리라. 나아가 참된 이성이란 분절성과 쌍극성의 토대 위에서 발휘도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p 210
현대 생물학에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수많은 메커니즘을 신경생리학적으로 해명해왔다. 하지만 절묘한 메커니즘을 알면 알수록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딱 하나, 난소가 하나의 ‘살아 있는 행성’이라는 것 아닐까? 아니, 지구에 사는 모든 세포는 모두 천체가 아닐까?
지구라는 특수한 ‘수행성’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최초의 생명체는 그 자체가 운명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원시 생명체는 ‘어머니 지구’에서 마치 떡이 잘게 썰려 나가듯이 탄생한 ‘지구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다. 극미한 ‘살아 있는 행성’은 인력만으로 연결된 천체의 행성과는 애초 다르다. 이는 ‘계면’이라는 이름의 태반을 통해 모태 즉 원시 바다와 생명적으로 이어진, 말 그대로 ‘별의 태아’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특별한 존재다.
p 218
도는 ‘스스로 그러함 (自然)’을 본받는다.
p 220
"rm 무엇인가가 혼돈한 상태로 있었는데, 이는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다.“라는 구절이 뜻하는 바가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가? 이는 ‘그 무엇인가’와 ‘하늘과 땅’이 식과 성처럼 쌍극적으로 서로 마주하는, 바꿔 말하면 ‘현상의 마음으로서 그 무엇인가가 처음에 등장하고, 그 무엇인가의 본질이 되는 독립과 주행, 곧 영원 회귀의 근원 리듬이 제시되며, 나아가 이것을 ’도‘라고 부른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도가 하늘, 땅, 사람의 세 단계로, 괴테의 말을 빌리면 ’변신‘을 거듭하며 나타나는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것이 아닐까? 바로 ’만물 유전‘의 세계이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다.
p 224
태아의 세계는 노자의 ‘도’에서도 하나의 필연적인 출발점이 되고 있다.
p 230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 두려움은 자기 죽음을 초래하는 임종의 은밀한 발걸음 소리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단 하나의 구원은 사후의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보증에 있을 것이다. 전통 불교에서는 태어나서 죽는 생명 무상의 이 세상, 차안에서 두 번 다시 죽지 않는 저 세상, 피안을 향해 배가 떠난다. 크리스트교에서는 별 저 너머에 있는, 영광스러운 신의 오른편 자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끔 그 탑은 하늘을 향한다. 이들 두 세계의 공통점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참모습인 ‘절대적 무풍 상태’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크리스트교의 파동 없이 무한하게 뻗어 나가는 직선으로 그릴 수 있다. 두 세계 모두 우주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대뇌피질이 낳은 숙명의 관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 231
태아는 열 달 동안 어머니의 배 속에서 과연 어떤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낼까? 모태에서 들리는 소리는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피의 웅성거림, 즉 어머니가 핏줄기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다. 자궁벽을 철썩철썩 때리는 대동맥의 박동 소리, 시내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같은 대정맥의 마찰음, 그리고 그 저편으로 높이 퍼져 흐르는 심장의 고동 소리. 이 소리는 저 멀리 우주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 같은 진한 울림이다. 마치 은하계 성운의 소용돌이가 징소리가 되어 유유히 울려 퍼지는 듯한 소리. 바로 이것이 ‘생명 파동’의 상징일까, 아니 ‘생 박동의 근원’이라고 해야 할까?
p 234
‘마음’, 이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이 마음만큼 사통팔달로 쓰이는 단어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아의 세계에서부터 생명의 세계까지, 그리고 의식의 표층에서 무의식의 심층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마음이 통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마음을 하자로 표현하면 사람의 심장 모양을 본뜬 ‘심心’이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마음과 심장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물론 지금 말하는 심장은 장기의 생김새가 아닌 독자적인 운동 형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박동 모습에서 심장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요컨대, 마음이란, 심장 박동으로 상징되는 ‘리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의 미묘한 변화가 가장 예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심장 박동의 리듬일 테니까.
p 235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만이 이와 같은 공감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대자연과 공진하는 마음이 의식의 거울에 비친다. 우리는 이를 ‘마음의 자각’이라고 부르고, 깨어남의 성스러운 장소를 머리에서 찾는다. ‘머리가 깨다’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각을 찾아볼 수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일상적인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머리는 투영된 우주 교향곡의 파동 형상에서 같은 모양을 끊어내는, 똑똑한 분별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동일한 위상 지점에 우선 ‘마디’를 매긴다. 경계점을 지칭하는, 말하자면 앞서 소개한 지휘봉을 흔드는 행위다. 박자를 맞춘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물론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분별력이 없다.
p 249
“모든 생물은 태곳적 우주의 리듬, 생명의 근원적인 리듬을 품고 있는 소우주이다. 연어가 몸속의 신비로운 기억을 더듬어서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인간도 본디 대우주와 공진하는 생명 기억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바로 리듬의 생명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