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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함석헌
“씨알의 소리”를 내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천하 씨알이 다 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무슨 소리가 그리 많습니까?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라디오 소리, 장사꾼의 목 찢어진 소리, 식모의 얼굴 시든 소리, 군인의 개새끼 소리, 학생의 뒤집은 소리, 대통령의 꾸며낸 담화 소리, 벼슬아치의 엉터리 보고 소리, 여당의 어거지 소리, 야당의 시시한 소리, 목사 스님의 저도 못가보고 하는 천당 지옥 소리, 신문잡지의 알고도 모른 척하는 맥 빠진 논설 소리, 심지어는 애기 하나 가지고 이놈의 아들이랬다 저놈의 아들이랬다 하는 정부 갈보의 지갑 속에 딸라 지전 발각발각 하는 소리와, 선거 때까지 일년은 참아 줄 줄 알았는데 여섯 달도 못가 무너져서 “불도저 시장”이라 흔들거리던 대갱이를 하루 아침에 박살을 멕여 버리는 와우 아파트 와르르하는 소리까지 들리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인데, 씨알의 소리만은들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다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죽을 리 없습니다. 절대로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법 없는 것이 씨알의 몸입니다.
그럼 잠이 든 거지오.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야무진 눈을 가지고 밝는 날만 기다리는 것이 씨알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라면 되지 않습니까?
알고도 모르는 말씀입니다. 하란다고 하는 것 아닙니다. 하도록 대접을 해야지오. 씨알은 착합니다. 으젓합니다. 착하기에 싸우지 않습니다. 경쟁하지 않습니다. 으젓하기에 자랑 않습니다. 뽑내지 않습니다. 으젓하다 못해 수줍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해라! 해라! 하면 도리어 못합니다. 왜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던 지랄도 멍석 펴 주면 아니 한다”고? 씨알의 용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대접을 해주어야 합니다. 수줍다는 것은 스스로 지키기를 굳게 하고 스스로 가지기를 높이 하는 말입니다. 멍석을 펴는 것은 대접이 아닙니다. 놀림 감으로 구경하자는 속셈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움추려집니다. 착하니 남을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팔리지 않으면 그만 입니다. 그것이 남을 저와 같은 맘성인 것으로 대접하는 으젓입니다. 씨알은 그러기 때문에 제노라고,잘났노라고, 제 선전을 제가 하며, 영웅인 체, 호걸인 체, 지도자인 체, 되지도 못한 것들이 나서서 우쭐 대고 설치고 하는 것을 보면,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하늬 바람이 부는데 아구 트는 씨알이 있을 수 없지오. 못생긴 것 같지만 못생긴 것이 아닙니다. 말이 통할 수 없는 저쪽을 그만큼 대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이 있었지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장난거리로 내려와 보라는 데는 잠잠하고 죽지 않았습니까? “진주를 돼지게 줄 수 없고 거룩한 물건을 개 에게 던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 자는 생명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시험하는 자는 죽음 밖에 볼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를 못박은 자들의 죽음입니다. 예수가 능력이 없어 죽은 것 아닙니다. “죽은 자들로는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는 것” 밖에 할 도리 가 없기 때문에 물음에 맞도록 대답을 한 것입니다. 씨알도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업신여기는 자 앞에서는 잠잠합니다.
결코 같이 업신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진주를 돼지게 주지 말라 할 때 진주를 아끼기만 한 것 아닙니다, 돼지도 알아준 것입니다. 먹지도 못할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은 진주를 버릴 뿐 아니라 돼지를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하여 짓밟고 도리어 준 사람을 찢는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도 저를 돼지로 대접하지 않고 적당치 않은 것을 주면 노할 줄을 아는데, 세상에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어찌 그리 많습니까? 군인에게 군인 이상의 것을 주고 대학총장께 대학총장 이하의 것을 주는데 그것이 업신여김인 줄을 모릅니다. 세상에 진주 목도리를 목에 건 돼지 같은 정치가, 사업가, 학자, 기관장이 어찌도 그리 많습니까? 씨알은 그러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성이 수줍어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제치고 능히 상을 받는 것은 벌써 사람이 아닙니다. 수줍음 다 팔아 먹고 까불고, 뻔뻔하고, 배짱, 능청을 부리는 것을 그들 세상에서는 소위 “리더쉽”이니 “거물” 이니 합디다마는 씨알은 그럼 외면해 버립니다. 자기를 아끼고 또 저 쪽을 불쌍히 여겨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씨알은 명령으로도 말고, 추켜줌으로도 말고, 대접을 해주셔야 소리를 냅니다.
어떻게 하면 씨알 대접입니까?
왜,“남에게서 받고저 하는대로 너희도 그대로 해라” 하지 않았습니까? “出乎爾者 反呼爾”라 하지 않았습니까? 노래가 듣고 싶으면 먼저 잘 못하는 노래라도 해야 합니다. 사슴을 잡으려 할 때 사슴아 오너라” 하지 않습니다. 울개를 쳐서 사슴 소리를 내면 스스로 옵니다. 내가 씨알의 소리를 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민중아 부르짖어라!”해도 소용없습니다. 지배자들을 향해 “언론 자유주어라!” 해도 돼지께 진주 먹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고 변변치 않은 내 소리라도 하면 씨알은 신이 나서 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어릿광대가 나와야 참 광대가 나옵니다. 어릿광대가 잘나서 아닙니다. 사실은 그 못난 점이, 그러면서 먼저 하는 그 맘성이, 참 광대를 불러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씨알은 서로「같이 우는(共鳴) 것」 「느껴 주는(感應)」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경꾼의 심정입니다. 씨알 끼리는 서로 맘성을 알아주고 마주 느껴 주는 것입니다. 잘 잘못을 몰라서도 아니요, 잘해서 소용이 없다 해서 아닙니다. 그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잘은 서로 따지고 평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열리고 고른 마음으로 주고 받는 데서야 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잘은 믿어줌에만 있습니다. 힘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네”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이”만이 가진 것입니다. “전체”에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씨알의 헌법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를 가르치잔 것 절대로 아닙니다. 네가 나를 가르치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열린 마음으로 주고 받을(對話) 때 보다 높은 지혜와 보다 큰 힘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 소리는 무슨 소리를 하자는 것입니까?
내 소리, 곧 “제”소리를 하잔 것입니다. 귓청이 떨어지도록 길거리에 소리가 찼지만 우리 소리가 아닙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도 부족해 자면서까지 말을 하지만 참 제 소리는 별로 없습니다. 팔려서 해도 제 소리가 아니고, 강제에 못 이겨, 달래는데 속아서, 해도 제 소리가 아닙니다. 제 소리는 스스로 속에서 울어나서 해야 합니다. 이른바 誠於中이면 形於外입니다. 이날껏 우리는 팔았고 팔렸으며 속였고 속았습니다. 팔잔 마음 없으면 팔리지 않을 것이요, 속이잔 마음 없으면 속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내주지 않고 남을 사들일 수 없고, 남을 아프게 않고 내가 아픈 법 없습니다. 그런데 이날껏 우리가 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말한다면?
수두룩합니다. 우선 “民”부터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民이라고나 했습니까? 庶民, 下民, 民草, 愚民, 그랬지. 꼭 같은 사람을 부르는데, 나면 나고 저면 저지, 王, 皇,陛下, 殿下, 閣下,臣, 僕, 그게 나 무엇입니까? 사람이 도덕이 있어야 하지만 그 도덕이 다 비뚤어진 것이었고, 믿음도 있어야지만 그 종교도 모두 뒤집혀 있습니다. 님이면 님이지 무슨 만왕의 왕이니, 만군의 여호와니, 옥황상제니, 염라대왕이니, 그것이 다 종살이 버릇에서 나온 것입니다. 분명히 “아버지”라 했고 “내가 이제 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한다” 했는데, 왜 아버님, 벗님 하지 못하고 “주님” “이 종을”합니까? 그것을 아첨으로 곱게 뵈려고 합니까? 아첨이 존경은 아닙니다. 비겁이 충성은 아닙니다. 얌전하다, 충성되다, 진실하다 하는 것이 다 제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남의 뜻에 남의 흉내를 내고 남을 위해 짐승 노릇을 하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습니다. 시험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과서를 보십시오. 씨알이 씨알로서 제 자리에서 제 소리를 하고 저를 위해 제 살림을 하라 가르치는 것이 몇 마디나 있습니까? 글귀로는 있는 듯 하나, 그 대체가 남을 위한 심부름꾼을 기르도록, 인간성을 잃고 기계가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땀 흘려 일한 결과를 빼앗아가며 국민은 세금 바칠 의무가 있다 하고, 저희는 죽기 싫은 전장에 보내어 그 생명으로 바꿔 얻은 것을 국방이라는 이름, 장성이라는 이름 아래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주는 것은 국군 묘지에 팻말 하나입니다. 그 땅은 저희가 아니 주어도 이 지구가 어디나 주게 마련이 되어 있고, 그 이름은 저희가 부칠 겨를 없이 씨알의 마음이 알고 있습니다. 누가 말한 것 같이 “정치는 남의 사상에 사는 일”입니다. 남의 사상에나 살아도 좋겠습니다. 남의 밥을 만들어 내고 장난감을 만들어 내고 남의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제는 제 소리를 좀 내 보자는 말입니다.
제 소리를 내면 무얼 합니까?
놀랍습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이 지어졌다 하지 않았습니까? 民心이 天心이라하지 않았습니까? 씨알이 제 소리를 내면 천지 환판이 됩니다. 세계 혁명을 하기 위해 씨알이 제 소리를 내야 합니다. 사람이 제 소리를 내고 그것을 귀로 들으면 달라집니다. 나는 내 귀에 들리는 내 소리를 내 소리로만 알고 70년을 살아 왔는데, 요새 와서야 녹음기에 들어간 정말 내 목소리를 듣고 놀랐습니다. 씨알이 이날껏 자기네 지배자, 그 지배자에게 아첨하는 학자들의 입을 통해서만 제 소리를 들어왔는데 그것이 왼통 협잡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직접 우리가 하고 우리가 들어보잔 말입니다. 큰 일이 일어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인도에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떤 암 호랑이가 하나 있어서 새끼를 배고 달이 차서 낳게 됐는데 그 신고가 너무 심해서 새끼를 낳아 떨어뜨리자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새끼는 살 길이 없어졌는데 때 마침 그 부근에 염소 때가 하나 풀을 먹고 있다가 그것을 보고 늙은 염소들이 의론 끝에 그놈을 거두어 젖을 먹여 길러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 이 염소의 양자가 된 호랑이 새끼는 호랑이를 한번도 보는 일이 없어 염소 무리에 섞여 같이 풀을 먹고 염소 소리를 내며 몇 해를 자랐습니다. 자기 모양을 스스로 보지 못하니 자기도 염생인 줄만 알고 염생이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떤날 갑자기 산골이 찌렁찌렁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큰 숫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염생이가 다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넋이 빠져 도망을 갔는데 이 양자 염생이만 어떤 영문인지 머뭇머뭇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아비 호랑이는 거기 오더니 새끼 보고 “이 자식아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야?” 했습니다. 새끼는 겁에 질려 대답도 못하는 것을 그 늙은 아비는 “이리 와봐!”하며 끌고 갔습니다. 그래 시냇물가엘 가더니 물 속에 비친 두 그림자를 가리키며 “저걸 봐!”했습니다. 보니 두 형상이 꼭 같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제가 호랑이 새끼인 줄을 알게 됐습니다. 아비는 다시 엄숙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 봐!’’했습니다. 벌벌 떨며 호랑이 소리도 아닌 진짜 염생이 소리도 아닌 매매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자식아 그게 무슨 소리야?” 호통을 쳤습니다. 움츠리는 아들을 늙은 아비는 친절하게 품에 끼고 굴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먹다 남았던 피가 뚝뚝 흐르는 날고기를 주며 “이걸 먹어!” 했 습니다. 새끼는 진저리를 떨고 “못 먹어요 풀이나 먹지” 했습니다. 아비는 다시 “뭣이 어쩌구 어째?”하고는 그 고기덩이를 새끼의 목구멍에 틀어막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핏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이 가짜 염생이는 비로소 그 핏맛을 알게 됐고 저도 모르게 언젠지 “으흥흥’’하는 호랑이 소리가 피를 뚫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자 늙은 아비는 흐뭇한 듯 흰 수염을 숭긋한 다음 “됐어 이젠 됐다. 자 이제부터 나와 같이 사냥을 가는 거다”하고 푸른 산속으로 둘이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씨알은 잘못되어 제 넋을 잊은 호랑이 새끼입니다. 호통을 치면 산골이 울리고 바위가 굴며 나서기만 하면 맞설 짐승이 없는 천성이건만 깜찍하고 패랴한 염생이 같은 지배자들 한테 붙들려 거기서 변변치 않은 것을 얻어 먹는 대신 제 소리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늙은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이제 제 소리를 낼 순간이 옵니다. 용감하게 새 시대의 공기를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씨알이 제 소리를 내면 어떻게 됩니까? 힘이 어디서 옵니까?
모든 씨알이 낡은 제도와 사상에서 해방이 되어 용감히 제 소리를 내면 그것이 저절로 하나의 우렁찬「어우름 노래(合唱)」가 됩니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 속에 들어가 소리를 한번 외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 일만이천봉이 곧 일시에 메아리를 쳐 울려 보낼 것 아닙니까? 그 소리를 들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씨알의 소리도 그렇습니다. 씨알은 느끼는 것이요 대답해 주는 것입니다. 소리는 소리를 부릅니다. 그러면 그때는 네 소리만도 내 소리만도 아닌 전체의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씨알의 헌법의 둘째 장을 알아야 합니다.
“전체는 부분의 모아논 것보다도 크다” 사람의 몸은 여러 부분이 하나로 하나되어 산 것이지만,해부한 부분들을 다 모아 놓아도 산 사람은 아닙니다. 산 사람은 해부 분석으로는 알 수 없는, 크기도 무게도 없는 어떤 무엇이 더 있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라 할 때 그것은 전체에서 떨어진 죽은 부분입니다. 그 부분이 하나가 될 때는 어느 부분에서도 볼 수 없던 생명이 일어납니다.
그럼 씨알의 헌법의 셋째 장이 또 있습니다.
“부분은 전체 안에, 전체는 부분 안에.” 이날까지 개인이 전체 없이도 있는 줄, 전체가 개인을 떠나서도 있는 줄 알았던 것이 잘못입니다. 전체가 소리를 낼 때 개인으로서는 누구도 할 수 없었던 혁명이 이루어집니다. 그때에 소리가 개인들의 입에서 나와도 그 개인의 소리가 아닙니다. 그 개인을 통해 전체가 직접 외치는 것입니다 허지만 그것은 어디 바깥에서 오는 것 아닙니다. 맨 첨부터 속에 있던 것입니다. 있었지만 전체는 전체가 부르기 전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 신비가 있습니다. 설명 못해도 겁낼 것 없습니다. 학자란 해부하고 분석은 하지만 살려 내진 못합니다. 살려 내는 것은 생명인데 생명은 믿음에만 있습니다. 서로 믿는 것이 씨알입니다.
씨알이 제 소리를 하는 것은 우리 속에 계신「그이」곧 전체가 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씨알은 어느 씨알도 다 완전 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믿음으로 전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제 모자람을 스스로 알면서도, 누구를 가르치잔 것도 아니요 누구에 추종하잔 것도 아니요 다만 전체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겸손하게 열린 마음으로 전체를 우러러 보면 어느덧 제 속에서 제 소리는 아닌 소리가 나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비로소 그때에 가서야 그것이야 말로 제 소리인 것을 느끼고 이때까지 제 소리인줄 알았던 것이 도리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 모든 씨알들이 제 소리를 할 수 있게 될 때 전체의 소리, 소리 아닌 소리를 듣고 입으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다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 자 곧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장) 그러면 그 말씀은 곧 창조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역사는 새 단계에 오르게 됩니다.
씨알의소리 1970. 5월 2호
저작집30; 2- 289
전집20; 14-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