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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바라보며 지켜지는 겸손. 主を見つめながら守られる謙遜。(2024년 9월 1일 주일예배)
본문 갈2:11~16
갈2:11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12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13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15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16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1. さて、ケファがアンティオキアに来たとき、非難すべきところがあったので、わたしは面と向かって反対しました。12. なぜなら、ケファは、ヤコブのもとからある人々が来るまでは、異邦人と一緒に食事をしていたのに、彼らがやって来ると、割礼を受けている者たちを恐れてしり込みし、身を引こうとしだしたからです。13. そして、ほかのユダヤ人も、ケファと一緒にこのような心にもないことを行い、バルナバさえも彼らの見せかけの行いに引きずり込まれてしまいました。14. しかし、わたしは、彼らが福音の真理にのっとってまっすぐ歩いていないのを見たとき、皆の前でケファに向かってこう言いました。「あなたはユダヤ人でありながら、ユダヤ人らしい生き方をしないで、異邦人のように生活しているのに、どうして異邦人にユダヤ人のように生活することを強要するのですか。」15. わたしたちは生まれながらのユダヤ人であって、異邦人のような罪人ではありません。16. けれども、人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知って、わたしたちも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ました。これ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していただくためでした。なぜなら、律法の実行によっては、だれ一人として義とされないからです。
지난 주일에는 성도의 삶과 일상의 모든 기회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며, 또한 하늘로부터의 선물로 주신 것임을 함께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나의 일상생활을 살 수 있는 것이 곧 은혜이며, 선물이고, 또한 사명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인생과 또한 복음전파의 사명에 기쁨과 뿌듯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를 통해 베드로가 저질렀던 실수를 지적합니다. 또한 이 일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의 약속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요. 11절부터 14절까지는 바울이 경험한 에피소드에 관한 내용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경험담을 통해 우리가 기억하고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약점을 늘 살피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인 베드로조차도 유대인으로서 갖는 치명적인 약점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성령세례의 경험을 통해 구원의 자유를 누리며,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인간적인 약점이 여전히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바울의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대체로 외적인 여건과 조건에 의해서 많은 것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수용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인간은 외면을 보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뒤통수나 등 뒤를 볼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의 얼굴과 표정조차도 거울을 이용하지 않으면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존재의 가치를 높이고, 혹은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땅에 예수님 외에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춘 의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53:2-3)
그러니 사람의 위대함과 사람의 온전함과 또한 사람의 업적과 그 지식을 칭송하고 자랑하는 것은 모두 허무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 2:11)
전도서를 지은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롭고 권세가 높았던 솔로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솔로몬에 대해 말하기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왕상4:34)
솔로몬이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블레셋 땅과 애굽 지경까지의 모든 왕을 다스렸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대하 9:26-27)
이처럼 대단한 영웅이며, 능력자였고, 지혜와 지식이 넘쳐났던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아무리 위대한 인생이라도... 인생 그 자체는 허무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위인이나 영웅호걸의 인생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오늘의 본문도 바울은 베드로의 실수와 실족함에 관하여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 또한 구원의 약속과 복음은 사람의 노력이나, 명성, 혹은 그에 관한 소문이나 평판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성도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지켜야 할 것은 겸손한 태도입니다. 죄에 대한 자세와 의에 대한 태도가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서 자기 내면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율법이나 자격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0-12)
가장 마지막 12절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구절은 오늘 본문에 베드로의 실수를 목격한 바울의 경험에서 오는 진심 어린 충고이며 격언임을 믿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16절에서 우리가 의로운 존재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의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믿어도 좋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기에 언제나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고 했는데요. 이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살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를... 이미 의로운 존재로 여겨 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조금은 어렵고 복잡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오랑우탄이나 유인원을 볼 때 아무리 사람이랑 똑같이 생겨도 그 유인원을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동물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 정말 유인원이나 침팬지를 똑 닮은 사람이 있어도 그를 유인원, 혹은 원숭이와 같은 동물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외모적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사람”인 것을 내면적, 직관적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경우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유인원을 사람으로 오해하거나, 사람을 유인원으로 착각할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해와 착각에서 깨어나면 사람과 유인원을 구별할 수 있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된 영적 아이덴티티가 내면에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하나님의 DNA”라고 표현하시던데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가 우리답게... 사람답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기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자들을 마음껏 축복하라고 명령하시지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6:23-24)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 거듭나서, 의롭게 살고, 신실하고, 정결하고,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축복과 풍요로움의 열매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의 과정인 것이지요.
그러나 소위 믿음의 정도, 혹은 율법을 지키는 노력에 따라서 그 세속적인 풍요로움과 육신적인 형통함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축복만이 견고하게 무너지지 않는 축복의 증거가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포인트는 우리 인생에서 노력과 실력으로 얻어지는 자랑거리로는 결코 우리 인생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적 종교적 율법을 지키는 자랑거리이든, 일반적인 삶의 지식적인 성공이나 명예, 혹은 소유물을 자랑하는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활동과 업적으로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 앞에 소박하게 내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자신을 살피며 사는 “겸손”이라는 덕목의 태도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 앞에서 실패한 것도 겸손의 태도가 순간적으로 약해진 탓입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자주 실패하는 것이 주님 앞에 겸손의 태도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지요.
주님 앞에서의 겸손이란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르신 희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 감당하시고 내 대신 죄값을 치르신 것을 잊지 않고 일상을 사는 태도와 자세가 겸손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늘 주님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한데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고, 나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의 눈치를 보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 겸손의 태도를 잃게 되지요. 그것이 곧 교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대단한 악덕이 아니라,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내 앞에 임재하시며, 내 곁에 동행하고 계심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태도와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범죄의 근원이 되는 죄입니다.
진정으로 자신답고, 사람답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믿음의 주인이시고, 온전케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일상을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고, 3년을 동고동락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던 그 놀라운 체험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간 주님을 바라보기 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실족하여 외식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고, 놀라운 간증들을 체험하고, 대단한 업적을 세웠을지라도... 겸손을 잃어버리면 쭉정이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영원토록 풍요롭고, 복이 넘치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 때, 우리는 비로소 겸손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채우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풍성함과 부요함을 얻으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자신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축복으로 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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