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와 / 황선영
익산에서 새마을호로 갈아타고 대천에서 내렸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진다. 카톡이 오는 것 같아 핸드폰을 꺼냈다. 국화다. 지하철역까지 차가 막혀 터미널에 제시간 도착이 어려울 것 같다고. 열한 시 표로 바꾼단다. 두 시간 기다려야 한다. 걱정 말고 천천히 오라고 답을 보냈다. 아무렴. 다 좋다. 일러도 늦어도. 국화니까. 그러고 보면 사람 좋은 데 별다른 영문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해도 이쁘디이쁘니 말이다. 까닭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하고 나서 찾아가는 것인가? 하고많은 사람 중에 얘한테 마음을 주고 싶었다. 나한테 특별히 친절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잠바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대천역 광장을 나와 걸으니 폭이 넓지 않은 천이 흐른다. 봄이라고 주변 풀과 나무의 초록이 생기 있다. 한참 서서 보았다. 다리가 있길래 건넜다. 무슨 다린가 궁금해 뒤돌았다. '만남교'라고 쓰여 있다. 참 고전적인 이름이고만. 좀 더 걸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카페가 보인다. 그리로 들어갔다. 비 오는 날 오전. 손님이 나뿐이다. 허브차와 크루아상을 시켰다. 창가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카톡 진동이 울린다. 이번엔 지하철을 잘못 탔다는 내용이다. '센트럴시티'로 검색해야 하는데 '센트럴'만 넣었더니 송도로 가는 '센트럴파크'가 제일 위에 떴나 보다. 그 채로 지하철을 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그래도 빨리 알아채 다행이다. 열한 시 반 버스로 또 미뤘다며 미안하다고 한다. 귀여운 여자 아이가 하트를 들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꼭 저를 닮았다.
종일 기다려도 괜찮아. 니 생각 많이 할 수 있으니까.
주문한 게 나왔다. 빵을 손으로 크게 떼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차는 약간 씁쓸하니 고소한 빵과 잘 어울린다. 보던 소설을 꺼내 들었다. 국화 오기 전에 다 읽게 될 것 같다. 역시 책은 두 권씩 가지고 다녀야 한다. 재미, 있는 것 없는 것으로. 아줌마가 됐어도 남 연애 얘기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눈 깜짝할 새 읽어 버렸다. 차를 마시다, 밖을 보다, 결국엔 핸드폰을 한다. 요즘 '릴스'에 빠졌다. 별 의미도 없는 걸 넋 놓고 본다. 잠깐인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신 차려야지, 이러다 더 멍청해질 것 같다. 정지우 작가의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펼쳤다. 작가야말로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열두 시 전엔 드문드문 테이크아웃해 가는 손님만 있었는데 좀 지나니 무더기로 들어온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셋, 주문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음료를 받아 테이블에 놓는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자마자 셋이 동시에 핸드폰을 들고 주문한 걸 여러 각도로 찍는다. 까만 티를 입은 이가 먼저 전화기를 손에서 놓았다. 빨대로 음료를 휘휘 젓는다. 잔을 테이블에 둔채 고개를 숙여 입술을 빨대에 댄다. 웃는다. 머리카락이 똥꼬까지 긴 학생은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지막 사람은 잔이 뜨거운지 조심스럽게 들었다, 놨다만 한다. 똑같은 크록스 신발을 신은 남자와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테이블에 가 앉고 남자는 주문을 한다. 끝내고 여자 옆으로 가 딱 붙어 앉는다. 서로 손깍지를 낀다. 내 바로 앞으로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앉았다. 왼쪽에 회사 이름이 새겨진 같은 비둘기색 잠바를 입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말랐다. 분홍 마스크를 썼다. 반대편은 똥똥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입 빨고 말을 시작한다. "우리 관리자 신랑 죽었잖혀. 그 여자 신랑 있을 때부터 남자 있었다는디." 와우, 흥미진진한데. 온 신경을 귀로 모았다. 아, 그런데 음악이 바뀌더니 소리가 커졌다. 신나는 팝송이다. 카페 안 사람들도 목소릴 높인다. 잘 안 들린다. 아쉽다. 분홍 마스크는 한마디도 안 할 작정인지 음료를 앞에 두고도 벗지 않는다. 화장기 없는 얼굴. 분홍 마스크가 기미를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한참을 듣기만 하다 살짝 내리더니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내 노란 연습장을 폈다. 이야기를 더 상상했다. 신랑 죽기 전에 있었다는 남자는 애인? 그렇다면 남편은 왜 죽었을까? 지병?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무엇? 살인이나 자살일지도 몰라. 에고,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가. 애인이 있는 여자는 죽은 남편 장례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울까, 웃을까? 세상에 궁금한 게 많다.
테이블 위 전화기 진동 소리가 요란하다. '선영아, 나 곧 내려.' 시간을 보니 한 시가 훌쩍 넘었다. 책과 연습장과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첫댓글 소설의 일부 인가요? 대단합니다.
이번엔 수필인데. 하하.
고맙습니다.
잠깐 동안의 일이 글로 탄생했네요. 대단합니다.
쓰면 다 글이제라.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건 글 쓸 준비가 되어 있으시군요. 그런 마음 자세에서 이렇게 좋은 글이 나오구요. 닮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저를 닮으시면.
원래 사방에 낙서하는 걸 좋아했어요.
장편소설 쓰셔도 되겠어요. 아직 만나기 전이니까요. 섬세하게 묘사만 잘해도 좋은 글이 되네요.
오, 생각 못했는데 아이디어 고맙습니다!!!
전 선생님처럼 글 쓸 수 있으면 천국에 사는 것 같을 것 같아요. 아마 둥둥 떠서 살 거예요.
이러나 저러나 인생은 수고와 슬픔 뿐.
하하.
@황선영 신의 경지에 이르셨군요.
상황 묘사가 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 돈독한 우정이 부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통통 튀는 글, 잘 읽힙니다. 저도 소설 같은 글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누구보다 선생님 글 찾아 읽었어요.
일상의 사소한 소재도 글로 엮어내는 재주가 남다릅니다.
말하듯이 쓰는 능력 정말 닮고 싶군요.
선생님의 글 필사하며 감 익히렵니다.
선생님, 목포 오시면 꼭 연락주세요.
제가 밥 살게요.
하하하.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문득 잠자리의 눈이 떠올랐어요. 이리 새심하게 관찰하려면 눈이 여러개 있어야하고 사방팔방으로 움직여야 하겠지요? 글 감각 만큼이나 대단한 레이더를 장착하셨어요. 겁나 부럽습니다.
아아, 전혀요.
저 날은 하도 할 일 없어서 그랬던 거예요.
몸은 좀 나아졌나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한수 배웁니다.
예, 선생님. 덕분에요.
고맙습니다!
무슨 우정을 연애하듯이 나누나요? 하하. 연애 소설에서 읽을 듯한 표현들이네요. 괜히 설레게...
하하. 그랬어요?
감성 살아있네요. 헤헤.
황선영 선생님을 조심해야겠어요. 이리 관찰을 잘 하니. 언제 이상한 제가 글에 등장할지 모르겠네요. ㅎㅎ
다음엔 선생님 좀 유심히 봐야겠어요.
전혀 글이 될 것 같지 않는 소재들을 모아 엮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선생님처럼 쓰고 싶습니다.
깨끗하게.
술술 잘 읽혀 단번에 읽었습니다. 위에 댓글을 읽어보니 모두 칭찬이 자자 하네요. 부러부럽요.
고맙습니다!!!
네 시간을 기다려 만나도 좋은 친구.
선생님의 친구인 국화 님이 부럽군요.
선생님은 친구 몇 명 있어요?
@황선영 물론 저는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