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이 들려주는 명제와 논리 이야기>> 황선희 지음. 자음과 모음.
//수학은 진실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조각품의 아름다움과 같이 우리의 나약한 감정의 어떠한 부분에도 호소하지 않고 그림이나 음악과 같이 화려한 장식도 없지만, 최고로 순수하고 단지 최고의 예술만을 보여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완벽성을 갖고 있는 냉정하고 준엄한 아름다움이다// 러셀의 <<신비주의와 논리학>>1918중에서.
이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다’ 쿠테타가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나 기관’들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혹시 그들의 ‘맞을 짓’의 근거를 찾고 있는 것일까? 엄밀한 판단 기준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지 않을까. 총을 들고 국회로 난입하고, 평시에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에 때렸다는 사랑의 고귀함?이 아니라, ‘폭행했다’는 냉정하고 준엄한 판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 대립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어떤 편을 지지하든 ‘문제가 있다’라는 평가는 비슷해 보인다. 한 가지는 ‘극우’나 ‘파시즘’적 해결 방법, 한 가지는 ‘민주주의적 해결 방법’인 듯하다. ‘민주주의 강화’냐 아니면 ‘파시즘’을 통한 해결 방법이냐? ‘민주주의’는 그 ‘형식’에 우선 방점이 있고, ‘파시즘’은 그 ‘내용’에 우선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는 왜 내 사랑을 진실을 몰라주냐고 아우성이고, 어떤 이는 사랑의 ‘형식’을 준수하려 하는 듯 하다. 수학은 나약한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화려한 장식도 없지만, 냉정하고 준엄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것이 순수하고 최고의 예술이라고 한다. 전에 /허드슨강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비행사고에 대한 처리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들은 연민의 감정도 없고, 화려한 수식도 그 흔한 ‘진정성’도 없이 제도나 시스템과 ‘형식’으로 사건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였다. ‘냉정하고 준엄한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들이 부대끼는 세상에서 이런 ‘준엄하고 냉정한 아름다움’이 이루어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 제도/는 이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러셀은 철학자, 수학자, 작가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하면 수학을 논리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즉 수학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걸 기호논리학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이는 수학과 논리학을 서로 연결하려는 시도라고 한다. 그의 논리학을 약간이라도 맛보기 위해서는 ‘개념’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개념’은 논리학을 위한 도구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트가 아니라, 내가 이해하기 위한 용도의 노트니, 한 번 더 옮겨봄으로써 한 번 더 읽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 인용을 주로 해본다. 한국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먼저 그 사건을 헌법에 물어야 한다. 나의 감정이나 판단이 아니다. ‘인용’은 이런 효과가 있기에 중요하다.
명제란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문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문장은 의문문, 감탄문, 명령문, 서술문 네 가지로 구분된다. 명제, 즉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문장은 서술문뿐이다. 그래서 나머지 문장에 대해서는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 수학은 참과 거짓을 명백하게 구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한다. 감탄문 등은 수학적인 판단이 불가한 영역이라 한다. 주어진 문장이나 식이 명제인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이면----이다’와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명제의 형식이라고 한다. 명제는 이 형식을 충족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형식은 가정과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이면’은 가정, ‘----이다’는 결론이다.
증명이란? 주어진 수식이나 문장(명제)이 참인지 확인하는 방법을 증명, 거짓인지 확인하는 방법을 반례라고 한다. 증명이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성질을 근거로 하여 이론적으로 어떤 명제가 참임을 밝히는 과정, 참임이 밝혀진 명제 중에서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을 정리, 정의란, 용어의 뜻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 공리란, 증명하지 않고도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 그런데 반례는 명제가 거짓임을 밝히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정의나 다른 명제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증명이 아니라 반례라고 한다. 반례는 단 하나라도 거짓인 예가 발견되면 거짓이 된다고 한다. 수학에서 거짓은 단 하나만 발견되어도 그 명제는 부정된다고 한다. 명제를 증명할 때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른다고 한다. 1-추측한 사실을 명제로 만든다. 2-명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가정과 결론을 기호로 나타낸다. 3-정의, 정리, 성질 등을 생각하며 체계적으로 설명해 나간다. /어떤 명제가 참임이 증명되면 그 참인 명제를 이용하여 또 다른 명제가 참임을 밝힐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수학적 지식은 참인 명제들의 연쇄이며, 반복하고 축적되면서 등장하게 된다고 한다. 이 명제의 연쇄에서 한 명제가 거짓으로 밝혀지면 그 후 모든 수학적 지식은 거짓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위대한 수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이후 두려움에 발표를 미루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이유라고 한다. 만약 쿠테타가 기각이 되면 단지 하나의 명제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의 연쇄가 무너지게 된다. 이제 ‘데이트 폭력’을 처벌할 근거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폭력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사랑의 진정성’이라는 내용만 남는다면. ‘내가 그,그녀를 진정 사랑하였기에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만을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면.
명제와 집합. 집합이란 어떤 조건에 의하여 그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의 모임을 말한다고 한다. 이 집합의 개념이 상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런 집합의 개념을 정의한 수학자는 칸토어라고 한다. ‘개념’이란 원래부터 있던 자연발생적인 정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념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칸토어의 집합 정의는 /우리의 직관이나 사고 가운데 명확하고 잘 구분되는 대상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놓은 것/ 이다. 그럼 명제와 집합은 어떤 관계가 있을가? 참인 명제를 가정과 결론으로 나누었을 때 가정에 해당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을 p, 결론에 해당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을 q라고 하면, p는 q의 부분집합이 된다.
p⊂Q, 반대는 P⊄Q로 기호로 표시할 수 있다고 한다. ⊄,⊂은 집합의 기호이다. 수학에는 전제 조건들이 많이도 있어 보인다. ‘어떤 조건’,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모임’ 등. 어떤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한다는 의미는 우선 문제를 이런 식으로 명확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런 작업이 없는 문제에 대해 수학자는 침묵하든지, 어떻게든 수학적 엄밀성 즉 명제로 만들어내야 한다. 명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논리학의 시작이 아닐까?
명제의 역, 이 대우. 역이란, 명제의 가정과 결론을 바꾼는 위치 변경. 이란, 가정과 결론을 부정한다. 대우란, 가정과 결론을 부정하고 그 위치를 바꾼다. 명제를 가지고 놀이를 하고 , 또 그런 관계들을 바꾸어서 새로운 명제들을 만든다. 즉 역의 이, 대우. 이의 역, 대우. 대우의 역, 이 등을 계속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명제가 참이면 역, 이, 대우 모두 참인가? 명제가 거짓이면 역, 이, 대우 모두 거짓인가 아닌가? 명제의 역, 이, 대우를 만드는 것이 사실은 논리학이지 않을가? 질문을 만드는 능력, 하나의 명제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 등. 기호로 나타내면 1-P⊂Q (참인 명제) 2-Q⊂P(명제의 역) 3-Pⁿ⊂Qⁿ (명제의 이. ⁿ은 여집합) 4-Qⁿ⊂Pⁿ(명제의 대우) 이 관계의 참, 거짓을 어떻게 알까. 기호만 보고 알기는 어렵다. 이것을 벤다이그램으로 그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집합의 개념으로 증명할 수 있다.
명제가 참이면, 역과 이는 거짓, 대우는 참이 된다고 한다. 원래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기가 어려울 때 우리는 대우가 참임을 증명하여 원래 명제가 참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명제‘a²이 짝수이면 a는 짝수이다’ 대신 대우’a가 짝수가 아니면 a²은 짝수가 아니다‘ 즉 a가 홀수이면 a²은 홀수이다’을 증명하면 된다고 한다. 철학자들이나 논리학자들이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왜 그렇게 요란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외에도 귀납적 추론, 연역적 추론, 귀류법, 수학적 귀납법 등 수학적 방법을 논리학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러셀의 논리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패러독스라고 한다. 패러독스는 러셀이 발견한 새로운 논리학이라고 한다. 흔히 논리학은 ‘A는 A이다’와 같은 참인 명제는 참이라는 동일률, 어떤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모순율, 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배중률 세 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패러독스는 세 가지 법칙 중에서 모순율과 배중률을 어기고 있고, 명백하게 타당한 추론을 하더라도 모순되는 두 개의 결론을 얻게 된다고 한다.
러셀의 패러독스에 대한 정의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을 N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 집합 N은 그 자신의 원소가 될까, 아니면 원소가 될 수 없을까//
무슨 소리인지. 이처럼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문장이 패러독스라고 한다. 이 패러독스가 가져단 준 혼란은 엄청났다고 합니다. 나는 이 패러독스의 문장을 해독도 할 수 없어 쪽지에 접어서 지갑에 넣었다. 생각나면 꺼내보아야겠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외워버려야겠다.
즐거운 하루였다. 어촌에서 평생 살았던 시골 아낙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재밌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첫댓글 문제를 만드는 능력,
명제를 만들고 증명하는 능력......철학자.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기대가 읽힙니다.
(헌법대로)형식적으로 증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