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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 나는 깨어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추공
[연지대사 왕생집 (蓮池大師 往生集)]
[정토종(蓮宗) 제8조 연지대사(蓮池大師, 운서, 주굉): 1540년경, 明 世宗, 항주 스님)]
1.비구의 왕생
2.임금과 신하의 왕생
3.처사의 왕생(處士往生)
4.비구니의 왕생
5. 부녀의 왕생
6.파계인(破戒人)의 왕생
7.축생의 왕생
연지대사 왕생집 (蓮池大師 往生集)]
-항주 운서사 사문, 주굉 모음 (古杭雲棲寺沙門袾宏 輯) -
서(序)
세존(世尊)이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었을 때에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불승(佛乘)을 널리 말씀하셨다. 그후 근기가 모두 투합하기 어렵게 되자, 일승(一乘) 중에서 삼승법(三乘法)을 보이셨고, 다시 삼승 중에서 정토(淨土)의 한 문(門)을 드러내었다.
오늘날은 부처님이 가신 지도 오래되었고, 중생의 번뇌도 날로 더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것(三乘)에 의지해서는 신묘한 견해를 개발하여 성인의 지위를 초월하기 어렵고, 이것(淨土)을 버리고서는 허둥지둥 타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이 문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재빨리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위대하다!
참으로 말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신효(神效)한 영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효험이 많았으나 지금은 드문 것은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입으로는 정토를 부르면서 마음은 사바를 떠나지 못하여, 굳게 깨달음을 구하는 선배들의 열정에 미치지 못할 따름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왕생했다고 전해오는 자가 있었다고 하나, 세월이 오래되어 이젠 없어져 다시는 볼 수 없고, 간간이 내외백가(內外百家)의 문장의 일부분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내가 본 것 중에서 그 인과가 분명한 것만을 발췌하고 보니, 어느듯 11년 동안에 천여 가지의 이야기를 모우게 되었다. 금년 갑신(甲申), 삼가 중봉(中峯) 화상의 우거(寓居)를 본받아, 산자락에 한 칸 초옥을 얽고 문을 닫아 걸고 왕래를 끊었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가지고 같은 부류대로 앞 뒤를 나누고, 또한 모든 성인들이 한 곳으로 돌아갔음을 증명하였고, 살아서 감응을 얻은 사실에도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모두 166 가지의 사실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간간이 숨은 뜻을 밝히고자 하여 찬(贊)을 붙이고는 제목을 왕생집이라 하였다.
그리고서 스님네와 신도들에게 이 책을 보이면서, 아무개는 이렇게 해탈하여 왕생하였고, 아무개는 이렇게 순일(純一)함으로 해서 왕생했으며, 아무개는 이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왕생했고, 아무개는 이러한 대자대비로 왕생했고, 아무개는 이렇게 잘못을 뉘우치고는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업(業)을 바꾸어 왕생하였다. 그리고 아무개는 이렇게 상생(上生)했고, 아무개는 이렇게 중생(中生), 혹은 하생(下生)하였다.
이렇게 옛적의 일을 고증하여 오늘에 증거해 보면 정업(淨業)을 닦는 자를 위한 확실한 증명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일일이 지적해 가면서 일러 주었다. 어떤, 내 곁을 지나가던 객이 몇 가지의 이야기를 읽어보지도 않고 발끈 화를 내면서 ‘정토(淨土)는 마음일 뿐, 마음 밖에는 국토가 업소. 정토에 왕생한다는 말은 우언(寓言 어리석은 말)일 따름이오. 그대는 진정 왕생한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 것이오?
어찌 태어남이 없다[無生]는 뜻에 어긋나는 말이 아니겠소.’ 하였다. 나는 그의 얼굴빛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태어남이 없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면 모든 것이 단멸(斷滅)이어서 오히려 마음뿐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과연 태어남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다면 태어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태어남이 이미 본래 없는 것이므로 늘 태어나되 태어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대는 이미 번뇌를 다했습니까?” “그러지 못했소.” “아! 번뇌를 아직 없애지 못했다면 다시 태어나는 인연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다시 태어나는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몸을 의탁해야 할 곳이 반드시 있어서 삼계(三界)의 넓은 고해(苦海)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진대 정토에 태어나지 않고 어느 곳에 태어나겠습니까? 육도(六道)에서 헤매는 것과 구품(九品)에서 노니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로움과 해로움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입니다.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까? 부질없는 이론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짓은 나도 하려면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함부로 진리를 천착하는 우를 범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가십시오. 그대가 진정으로 나의 말을 그르게 여기지 않는다면 정토에 태어나 불승(佛乘)에 오를 것입니다.
털 끝 만큼의 의심도 갖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되지 못할 리는 없습니다.” 객이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잃은 듯 어리둥절해 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피 울었다. 그러다 다시 옷깃을 가다듬고 남은 부분을 마저 읽고는 절을 하며 이 책을 출판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제 출판에 즈음하여 이와같이 시말의 경위를 적어두는 바이다. 만력(萬曆) 12년[1584] 여름, 항주 사문 주굉 적다.
* 주굉(袾宏 1535-1615).
명나라 때 스님으로, 자백진가(紫栢眞可), 감산덕청(憨山德淸), 우익지욱(藕益智旭)과 함께 명나라 4대 고승의 한 분이다. 항주인화(杭州仁和 : 절강성 항현) 사람으로 자(字)를 불혜(佛慧), 호(號)를 연지(蓮池)라 했으며, 17세 때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있었다. 이웃집에 할머니가 계셨는데, 날마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먼저 간 남편이 부처님 명호를 수지하여 임종시에 병없이 죽었다. 때문에 염불의 공덕이 불가사의함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 말에 감화를 받은 이래 마음을 정토에 의지하고 생사대사(生死大事)란 네 글자를 책상머리에 써 놓고 스스로 경책하였다. 27세에 부친상을, 32세에는 모친상을 당하였기에 그해(1566년), 마침내 결심하여 출가하였다.
북쪽으로 유람하다가 편융스님을 만났는데, 편융은 그에게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말고 오직 일심으로 도를 찾고 지계염불(持戒念佛) 하라고 깨우쳐 주었다. 이에 감격을 깊이 받았으며, 고봉원묘(高峰原妙) 계열의 소암덕보(笑巖德寶)의 법을 받아 크게 깨달은 뒤 선종(禪宗)의 조사가 되었으며, 변융(徧融)의 뒤를 이어 화엄(華嚴)의 종사로써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융경5년(1571) 항주 운서산에 들어가 산수가 그윽하고 절묘함을 보고 이를 좋아하여 거처를 산속에다 정하고 염불삼매를 수행하기 시작하였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사람들을 교화했기 때문에 승려와 재가신자가 운집하여 일대총림을 이루게 되었다. 만력12년(1584)에는 [왕생집]을 편찬하여 옛날부터 지금까지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전하였다.
20년 동안 항주 정자사에서 법회를 열었고, 그때 또 계단을 만들어 자서수계 (自誓受戒)의 법을 행하였으며, 산중 및 성의 안팎에 방생하는 연못을 만들었고, [계살방생문 戒殺放生文]을 지어 중생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또 항상 정토를 주장하여 [아미타경소]를 저슬하였고, 참선하는 무리들의 자만심을 통렬히 꾸짖었다.
만력 44년(1615) 7월에 병이 깊어 제자들에게 성실하게 염불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81세로 입적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운서대사(雲棲大師) 또는 연지대사(蓮池大師)라 부르며 존중하였고, 그를 연사(蓮社: 정토종) 제8조로 추앙한다.
저서에는 아미타경소초 4권, 왕생집 3권, 정토의변 1권, 선관책진(禪關策進) 2권,
죽창수필 2권, 치문숭행록 1권 등이 전한다.
- 왕생집 목록(往生集目錄)-
제1권. 비구의 왕생(沙門往生類)
제2권. 왕과 신하의 왕생(王臣往生類)
처사의 왕생(處士往生類)
비구니의 왕생(尼僧往生類)
부녀의 왕생(婦女往生類)
악인의 왕생(惡人往生類), 축생의 왕생(畜生往生類)
제3권. 모든 성인이 한 곳으로 돌아가심(諸聖同歸類), 살아서 감응을 얻음(生存感應類)
[비구의 왕생집(往生集)]
연지대사, 왕생집 1권
원조사(遠祖師)
진(晋) 혜원(慧遠)은 안문(雁門) 누번(樓煩) 사람이다. 육경(六經)에 통달했으나, 그 중 노장(老莊)에 더욱 밝았다. 안 법사(安法師 ; 道安)에게서 <반야경> 강의를 듣고 활연히 대오하여, 이로 인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그를 섬겼다. 태원(太元) 6년[381], 심양(潯陽)을 지나다가, 여산(廬山)이 유적하여 마음을 깃들여 살만한 곳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산신(山神)의 현몽(現夢)을 받고, 어느날 밤 번개와 비바람이 몰아 치더니 재목을 힘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자사(刺史) 환이(桓伊)가 집을 짓고 신운(神運)이라고 불렀다. 혜영(慧永)이 먼저 서림(西林)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혜원이 사는 곳은 동림(東林)이라 하였다. 혜원은 동림에 머문 지 30년 동안 발길을 세속에 들여놓은 적이 없이 지극히 서방(西方)에만 뜻을 두어, 고승과 거유(鉅儒) 140인과 함께 정사(淨社)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연루(蓮漏 : 혜원의 제자 혜요慧要가 만든 시계. 샘 안에 연 12잎을 세우고 물결따라 하루 12시를 정하도록 만들었다) 6시 동안 선송(禪誦)을 그치지 않았고, 생각과 마음을 정토에 쏟아 세 번이나 성상(聖相)을 보았으나 침묵하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훗날 19년[394] 7월 저녁, 반야대(般若臺)에서 정(定)에서 막 일어나려 하다, 아미타불의 몸이 허공에 가득한데, 원광(圓光) 속에서 화불(化佛)이 몸을 나투시고, 관음⋅세지 두 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물이 흐르듯 광명이 열네 줄기로 분산하면서 아래 위를 선회하는 속에서 미묘한 법을 연설하시고, 부처님께서 ‘내가 본원력(本願力 : 부처님이 보살 때 세운 원력)을 지키기 위하여 와서 너를 안위하노라. 너는 7일 후에 반드시 나의 국토에 태어나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또 보니, 불타야사(佛陀耶舍)⋅혜지(慧持)⋅혜영(慧永)⋅ 유유민(劉遺民) 등이 부처님 곁에서 읍하며 ‘ 스님께서는 저희들보다 뜻을 세운 지가 오래였습니다.
어찌 오시는 것이 이다지 늦습니까?’하는 것이었다. 이미 때가 이른 것을 알고는 문인(門人)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 이곳에 머물 때 세 번 성상을 보았고 오늘 다시 두 번이나 보았다. 정토에 태어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때가 이르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때는 의희(義熙) 12년[416] 8월 6일이었다.
찬(贊) 진(晋)나라 이전에도 정토의 법이 비록 중국에 전해지긴 했으나, 널리 전하고 힘써 행하여 거리나 집집마다 정토의 법을 깨우치게 된 것은 원 법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만대 이후에 정업을 닦는 제자들이 스님을 추존하여 시조로 삼게 된 것이다. 참으로 석가가 다시 서방(西方)을 연설한 것이며, 미타가 동토(東土)에 현신한 것이라 할 만하였다.
그 공이 위대하지 않은가. 내가 예전에 여산을 여행하다 호계(虎溪)의 샘을 마셔보고, 삼소(三笑)의 집을 바라보면서 18현(賢)의 유적을 배회한 적이 있었다. 그 규모가 홍원(弘遠)한 것을 보니 족히 만 명의 스님들이 살만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전각(殿閣)은 먼지가 쌓였고 종과 북은 적막에 묻혔으며, 문은 뒤틀리고 부엌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철인(哲人)이 가시자 아름다운 자취도 끊어지고 만 것이다. 애달픈 일이었다.
혜영(慧永)
진(晋) 혜영(慧永)은 하내(河內)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고, 그 후 원(遠) 공과 함께 안 법사를 의지하였다. 태원(太元) 초(初)에 여산에 주석하고 있노라니 , 자사(刺史)인 도범(陶範)이 지신의 집을 희사하여 서림(西林)이라 하고 그를 살게 하니, 이곳에서 철저히 세속을 끊고 안양(安養: 극락)을 간구하였다.
그 후 의희(義熙) 10년[414]에 병든 모습을 보이더니, 문득 옷을 걷고 신발을 찾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대중이 놀라 물으니 “부처님이 와서 나를 맞이하신다.”하고 대답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7일 만에야 사라졌다. 당(唐) 현종(玄宗)이 시호(諡號)를 추서하여 각적대사(覺寂大師)라 하였다.
찬(贊) 혜영이 처음 입도(入道)하여 원 법사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정사(淨社)를 세워만세의 법을 세웠다. 그러므로 혜원이 조사(祖師) 라고 한다면, 혜영은 종사(宗師)라고 할 것이다. 여산의 18대현(大賢)과 132위의 모든 왕생했던 이들을 여기서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우선 아래와 같이 한 두 분을 소개한다.
담순(曇順)
진(晋) 담순은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나집(羅什: 구마라집) 법사를 따라 여러 가지 경전을 강석하였다. 나집은 ‘이 사람은 기특한 그릇이다.’하고 찬탄하곤 하였다. 그 후 여산에 들어가 정업을 닦았다. 그 때 영만교위(寧蠻校尉) 유준효(劉遵孝)가 강릉에 절을 짓고 담순을 맞이한 이후로 염불삼매가 성행하게 되었다. 송(宋) 원가(元嘉) 2년[425], 대중에게 작별을 고별하고 앉아서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승예(僧叡)
진(晋) 승예1)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제방에 유학하여 멀리 천축(天竺)에까지 다녀왔다. 관중(關中)에 돌아와서는 나집 법사로부터 경전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여산의 연사(蓮社)에 참예하였다. 송(宋) 원가(元嘉) 13년[436], 홀연히 대중에게 “나는 가야겠다.”하고 고별하고는, 서쪽을 향하여 합장한 채 죽었다. 대중이 보니, 승예 책상 앞의 한 송이 금연화(金蓮花)가 갑자기 시들었고, 오색 향연이 그의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담항(曇恒)
진(晋) 담항은 하동(河東) 사람이다. 어려서 원 공을 의지해 출가하여 내외의 전적 (典籍)에 관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나, 여산에 들어간 후에는 염불에만 전념하였다. 의희(義熙) 14년[418], 단정히 앉아 합장한 채 큰 소리로 염불하며 죽었다.
도병(道昞)
진(晋) 도병은 영천(潁川)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원 공을 스승하여 경 율(經律)에 통달했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염불삼매를 극진히 궁구하였다. 의희(義熙) 14년[418], 예장(豫章) 태수 왕건(王虔)이 산에 들어와 알현하고, 원 공의 법석을 계승해 줄 것을 간청하니, 대중들이 모두 숭앙하게 되었다. 원가(元嘉) 12년[435], 대중을 모아 염불한 후 자리에 앉아서 죽었다.
찬(贊) 말과 행동이 일치하다는 것은, 이른바 마음과 입, 두 가지로 동시에 염불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 듯하지만, 행동거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왕생을 바라면서 누구를 속일 수 있으랴.
담선(曇詵)
진(晋) 담선은 광릉(光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원 공을 스승하여 부지런히 정업을 닦았고, 겸하여 강설에 능하여 <유마경>을 주석하여 세상에 남겼다. 원가(元嘉) 17년[440], 가부좌한 채 염불하며 갔다.
도경(道敬)
진(晋) 도경은 낭야(瑯瑘) 사람이다. 할아버지인 응지(凝之)가 강주(江州) 자사가 되었으므로, 그러한 인연으로 원 공을 따라 출가하였다. 나이 열일곱에 경론에 박통하여 하루에 만언(萬言)을 기억하였으며, 독실히 염불에 뜻을 두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송(宋) 영초(永初) 원년[420], 대중에게 말하기를 “선사(先師)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후, 나는 그대로 실행하였다.”하고는, 단정히 앉아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죽었다. 대중이 보니, 광명이 방에 가득하더니 잠시 후에야 사라졌다.
찬(贊)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갖춘 이로서 스스로 뽐내지 않는 자가 드물다. 그러면서도 독실히 염불에 뜻을 두었으니 숙세에 정인(淨因)을 심은 자가 아니겠는가. 요즘 사미로서 약간의 경론이라도 익힌 자면 아만과 게으름으로 머리가 희도록 돌아갈 줄 모른다. 그러다 부득이 서방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 때는 이미 늦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진(晋) 불타발타라는 우리말로는 각현(覺賢)이라는 뜻이다. 가유위국(迦維衛國. 가비라국, 곧 석가세존의 탄생국) 사람으로 감로반왕(甘露飯王. 석가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아우. 곧 석존의 숙부)의 후예였다. 나이 열여섯에 모든 경전에 박학했으며, 깊이 선 율(禪律)에도 능통하였다. 요진(姚秦) 사문 지엄(智嚴)이 서역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스님을 모셔 장안으로 왔다.
동궁(東宮)에서 법을 연설할 적에 나집 법사와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논의하기도 하였다. 후에 관중(關中)의 중인 도항(道恒) 등에게 빈척을 사, 이로 인하여 여산에 들어가 원 공의 연사(蓮社)에 원공의 참예하여 관불삼매(觀佛三昧) 등 경을 번역하였다. 송(宋) 원가(元嘉) 6년[429], 염불하며 죽었다.
승제(僧濟)
진(晋) 승제가 여산에 들어가 원 공에게서 배울 적에, 원 공이 ‘큰 법을 계승할 자는 바로 너다.’하고 찬탄하였다. 나중에 혹독한 병이 들어 정성을 다해 정토를 바라게 되었는데, 원 공이 촛불 하나를 주면서 ‘너에게 마음을 안양에 두게 할 것이다.’하였다. 제(濟)는 촛불을 잡고 탁자에 기대어 생각을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게 한는 한편, 대중을 모아 <정토경>을 읽게 하였다.
오경(五更)에 제(濟)가 제자 원필(元弼)에게 촛불을 주면서 대중을 따라 행도(行道: 여러 스님네가 경을 읽으면서 부처님의 주위를 도는 의식)하게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자신이 촛불을 잡고 허공에 올라 어딘가로 가는데, 아미타불이 손바닥에 받아들고 두루 시방(十方)에 이르는 것을 보고 문득 깨어났다. 슬프기도 한 한편 기쁘기도 하면서, 사대(四大)는 본래 전혀 병고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저녁 문득 일어나 허공을 살펴보니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도로 자리에 누우며 유쾌한 얼굴로 곁의 사람에게 “나는 가네.”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죽었다. 그 때는 폭염이 내려쬐는 한더위였으나, 3일 동안 몸이 변하지 않았고, 기이한 향기가 자욱하였다.
찬(贊) 제(濟)는 성사(聖師)의 지시로 정토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임종의 조념(助念)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폭서에 시신을 관에 담아 두었으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뿜어나왔다고 하니, 청정한 범행(梵行)의 결과로 얻어진 영험이었다.
혜공(慧恭)
진(晋) 혜공은 예장(豫章) 풍성(酆城) 사람이다. 혜란(慧蘭), 승광(僧光), 등과 함께 동학으로서, 난(蘭)과 광(光)도 정토를 간구하여 임종에 모두 기이한 영험이 있었다. 5년 후에 공이 혹독한 병이 들었는데,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부딪치면서 마음에 안양을 서원하여 염불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미타불이 금대(金臺) 앞으로 맞이해 가는데, 공이 그 위로 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또 보니, 난(蘭) 등이 금대 위의 광명 속에서 ‘장노께서 이미 상품(上品)에 태어나셨으니, 저희들의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탁(五濁)에 머물러 서로 만남이 더딘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공은 기꺼이 몸을 버리고 갔다.
혜건(慧虔)
진(晋) 혜건은 어려서 출가하여 계행이 엄정하였다. 의희(義熙) 중에 산음(山陰)의 가상사(嘉詳寺)로 가서 갖은 고생을 무릅쓰면서 대중을 이끌다, 나중에 병이 들어 안양에 태어나기를 간구하며 관음보살께 기도하였다. 북사(北寺)에 정엄(淨嚴)이란 비구니가 있었는데 도덕과 행실이 장한 이였다. 꿈에 관음보살이 서곽문(西郭門)으로 들어오는데,
아름다운 자태는 일월이 비치 듯하며, 깃발과 양산은 칠보로 장엄하였다. 정엄이 놀라 예(禮)하며 ‘ 대사(大士)께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으니, ‘가상(嘉祥)에 가서 건 공을 맞이하려 하네.’하였다. 건(虔)은 병은 비록 완쾌하지 않았으나 안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자들이 모두 기이한 향기를 맡는 가운데 조용히 죽었다.
찬(贊) 임종에 부처님을 친견한 사실을, 어떤 이는 순전히 자신의 관념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지금 다른 사람도 역시 보았다면 어찌하려 하는가? 감응의 교류는 불가사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승현(僧顯)
진(晋) 승현은 천축(天竺) 사람이다. 남으로 강좌(江左: 양자강의 동쪽지방. 지금의 강소성江蘇省)를 여행하다가 병이 들어 서방을 간구하게 되었다. 병고 속에서도 잠시도 쉬지 않더니, 아미타불의 광명이 자신의 몸에 비취는 것을 보고는 아픈 곳이 모두 나았다. 그리고는 일어나 목욕을 하고, 곁에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면서 아울러 인과를 경계할 것을 말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다음날 새벽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게으른 비구는 어쩌다 병이 들면 ‘내 몸이 피곤하다. 회복한 이후에나 염불하리라.’하고 말한다. 그러나 염불은 늙고 병든 이를 제도하기 위한 법문으로, 이때야말로 더욱 염불해야 할 때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顯)은 염불의 힘으로 이미 병이 나았고 또한 왕생까지 할 수 있었다. 훌륭한 일이다.
혜통(慧通)
진(晋) 혜통은 양주(涼州)의 혜소(慧紹) 선사로부터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으면서도 마음으로 안양을 기원하였다. 병이 들자 선정 중에서, 형색이 매우 단엄한 어떤 사람이 통(通)에게 ‘좋은 때가 이르렀노라.’하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 후에 아미타불의 광명이 찬연한 것을 보았다. 정(定)에서 일어나 동학(同學)에게 고별하고는 편안히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3일 만에야 흩어졌다.
법림(法琳)
진(晋) 법림은 임공(臨邛: 지금의 사천성 공협) 사람이다. 계행이 청정하였고, 성도(成都) 영건사(靈建寺)에 머물며서 정업을 닦았다. 늘 미타, 관음 두 경을 지니고 있었는데, 독송을 할 때는 어떤 건정한 사문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건무(建武) 2년[318], 병이 들어 누웠으나 일심으로 서방을 생각하면서 예참을 쉬지 않더니, 모든 현성(賢聖)이 모두 공중에 모이는 것을 보고 합장한 채 죽었다.
찬(贊) 임(琳)은 경을 외울 적에 사문이 앞에 나타나곤 하였다 한다. 대개 지극한 정성으로 감득한 것으로서 괴이쩍게 여길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서방에 왕생한 것이 이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업을 닦는 자는 모양을 취하여 바라지 말라.
담감(曇鑒)
송(宋) 담감은 평소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짓게 되면 서방에 회향하면서 부처님을 뵙기를 서원하였다. 하루는 정(定) 중에서, 아미타불이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너의 때를 씻어 주노라. 너의 마음과 너의 몸과 입을 씻어 모두 깨끗이 해 주리라.’하시고, 병 속에서 연꽃 한 가지를 꺼내 주는 것을 보았다.
정에서 일어나자 스님들과 고별하고 밤이 깊어서 혼자 낭하를 거닐며 염불하더니, 오고(五鼓: 오경{새벽3-5시}을 알리는 북)에 이르러서는 그 소리가 더욱 우렁찼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제자가 관례대로 문안을 여쭈었더니, 가부좌하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가서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승유(僧柔)
제(齊) 승유는 방등(方等)의 여러 경전을 공부했으나, 오직 정업만을 가까이 하였다. 죽는 날 천여 명의 화불(化佛)을 보았고 , 방의 안 밖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겨오는 가운데 서쪽을 향하여 경례하고 죽었다.
혜광(慧光)
제(齊) 혜광은 낙양(洛陽)에 살았다. 화엄, 열반, 십지 등의 소(疏)를 저술하여 깊이 권교(權敎)와 실교(實敎)의 뜻을 밝혔다. 하루는 병이 들었는데, 하늘의 대중들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는 “내가 원하는 것은 안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였다.
얼마 후 정토의 화불(化佛)이 허공에 가득하자 “원하옵느니 우리 부처님께서 저를 섭수하사 저의 본원을 이루게 하소서.” 하고, 잠시 기침 (여기서는 부처님을 찾아뵙기 전에 내는 언성을 말한다. 지금의 ‘노크’ 같은 것)을 하더니 말고 기운이 모두 쇠진하였다.
찬(贊) 천상에는 욕락도 많고 여인도 있으므로 해탈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예전에는 ‘설사 수행하여 비비상천(非非想天)에 이를지라도 서방으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토를 찬탄하는 자는, ‘상품(上品)은 열반의 언덕에 오른 것이요, 하생(下生)이라도 천궁(天宮)보다는 낫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지금 광(光)이 목숨이 다할 즈음에 살핌이 정확하고 소원이 분명했으니, 명쾌하고 용기있는 자라 할 것이다.
* 혜광(慧光)은 남북조(南北朝 420-581) 때의 승려로, 여산 백련사에 참예한 불타야사 삼장에게서 출가하여 계율(사분률)을 배워 중국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인도의 세친보살이 지은 <십지론>을 주석하여 중국 지론종(地論宗)의 기초를 열었다. 세상에서는 광통율사(光統律師)라 부른다.
혜진(慧進)
제(齊) 혜진은 고좌사(高座寺)에 살았다. <법화경>을 읽고 백부(百部)의 경을 찍어내더니, 이러한 선업을 회향하여 안양에 왕생하기를 서원하였다. 후에 공중에서 ‘너의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다.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하는 말을 듣고, 병없이 죽었다.
도진(道珍)
양(梁) 도진은 여산에 머물면서 정업을 닦았다. 꿈에 어떤 사람이 바다 가운데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물으니, 미타불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진(珍)이 함께 가고자 하니, 배에 타고 있던 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아직 욕실(浴室)도 짓지 않았고 <미타경>도 외우지 않았소. 같이 갈 수 없소.’ 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는 스님들을 목욕시키고 경을 외우는 일을 매년 거르지 않았더니, 홀연히 욕탕의 표면으로 백은대(白銀臺)가 내려왔다. 그래서 그 사실을 가만히 기록하여 경함(經函) 속에 넣어 두었다. 목숨이 다하는 날 저녁, 온 산의 중간 이상은 불이 난 듯 광명이 찬연하였다.
읍인(邑人)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제왕(諸王)의 예근(禮覲: 제후가 천자에게 알현하는 의식)일 것이라고 여겼으나, 날이 새자 진(珍)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중에 경함을 열어보고 진이 상서로운 감응으로 의당 정토에 태어났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찬(贊) 원(遠: 혜원) 공은 세 번이나 성상(聖相)을 보았으나 남에게 말하지 않았고, 진(珍) 공은 욕탕으로 은대가 내려왔으나 그냥 기록만 해 둘 뿐이었다. 고덕(高德)의 신중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저 못난 장부는 조그마한 기이한 일이라도 있으면 까불까불 입을 참지 못한다. 작게는 그 일을 잃어버리게 되고 크게는 마군의 덫에 걸리게 된다.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란(神鸞)
후위(後魏)의 담란(曇鸞)은 젊어서 오대산을 여행 하다가 영이(靈異)한 일을 경험하고는 출가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장생(長生)을 좋아하여 도은군(陶隱君: 남북조 시대의 본초가本草家인 도홍경陶弘景의 호)에게서 선경(仙經) 10권을 전해 받았다. 나중에 보리유지(菩提流支) 삼장을 만나 “불교에도 장생불사의 술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지(支)는 웃으며 “장생불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 불도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십육관경(十六觀經)>을 주면서 “이것을 배우면 삼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육도에도 다시는 가지 않게 됩니다. 그 수명은 하사겁(河沙劫)의 바위라도 이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부처님의 장생입니다.” 하였다. 난(鸞)은 매우 기뻐하며 마침내 선경(仙經)을 불태우고 정업을 닦았다. 추위와 더위, 질병이나 고통속에서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위나라 왕이 신란(神鸞)이라고 호(號)하였다.
어느날 저녁, 방 안에서 어떤 범승(梵僧)이 ‘나는 용수(龍樹)다. 오랫동안 정토에 살고 있었으나, 너와는 동지이므로 일부러 와서 만나게 된 것이다 .’하는 것을 보았다. 난은 때가 이른 줄을 알고는 대중을 모우고 “괴로운 인생은 끝내 끝날 날이 없다. 지옥의 고통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구품(九品)의 정업은 닦지 않아서는 안된다 .”하고 가르치고는, 제자들에게 큰 소리로 염불하게 하고 서쪽을 향하여 예하고 죽었다. 대중이 들으니, 하늘 음악이 서쪽으로부터 들려오더니 얼마 후에 사라졌다.
찬(贊) 선도(仙道)를 닦는 자들은 ‘부처는 죽음이 있지만 신선은 장생한다.’하고 말한다. 지금 지(支) 공은 ‘부처님은 장생이 있으나 신선은 장생이 없다.’ 하였다. 이 말씀은 통쾌하고 솔직하기가 천고에 빼어났다. 난(鸞) 법사는 그른 것을 버리고 올바른 곳으로 돌아가기를 마치 헌 신을 버리듯 하였으니, 어찌 숙세에 정인(正因)을 심은 자가 아니겠는가.
* 담란(曇鸞. 476-542) 대사는 중국 정토종의 초조로 추앙받는 분으로, 세친보살이 ‘오념문’을 설하신 <왕생론>에 주를 달아 후세 정토교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라 합니다. 보리유지(菩提流支) 삼장은 <왕생론>을 번역하신 분입니다. 연화세계 까페 ‘ 스님법문보기’ 30번에 담란대사에 대한 백련스님 법문이 있고, ‘염불삼매’ 44번에도 세친보살의 ‘오념문’에 대한 스님의 법문이 있습니다.
담란대사 <왕생론주> 한글 역 - 이태원, <왕생론주 강설>, 운주사. 2003. * 하사겁(河沙劫)의 바위 : 흔히 겁석(劫石)이라 한다. 둘레 사방 40리나 되는 바위를 백년마다 한번씩 천녀(天女)가 내려와 천의(天衣)의 엷은 옷으로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무한한 시간.
지자대사(智者大師)
수(隋) 지의(智顗)는 호를 지자대사라고 하며, 영천(穎川)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성상을 보면 예를 하고, 스님을 만나면 반드시 절을 하더니, 18세에 과원사(果願寺)에 출가하고 나중에는 남악 사(南岳思: 혜사慧思) 대사를 섬겼다. 홍법의 인연이 다할 즈음에는 섬동(剡東) 석성사(石城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입멸할 무렵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의 목숨이 여기에 있고 다시는 더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오늘 도끼질은 그치고 거문고 줄은 끊어졌다. ” 하더니,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의 제목을 읽고 나서 다시 “48원으로 장엄한 정토는 꽃이 피어있는 못과 보배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 지옥 중생도 잠깐 회개하는 자는 오히려 왕생할 수 있거든,
하물며 계, 정(戒定)을 닦는 자랴. 성도(聖道) 수행의 힘은 그 공이 헛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지랑(智朗)이 “대사께서는 어떤 지위에 증입했으며 여기서 죽어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궁금합니다.” 하고 물었다. “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아니했던들 반드시 육근(六根)을 청정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는 손해가 되어가면서 남을 이롭게 했으므로 단지 오품(五品)밖에 오르지 못했다. 네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물었느냐? 나의 모든 벗들이 관음보살을 모시고 모두 와서 나를 맞이한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삼보(三寶) 의 이름을 부르고 마치 삼매에 들 듯 갔다.
찬(贊) 대사는 도덕이 훌륭했고, 일가의 교관(敎觀)은 만대에 숭앙할 만 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버릴 때 오직 서방에만 돌아가려 했고, 내지 관경(觀經)에 소(疏)를 내고 십의론 (十疑論)을 저술하여, 늘 여기에만 정성을 쏟은 것을 보면 그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의 소(疏)에, 마음을 관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한 것을 보면, 정토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고 말한다.
아!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마음으로 부처를 관하면 부처가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만약 부처가 없다면 마음을 관해 무얼 하겠는가. 정보(正報)가 기왕 그렇다면 의보(依報)도 마찬가지다.’ 하였다. 천태교를 배우는 자는 이 점을 살펴보라. * 교관(敎觀) :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을 말한다.
교상은 석가 일대의 교설을 자기네 종파의 입장에서 분류한 교판(敎判) 곧 이론적인 교리조직이고, 관심은 자기네 종파가 내세운 진리를 관념하는 것으로 그 진리에 따라 실천 수행하는 것을 말함. * 정보(正報), 의보(依報) : 과거세의 업인(業因)에 의해 얻어진 중생의 몸을 정보라 하고,
그 몸이 의지하고 있는 환경을 의보라 한다 (극락정토에 있어 정보는 아미타부처님과 보살님 들이고, 의보는 극락정토의 장엄한 환경을 말함). * 십의론(十疑論) : 천태종의 개조(開祖) 지자대사(538-597)께서 정토왕생에 대한 의심을 열 가지로 나누어 대답한 <정토십의론>을 말함. -
법희(法喜)
수(隋) 법희는 항상 방등참법(方等懺法)을 행하던 이였다. 하루는 꿩 한 마리가 목숨을 변상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신인(神人)이 꾸짖으며 ‘법사는 정토에 왕생하실 분이다. 어떻게 너의 목숨을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나중에 병 중에서 일생의 행업(行業)을 모두 서방에 회향할 것을 발원하고 지심으로 염불하더니, 불보살이 와서 맞이해 가는 것을 보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경에 ‘가령 백천 겁 동안이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연이 만나는 날, 과보를 도로 자신이 받아야 한다.’ 하였으니, 희(喜)인들 어찌 어찌 정토에 태어났다고 하여 꿩의 목숨을 보상하지 않을 수 있으랴만, 다만 한 번 정토에 태어나면 영원히 윤회가 끊어질 것이니, 인연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만약 무생(無生)을 깨닫는다면 중생계에 들어가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니, 그 때 비록 보상이 있다 하더라도 이른바 ‘머리가 하얀 칼 날 위에 닿더라도 마치 봄바람을 치는 것과 같으리.’ 한 경우가 될 것이다. 어찌 범부의 육도와 같을 수 있겠는가.
*방등참법 : 지자대사께서 세운 방등삼매 (方等三昧=반행반좌삼매)를 행하면서, 육근(六根)의 죄장(罪障)을 참회하는 것.
장안(章安)
수(隋) 관정(灌頂)은 장안 사람으로, 지자대사의 제자다. 날마다 염불로 일을 삼더니, 임종에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감돌더니, 제자에게 유계(遺誡)를 마치고서는 홀연히 일어나 합장한 채 아미타불과 두 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문득 숨을 거두었다.
혜성(慧成)
수(隋) 혜성은 지강(枝江)에 살았다. <미타경>을 독송하고 서방관(西方觀)을 닦으면서 30년 동안 자리에 눕지 않았다. 정에 들 때마다 정토의 연화로 된 대좌와 보배로 된 나무를 보곤 하였다. 임종하는 날 저녁, 사람들이 성(成)이 연화에 앉아 가물가물 서쪽을 향하여 가는 꿈을 꾸었다.
도유(道喩)
수(隋) 도유는 개각사(開覺寺)에 살았다. 아미타불을 염하되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성상을 겨우 세 치 정도의 크기로 만들었는데, 후에 정 중에서 부처님이 ‘네가 어찌하여 나의 상을 작게 만들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마음이 크면 크고, 마음이 작으면 작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말을 마치자 성상의 몸이 허공에 가득하더니, ‘너는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하라. 내일 별이 뜰 때 내가 와서 너를 맞이하리라. ’ 하시었다. 그 때가 되자 과연 부처님이 오시고 광명이 방에 가득한 가운데 마침내 앉아서 죽었다.
찬(贊) 마음이 크면 크고, 마음이 작으면 작다 하였다. 그렇다면 마음이 더러우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면 깨끗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喩)는 한 부처님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았고, 앞의 승유나 혜광은 많은 부처님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이것은 하나가 바로 많은 것이요, 많은 것이 바로 하나인 이치로서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순(智舜) 수(隋) 지순은 여산에 들어가 원 법사의 본받았다. 대업(大業) 초에 관경(觀經)을 강의하고는 병이 들었다. 그런데 앵무와 공작이 불, 법, 승을 염하며 미묘한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는, 제자들에게 “ 내가 오늘 왕생한다.” 하고는 편안히 갔다.
혜해(慧海) 수(隋) 혜해는 강도(江都) 안락사(安樂寺)에 살았다. 경론에 밝고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어느날 도전(道銓)이라는 스님이 제주(濟州)에서 오면서 아미타불 상을 가지고 왔다. 미묘하고 아름다워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물으니, “이것은 천축 계두마사(鷄頭摩寺)의 오통(五通)보살이 허공에 올라가 저 안락세계에서 직접 그려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였다.
해(海)는 기쁘고 감격하여 정성을 다해 예경하노라니, 신묘한 광명이 찬연히 빛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성을 다해 모사(模寫)하고, 저 국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후에 대수롭지 않은 병이 들더니, 밤에 문득 일어나 늘상 하듯이 서쪽을 향하여 예하고는 가부좌하여 새벽에 이르러서 죽었다. 단엄한 것이 나치 생시와 같았다.
찬(贊) 극락세계는 여기서 10만억 불토를 지나야 한다고 하니, 역시 허공에 올라가서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닐 것이요, 혜해의 정성이 부처님을 감동시킨 것이리라. 저 도전이라는 분도 어쩌면 정토의 현성(賢聖)일지도 모른다.
법지(法智) 수(隋) 법지는 어려서 출가하였다. 늙어서 빠르고 곧은 길은 염불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내가 들으니, 경에 하나의 길라(吉羅)를 범하더라도 일중겁(一中劫)을 지나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하니, 그 말씀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열 번만 아미타불을 부르면 80억 겁의 생사중죄를 면할 수 있다 하신 말씀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였다.
그 자리에 어떤 자가 “스님은 큰 사견(邪見)입니다. 모두 부처님의 말씀인데 어찌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 하고 반박하였다. 그리하여 국청사(國淸寺)의 도솔대(兜率臺)에서 밤낮으로 염불을 정근하더니, 하루는 문득 스님과 신도들에게 “내가 서방에 왕생해 간다.” 하고는, 밤중에 병 없이 죽었다. 그 때 금색 광명이 수백 리나 뻗쳤으므로 강가의 어부들은 누구나 새벽이 온 줄로 여겼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야 다시 밝아졌으므로 지(智)가 왕생한 줄을 알게 되었다.
찬(贊)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말은 꿀과 같아서 중간이나 가장자리가 모두 달다. 모두 반드시 믿어 가지라.’ 하셨다. 그러므로 악인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은 믿으면서, 한 생각에 서방에 태어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사견이다. 근래 주문을 지니는 자가, 다라니에서 말하는 공덕이 능히 산과 바다를 바꾸고 귀신을 부릴 수 있으며 갖가지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믿으면서, 정토에서 말하는 공덕은 바로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고 삼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못마땅해 하며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도 사견이기는 마찬가지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 길라(吉羅) : 돌길라(突吉羅)의 줄임말. 악작(惡作), 악설(惡說)이라고 번역한다. 비구 250계 중 109 가지가 여기에 포함된다.
선도화상(善導和尙)
당(唐) 선도는 정관(貞觀) 중에 서하(西河) 작(綽: 도작) 선사의 구품도량(九品道場)을 보고 기뻐하며 “이것은 참으로 부처의 경계에 들어갈 수 있는 나루터다. 다른 행업을 닦는 것은 굽고 치우친 길이어서 성취하기 어렵다. 오직 이 법문만이 재빨리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고는 밤낮없이 예송정진(禮誦精進)하고 사중(四衆)을 격발하였다.
방에 들어와서는 호궤(胡跪)한 채 염불하며 힘이 다하지 않으면 쉬지 않았으며, 밖에 나가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정토를 연설하여 30여 년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부엌으로 돌려보냈고, 거친 음식은 자신이 먹었다. 시주가 있으면 <미탸경> 10만 권을 유포하는데 사용했으며,
정토변상(淨土變相) 삼백벽(三百壁)을 그렸고 떨어지고 파손된 것은 그때마다 보수하였다. 끊이지 않고 등불을 밝혔으며, 삼의(三衣)와 물병과 발우를 소지하지 못하게 했고, 길을 갈 때는 여러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게 했다. 부질없이 세상의 일을 담론할까 걱정하신 것이다. 그의 교화를 따르는 작 매우 많았다. <미타경>을 10만에서 50만 번까지 독송한 자도 있었고,
염불을 하루에 만 번에서 10만 번까지 하는 자도 있었다. 염불삼매에 들어 정토에 왕생한 자는 이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이가 “염불한다고 하여 정토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밥하였다. “네가 생각한 만큼 너의 소원이 이루어진다. 한 번 생각하면 한 광명이 입에서 나오고, 열 번이나 혹은 백 번이면 광명도 마찬가지다.”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정토를 권한 게(偈)에 이런 것이 있다.
점점 닭 같은 피부 학 같은 머리칼 갈수록 걸음걸이는 뒤뚱뒤뚱 비록 금옥이 방에 가득한들 어찌 늙고 병듦 면하랴. 그대 갖가지 쾌락 마음대로 누리게만 무상은 끝내 찾아오고 말리 여기 손쉬운 수행법이 있네 단지 ‘나무아미타불’ 점점계피학발 漸漸雞皮鶴髮 간간행보용종 看看行步龍鍾 가사금옥만당 假使金玉滿堂 기면애잔병고 豈免哀殘病苦 임여천반쾌락 任汝千般快樂 무상종시도래 無常終是到來 유유경로수행 惟有徑路修行 단념아미타불 但念阿彌陀佛
찬(贊) 선도화상을 세상에서는 흔히 미타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엄한 수행이나 널리 중생을 이익케 한 것을 보면, 미타가 아니면 필시 관음이나 보현의 무리일 것이다. 아! 거룩하구나.
지흠(智欽)
당(唐) 지흠은 선업(禪業)을 익혔던 분이기도 하지만, 만오천 부처님의 명호를 백 번이나 예념(禮念)했던 분이기도 하다. 나중에 유주(柳州) 아육왕탑 앞에서 팔 하나를 태우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제자 승호(僧護)가 한밤중에 뜰 앞에 기이한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고, '누가 횃불을 들고 있는가?' 하고 물으니,
공중에서 '흠 선사를 맞이해 가는 길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護)가 급히 창문을 열고 보니, 부처님 몸의 광명과 꽃으로 장식한 깃발과 보배의 일산이 허공에 가득한 가운데, 흠이 부처님을 따라 천천히 가고 있었다.
찬(贊) 몸을 태우거나 팔을 태우는 일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종종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욕보살의 일이지 초심자의 경계는 아니다. 서방을 찾는 자는 반드시 흠 공의 선을 익히고 부처님께 예한 일을 배울 일이지, 굳이 그의 팔을 태운 일을 본받을 것은 아니다. 만약 팔을 태우는 정성이나 용기로 다생의 악습을 다스린다면 태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옛말에 '유하혜(柳下惠)나 잘 배워라!' 한 말이 그럴 듯 하지 않은가.
오회법사(五會法師)
당(唐) 법조(法照)는 대력(大曆) 2년[767]부터 형주(衡州) 운봉사(雲峯寺)에 살았다. 그 때 숭상했던 일은 자비와 인욕과 계행과 선정이었다. 일찍이 발우 속에서, 오색구름이 서려있는 곳에 대성죽림사(大聖竹林寺)라는 편액이 걸린 범찰(梵刹)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오대산에 가서 기이한 광명이 서려있는 것을 보았고 과연 죽림사도 그 곳에 있었다. 강당에 들어가니 많은 대중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문수는 서편에, 보현은 오른쪽에서 법을 설하고 있었다. 조(照)는 예하고 “말세의 범부가 어떤 법을 닦아야 하리까?” 하고 물었다 문수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수행문 가운데 염불만한 것이 없다.
나도 염불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었다.” 하였다. 또 물었다. “어떻게 염(念)하리까?” “이 세계의 서쪽에 아미타불이 계시는데, 저 부처님의 원력은 불가사의하다. 너의 생각(念)을 영속하여 끊이지 않게 하라.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나중 섣달 초 하루에 화엄원(華嚴院)의 정업도량(淨業道場)에서 두 보살의 왕생할 것이라는 수기를 기억하고 일심으로 염불하고 있노라니,
홀연히 범승(梵僧)인 불타파리(佛陀波利)가 나타나서 ‘너의 화대(花臺)가 이미 마련되었다. 3년 후에 꽃이 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때가 되자 대중에게 “나는 간다.” 하고 고별하고, 단정히 앉아 갔다. 스님은 일찍이 호동사(湖東寺)에서 다섯 차례의 염불법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상서로운 구름과 보배로 꾸며진 누각을 감응했으며,
아미타불과 두 보살의 몸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기도 하였다. 또한 병주(幷州)에서 다섯 차례의 염불법회를 열었는데, 대종황제(代宗皇帝)의 궁중에 염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감응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신하를 보내 찾아보고 스님의 교화가 성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조칙으로 서울에 들어가 궁인(宮人)들에게 염불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역시 다섯 차례였다. 그래서 오회법사(五會法師)라고 부르게 되었다.
찬(贊) 감응을 먼저 꿈꾸고 경계를 나중에 보았으니, 참으로 분명히 믿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모든 수행문 가운데 염불만한 것이 없다고 한 문수의 가르침을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3년 전에 화대(花臺)가 미리 마련되었다는 것은, 소위 신심을 일으키자 말자 연꽃의 꽃술에 이름이 새겨지고, 그 부지런하고 게으른 정도에 따라 활짝 피기도 하고 시들기도 하는 것이니,
역시 믿을 만하지 않은가. 아! 그윽히 신령한 자취를 나타냈고 미리 성인의 수기를 받았으며, 다섯 차례의 교화를 행하여 그 음성이 궁중에까지 사무쳤으니, 어찌 자비의 원력을 타고 태어난 분이 아니겠는가.
* 오회법사 법조스님(?-772)은 무량수경에 근거하여 오회염불을 창시하여 오회법사찬 (오회법사찬)이란 저술을 남긴 분입니다. * 일체종지(一切種智) : 부처님이 지니고 있는 지혜. 모든 존재에 대하여 평등의 처지에서 다시 차별의 상(相)을 세밀히 아는 지혜.
대암(臺岩) 강법사(康法師)
당(唐) 소장(小康)은 진운(縉雲) 선도(仙都)사람으로, 나이 열다섯에 법화와 능엄에 통달하였다. 정원(貞元) 때 낙양(洛陽) 백마사(白馬寺)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전각 속의 글자가 방광하는 것을 보고 찾아보니, 선도화상의 서방화도문(西方化導文)이었다. 스님이 ‘만약 정토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방강하소서.’ 하고 축원했더니, 말을 마치자 광명이 다시 찬연하였다.
스님은 ‘겁석(劫石)은 갈아 없앨 수 있을망정 나의 원력은 바꾸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장안(長安) 광명사(光明寺)로 가서 선도화상 영당(影堂)에 예배하노라니, 홀연히 영상(影像)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면서 ‘ 너는 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널리 중생들을 교화하라. 후일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안양에 왕생할 것이다.’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신정(新定)으로 가서 돈을 구걸하여 어린애들을 달래어 염불하게 하였다.
염불 한 번 부르는데 일문(一文)씩의 돈을 나눠주었다. 1년 남짓되자 어린이 어른, 귀한 이, 빈천한 자를 막론하고 스님을 만나는 자는 누구나 아미타불을 불렀다. 염불하는 소리가 거리마다 울려퍼졌다. 또한 오룡산(烏龍山)에 정토도량을 세우고 자리에 올라 큰소리로 부처님을 부르니, 한 번 부르면 한 부처님이 입에서 나왔고, 열 번 부르면 열 부처님이 나왔다.
대중들이 모두 목격한 사실이었다. 그리고는 “너희들 중에 부처님을 본 자는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 대중이 수천 명이었으나 보지 못한 자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책망하고 마음 아파하며 더욱 정진에 힘썼다. 나중 21년 10월 3일,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부촉하기를
“반드시 정토에는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염부제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라. 너희들이 나의 광명을 본다면 진정한 나의 제자다 .” 하고는, 몇 줄기의 기이한 광명을 내고는 죽었다. 대자암(臺子岩)에 탑을 세웠으므로 대암법사(臺岩法師)라고 불렀다.
찬(贊) 어떤 이는 부처님이 입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요괴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것이다. 아! 세존께서는 술 취한 코끼리를 만났을 때, 다섯 손가락 끝에서 금빛 찬란한 사자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내가 어찌 코끼리를 막을 생각을 내었겠느냐.
나의 한없는 기간동안 자비와 인욕을 수행한 힘으로 자연히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나도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였다. 지금 강(康) 공의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도 역시 한없는 기간동안 부처님께 귀경한 소치일 뿐이다. 어찌 괴이쩍게 생각할 일이랴.
세상에는 요술장이들이 캄캄한 밤에 가만히 앉아 향 연기 위로 부처님이 나타나는 것을 관하면 감응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것과 삿되고 올바른 것을 비교해 보라. 실로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일 것이다. 정업을 닦는 자를 위하여 불가불 밝혀두는 바이다.
자각(自覺)
당(唐) 자각은 진주(鎭州)에 살았다. 항상 발원하기를 ‘원하옵건대 관음을 인해 아미타불을 친견케 하소서.’ 하였다. 그리고는 관음상을 주성(鑄成)하였는데, 높이가 49자 였다. 완성되는 날 축원을 하고 있노라니, 삼경(三更)에 홀연히 금색 광명 두 줄기가 뻗치더니,
아미타불이 광명 속에서 내려오시고 두 보살이 좌우에서 따르고 있었다. 부처님이 손을 드리워 각(覺)의 머리를 어루만지시며 ‘ 나의 발원을 지켜 결코 어기지 않노니, 우선 중생을 이익케 하노라. 태어날 보배의 못은 어떤 것도 발원만한 것이 없나니라.’ 하였다. 나중 11년 7월 보름 저녁에 차림새가 천주(天主)와 같은 어떤 사람이 구름 사이에서 몸을 나타내어 각(覺)에게 말하기를 ‘안양의 시기가 이르렀다.’ 하자, 즉시 관음상 앞에서 가부하고 앉아 죽었다.
선주(善冑)
당(唐) 선주는 영주(瀛州) 사람이다. 무덕(武德) 3년[621]에 병이 위독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 나는 일생 올바른 믿음을 가졌으므로 정토에 태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지는 않는다.” 하고는 방을 치우고 향을 피우게 하였다. 그러다 병이 깊어 다시 쓰러졌다가 갑자기 일어나 앉아 합장한 채 시자에게
“세존을 맞이해 자리에 앉게 해 드려라.” 하고는, 스스로 잘못을 말씀드리더니, 얼마 후 “세존께서는 가셨다.” 하며 몸을 굽혀 전송하듯 하는 몸짓을 하였다. 그리고는 자리에 누워 “조금 전에 아미타불께서 오셨다. 너희들도 보았느냐? 오래지 않아 나도 갈 것이다. ” 하더니, 잠시 후에 죽었다.
신소(神素)
당(唐) 신소는 안읍(安邑) 명조(鳴條) 사람이다 처음에는 강연으로 업을 삼았으나, 도걸(道傑), 제명(齊名)과 함께 일생 서방을 생각하는 것으로 행업을 삼게 되었다. 정관(貞觀) 2년[628]에 대중이 누암(樓岩)을 주관해 줄 것을 간청하여 그곳에 살았다. 17년 2월 23일에 대중을 불러 고별하고,
얼굴빛을 엄정히 하고 가부좌하고 앉아 관음보문품(觀音普門品)을 두 번 외게 한 후, 자신이 아미타불을 부르고 대중이 따라하게 하더니, 한밤중이 되어서 단정히 앉아 편안히 갔다. 살갗은 비록 변하였으나 앉아있는 모습은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혜선(慧璿)
당(唐) 혜선은 양천(襄川)에서 출가하고, 일찍이 삼론(三論)과 대경(大經: 화엄경)을 널리 공부한 적도 있었다. 정관(貞觀) 23년[649] 4월 8일 밤에 산신이 ‘ 법사께서는 오래지 않아 서방에 왕생하실 것입니다. ’ 하더니, 7월 14일, <우란분경(盂蘭盆經)>을 강설하여 끝마치고는 손을 털면서 “살아서는 시주의 은혜를 입었으나, 오늘은 모두 보시해야겠다. 조그마한 물건 하나라도 쓸만한 것들은 모두 시방의 가난한 걸인이나 수도자들에게 주어라. ” 하고는, 말을 마치자 법좌에서 죽었다.
찬(贊) 옛날 생(生) 공이 숨을 거두려할 때 대중들이 보니, 불자(拂子)가 땅에 떨어지면서 탁자에 기댄 채 마치 선정에 든 듯 죽었다 하더니, 선(璿)의 일도 역시 이와 유사하다. 아! 평생의 도력이 아니었다면 임종에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회옥(懷玉)
당(唐) 회옥은 태주(台州) 사람이다. 남루한 옷과 한 끼의 밥으로 항상 앉아 있기만 하고 눕지 않은 채 <미타경> 30만 번을 독송했고, 하루에 부처님 명호 5만 번을 불렀다. 천보(天寶) 원년[742], 불보살이 허공에 가득한데, 한 사람이 은대(銀臺)를 가지고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
옥이 “내가 일생 염불했던 것은 금대(金臺)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찌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하니, 성중(聖衆)이 마침내 사라졌다. 옥(玉)은 더욱 정진을 배가하였다. 21일 후에 전에 대좌(臺座)를 가져왔던 자가 다시 와서 “스님께서는 정진의 힘으로 상품(上品)에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부하여 앉아 기다리십시오.” 하였다. 3일 후에 기이한 광명이 방에 가득하더니 ,
제자들에게 “나는 정토에 왕생한다. ” 하고는, 미소를 머금고 죽었다. 군(郡)의 태수 단(段) 공이 이렇게 게(偈)를 지어 찬탄한 것이 있다. 우리 스님 한 생각에 초지(初地)에 오르사 불국음악 두 번이나 들려왔네 오직 문 앞의 늙은 홰나무 가지를 늘어뜨려 금대를 막네. 아사일념등초지 我師一念登初地 불국생가량도래 佛國笙歌兩度來 유유문전고괴수 惟有門前古槐樹 지저지위괘금대 枝低只爲罣金臺
찬(贊) 어떤 이가 ‘은대가 왔다가 사라지고, 금대를 원하자 다시 왔다 하니, 어찌 과보가 일정함이 없이 사람이 선택하는 대로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만법은 마음을 따라 감응한다(萬法由心隨感而應).’는 이치이다. 화거(火車: 중생을 지옥으로 데려간다는 불 수레) 가 이미 나타났더라도
열 번의 염불로 왕생한 일도 있고, 천상의 대중들이 와서 맞이했으나 마음을 맹서하고 정토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이렇게 선악과 범성(善惡聖凡)은 서로 막혀 있는 것이지만, 잠깐동안에 업(業)을 바꿀 수 있었다. 더욱이 금과 은 같은 미세한 차이랴.
도앙(道昂)
당(唐) 도앙은 위군(魏郡) 사람이다. 영유법사(靈裕法師)를 따라 늘 한능산사 (寒陵山寺)에서 화엄 지론(華嚴地論)을 강의하여, 고찰이 신중하고 넓었다. 마음에 서방을 결심하고 안양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더니, 나중에 스스로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미리 8월로 기한을 잡았으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8월 초하룻날이 되었으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재(齋) 때가 되었는가를 묻고는, 법상에 올라가 앉았다. 몸에서는 위엄이 감돌고 향로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솟았다. 사중(四衆)을 이끌어 보살계(菩薩戒)를 설하니, 말씀이 간절하여 듣는 자들은 마음이 섬뜩한 지경이었다. 앙(昂)이 눈울 들어 바라보니, 천상의 대중이 어지럽고 음악이 요란한 것을 보고, 대중에게 “도솔천(兜率天)이 나를 맞이한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생사의 근본일 뿐, 본래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늘 마음에 정토를 기원하였으나, 어찌하여 나의 정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하니, 말을 마치자 하늘의 음악이 사라지고 서방의 향기로운 꽃과 음악이 구름처럼 울려퍼지더니, 날아 내려와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것은 온 대중이 모두 목격한 사실이었다. 그러자 앙(昂)이 “지금 서방의 영상(靈相)이 와서 나를 맞이한다. 원하는 바는 왕생일 뿐이다.” 하더니, 향로를 잡은 손이 미끄러지면서 법상에 앉은 채 죽었다. 온 천하가 경탄해 마지않았다.
찬(贊) 천궁(天宮)을 물리치고 정토를 찾은 이는 , 앞에는 광(光) 공이 있고, 뒤에는 홍(洪) 공과 앙(昂), 세 사람이 있다. 그러나 때가 눈 앞에 다가왔는데도 능히 사중을 계율로 인도하다 법상에 기댄 채 죽을 수 있었고, 영상(靈相)이 찬란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했던 일은, 아! 기이한 일이다.
도작(道綽) 당(唐) 도작은 병주(幷州) 문수(汶水) 사람이다. 열네 살에 출가하여 경론을 익히다, 만년에는 찬(瓚) 선사를 섬기며 선을 배우기도 했고, 또한 신란(神鸞: 담란)의 정토업을 독실히 닦기도 하였다. 어떤 스님이 정(定) 중에서 작(綽)의 염주가 칠보대산(七寶大山) 만한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평소에 대중을 위해 <무량수관경(無量壽觀經)> 을 이백여 번 설했으므로, 사람들이 제각기 염주를 돌리며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게 되었다. 어떤 때 법석을 흩으면 임곡(林谷)에 애원하는 소리가 가득했고, 육시예경(六時禮敬)을 처음부터 거른 적이 없었으며,
염불은 하루에 7만 번으로 한정을 정하였다. 정관(貞觀) 2년[628] 4월 8일에 죽었다. 부음을 듣고 달려온 자들이 산사를 가득 메웠는데, 화불(化佛)이 공중에 머물고 있고 하늘꽃이 내려와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실상(實相)
당(唐) 실상은 옹주(雍州) 장안(長安) 사람이다. 19세에 출가하여 두타행각과 육시예참을 40 년이 가깝도록 행하였다. 밤에는 <미타경> 일곱 번을 독송하고 6만 번의 염불을 하였다. 병이 깊어 일어날 수 없게 된 지경이 되었으나 독송과 염불을 버리지 않더니,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부촉하기를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염불이다. 헛되이 세상을 보내지 말라. 서방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 나의 시신은 불태워 흩어버리고 탑을 세우거나 비석을 새기려 애쓰지 말라.” 하고는 죽었다.
찬(贊) 옥(玉)은 하루 5만 번의 염불을, 작(綽)은 7만, 상(相)은 지금 6만 번의 염불을 하였다. 세 늙은이가 모두 고승이었으나 날마다 일정한 수의 염불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것은 어리석은 아낙네들이나 할 짓이다.’ 하고는 비웃는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안(惟岸)
당(唐) 유안은 병주(幷州) 사람이다. 정토를 참으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기고 방등참(方等懺)을 행하며 고행정진하여 쉬지 않았다. 약간의 병이 들자 관음, 세지 두 보살이 공중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안(岸)은 화공 (畵工)을 불렀으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두 사람이 나타나 스스로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 말하고, 다 그리고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안(岸)이 제자들에게 고별하기를 “나는 지금 왕생하려 한다. 누가 같이 갈 자가 없느냐?” 하자, 어떤 동자가 같이 가기를 원하였다. 안(岸)이 부모에게 고별하게 하니, 부모는 장난인줄로 여기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도량에 들어가 염불하고 죽었다. 안(岸)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얘야 어찌하여 나보다 먼저 간단 말이냐?” 하였다. 그리고서 붓을 들어 이렇게 두 보살을 찬탄하고는 영원히 갔다. 원하옵노니 자비의 손으로 이끌어 서행(西行)을 함께 하소서 원이자비수 願以慈悲手 제장공서행 提獎共西行
찬(贊) 안(岸)의 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거니와, 저 동자는 오랫동안 정업을 닦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신이(神異)하게 갈 수 있을까? 아! 그는 열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숙세에 깊은 선근을 심은 자이리라.
정업을 닦는 자가 혹시 금생의 몸으로는 왕생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을 보면 스스로 위안이 되지 않겠는가. 방등참(方等懺) : 천태 지자대사께서 세우신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를 말함. 참회하여 죄업을 소멸하기 위한 수행법. 일정 기간은 행도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일정 기간은 가부좌하고 앉아서 수행함.
승연(僧衍)
당(唐) 승연은 병주(幷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미륵보살을 염(念)하면서 내원(內院)에 상생(上生)할 것을 발원했으나, 나이 90에 가서야 도작(道綽)선사를 만나 정토를 듣고 비로소 염불로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날마다 천 배의 절을 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제자들에게 고별하기를
“아미타불이 나에게 향기로운 옷을 주시고, 관음, 세지가 나에게 보배의 손을 보여 주셨다. 나는 이제 간다.” 하고는 죽었다. 그 때 개방(啓芳), 원과(圓果) 두 법사가 이 사실을 목격하고, 오진사(悟眞寺)에서 관음보살의 손에 들고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으며 “만약 정토와 인연이 있으면 7일 동안 시들지 마소서.” 하고 발원하였더니 그 때가 지나도록 더욱 무성하였다.
방(芳)과 과(果)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밤낮으로 관념(觀念)을 쉬지 않았다. 어느날 홀연히 칠보로 된 못에 이르러 대보(大寶)의 장막 속으로 들어갔더니, 부처님과 두 보살이 보화(寶華)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데, 광명이 휘황하였다. 방과 과가 예했더니 부처님이 ‘나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는 누구나 나의 국토에 왕생하리라.’ 하시는 것을 보았고, 또한 석가세존과 문수보살이 하늘음성으로 정토를 찬탄하시는 말씀도 들었다.
또 보니, 세 길의 보배로 된 계단이 있는데, 하나는 세속인이 있었고, 두 번째는 스님과 세속인이 반반씩 섞여 있었으며, 세 번째의 것에는 스님들만 있었다. 부처님이 ‘이들은 모두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했던 이들로서 이 국토에 왕생하였다.’ 하였다. 5일 후에 홀연히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는 “종소리는 우리들을 위해서다.” 하고, 함께 죽었다.
찬(贊) 나이 90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업을 닦아서도 오히려 왕생할 수 있었다. 젊은이는 어떨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저 방(芳)과 과(果)도 소문만 듣고 마음을 내어 마침내 신비한 감응을 얻었다. 어진 이를 보고 같이 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회감(懷感)
당(唐) 회감은 장안 천복사(千福寺)에 살았다. 염불도량에 들어갔으나 3. 7일 동안 상서를 보지 못하자, 스스로 업장이 두터운 것을 한탄하며 음식을 끊고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 때 선도(善導)대사가 허락하지 않고 3년 동안 더욱 정성을 다해 염불하게 하여, 가르친 대로 하여 감응을 얻었다.
나중에 부처님의 금색옥호(金色玉毫)를 보고 염불삼매를 얻어 <결의론(決疑論):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을 말함> 7권을 지었다. 임종에 합장한 채 “ 부처님이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죽었다.
찬(贊) 속담에 ‘정성을 기울이면 절구공으로도 바늘을 만들 수 있다.’ 하더니,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다. 한계를 느끼고 자신을 원망하는 자는 생각해 볼 일이다.
덕미(德美)
당(唐) 덕미 법사는 회창사(會昌寺)에서 서원(西院)에 참회하는 집을 짓고 반주삼매(般舟三昧)를 행하여 여름내 앉거나 눕지 않았다. 어떤 때는 입의 허물을 막기 위해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불경(不輕: 남을 업신여기지 않음) 을 행하여 아무에게나 절하고 예하였다.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세속의 생각을 끊었으며, 서방을 전념하여 입으로 미타를 부르며 죽을 때까지 쉬지 않았다. 나중에 잠깐 방에 들어가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편안히 죽었다.
찬(贊) 세속의 생각을 끊으면 더러운 인연이 다할 것이요, 서방을 전념하면 깨끗한 인연이 이루어질 것이다. 옛 성인의 말씀에 ‘애욕이 깊지 않으면 사바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요, 생각이 전일하지 않으면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 하였다. 진실하다, 이 말씀이여! * 반주삼매(般舟三昧): 반주는 불립(佛立)이라고 번역한다. 부처님이 공중에 서 있는 것을 관하여 성취한 삼매.
변재(辯才) 당(唐) 변재는 양양(襄陽) 사람이었다. 남몰래 정토를 닦으면서도 20년 동안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 다만 호융(護戎)인 임(任) 공이 이 일을 알고는 ‘재(才)가 반드시 10년 후에 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하였다. 하루는 제자를 임 공에게 보내어 ‘전에 정한 기한이 이미 되었습니다.’ 하였더니, 임 공이 오자 “나는 갑니다 .” 하고는 가부좌한 채 죽었다. 선악(仙樂)이 서쪽에서 들려오고 기이한 향기가 흩어지는 것을 대중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수홍(壽洪)
당(唐) 수홍은 분양(汾陽) 사람이다. 항상 염불하며 정토를 간구하더니, 죽을 때에 이르러 도솔천의 동자가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 “나는 서방에 왕생하려 한다. 천상에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대중에게 염불하게 하더니, 문득 “부처님이 서쪽에서 오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법상(法祥)
당(唐) 법상은 양도(楊都) 대흫국사 (大興國寺)에 살면서 30년 동안 안양의 업을 닦으며 모든 선행은 반드시 서방에 회향하였다. 병이 들었을 때 제자들이 상(祥)의 염불 소리가 더욱 우렁찬 것을 들었고, 또한 방의 서쪽 벽에 거울을 매단 듯한 광명이 비치면서 정토의 광경이 나타났으며, 빈가(頻伽: 극락조. 가릉빈가)가 나래짓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편안히 죽었다.
찬(贊) 상(祥)은 빈가를 보았고, 앞의 지순(智舜)은 앵무와 공작을 보았다. 부처님을 친견하지 않고 새들을 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경(아미타경)에 ‘이 모든 새들은 아미타불이 변화하여 만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정보(正報)와 의보(依報)가 모두 정토의 모양인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대행(大行)
당(唐) 대행은 태산(泰山)에 살면서 3년 동안 보현참법(普賢懺法)을 닦아 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감응하였다. 늙어서 대장각(大藏閣)에 들어가 발원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골라 <미타경>을 얻어 밤낮으로 독송하였다. 3. 7일이 되는 날, 유리의 땅 위에 부처님과 두 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보았다.
희종황제(僖宗皇帝)가 그 사실을 듣고 궐내에 불러 상정진보살(常精進菩薩)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1년 후 유리의 땅이 다시 나타나더니, 그날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보름동안 흩어지지 않았고 육신도 썩지 않았다.
찬(贊) 유리의 땅은 위와 아래가 내비치는 곳으로, 청정한 덕으로 감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혜영(慧永)과 승연(僧衍)은 기이한 향기가 7일 동안 흩어지지 않았고, 혜통(慧通)은 3일, 행(行)은 지금 보름동안 감돌았다고 하였다. 범행(梵行)이 더욱 청정했던 소치가 아니겠는가.
명첨(明瞻)
당(唐) 명첨은 늙어서야 안양에 뜻을 둔 이다. 어떤 이가 이미 늦었다고 놀리자 “열 번의 염불만으로도 공을 이루어 부처님을 친견한 일도 있다. 내가 무엇을 염려하랴. ” 하고 대꾸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자, 흥교사(興敎寺)에서 재를 베풀어 스님과 신도들과 고별하게 되었는데,
그 때 복야(僕射: 당나라 때 재상벼슬을 이름) 인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해(杜如海)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오후가 되자 위의를 단정히 하고 일심으로 염불하다, 문득 “부처님이 오셨다. 두 보살임도 함께 오셨다.” 하고는, 몸을 발돋음하여 합장한 채 죽었다.
영명 수(永明壽) 선사
전씨오월(錢氏吳越: 북송[北宋]을 말함)의 연수(延壽)는 항주 여항(餘杭) 사람이다. 사명취암(四明翠岩) 선사에게서 출가하였고, 천태 소(天台韶) 국사에게 참예하여 심요(心要)를 발명하였다. 일찍이 법화참(法華懺)을 행하다가 밤중에 보현의 연꽃이 홀연히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숙세의 원력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지자암(智者岩)에 올라가 두 개의 제비를 만들어 하루는 일심으로 선정을 익히고 하루는 만행으로 정토를 닦으면서 지심으로 기도하여 일곱 번을 뽑아 모두 정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정토를 닦게 된 것이다.
나중에 영명(永明)에 살면서 하루에 108 가지의 일을 정해놓고 실행했으며, 밤에는 별봉(別峯)에 올라가 길을 걸으면서 염불하니, 곁에 사람들이 때때로 하늘 음악을 듣곤 하였다. 충의왕(忠懿王)이 찬탄하기를 ‘자고로 서방을 구하는 자들 중에 이와같이 간절한 자는 아직 없었다.’ 하고, 서방향엄전 (西方香嚴殿)을 세워 그의 뜻을 이루어 주었다.
영명에 있은 지 15년 동안 제자 천칠백 명이 한상 대중과 함께 보살계를 받았고, 귀신에게 시식(施食)을 베풀었으며 모든 생명을 방생하면서 이런 일들을 모두 정토를 장엄하는데 회향하였다. 그 때 모두 미륵의 하생(下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개보(開寶) 8년[975] 2월 26일, 새벽에 일어나 향을 피워 대중에게 고별하고 가부좌하고 죽었다.
후에 어떤 스님이 임천(臨川)에서 와서 몇 해가 되도록 그의 탑을 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내가 병이 들어 명부에 들어갔습니다. 전각 왼편에 어떤 스님의 상(像)을 모셔놓고 왕이 공손히 예경하고 공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가만히 물어보니 ‘이 분은 항주의 영명 수 선사입니다.
대체로 죽은 자는 모두 명부를 거치게 마련입니다만 이 스님은 이미 바로 서방의 상상품(上上品)에 태어났으므로 왕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예경하게 된 것입니다.’하였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찬(贊) 영명은 선법(禪法)을 얻었으면서 마음에 정토를 새겨 두었으니,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넓고 큰 행원은 그 광명이 만세에까지 비칠 것이다. 그 분은 하생한 미륵이실까? 다시 태어난 선도(善導)이실까?
지통(志通)
석진(石晋: 후진後晋을 말함)의 지통은 봉상(鳳翔) 사람이다. 지자대사의 <정토의식(淨土儀式)>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이로부터 서쪽을 향하여서는 침도 뱉지 않고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으면서 전심으로 염불하였다. 나중에 백학과 공작이 무리를 지어 서쪽에서 날아오고,
또한 연꽃이 눈앞에서 피었다 지는 것을 보고는 “백학과 공작은 정토의 경계요, 연꽃의 빛나는 모양은 태어날 곳이다. 정토가 나타났다.” 하고는, 일어나 부처님께 예하고 죽었다. 다비를 할 적에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불더미 위에 감돌았고, 사리가 온 몸에 비늘처럼 얽혀있었다.
찬(贊)
반드시 서쪽을 피하여 침을 뱉았고, 앉아있을 때는 반드시 서쪽을 행하였다 하니, 정성이 이와 같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 요즘은 경솔하고 천박한 마음으로 왕생을 바라고 있으나,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는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 아! 낙일(落日)을 관하게 하신 분명한 경문도 있고,
지자대사는 나면서부터 서쪽을 향하여 가부하고 앉았으며, 내지 정업을 닦았던 제현들도 서쪽을 향하여 앉아서 죽었다. 집착하지 않고 그럴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탐착해 경계를 혼탁하게 하면서 일생을 그렁저렁 보내거나, 겨우 정토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집착할까를 걱정하고 있으니,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
오은(唔恩) 송
(宋) 오은은 고소(姑蘇) 상숙(常熟) 사람이다. 나이 열셋에 <미타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 마침내 부모님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였다. 종일 한 끼의 음식만을 먹고 항상 의발(衣鉢)을 몸에 지녔으며, 재물을 모우지 않았고, 누울 적에는 반드시 우협(右脅)으로 하고 앉을 적에는 반드시 가부좌를 하였다. 포살(布薩)할 적마다 슬피 울기를 마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널리 서방의 정업과 일승 (一乘)의 원지(圓旨)를 가르쳤다. 누가 심기가 투합하지 않은데 대해 의심하는 자가 있으면, 함께 독고(毒鼓)의 인연을 지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옹희(雍熙) 2년[985] 8월 초하루, 밤에 백광(白光)이 우물 속에서 비치는 것을 보고 문인에게 “나는 가야겠다.” 하고는, 음식을 끊고 말을 금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꿈에 한 사문이 금화로에 향을 사루어 들고는 그의 방을 세 번 돌면서 스스로 ‘관정(灌頂)이 여기와서 맞이한다.’ 하였다. 꿈에서 깨어 문인을 불러, 가보니 그때까지 기이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25일, <지관지귀<止觀指歸)>와 <관심의(觀心義)> 를 설해 마치고는 단정히 앉아 죽었다. 사람들이 하늘음악이 공중에서 쟁쟁하게 울리면서 점점 서쪽을 향하여 사라지는 것을 들었다.
찬(贊) 재물과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은 청렴하고 결백한 마음이요, 앉고 눕는 것을 구차하게 하지 않은 것은 신중한 마음이며, 의발을 항상 몸에 지닌 것은 지중한 마음이며, 포살할 적마다 눈물을 흘린 것은 성실한 마음이다 이 네 가지의 마음은 모두 정토의 인(因)으로서, 그가 왕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사람들을 가르칠 적마다 서방의 정업과 일승의 원교를 동시에 베푼 것은, 깊이 염불문에 들어가는 은혜를 베푼 것이다. * 포살(布薩): 장정(長淨) 또는 설계(說戒)라고 번역한다. 동일지역 내의 비구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지나간 반 달간의 행위를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고백 참회하는 의식. * 독고(毒鼓): 독을 바른 북이라는 뜻. 이 북소리는 사람을 죽일 수 있으므로 <열반경>에서 말한 불성(佛性)이나 상주(常住)의 소리는 중생의 오역(五逆)이나 십악(十惡)을 죽여 불법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비유함. * 관정(灌頂) : 천태 지자대사의 수제자. 염불 왕생하신 분.
원정 상(圓淨常) 법사
송(宋) 성상(省常)은 전당(錢塘) 사람으로 일곱 살에 출가하였다. 순화(湻化) 중에 남소경(南昭慶)에 살 적에 여산의 가풍을 사모하여, 피를 내어 <화엄경> 정행품(淨行品)을 쓰고, 연사(蓮社)라는 이름을 바꾸어 정행(淨行)이라 하고, 사대부로서 그 외에 참예한 자를 정행제자(淨行弟子)라고 불렀다.
그 중, 왕 문정공(王文正公) 단(旦)이 수석으로, 한 때는 공경(公卿)과 백목(佰牧)이 120 명, 비구가 천여 명이나 될 때도 있었다. 한림(翰林)인 소 역간(蘇易簡)이 정행품 서(序)를 지어 ‘나도 마땅히 머리카락을 펴 그의 발을 받들고, 살을 베어 그의 법을 간청해도 오히려 부족할 것인데,
하물며 변변찮은 문장과 천박한 학문으로 이를 아까워 하랴.’ 하기도 하였다. 천희(天禧) 4년[1020] 정월 12일, 단정히 앉아 염불하더니, 큰 소리로 “부처님이 오셨다.” 하고는, 조용히 죽었다.
찬(贊) 원 공을 위시하여 선도(善導), 남악(南嶽), 오회(五會), 영명(永明), 대암(臺岩)과 끝에 가서 법사(성상)를 연사(蓮社)의 칠조(七祖)라 부르며, 교화의 흥성함은 옛이나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의 수행을 살펴보면,
애쓰고 노력하기를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남에게 권할 줄만 알았지 자신이 실행할 줄은 모른다. 선배들에게 부합하기에 아득히 먼일이 아니겠는가.
정관(淨觀)
(宋) 정관은 가화(嘉禾) 적광암(寂光庵)에 살면서 정토참법(淨土懺法)을 10여 년이나 닦았다. 어느날 제자에게 “나는 27일 후에 갈 것이다. ” 하더니, 그 때가 되자 2일 전에 붉은 연꽃을 보았고, 다음날 또 노란 연화가 땅에 가득한데, 꽃마다 화생(化生)의 어린애가 꽃잎 속에 앉아 있는데 선대(仙帶)를 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3일째 되는 날 감실(龕室)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대중에게 염불하라 하고 잠시 후에 죽었다.
찬(贊) 염불하는 사람은 미리 때가 된 것을 안다. 이것은 사바의 인연은 다하고 정토의 인연이 성숙되어 자연히 성경(聖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원 공은 7일 전에, 지금 관(觀)은 27일 전과 같은 따위다. 세상 사람들은 살아서는 실덕(實德)이 없었으면서 죽을 때에 다달아 이를 흉내내어 갖은 수단으로 꾸며 식자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심지어 산채 불에 뛰어들어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귀신이나 사마(邪魔)에 붙거나 악도에 떨어질 줄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연민스런 일이다. 만약 아무 안목도 없는 무리들에게 이를 부러워하여 본받게 한다면 그 피해는 더욱 막대하다. 내가 왕생한 사례들을 모아보니, 한 사람도 산채 그 몸을 불태운 자는 없었다. 지혜로운 자는 이것을 보고 널리 세상에 고하여 모든 어리석은 자를 구해주기 바란다.
자운 참주(慈雲懺主)
송(宋) 준식(遵式)은 태주(台州) 임해현(臨海縣) 사람이다. 학행이 고상하여 이름이 양절(兩浙)에 자자하였다. 안양에만 뜻을 두어 일찍이 반주삼매를 행하여 90일 동안 피를 쏟도록 애썼으며, 도량에 들어가서는 두 발의 살갗이 터졌으나 죽음으로 스스로 맹서했다.
꿈에 관음보살이 손가락을 그의 입 속에 넣어 몇 마리의 벌레를 끄집어 냈으며, 또한 손가락 끝에서 감로를 꺼내 그의 입에 부어 넣었다. 꿈을 깨자 몸과 마음이 가뿐한 가운데 병이 다 나아있었다. <정토결의행원(淨土決疑行願)>과 <정토참법(淨土懺法)>을 지어 세상에 남겼다.
천성(天聖) 때, 죽는 날 향을 사루어 부처님께 예하고 ‘제불께서 증명하사 안양에 왕생케 하소서.’ 하고 발원하고, 밤이 되어 앉아서 죽었다. 사람들이 큰 별이 영축봉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당시에 자운참주라 불렀다.
찬(贊) 극진히 참법(懺法)을 애쓰고 자신이 행하면서 만세에까지 법을 남긴 이는 고금에 한 사람일 따름이다. 심지어 보배의 손으로 벌레를 끄집어내고 감로를 입에 부어넣은 일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그런 감응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양절(兩浙):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절동은 전단강 이남. 절서는 전단강 이북. * 준식(遵式. 964-1032): 자운 준식 스님의 스승은 고려 전기의 스님으로 천태종 16대 조사이신 보운 의통(寶雲義通. 927-988) 이십니다. 의통스님은 항상 사람들을 부를 때 ‘ 고향 사람(鄕人)’이라 했는데, 그 까닭을 물으면, ‘나는 극락정토를 고향으로 삼는다. 모든 사람이 다 왕생해야 할 것이므로 모두가 다 고향사람이다’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종탄 소주(宗坦疏主)
송(宋) 종탄은 노주(潞州) 여성(黎城) 사람이다. 50년 동안 명성이 강림(講林)에 자자하더니, 늙어서 당주(唐州)의 청대진 (靑臺鎭)에서 정토만을 구하여 삼업(三業. 몸과 입과 마음)과 사의(四儀.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네 가지 행동거지)에 잠시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정화(政和) 4년[1114] 4월 27일, 꿈에 아미타불이 ‘너의 설법도 이젠 6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후에는 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하니, 꿈을 깨어서 그 사실을 대중에게 알렸다. 5월 4일, 대중을 모우고는 “인연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당연히 때가 있게 마련이다. 정토의 수승한 인연은 반드시 때를 의지해야만 한다. 대중들은 염불하여 나의 왕생을 도와다오.” 하고는, 앉아서 죽었다.
그 때 온 하늘에 뇌성이 치고 흰 구름이 땅을 덮더니, 3일 만에야 그쳤다. 소지하고 있던 마노 염주가 그 때까지 손에서 구르고 있어서 대중이 가지려 했으나 끝내 그러지 못했다. 감응한 사실은 여기서 자세히 적지 못한다. 따로 적으려 한다.
자조 종주(慈照宗主)
송(宋) 자원(子元)은 호가 만사휴(萬事休)로서, 평강(平江) 곤산(昆山) 사람이다. 어렸을 적부터 지관(止觀)을 익히다, 정 중에서 까마귀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는 이십여 년 동안 종이 속에서 찾았으나 찾고 찾아도 더욱 막막할 뿐이었네 홀연히 까마귀 울음을 듣고 비로소 이제까지 그릇 용심한 줄 알았네. 이십여년지상심 二十餘年紙上尋 심래심거전침음 尋來尋去轉沈吟 홀연청득자아규 忽然聽得慈鴉叫 시신종전착용심 始信從前錯用心 하고 송(頌)하였다.
그리하여 남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널리 염불을 권장하고, 법계 중생을 대신하여 예불 참회하며 안양에 왕생하기를 기도하였다. 백련참당(白蓮懺堂)을 짓고 <사토삼관선불도(四土三觀選佛圖)>를 저술하여 염불종의 안목을 열어보였다. 역순의 경계 속에서도 마음을 움직인 적이 없었으므로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불러 보시고 자조(慈照)라는 호를 내렸다. 3월 23일, 탁성(鐸城)에서 대중에게 “나는 교화할 인연이 이미 다하였다. 이젠 가야겠다.” 하고는, 합장한 채 죽었다. 다비에 붙이니 무수한 사리가 나와, 나라에서 최승지탑(最勝之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법지(法持)
송(宋) 법지는 화도사(化度寺)에 살았다. 미타참(彌陀懺)을 닦으면서 염부제를 하루빨리 벗어나 안양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눈물을 흘리며 슬파 울며 접인해 주시기를 기원하며 큰 소리로 끊임없이 염불하더니, 홀연히 장육 (丈六: 1장 6척尺)의 부처님 몸이 못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이젠 중품(中品)에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고는, 서쪽을 향하여 죽었다.
찬(贊) 인간의 정리란 오래 살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죽음을 재촉하면서 안양을 간구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지극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발원은 그럴 수 있다 하겠으나, 바다에 뛰어들거나 절벽 위에서 몸을 던지며 나무더미를 쌓아놓고 스스로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은 마군의 짓이다.
본여(本如)
송(宋) 본여는 호를 신조(神照)라고 하였다. 동산(東山) 승천사(承天寺)에 살면서, 군수인 장순(張郇)과 결사(結社)를 맺었다. 하루는 자리에 올라 설법하여 대중과 결별하고 물러나와 앉아서 죽었다. 그 때 강가의 어부가 구름 속에 어떤 스님이 서쪽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해 탑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전과 같고 탑 안에 연꽃이 피어있었다.
기 법사(基法師)
송(宋) 기 법사는 보운(寶雲: 고려스님인 보운 의통)에게서 배웠다.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에 살면서 일념으로 염불하였다. 하루는 병색을 보이면서도 제자들을 위해 널리 현지(玄旨)를 설하고 있노라니, 대중들이 보니 서방에서 광명이 비치면서 공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스님이 “아미타불과 두 보살이 오셨다. ” 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서쪽을 향해 죽었다. 문인이 아미타불이 스님에게 초세여래 (超世如來)라고 수기하는 꿈을 꾸었고, 어떤 이는 스님이 청련화대(靑蓮花臺)에 앉아있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법지(法智) 선사가 이렇게 찬탄한 적이 있었다. 병들어 누웠으면서 현지를 설했고 임종에 부처님을 친견했으니 참으로 공경할 만한 어른이시다. 와병담현 臥病談玄 임종견불 臨終見佛 시가경야 是可敬也
찬(贊) 어떤 이는 기(基)가 어떻게 수기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할지 모른다. 아! ‘여래 무량광을 친견하옵고 현전에서 제가 보리기(菩提記)를 받고저.’ 하는 말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약우(若愚)
송(宋) 약우는 운천(雲川) 선담(仙潭)에 살면서 무량수각(無量壽閣)을 지어 스님들과 세속인들에게 염불하기를 권하며 30년 동안 정근하였다. 도잠(道潛)과 칙장(則章), 두 스님과 벗을 맺었는데, 잠은 시(詩)에 능하여 명예를 가까이 하였으나, 우와 장은 오직 실행에만 힘썼다. 죽을 무렵에 이르러, 꿈에 신인(神人)이 ‘너의 동학인 칙장은 보현행원 삼매를 얻어 이미 정토에 태어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우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대중에게 <관경(觀經)>을 읽게 하고 단정히 앉아 묵묵히 있더니, 갑자기 “정토가 앞에 나타났다. 나는 가야겠다.” 하고는, 다음과 같이 게(偈)를 쓰고는 죽었다. 본래 집이 없으니 돌아갈 곳 있으랴만 구름 속에 길이 있는 줄 누가 알랴 시냇빛(계광溪光)에 서산 달이 지니 바로 선담(仙潭)에서 꿈을 깰 때네.
본자무가가득귀 本自無家可得歸 운변유로허수지 雲邊有路許誰知 계광요락서산월 溪光搖落西山月 정시선담몽단시 正是仙潭夢斷時 허공 속에 천 꽃(千花)의 그물 꿈 속엔 칠보의 연못 서방의 길을 밟고나서는 다시는 한 점의 의심도 없네 공리천화라망 空裏千花羅網 몽중칠보연지 夢中七寶蓮池 답득서방로온 踏得西方路穩 갱무일점호의 更無一點狐疑
찬(贊) 우와 잠과 장은 벗이었으나, 잠은 시에 탐익해 명예를 가까이 하여 정토의 이익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지혜를 멀리하고 세상과의 인연을 소원(疎遠)히 하라. 서방을 찾는 자는 이를 반드시 명심하라.
수진(守眞)
송(宋) 수진은 영흥(永興) 사람이었다. 기신론과 법계관(法界觀)을 강의하면서, 늘 한밤중에는 무량수불왕생비밀인 (無量壽佛往生秘密印)을 맺고서 서방에 뜻을 두었다. 어느날 새벽, 몸이 정토에 오르는 것을 느끼고서 눈을 들어 부처님을 보고 상 앞에 엎드려 ‘48원으로 능히 나를 제도하실 분!’ 하고는, 향과 꽃을 가지고 법당에 들어가 공양하고 자리에 돌아와 죽었다.
지례(知禮)
송(宋) 지례는 호를 법지(法智)라고 하였다. 남호(南湖)에 살 적에 <묘종초(妙宗鈔)>를 지어 관심(觀心)과 관불(觀佛)의 뜻을 널리 밝혔다. 해마다 2월 보름에는 염불시계회 (念佛施戒會)를 열어 만인들을 깨우쳤고, <융심해(融心解)>를 찬술하여 일심삼관 (一心三觀)과 사정토(四淨土)의 뜻을 밝혔다. 후일 정월 초하루에 광명참(光明懺)을 주관하더니, 닷새 째 되는 날, 대중을 불러 설법하고 수백 번의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서 조용히 앉아 죽었다.
찬(贊) 예(禮)는 <묘종초>을 짓고 정관(淨觀)을 설하여 널리 천태의 교의를 밝혔으나, 임종에 염불하며 앉아서 죽었으니, 어찌 부질없이 입을 놀리는 자와 같은 수준에서 논의할 수 있으랴. * <묘종초(妙宗鈔)>: 천태 지자대사의 <관무량수경소>를 상세히 해설한 책. * 일심삼관(一心三觀): 천태종의 관상법(觀想法)의 하나. 일념의 마음중에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의 3관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
현상세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공관, 현상세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가관, 이 양자가 서로 갖추어져야 비로소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고 하는 중관의 3관을 일념으로 동시에 관념하는 것. * 사정토(四淨土): 천태 지자대사가 분류한 정토의 4종류인데, 지례가 <묘종초>에서 자세히 설함. 1. 범성동거토(凡聖同居土) - 범부와 상인이 함께 머무는 정토. 2. 방편유여토(方便有餘土) - 2승이 방편으로 미혹은 끊었으나,
근본무명의 견사혹(見思惑)을 끊지 못하여 삼계 밖에 태어나 생사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정토. 3. 실보무장애토(實報無障碍土) - 중도(中道)를 깨친 법신보살이 법성신(法性身)을 체득하여 머무는 정토. 미세한 무명은 남아있다. 4. 상적광토(常寂光土) - 법신불이 머무는 정토. 시공을 초월한 묘각(妙覺)의 지혜가 머무는 곳. * 사명 지례(四明知禮960-1028)스님은 천태종 17대 조사이며, 자운 준식과 동문으로, 스승은 고려 스님으로 천태종 16대 조사이신 보운 의통(寶雲義通. 927-988)이십니다.
유엄(有嚴)
송(宋) 유엄은 태주(台州) 적성(赤城) 숭선사(崇善寺)에 살면서 신조(神照)를 의지하여 천태교를 배웠다. 만년에 명자나무 아래에 띠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사암(樝庵)이라고 호하였다. 평생 독실히 정업을 닦아 ‘안양 고향을 생각함[懷安養故鄕]’이라는 시가 당시에 전하였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 4월, 죽음에 임박하여 보배 연못에 큰 연꽃이 피어있고 하늘음악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고는 ‘정토로 돌아감[餞歸淨土] ’이라는 시를 지어 대중에게 보이고 7일 후에 가부좌하고 죽었다. 탑 위에 달과 같은 광명이 서려있더니 3일 후에야 사라졌다.
찬(贊) 앞의 법상(法祥)은 거울을 비추는 듯한 광명이 벽 위에 나타났고, 지금 엄(嚴) 공은 달과 같은 광명이 탑 위에 나타났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형철(瑩徹之明)했던 영험이었다. 그리고 광명이 방에 가득했던 경우나 금색 광명이 강변 수백 리까지 뻗쳤던 경우를, 아! 이것들을 거짓이라 하겠는가.
혜명(慧明)
송(宋) 혜명은 호를 회암(晦庵)이라 하고, 혜광(慧光)에게서 배웠다. 만년에 청산(菁山) 상조사(常照寺)에 있으면서 정업을 닦아, 하루에 반드시 법화, 능엄, 원각경을 독송하고 미타의 명호를 만 번 불렀다.
경원(慶元) 기미(己未)[1199] 봄에 병색을 보이더니, 제자에게 “나는 대승을 배워정토에 왕생하려 하였다. 지금 그 뜻을 이루었다 .” 하고는 발을 포개고 앉아 죽었다. 대중이 하늘음악이 서쪽에서 흘러와 머리 위에서 맴도는 것을 들었다. 다비하니 오색의 사리가 무수하였다.
사찬(師贊)
송(宋) 사찬은 옹주(雍州) 사람으로, 승동(僧童)이 되어 열네 살적부터 염불을 끊이지 않고 불렀다. 문득 병이 들어 갑자기 죽더니, 잠시 후에 다시 깨어나 스승과 부모에게 “아미타불이 이곳에 오셨으니 저도 따라가려 합니다.” 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보니, 공중에 보대(寶臺)와 오색의 기이한 광명이 서쪽을 향하여 사라졌다.
두 사미(二沙彌)
수(隋) 문주(汶州)에 두 사미가 있었는데, 뜻을 함께 하여 염불하더니 큰 사미가 갑자기 죽었다. 정토에 이르러 부처님을 친견하고 “아우인 사미와 함께 정업을 닦았습니다. 왕생할 수 있사오리까?” 하고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저가 너를 권하였기에 너도 발심하게 되었다. 너는 지금 돌아가서 더욱 정업에 힘써라. 3년 후에는 함께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가 되어 두 사람이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 꽃이 휘날리는 가운데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함께 죽었다.
요연(了然)
송(宋) 요연 법사는 호를 지용(智涌)이라 하고 , 24년 동안 백련사(白蓮寺)에 살았다. 꿈에 용 두 마리가 공중에서 유희하더니, 한 마리가 신인(神人)으로 변하여 소매 속에서 편지를 꺼내보고 ‘스님께서 7일 후에는 가실 것입니다.’ 하였다.
잠에서 깨어 대중을 모아 설법하고 ‘ 염불의 힘으로 극락국에 왕생한다. 너희들도 힘쓰지 않으랴.’ 하고 크게 쓰고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대중에게 <미타경>을 독송하게 하여 ‘서방세계’라고 한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죽었다. 능인사(能仁寺)의 스님들이 누구나 하늘음악과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가에서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조(思照)
송(宋) 석사조(釋思照)는 연종(蓮宗)을 연구하고 정업에 전심하여 사경(四更. 오전1-3시) 만 되면 일어나 부처님 명호를 부르니, 게으른 비구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법장의 48원을 본받아 승속을 모아 염정회 (念淨會)를 만들어 30년 동안 주관하였다. 어느날 병이 들어 누워있다 꿈에 장육(丈六)의 금빛나는 몸을 보고, 대중을 모아 염불하다 홀연히 큰소리로 대중과 함께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손가락을 구부려 인(印)을 맺고는 앉아 죽었다. 다비하니 치아와 염주는 불타지 않았다.
지렴(智廉)
송(宋) 지렴은 상우(上虞) 화도사 (化度寺)에 살았다. 처음에는 선문에 두루 참예하였으나, 늙어서는 한결같이 서방에 뜻을 두었다. 경원(慶元) 개원(改元)[1195] 8월에 대중에게 고별하고 “나는 꿈에서 아미타불이 대중에게 둘러싸여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선인들은 정업에 전심하여 나의 국토에 와서 왕생하라’하셨다.
나는 이렇게 승상(勝相)을 보았다. 나는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하고, 다음과 같이 게(偈)를 쓰고 몸을 돌려 서방을 행한 채 결인(結印)하고 갔다. 기러기가 장공을 지나감이여 그림자가 한수(寒水)에 잠기도다 죽음도 태어남도 없음이여 연화국이로다 안과장공 雁過長空 영침한수 影沈寒水 무멸무생 無滅無生 연화국리 蓮花國裏
지심(智深)
송(宋) 지심은 호를 자천(慈川)이라 하고, 해월(海月)에게서 배웠다. 고향인 가화(嘉禾)로 돌아가 광명참회(光明懺會)를 열어 20년을 하루같이 시행하다, 늙어서는 염불에만 뜻을 두어 항상 정업으로 사람들을 교화하여 무수한 자를 왕생케 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병색을 보이었으나 객이 와서 문안을 여쭐 때도 평시와 같이 담론을 나누더니, 객이 문 밖을 나가자 마자 금방 천화(遷化)하였다. 사람들이 보니 붉은 구름이 서쪽을 향하여 사라졌다.
법인(法印 혹은 法因) - 신수대장경에는 法因으로 나옴.
송(宋) 법인은 사명(四明) 광수사(廣壽寺)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일심으로 정토를 찾았다. 나중에 병이 들어 대중을 모아 <관경(觀經)>을 읽게 하고 사흘 동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더니, 문인에게 “나는 가야겠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가 게(偈)를 남겨 줄 것을 간청했더니 나와 미타 본래 둘 아니나 둘이니 둘 아니니 하는 것 모두 버렸네 나 이제 이렇게 미타를 친견하니 감응과 사귐 부사의하네 아여미타본무이 我與彌陀本無二 이여불이병개리 二與不二並皆離 아금여시견미타 我今如是見彌陀 감응도교난사의 感應道交難思議 하고 쓰고는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나의 마음으로 저 부처를 생각하면 중생과 부처가 완연하지만, 범부의 마음으로 부처의 마음을 보면 중생과 부처가 어찌 다르랴. 다르지 않으므로 두 가지를 여의었고, 완연하므로 두 가지가 아닌 것까지 여의었으며, 두 가지를 여의었으므로 다른 곳을 따라 찾지 않고, 두 가지가 아닌 것까지 여의었으므로 정토를 찾는 것도 상관없다.
또한 두 가지를 여의었으므로 범정(凡情)이 다하였고, 두 가지가 아닌 것까지 여의었으므로 성해(聖解)마저 다 없어졌다. 이렇게 부처를 보는 자는 늘 사바요, 늘 정토며, 생각마다 석가가 출세하고 언제나 미륵이 하생할 것이니, 진정으로 미타를 친견한 자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얼굴을 마주보고 만나더라도 만 리의 구름일 뿐이다.
지선(智仙)
송(宋) 지선은 호를 진교(眞敎)라고 하였다. 백련사(白蓮寺)에 살면서 13년 동안 도를 강의하며 서방을 향한 예념(禮念)을 잠시도 버린 적이 없었다. 어느날 저녁, 약간의 병색을 보이고는 관당(觀堂)의 대중을 청하여 <미타경>을 읽게 하다가, 송경이 끝나지도 않아서 앉아서 죽었다. 이웃 능인사(能仁寺)에 사는 스님들이 모두 그윽한 하늘 음악을 듣고서, 여명이 되어 스님이 돌아간 것을 알았다.
종리(宗利)
송(宋) 종리는 신성(新城) 벽소(碧沼)에 살면서 10년 동안 염불삼매를 닦았다. 나중에 도미산(道味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일상(一相)이라고 불렀다. 15년이 지나 어느날 제자에게 “내가 벽연화 (碧蓮花)가 허공 속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하더니, 3일 후에 다시 “부처님이 오셨다.” 하고는, 이렇게 게(偈)를 쓰고 조용히 죽었다.
내 나이 구십, 머리는 눈이 내린 듯 세상에는 으례 백년객(百年客) 없네 일상도인(一相道人)이 돌아감이여 금대에 앉으니 건곤이 비좁네 오년구십두설백 吾年九十頭雪白 세상응무백년객 世相應無百年客 일상도인귀거래 一相道人歸去來 금대좌단건곤착 金帶坐斷乾坤窄
제옥(齊玉)
송(宋) 제옥은 호를 혜각(慧覺)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잡천(霅川) 보장사(寶藏寺)에서 정토회를 열어 주관하다, 나중에는 상축(上竺)에 살면서 한밤중에는 미타상을 머리에 이고 행도(行道)하면서 염불하였다. 하루는 수좌에게 “책상 앞에 다보탑이 나타났으나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바라는 것은 정토일 뿐이다. 대중을 모우고 나를 위해 염불하라,” 하였다. 수좌가 종을 쳐서 스님들이 백여 명이 모이니 “내가 이미 부처님을 친견하였다.” 하고는,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갔다.
찬(贊) 다보탑도 역시 불국토인데, 옥(玉)은 어찌하여 원치 않은 것일까? 옛날 위제희(韋提希)가 두루 정토를 살펴보고는 유독 안양만을 요구했던 것은, 대개 전심으로 공덕을 닦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줄을 안다면 서방만을 말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원조 본(圓照本)선사
송(宋) 종본(宗本)은 상주(常州) 무석(無錫) 사람이다. 처음에는 천의 회(天衣懷) 선사를 참예하여 염불로 깨달음이 있었다. 나중에 정자(淨慈)로 옮겼다가, 조칙을 받들어 동경(東京) 혜림사(慧林寺)에 들어가, 연화전(延和殿)에서 임금을 대하여 밀지(密智-旨)를 설하였다. 평소에 몰래 정업을 닦아,
뇌봉재(雷峯才) 법사가 신통으로 정토를 여행하다, 연화 한 송이가 매우 수려한 것을 보고, 물으니 정자사(淨慈寺)의 본(本) 선사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또한 자복 희(慈福曦) 공이 혜림사에 와서 그의 발에 예하고 돈을 시주하고 갔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정 중에서 금련화 (金蓮花)를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본(本) 공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또한 무수한 연꽃이 있었는데, 이는 태어날 자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또한 시든 것도 있었는데, 이는 퇴타(退墮)한 사람의 것이라고 하였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가 “스님께서는 직지(直指: 禪法)을 전해 받으셨으면서 어찌하여 연경(蓮境)을 사모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비록 종문에 있으나 정토도 겸수(兼修)할 뿐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나중에 임종에 편안히 앉아 갔다. 시호는 원조 선사다.
찬(贊) 옛날 중봉(中峯)과 천여(天如)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과 정토가 이치는 하나이나 공(功)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겸수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겸한다고 한 뜻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두 배에 발을 걸친다는 의미의 겸한다는 뜻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러나 원통(圓通)에 방해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겸한다는 뜻은 어찌 옳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더욱이 선 밖에 정토가 없고보면, 국토가 바로 마음이어서 원래 두 가지 물건이 아니다. 어찌 다시 겸한다고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통 본(大通本) 선사
송(宋) 선본(善本)은 화엄을 시험받고 득도하였다. 조칙을 받들어 법운(法雲)에 살면서 대통이라는 호를 받았다. 나중에 항주 상오사(象塢寺)로 돌아가 정업을 닦다가, 정 중에서 아미타불이 금색의 몸을 보이신 것을 보고, 어느날 아침 문인에게 “단지 3일 동안만 머물 것이다.” 하더니, 그 때가 되어 가부좌하고 앉아 염불하며 서쪽을 향하여 죽었다.
영지 조(靈芝照) 선사
송(宋) 원조(圓照)는 영지사(靈芝寺)에 살았다. 계율을 숭상하고 독실히 정업에 전념하여 염불을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관경(觀經)> 과 ‘보현행원품’을 읽게 하고는, 가부좌하고 죽었다. 서호(西湖)의 어부들이 모두 공중에서 음악소리를 들었다.
청조 율사(淸照律師)
송(宋) 혜형(慧亨)은 무림(武林) 연수사(延壽寺)에 살았다. 처음에는 영지(靈芝)를 의지하여 계율을 읽혔으나, 60년 동안 정업만을 전수(專修)하여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염불을 권장하였다. 보각(寶閣)을 짓고 셋 성인의 상을 모셨는데 거룩하기 비할 데 없었다.
강 자임(江自任)이라는 자가 어느날 꿈에 보좌(寶座)가 허공에서 내려와 ‘형(亨) 율사가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 하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그 때 마침 사우(社友)인 손(孫) 거사가 미리 형(亨)에게 고별하고 집에서 인(印)을 맺고 죽었는데, 스님이 가서 향을 사루고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손군도 갔으니 나도 가야겠다.” 하고는, 대중을 모아 염불하고 이렇게 게(偈)를 설하고 갔다.
입으로는 미타를 부르고 생각으로는 백호(白毫)를 생각하라 이렇게 하여 퇴타하지 않으면 반드시 안양에 왕생하리 미타구구칭 彌陀口口稱 백호염념상 白毫念念想 지차불퇴심 持此不退心 결정생안양 決定生安養 호를 청조 율사라고 하였다.
찬(贊) 60년 동안 정업을 닦았으니, 임종에 상서로운 감응을 어찌 의심하랴. 세상에는 잠깐의 공력으로 정토가 영험이 없다고 탓하는 자도 있다. 잘못된 노릇이다.
사민(思敏)
송(宋) 사민은 영지 율사를 의지하여 수계하는 법을 보충하였고, 20년 동안 전심으로 염불하던 이다. 나중에 병이 들어 대중에게 반 달 동안 <관경(觀經)>을 읽게 하더니, 3일이 지나서 화불(化佛)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임종에 큰소리로 염불하는 소리가 뇌성이 치듯 하였다. 혹서(酷暑)에 시체를 감실에 두었으나 7일 동안 변하지 않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희담(晞湛)
송(宋) 희담은 산음(山陰) 사람이다. 젊어서는 유생이었으나 홀연히 세간을 싫어하여 출가하였다. 형(瑩) 스님과 완두(阮杜)에 무량수불전 (無量壽佛殿)을 세우고 정업을 전수하여 앉아있을 적에도 서방을 등지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하여 항상 부처님과 두 보살의 모습을 친견하더니, 어느날 저녁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고 똑바로 앉아 인(印)을 맺고 죽었다.
등 법사(登法師)
수(隋) 등 법사는 병주(幷州) 흥국사(興國寺)에서 <열반경>을 강의할 때, 와서 설법을 듣는 자에게 널리 염불왕생을 권장하였다. 개황(開皇) 12년[592], 죽을 때는 기이한 향기가 허공에 가득하였고, 장사지낼 때까지 광명과 향기로운 구름이 온 마을에 서리고 있었다.
승애(僧厓)
석승애는 익주 다보사(多寶寺)에 살았다. 간절히 정업에 전심하여 다섯 손가락을 태워 서방의 삼성(三聖)에게 공양하였다. 누가 고통스럽지 않았는가 하고 물으니 “마음이 이미 고통스럽지 않았거든 손가락이 어찌 고통스러우랴.” 하고 대답하였다. 임종에 하늘꽃이 비내리 듯 하였고 사람들이 보니 애(厓)의 납의와 석장이 5,6백의 스님들과 함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장 법사(藏法師)
송(宋) 승장(僧藏)은 분주(汾州) 사람이다. 일생동안 스님들이나 세속인의 예배를 받은 적이 없이 정토에만 전수하였다. 죽을 때 하늘 음악이 차례로 와서 맞이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더니, 서방의 부처님이 오시자 대중과 고별하고 죽었다.
고산원(孤山圓) 법사
송(宋) 지원(智圓)은 서호(西湖) 고산에 살면서 수많은 경전들을 주석하였고, 정토에 전심하여 <미타소(彌陀疏)>와 <서자초(西資鈔)>를 지어 왕생을 권장하였다. 죽어 도기(陶器)에 묻었는데, 15년 후에 장마로 산이 무너져 도기를 열어보니, 몸이 엄연한 채 손톱과 머리카락이 그대로 자라고 있었다.
찬(贊) 죽은 후에도 전과 다름 없었다는 말만 하고, 임종에 왕생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죽은 후의 현상을 살펴보건대 그 영험은 닦은 대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바로 그 청정한 업이 견고함으로 해서 감응한 것이다. 반드시 왕생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정(元淨)
송(宋) 원정은 항주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고 나중에는 용정사(龍井寺)에 살았는데, 당시의 지식인이었던 조청헌(趙淸獻) 공과 소문충(蘇文忠) 공과 같은 무리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죽을 때 방원암(方圓庵)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7일 동안만 아무 장애가 없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하더니, 7일 후에 게(偈)를 써서 대중에게 보이고는 편안히 앉아 죽었다.
유미타(喩彌陀)
송(宋) 사정(思淨)은 성이 유씨로서 전당 사람이다. 자호를 정토자(淨土子)라고 하였다. 젊어서는 영(瑛) 법사를 모시고 <법화경>을 강의하였으나, 나중에는 염불에 전념하고 여가가 있으면 불화를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고요한 방에서 조용히 생각하여 미타의 광명을 보고서야 붓을 놓았다. 소흥(紹興) 정사(丁巳)[1137]에 7일 동안 단정히 앉아 일심으로 염불하다 편안히 갔다.
찬(贊) 부처를 그리고 부처를 관하는 것이 잘 하기만 하면 자못 같을 수도 있다. 대개 그림은 능히 사람을 말의 배 속에 둘 수도 있거든, 어찌 사람을 불국에 두지 못하랴. 그렇다면 화공이 부처님을 그려 어찌 왕생하지 못하랴만 아! 그들에게 물어보라.
방은 반드시 고요하고 생각은 반드시 조용한가 하고. 더욱이 화공은 온갖 형상을 마음대로 그리지 않는가. 그러나 유(喩) 노인은 오직 한 부처님에만 전념하였다. 전념하면 관하는 것이지 그리는 것이 아니다. 단청하는 자들은 이것을 핑계하지 말라.
몽윤(蒙潤)
석몽윤은 자(字)가 옥강(玉岡)으로, 고원(古源) 선사에게서 법을 받았다. 늙어서는 풍황령(風篁嶺)의 백련암(白蓮庵)에 살면서 문을 닫아 걸고 염불하였다. 임종에 화불(化佛)이 와서 맞이하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운옥(雲屋)
원(元) 선주(善住)는 자가 운옥으로 소주 사람이다. 문을 닫아 걸고 종일 염불하여 병이 들어도 변함없었다. 죽을 때에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저서로 <안양전(安養傳)>과 <곡향집(谷響集)>이 있다.
지관주(旨觀主)
원(元) 지관주는 자가 별종(別宗)으로 항주 사람이다. 계덕이 매우 엄정했고 용산(龍山)의 서쪽 산록에 관실(觀室)을 짓고 염불삼매를 수행하여, 비록 병난 (兵亂)을 피해 도망하면서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임종에 병 없이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지운 인(芝雲仁) 법사의 <행업집(行業集)> 에 자세한 행적을 기록하였다.
담의(曇懿)
송(宋) 담의는 전당에서 의업(醫業)에 종사했던 이다. 만년에 염불삼매를 닦으며 평소에 모아놓았던 재산을 내어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고, 불상을 조성하고 목욕소를 시설하였다. 이렇게 20년 동안 한 후, 나중에 병이 들었으나 일체 약을 멀리하고 일곱 분의 스님들을 모셔 염불을 간청하였다.
다음날 크기가 집채만한 연화를 보았고, 또 하루는 범승(梵僧)이 침대 곁에 다가와 안부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밤중에 대중들이 염불소리가 차츰 낮아지는 것을 듣고 가보니 편안히 죽어가고 있었다.
태미(太微)
송(宋) 태미는 어린아이 적에 전당의 법안(法安) 법사에게 출가하였다. 처음에 <미타경>을 주니 끝까지 외워버리는 것이었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문에 빗장을 지르고 염뷸에 전념하였다. 이와같이 정진하여 늘 뒷산을 거닐다, 홀연히 젓대소리를 듣고 활연히 깨달았다.
이로부터 젓대 하나를 들고 스스로 즐겼다 능 감부(凌監簿)라는 이가 있었는데, 함께 정업을 닦던 자였다. 그는 미(微)를 ‘정토향(淨土鄕)의 형님’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문을 두드리며 “정토향의 아우가 뵐까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미(微)가 “내일 정토에서 만나세 . 오늘은 염불하느라 한참 바쁘네.” 하였다. 다음날 아침, 아침 공양에 참석치 않은 것을 이상히 여겨 가 보니, 젓대와 발우와 선상을 이미 불태워버리고 땅 위에 가부좌한 채 죽어있었다.
찬(贊) 젓대를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하니, 고인은 나름대로 젓대에 깨달음의 노래를 실어 불사를 지었던 것이다. 구지(俱胝) 화상은 천룡(天龍) 화상에게서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어 종신토록 손가락을 세워 보였으며,
단(端) 공은 사자놀이를 보고 심지(心地)를 발명(發明)하고는 늘 오색이 찬란한 비단옷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능엄경>을 잘못 읽고서는 구두점(句讀點)을 고치지 않았던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이와 유사한 일이다. 함부로 미쳐 날뛰면서 방자를 떠는 자들은 이런 일을 핑계대지 말라.
* 일지두선(一指頭禪): 구지화상이 천룡선사가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곳에서 깨닫고, 이후로 학자들이 참문(叅問)하면 언제나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는 고사. * 단(端) 공: 정단(淨端)을 말함. 송(宋) 귀안(歸安) 사람. 용화 악(容華岳) 선사의 제자.
용흠(用欽)
송(宋) 용흠은 전당 칠보원(七寶院)에 살면서 대지(大智)를 의지하여 계율을 배웠다. 대지가 대중에게 ‘살아서 계행을 청정히 지키면 죽어서 안양에 돌아간다.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일을 이것으로 다 마칠 수 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정토를 결심하여 한결같이 물러가지 않으며,
하루에 염불 3만 번을 불렀다. 하루는 정 중에서 정토를 여행하다, 부처님과 보살과 갖가지 기이한 모양들을 보고, 시자에게 “나는 내일 서방으로 간다.” 하고는, 대중을 모아 염불하고 여명에 합장한 채 서쪽을 바라보면서 가부좌하고 죽었다.
구법화(久法華)
송(宋) 가구(可久)는 명주(明州)에 살았다. <법화경>을 읽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했으므로 당시에 흔히 구법화라고 불렀다. 원우(元祐) 8년[1093], 나이 81세에 앉아서 죽었다. 3일 후에 다시 깨어나 사람들에게 “내가 정토의 경계를 보니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연화대 위에마다 태어날 자의 이름을 표기해 두었는데, 한 금대(金臺)에는 성도부(城都府) 광교원(廣敎院) 훈(勳) 공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한 곳에는 명주(明州) 손 십이랑(孫十二郞)이 적혀 있었으며 , 한 곳에는 가구(可久)의 이름이 있었다. 또한 한 은대(銀臺)에는 명주(明州) 서도고(徐道姑) 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고는, 다시 죽었다.
5년 후에 서도고가 죽었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했으며, 12년 후에 손십이랑이 죽을 때는 하늘 음악이 허공에서 쟁쟁하여, 모두 구가 말한 것과 일치하였다
찬(贊) 연화에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는 말을 여기서 누차 보게 된다. 환상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환(幻)과 같은 마음으로 환과 같은 부처를 생각하고, 환과 같은 꽃에 환과 같은 이름을 표기하였으며, 내지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는 것이 어떤 것인들 환이 아니랴만,
나는 우선 환생(幻生)이라는 생각을 접어두노니, 어찌 굳이 그 사실 여부를 논하랴. 조휘(祖輝) 원(元) 조휘는 사명군(四明郡)의 성불각 (成佛閣)에 살면서, 사람을 만나면 다만 ‘나무아미타불! 말할래야 말할 수 없어!’ 할 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설부득 (說不得: 말할 수 없다) 화상이라고 불렀다.
운현위(鄞縣尉)인 왕용향(王用享) 부부가 그를 공경하여 섬겼는데, 하루는 그의 집에 가서 “내가 내일 가야겠어.” 하고 고별하였다. 다음날 대중을 모우고 감실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참외를 달라하여 맛있게 다 먹고는 염불하며 죽었다.
초기(楚琦)
대명(大明) 초기는 촉군(蜀郡) 사람으로 독실히 서방을 믿었다 연경(燕京)에 들어가 북소리를 듣고는 크게 깨달았다. 홍무(洪武)초에 경도(京都)에 가서 세 번이나 임금에게 법을 설하여 임금을 매우 기쁘게 하였다. 나중에 서재(西齋)라는 집을 짓고 한결같이 정업을 닦다, 큰 연꽃이 온 세계에 가득한데, 미타가 그 가운데 계시고 많은 보살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죽는 날, 게(偈)를 써서 대중에게 보이고는 “나는 가야겠다.”고 하였다. 누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서방(西方)!” 하였다. 또 “서방에만 부처가 있고 동방에는 부처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큰 소리로 한 번 할(喝)하고, 편안히 갔다.
보주(寶珠)
대명(大明) 보주는 일찍이 항군(杭郡) 가화(嘉禾) 부근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한 벌 누더기 뿐이었고, 자는 곳도 일정한 거처가 없이 걸식하며 살았다. 평소 염불이 끊이지 않아, 누가 부르면 겨우 대답만 하고는 염불을 연이으면서 다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해문사(海門寺)에서 갑자기 반 달여나 미친병에 걸린 듯하며 지냈다. 어떤 스님이 “스님의 평소 실행대로라면 당연히 세인들의 안목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나무라자, “그렇다면 나는 가야지!” 하고는, 목욕을 하고는 편안히 죽었다.
총론(總論) <무량수경>에는 세 가지 부류의 왕생을 논하였다. 그 첫째는 집을 버리고 세속을 떠나 사문이 되어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전념하는 자라 하였다. 집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다는 것은 몸이 출가하였다는 의미요,
한결같이 전념한다는 것은 마음이 출가하였다는 뜻으로서, 몸과 마음이 모두 청정하다면 어찌 정토에 왕생하지 못하겠는가. 세상에 어떤 미친 중은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재가의 이중(二衆)을 잘 접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사문이다. 내가 어찌 이런 짓을 달갑게 여기랴.’ 한다. 또 어떤 중은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스님 중에서 둔한 근기를 접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교리에 밝고 나는 종문(宗門)에 밝다. 내가 어찌 이런 것을 달갑게 여기랴.’ 한다. 아! 이들이 어찌 원조(遠祖: 혜원 법사) 이하의 모든 대화상들을 알 리가 있겠는가. 어떤 이는 경법(經法)에 능통하여 명성이 천하에 떨쳤고, 어떤 분은 조사의 법인(法印)을 잡고 도가 고금에 충만하였다.
저분들이 교리나 종문에 어두웠던 자였던가? 또한 정토 밖에 따로 종문이나 교리도 없고, 사문도 없음을 어찌 알 리가 있겠는가. 나는 이 자리를 빌려 감히 미친 자들에게 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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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신하의 왕생]
연지대사 왕생집 2권
오장 국왕(烏萇國王)
오장 국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여가에는 평소 불법을 숭봉하여,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짐은 국왕이 되어 비록 복락은 누리고 있으나 무상은 면할 길이 없다. 듣건대 서방정토는 마음을 깃들일 만한 곳이라 하니,
짐은 마땅히 발원하여 저 국토에 왕생하고자 한다. ” 하고는, 종일 행도염불(行道念佛) 하였으며, 부처님이나 스님들께 공양할 때마다 왕과 부인이 몸소 음식을 드려, 이렇게 30년 동안을 거르지 않았다. 붕어할 때, 얼굴에 웃음빛을 띠고 화불(化佛)이 와서 맞이하는 등, 상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찬(贊) 말세에 법을 듣고 믿어 지니는 자들 중에는 지위가 없는 자는 많고 지위가 있는 자는 적으며, 지위가 있으면서 그 지위가 지극히 존귀한 자는 더욱 적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지위가 높을수록 욕심도 더욱 많고, 욕심이 많을수록 번뇌도 더욱 깊기 때문으로, 이치가 그럴진대 이를 면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지금 임금의 복락을 누리면서도 서방에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숙세에 수승한 인을 심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까지 제왕으로서 마음을 불법에 둔 자를 어찌하여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 정토전(淨土傳)을 기록하는 것만해도 그 의도가 마음을 외곬로 전념하는 자에게만 있으므로, 단순한 신앙을 가진 자는 함부로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위세자(魏世子)
송(宋) 위 세자는 부자 세 사람이 모두 서방을 닦았으나, 처만은 닦지 않았다. 딸이 열네 살에 죽었는데, 7일 만에 다시 소생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소녀가 보니, 서방의 칠보로 된 연못 속에 아버지와 오빠 등 세 분은 이미 연화가 피었으니 돌아가시면 반드시 이곳에 왕생하실 것입니다만,
유독 어머니만이 없었으므로 잠시 돌아와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도 뜻을 일으키소서.” 하고 아뢰었다. 어머니도 딸의 말에 감동하여 즉시 신심을 일으켜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중에 죽어 역시 안양에 왕생하였다.
찬(贊) 처음에는 정토와의 인연이 소원했으나 마침내 극락국에 왕생하게 된 것은, 믿고 믿지 않는 차이였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다만 믿지 않는 자는 제외한다 .’ 하였다.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유유민 참군(劉遺民 參軍)
진(晋)의 유유민은 팽성(彭城) 사람으로 한나라 초원왕(楚元王)의 후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자신의 재주를 자부하여 세속의 무리들과 휩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에 부(府)의 참군이 되었으나 숨어버렸고, 사안(謝安)이 유유(劉裕)와 사귈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고 스스로 호하기를 유민(遺民)이라고 하였다.
여산에 들어가 원(遠) 공의 연사(蓮社)에 참예하였고, 염불삼매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전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정 중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땅을 비치니 모두 금색으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연사에 산 지 15년 째 되는 해에는 또한 아미타불이 옥호광(玉毫光)을 비치시며 팔을 드리워 이마를 어루만지시자, 유민이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저의 이마만을 만지십니까? 옷으로 저를 덮어주소서.” 하고 간청하니,
잠시 후에 부처님이 이마를 만지시며 가사를 끌어 그를 덮어주시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는 또 칠보의 연못에 들어가니, 푸르고 흰 연꽃이 만발한데, 그 물이 한없이 맑았다. 이마에는 원광(圓光)이 빛나고 가슴에는 만자(卍字)가 드러나 있는 어떤 사람이 못의 물을 가리키며 ‘팔공덕수(八功德水)다. 너는 이 물을 마셔라.’ 하고 말하였다.
유민이 물을 마시니 더없이 달고 향기로웠던 일을 보기도 하였다. 깨어나 보니 그때까지 아직도 기이한 향기가 몸에서 풍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중에게 “나는 정토의 인연이 이르렀다 .” 하고는, 성상(聖像)을 대하여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고는 “저는 석가의 유교(遺敎)로 인하여 아미타불이 계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이 향을 석가여래에게 공양하고, 다음에는 아미타불과 <묘법화경>에게 공양합니다. 원하옵건대 일체 중생이 모두 정토에 왕생하여지이다.” 하고 축원하고는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갔다. 그 때는 의희(義熙) 6년[410]이었다.
찬(贊) <관경(觀經)>에서 정업의 정인(正因)을 밝히면서, 부모에게 효양하는 것이 제일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불효한 자는 종일 염불하더라도 부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지금 유민은 어려서는 효양을 다 바쳤고, 다시 깊이 삼매에 들어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를 감응했으니, 그의 왕생의 품위(品位)가 높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재가에서 정업을 닦는 자는 이것으로 만대의 사법(師法)을 삼으라.
* 사안(謝安): 동진(東晋) 중기의 명신 * 유유(劉裕): 남조(南朝) 송(宋)나라 무제(武帝)의 이름. 처음에는 진(晋)을 섬기다가 나중에 제위를 찬탈하였다. * 유민(遺民): 전조(前朝)의 백성으로 의를 지키고 새 조정을 섬기지 않는 자를 일컫는 말. * 팔공덕수(八功德水): 정토의 연못에 담겨있는 여덟가지 훌륭한 공덕이 있는 물. 여덟가지 공덕이란, 맑고[澄淨], 차고[淸冷], 감미롭고[甘美], 부드럽고[輕軟], 윤택하고[潤澤], 화평하고[安和], 기갈을 면하고[除飢渴], 신체의 여러 기관을 자라게 하는[長養諸根] 공덕을 말한다.
장야 무재(張野茂才)
진(晋) 장야는 심양(潯陽)에 살았다. 중국어와 인도어에 다 능통했으나 더욱 글을 잘 지어 무재(茂才)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누차 산기상시(散騎常侍)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나아가지 않고, 여산의 연사(蓮社)에 들어가 정업을 닦았다. 의희(義熙) 14년[418], 가족에게 고별하고 방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죽었다.
장항 학사(張抗學士)
송(宋) 장항은 부처님께 선행을 쌓고 대비다라니(大悲陀羅尼)를 10만 번 외우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나이 60여가 되어 앓아 누웠으면서도 일심으로 염불하더니, 가족에게 말하기를 “ 서방정토는 다만 눈 앞에 있을 뿐이다. 아미타불이 연꽃 속에 계시고 옹아(翁兒)는 금지(金地)에서 부처님께 예를 드린다.” 하고는, 염불하고 갔다. 옹아란 항(抗)의 손자로서 세 살 때 죽었다.
찬(贊) 마음이 청정하면 서방도 눈길에 닿는 곳에 있고, 마음이 더러우면 지옥도 몸을 따라온다. 항(抗)의 청정한 마음을 성취함이여! 눈 앞에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말을 어찌 의심하랴.
왕중회 사사(王仲回 司士)
송(宋) 왕중회는 관직이 광주(光州)의 사사참군(司士參軍)을 지냈다. 무위자(無爲子) 양(楊) 공에게 “경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토에 왕생하게 하였으나, 조사(祖師)는 마음이 바로 정토다. 굳이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양 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시오.
만약 부처님의 경계에 있다면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을 것이니 무엇하러 왕생을 찾겠소. 만약 중생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어찌 지심으로 염불하여 더러운 국토를 버리고 정토에 왕생하려 하지 않겠소.” 사사는 깊이 깨닫고 뛸 듯이 기뻐하며 물러갔다. 2년 후, 양 공이 단양(丹陽)의 태수가 되었을 때,
홀연히 꿈에 사사가 나타나 “전에 가르침을 받고 지금 이미 왕생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와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며칠 후에 부음이 도착했는데, 사사는 7일 전에 미리 때가 이른 것을 알고 가족들에게 고별하고는 죽었다는 것이다. 바로 꿈 꾼 때였다.
마자운 현위(馬子雲 縣尉)
당(唐) 마자운은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경읍(涇邑)의 현위가 되었다. 조세선(租稅船)을 호송하여 서울로 가다 풍량을 만나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이러한 죄로 체포되었으나 전심으로 염불하여 5년 만에 사면을 받고 남능(南陵)의 어느 절에 숨어 살았다.
하루는 사람들에게 “내가 일생을 염불을 정근하여 지금은 서방의 업이 이루어졌다. 이젠 가서 안양에 왕생해야겠다.” 하더니, 다음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있으니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자운(子雲)은 기뻐하며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갔다.
찬(贊) 몸은 체포를 당했으나 마음은 염불하여 마침내 사면을 받을 수 있었으니, 이는 곧 칼이나 쇠사슬을 쓰고 옥에 갇혔더라도 관음보살을 생각하고 해탈을 얻은 자의 경우일 것이다. 지금 오욕에 얽혀있는 것이 어찌 체포를 당한 것이 아닐 것이며,
염불 한 마디로 80억 겁의 생사중죄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어찌 사면장이 아니랴. 그러나 오욕에 손발이 묶여 있으면서도 염불할 줄 모르고 영겁토록 죄를 안고 있으니, 끝내 사면을 받을 때가 없다. 슬프다.
가순인 군쉬(賈純仁 郡倅)
송(宋) 가순인은 잡천(霅川) 사람으로 벼슬은 영주(郢州) 군수를 지냈고, 정업에 전심하여 오랫동안 염불로 재계하였다. 조그만 병이 들더니 서쪽을 향하여 조용히 앉아 갔다. 머리 위에는 원상(圓相)의 흰 광명이 서렸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장적 조교(張迪 助敎)
송(宋) 장적은 전당 사람으로 벼슬은 조교를 지냈다. 원정(圓淨) 율사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정업 법문을 물어 독실하게 수지(修持)하여 안양에 왕생할 것을 서원하였다. 염불할 때마다 큰소리로 용맹을 다하여 목소리가 쉰 경우에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원정에게 “정 중에서 흰색의 빈가조 (頻伽鳥)가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 하더니, 3년 후에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염불하며 죽었다.
찬(贊) 빈가만을 보고 부처님은 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처음에는 이런 것들을 잠깐 보았다가 나중에는 으레 부처님을 보기 마련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표현이 어떨까.
왕용서 국학(王龍舒 國學)
송(宋) 왕일휴(王日休)는 용서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간결하여 경사(經史)에 박식하였으나 하루 아침에 그것들을 내버리고는 “이것들은 모두 업습(業習)일 뿐 구경법은 아니다. 나는 이제 서방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염불을 정진하여, 나이 60에 베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었으며, 하루에 천 배의 절을 하고 밤에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정토문(淨土文)>을 지어 세상에 권하기도 하였다. 죽기 3일 전에 두루 친척이나 아는 이들에게 고별하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 때가 되어 독서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예념(禮念)하더니, 문득 큰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 하고는 나무처럼 반듯이 서서 죽었다.
이웃 사람의 꿈에, 푸른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공을 이끌고 서쪽을 향하여 가는 꿈을 꾸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그를 숭앙하게 되었다.
찬(贊) 용서는 서방을 권발(勸發)하기에 가장 간절했던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심지어 임종시에 수승하고 기이한 상서는 천고에 빛나는 것이었다. 아! 어찌 정토의 성현이 세간에 내려와 중생을 교화했던 분이 아니겠는가.
* 송나라 왕일휴는 유학에 조예가 깊어 국학진사(國學進士)가 되었으나, 후에 느끼는 바가 있어 유교를 버리고 오로지 서방의 정토업을 수행하였다. 남송 소흥 30년(1160)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기원하여 <무량수경>의 사역(四譯)을 교정하고 모아 새롭게 2권 56분의 경을 만들었고,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 10권(지금은 12권이 있지만 뒤 두 권은 후대 사람들이 추가하여 보충한 것임)을 찬술하여 정토의 긴요한 법과 고금에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그는 건도9년(1173)에 죽었다. 그의 정토문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간행되어 많은 이들 사이에서 인용되었다.
또 그는 십념(十念)의 행을 중시하여 매일 새벽에는 합장하고 서방을 향하여 예배하고 열 번 부처님을 불렀으며, 동시에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나무일체보살성문제상선인 (南無一切菩薩聲聞諸上善人)을 각각 열 번씩 불렀다고 한다. 또 재계(齋戒)를 지켜야 한다고 권장하였고, 특히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큰 선이라고 하였다.
만약 질병이 들었을 때에 세 가지 깨끗한 고기 (자기에게 제공된 고기를 죽이는 것을 (1) 보지 않은 것. (2) 듣지 않은 것. (3) 자기를 위해 죽였을 것이라는 의심이 없는 것)를 먹으려고 하면, 이 먹는 고기 중생들을 위해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 삼십육만억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아미타불(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 三十六萬億 一十一萬 九千五百 同名同號 阿彌陀佛)’을 49번 염송하여 그들의 왕생극락을 빌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계살염불(戒殺念佛)설은 당시 교계를 크게 자극하였고, 명나라시대 이후부터는 거사불교의 규범이 되었다.(모찌쯔끼신코望月信亨 지음. 이태원 역, <중국정토교리사>, 운주사, 1997. 409-411쪽에서 정리)
강공망 사간(江公望 司諫)
송(宋) 강공망은 조대(釣臺) 사람이다. 관직이 간의(諫議)에 이르렀으나 거친 음식을 먹으며 청정히 수행하였다. <보리문(菩提文)>과 <염불방편문(念佛方便文)>을 지어 세상을 깨우쳤다. 어려서 죽은 아들이 있었는데, 꿈에 나타나 “아버지께서는 도를 닦아 이미 공업(功業)이 성취되었습니다. 명부에 금자(金字)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엄주부(嚴州府) 강공망(江公望)’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였다.
간관(諫官)의 책임을 맡은 지위에 있었으나, 마음은 불도를 사모하여 몸소 수행하여 마음에 애욕을 없이하였다. 동정(動靜)에 불법을 어기지 않았고 어묵(語黙)에 종풍과 계합하여, 명리는 이미 염부를 벗어났고 몸과 마음은 정토로 돌아갔다. 선화(宣和) 말에는 광덕군(廣德軍)이 되었다가, 어느날 병 없이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어떤 이는 편액에 이름이 적혀있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 영명은 명부에 상(像)을 그려 놓았던 일이 있었고, 탑을 돌던 스님이 이것을 확인하였다. 어찌 유독 공망에 대해서만 의심하랴.
갈번 대부(葛繁大夫)
송(宋) 갈번은 징강(澄江) 사람이다. 젊어서 급제하여 벼슬이 조산(朝散)에 이르렀다. 공서(公署)나 사가(私家)에 반드시 정실(淨室)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 일찍이 방에 들어가 예송하고 있노라니, 사리가 허공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고, 평소 정업을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 권하여 많은 감화를 받기도 하였다. 어떤 스님이 정 중에서 정토를 여행하다, 번(繁)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병 없이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사대부로서 부처님을 믿었던 자는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조롱을 피해 밖으로는 형색을 갖춰가면서 공서에 부처님을 모시는 일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갈 군은 그 독실한 신앙을 회피하지 않은 분이다. 앉아서 숨을 거두고 왕생했던 사실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병 중관(李秉 中官)
송(宋) 이병은 소흥(紹興)의 중관으로 약원(藥院)을 관리하였다. 처음에는 정자사(淨慈寺)의 휘(輝) 공으로부터 선(禪)을 배워 깨달음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용서의 <정토문>을 읽고 매일 염불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으며, 각장(閣張)인 원미(元美), 전장(殿長)인 임사문(林師文) 등 수십인과 전법사(傳法寺)에서
염불회를 결성하였다. 하루는 병이 들었는데, 꿈에 아미타불이 금색 원광(圓光)을 그의 머리에 씌워주는 것을 꿈 꾸었으며, 7일 후에는 금색 꽃이 방에 가득한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친척에게 고별하고 단정히 앉아 인(印)을 맺고 죽었다.
호인 선의(胡闉 宣義)
송(宋) 호인은 관직이 선의였다. 평소에도 불법을 믿었으나 정토를 알지 못하다, 나이 84세가 되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그의 아들이 청조(淸照) 율사를 맞이하여 가르침을 간청하였다. 조(照)가 인(闉)에게 물었다.
“공은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곳을 아십니까?”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도 깨끗할 것입니다.” “공은 스스로 평생을 돌아보십시오. 잡념에 물든 적은 없습니까?” “이왕 세간에서 사는 몸이 어찌 잡념이 없을 수 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이 청정하고 국토가 청정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부처님 명호를 부름으로 해서 어떻게 능히 80억 겁의 생사중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
아미타불은 큰 서원과 오랜 수행으로 위덕이 광대하신 분으로, 광명의 위신력은 불가사의합니다. 그래서 한 번 그의 명호를 부름으로 해서 한량없는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밝은 햇살 아래 서리가 녹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무엇을 다시 의심하겠습니까?” 인은 마침내 깨닫고 그날로 스님을 불러 염불하게 하였다. 다음날 조(照)가 다시 왔다. 인이 “스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두 보살이 강림하신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 하니, 조(照)가 대중과 함께 큰 소리로 염불하자 인이 합장하고 갔다.
찬(贊) 인(闉)이 왕생한 것은 청조를 만났기 때문이요, 청조를 맞이해 온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그를 진정 대효(大孝)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겠다. 세상에는 조그마한 애정에 집착하여 부모의 재계를 망치는 자가 있다. 매우 잘못된 노릇이다.
양무위 제형(楊無爲 提刑)
송(宋) 양걸(楊傑)은 무위주(無爲州) 사람으로 호는 무위자(無爲子)다. 소년에 급제하여 관직이 상서주객랑(尙書主客郞)이 되어 양절(兩浙)의 형옥(刑獄)을 다스렸다. 불법을 존숭하고 선종에도 깨달음이 있었다.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중생의 근기는 날카롭고 둔한 차이가 있으나,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행할 수 있는 법문은 오직 서방정토일 뿐이다. 일심으로 관념(觀念)하여 어지러운 마음을 거두기만 하면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여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천태십의론서(天台十疑論序)>과 <미타보각기(彌陀寶閣記)>, <안양삼십찬(安養三十贊)>, <정토결의집서(淨土決疑集序)> 등을 지어, 널리 서방의 교관(敎觀)을 천양하고 미래 중생을 깨우쳤다.
만년에는 미타장육존상(彌陀丈六尊像)을 그려놓고 늘 수행 관념(隨行觀念)하더니, 목숨이 다하는 날,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감응하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그의 사세송(辭世頌)에 이런 것이 있다. 삶도 연연할 것 없고 죽음도 버릴 것 없네 허공 속의 한 점 구름인 듯 기왕 착오한 일 서방극락에 나아가네. 생역무가연 生亦無可戀 사역무가사 死亦無可捨 태허공중지호자야 太虛空中之乎者也 장착취착 將錯就錯 서방극락 西方極樂
찬(贊) 무위자의 송을 읽어보니, 이른바 선을 참구하여 성품을 보았으면서 다시 정토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겠다. ‘이왕 착오한 일’ 운운은 곱씹을 맛이 적지 않다. 아! 인간의 재사(才士)로서 어찌 이 한번의 착오를 고쳐 나아갈 수 있으랴.
위문진 관찰(韋文晋 觀察)
송(宋) 위문진은 행동거지가 고결하고 정업도량을 세워 널리 중생을 제도하였다. 유월 모일 홀연히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하고 합장한 채 염불하며 죽었다. 기이한 향기를 원근에서 다 맡을 수 있었다.
문언박 로공(文彦博 潞公)
송(宋) 문언박은 서울에서 정엄(淨嚴) 법사와 함께 10만 인을 모아 정토회를 만들었다. 임종에 편안히 염불하며 죽었다.
마우 시랑(馬圩 侍郞)
송(宋) 마우는 그의 할아버지인 충숙공(忠肅公)이 항주 군수일 때부터 자운참주(慈雲懺主)에게서 염불을 배워 온 가족이 숭봉하게 되었고, 우(圩)도 25년 동안 염불하였다. 숭녕(崇寧) 때 조그만 병이 들더니, 옷을 갈아입고 앉아서 갔다. 덮개가 푸른 (마차가 문을 나서는 듯한) 어떤 기운이 하늘로 올라갔다. 가족들이 우(圩)가 상품(上品)에 왕생하는 것을 모두 꿈꾸었다.
종리 소사(鍾離 少師)
송(宋) 종리근(鍾離瑾)은 절서(浙西)의 제형(提刑)으로 있을 때 자운참주를 만나 정토를 독신하게 되었다. 나중에 개봉(開封)의 군수가 되어 나갔을 때는 국사에 전념하고, 들어와서는 잠을 잊고 염불하더니, 갑자기 밤중에 가족을 깨워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앉아서 갔다. 온 집안 식구가 모두 근(瑾)이 푸른 연꽃을 타고 선악 (仙樂)에 인도되어 서쪽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염방영 승무(閻邦榮 承務)
송(宋) 염방영은 지주(池州) 사람이다. 24년 동안 왕생주(往生呪)를 외며 염불하더니, 죽을 때 가족들의 꿈에 부처님이 광명을 놓으며 영(榮)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는데, 새벽에 영이 서쪽을 향해 가부하고 앉았더니 갑자기 일어나 몇 발자국을 걷고는 선 채로 죽었다.
왕충 조산(王衷 朝散)
송(宋) 왕충은 가화(嘉禾) 사람이다. 서호(西湖)에서 염불회를 조직하여 현우(賢愚), 귀천(貴賤),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회에 들게 하였다. <권수문(勸修文)>이 현재 세상에 남아있다. 나중에 병 없이 서쪽을 향하여 앉아 죽었다.
종리 경융 대부(鍾離景融 大夫)
송(宋) 종리 경융은 조청대부(朝請大夫)의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관경(觀經)>을 읽다 염불에 몰두하게 되었다. 사직한 후에는 동원(東園) 곁에 띠집을 짓고 살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미타를 모르면 미타가 서방 밖에 있으나, 미타를 알면 미타는 다만 자기의 집에 있을 뿐이다.” 어느날 저녁, 묘응(妙應) 스님에게 보현행원품을 읽게 하고는 향을 피우고 공경히 듣더니, 두 손으로 인(印)을 짓고 죽었다.
전상조 군수(錢象祖 郡守)
송(宋) 전상조는 호를 지암(止菴)이라 하였다. 금릉(金陵)을 다스릴 때는 날마다 정토를 더 충실히 수행치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향주(鄕州)에 접대십처(接待十處)를 만들어 모두 정토극락 등의 이름을 붙였고, 지암고승료 (止菴高僧寮)를 지어 스님들을 맞이하여 도를 담론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좌상(左相)을 사직하고 돌아와서는 더욱 정업에 힘썼다. 가정(嘉定) 4년[1211] 2월에 조그만 병이 들더니 연꽃향기는 불국에서 풍겨오고 유리의 땅에는 티끌도 묻지 않았네 나의 마음은 저보다 깨끗하여 오늘에야 비로소 한 송이 꽃이 핀 걸 알겠네. 함담향종불국래 菡萏香從佛國來 유리지상절섬애 琉璃地上絶纖埃 아심청정초어피 我心淸淨超於彼 금일요지일타개 今日遙知一朶開 하고 게(偈)를 썼다.
3일 후, 어떤 스님이 병 문안을 하였는데, 공이 “ 나는 삶도 탐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태어나지도 않고 인간이 되지도 않고, 오직 정토에 왕생하고자 할 뿐입니다.” 하더니, 말을 마치자 가부좌하고 갔다. 후에 어떤 사람의 꿈에 공중에서 ‘전 승상은 이미 서방의 연궁(蓮宮)에 태어나 자제보살(慈濟菩薩)이 되었다.’ 하는 꿈을 꾸었다.
매여능 현령(梅汝能 縣令)
송(宋) 매여능은 상숙(常熟) 사람으로 벼슬은 현령을 지냈다. 평소부터 정업에 뜻을 두었더니, 어느날 꿈에 어떤 스님이 종이 백 폭을 주는데 찢어보니 16자의 글자가 되었다. 이 사실을 동령 조(東靈照) 스님에게 물어보니 “열여섯 자란 어찌 <십육관경<十六觀經)>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 때 마침 어떤 스님이 경을 주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경을 읽고 염불하며 스스로 ‘왕생하기 위하여 마음을 보인다(爲往生以見志)’ 하고 이름하였다 그 때 읍의 생(生) 공이라는 분이 장육(丈六)의 미타상을 조성하였는데, 재산 백 만을 보시하여 장식하였다. 그랬더니 법당 앞의 못에 한 쌍의 백련이 피었는데 꽃잎이 백 잎이나 되었다. 그해 겨울에 병 없이 죽었다.
잠정국 학유(昝定國 學諭)
송(宋) 잠정국은 호가 성재(省齋)로서 주학유(州學諭)를 지냈다. 염불하면서 정토의 모든 경전을 읽었고, 매월 24일 마다 승속을 모아 경을 읽고 염불하였다. 가정(嘉定) 4년[1211], 꿈에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부처님이 군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3일 후에는 반드시 저 나라에 왕생할 것입니다 .” 하고 고하였다. 그날이 되어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염불하고 앉아 죽었다.
풍제천 간의(馮濟川 諫議)
송(宋) 풍집(馮檝)은 호를 제천(濟川)이라 하고, 수영(遂寧) 사람으로 태학을 거쳐 과거에 올랐다. 처음에는 선림(禪林)을 찾아 다녔으나, 만년에는 정업만을 숭상하여 <서방문(西方文)>과 <미타참의(彌陀懺儀)>를 지었다. 나중에 급사중(給事中)으로 노주(潞州)에 출정했다가 승속을 모아 염불회를 만들었다. 공주(邛州)를 다스릴 때, 뒷 마루에 높은 자리를 만들고 대궐을 향해 절하고는, 승복을 입고 자리에 올라 주장자를 무릎위에 비껴 얹고 죽었다.
찬(贊) 전등록(傳燈錄)에 공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는데, 처음에는 용문원(龍門遠)을 참예하였고, 다음에는 묘희(妙喜)를 참예하여 각각 깨달음이 있었다. 임종에 미리 기한을 정하고 자리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무릎위에 얹고는 죽었다. 그 자재하고 분명한 모습은 완연히 선문의 여러 종사들의 풍격, 그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그의 염불왕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술하는 자의 뜻을 세우는 입장이 같지 않고, 각각 소중히 여기는 바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저[전등록]는 직지인심(直指人心)만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으레 심지를 밝힌 부분만을 취하고 정토는 생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회옥(懷玉)은 금대가 두 번이나 이르렀고, 원조(圓照)는 연꽃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사실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으나, 여기[왕생집] 서는 이 점을 상세히 기록한 것은 정토로 돌아가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평소에 염불하여 왕생에 대해 대답한 것을 살펴보면, 심성을 밝히는 것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덕을 소중히 여긴다면 안자(顔子)를 덕행의 조목에 나열하고 정사에 대한 부분에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요, 재주를 소중히 여긴다면 안자는 임금을 보필할 만한 그릇을 갖추었다 하고 덕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각기 그 입장이 같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정업을 닦는 자는 돈독히 믿고 의심치 말기 바란다.
왕민중 시랑(王敏仲 侍郞)
송(宋) 왕고(王古)는 자가 민중으로 동도(東都) 사람이다. 벼슬은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으면서 자비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깊이 선종에 계합하였다. 또한 정토법문의 우수함을 깨달아 <직지정토결의집(直指淨土決疑集)> 3권을 지어
평생 염불을 정근했으며, 염주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일상생활에서 늘 서방정관(西方淨觀)으로 불사를 삼았다. 어떤 스님이 정(定)에서 정토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고(古)와 갈번(葛繁)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한다. 왕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신수 진사(吳信叟 進士)
송(宋) 오자재(吳子才)는 호가 신수다. 벼슬을 사직한 후, 미리 관 하나를 만들어 놓고 밤에는 그 속에 누워 동자에게 관을 두드리게 하고 오신수여 돌아가자 삼계는 편치 않아 머물만한 곳 아니다. 서방정토에 연태(蓮胎)가 있으니 돌아가자. 오신수 吳信叟 귀거래 歸去來 삼계무암불가주 三界無安不可住 서방정토유연태 西方淨土有蓮胎 귀거래 歸去來 하고 노래하며 스스로 한 줄씩 화답하였다. 나중에 병 없이 죽었다.
백거이 소부(白居易 小傅)
당(唐) 백거이는 관직이 중대부태자소부 (中大夫太子小傅)를 지냈다. 집을 버려 향산사(香山寺)를 만들고는 스스로 향산(香山)거사라 호하였다. 만년에 풍질을 앓게 되자, 봉전(俸錢) 3만을 내어 서방극락세계를 한 부 그리고, <무량수경>을 의지해 의,정(依正)의 장엄을 매우 자세히 하였다.
그리고는 정례발원(頂禮發願)하여 다음과 같은 게(偈)를 써서 서방을 찬탄하였다. 서방세계 청정한 국토여 모든 악도나 고통이 없네 원하옵노니 저같이 늙고 병든 자 함께 무량수불 처소에 태어나과저. 극락세계청정토 極樂世界淸淨土 무제악도급중고 無諸惡道及衆苦 원여아신노병자 願如我身老病者 동생무량수불소 同生無量壽佛所
찬(贊) 전하는 이야기로는, 봉래에 낙천(樂天)이라는 신선이 있었다는데, 낙천이 이곳을 떠나면서 ‘해산(海山)은 내가 돌아갈 곳 아니요, 돌아간다면 반드시 도솔천이어야 하리. 지금 다시 도솔마저 버리고 정토를 찾노니, 소위 모래를 헤쳐 진금을 찾듯 더욱 빛나고 더욱 아름다우리.’ 하고 노래했다 한다.
장윤 도총(張掄 都總)
송(宋) 장윤은 양절도총관(兩浙都總管)의 벼슬을 지냈던 이다.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약하며 일심으로 염불하니, 온 집안이 그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처자와 함께 하루에 염불 만 번을 불렀다. 효종황제(孝宗皇帝)가 연사(蓮社)라는 친서를 내렸다.
소식 학사(蘇軾 學士)
송(宋) 소식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고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남으로 귀양가는 날, 미타상 한 축(軸: 두루마리) 을 그려 행낭에 넣어가지고 갔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식(軾)이 서방에 왕생하는 징표다.” 하였다. 어머니 정(程)씨가 돌아가시자, 남겨 두신 비녀와 귀걸이를 팔아 호석(胡錫)이라는 공인에게 부탁하여 미타상을 그려 왕생을 천도하였다.
찬(贊) 노천(老泉: 소식의 아버지)은 선망부모를 천도하기 위하여 일찍이 극락원(極樂院)에 여섯 분의 보살상을 조상한 적이 있었고, 자곡(子曲: 소식의 동생)도 역시 매우 가까이 법문에 왕래하였다. 이렇듯 소씨가 삼보에 귀의한 것은 대를 이은 것이었다.
세상에는 서방징표라는 것을 새기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동파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터무니 없는 말을 덧붙여 선전한다. 안목을 갖춘 자는 거짓을 인하여 진실까지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소식(蘇軾. 1036-1101): 북송(北宋)의 정치가, 문학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송대 문학의 제일인자. 호는 동파(東坡).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자주 좌천되고 유배 중에 사망함. 정토종의 제13대 조사이신 인광 (印光. 1861-1940) 대사님의 법문 중에, 오조사(五祖寺)의 사계(師戒) 선사는 송(宋)나라 초기에 천하의 명성을 떨친 훌륭한 스님이었으나 사후에 소동파로 태어났다는 말씀이 있다.
장무진 승상(張無盡 丞相)
송(宋) 장상영(張商英)은 처음에 부인 향(向)씨로 부터 발심하여 불법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호를 무진거사라고 하였다. 그의 발원문에 이런 것이 있다. 이 세계와 오탁의 어지러운 마음을 생각해 보면, 정관(正觀)하는 힘도 없고 요인(了因:보조적으로 사물의 생성을 도와주는 힘)의 힘도 없어서
자성유심(自性唯心)을 능히 깨닫지 못하나이다. 삼가 석가세존의 금구(金口)의 가르침을 따라 아미타불을 전념하려 하옵나니, 저 세존의 원력으로 섭수하사 과보가 다하는 날 극락에 왕생케 하소서. 흘러가는 물에 배를 타듯 자력을 들이지 않고 바로 이르게 하소서.
찬(贊) 무진은 도솔열(兜率悅) 공에게서 선종을 깨달았으면서 정성을 다해 안양에 전념하였으니, 그의 책략은 치밀한 것이었다. 향산으로부터 이 네 분의 공에 이르기까지 비록 서방을 감응한 사실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원인을 근거로 하여 결과를 살펴보건대 서방에 왕생하지 않았으면 어느 곳에 태어났으랴.
* 총론(總論) 내가 듣기에 고덕이 말하기를 ‘사대부로서 총명이 출중한 자는 모두 전생에 중노릇하던 자였다.’ 하였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점은, 끝내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는 자는 열에 아홉이라면 숙세의 인연을 등지지 않는 자는 겨우 열에 하나일 뿐이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탁악세에서는 퇴보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인연들이 잠재하고 있어서 비록 어진 자라 할지라도 이를 면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戒) 선사의 후신은 동파(東坡)요, 청(靑) 선사의 후신은 증노공(曾魯公)이며, 철(喆) 선사의 후신은 부귀에 빠져 근심과 괴로움이 많았던 어떤 자라 하였다.
동파(소동파)는 법문에 가장 가까이 했던 분이니 증(曾) 공이 이왕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 철 선사의 후신은 그 미혹함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고금의 선지식들이 사람들에게 오탁은 버리고 정토를 찾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유민(劉遺民) 이하의 여러 군자들은 그 소득이 적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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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의 왕생(處士往生類)]
연지대사 왕생집 3권
주속지(周續之)
송(宋) 주속지는 안문(雁門) 사람이다. 열두 살에 오경(五經)과 오위(五緯: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다섯 가지 책)에 통달했 으므로 십경동자(十經童子)라고 불렀다. 한가한 곳을 좋아하여 공경(公卿)과의 교류를 피하고 언제나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여산 원(遠) 법사를 섬겨 참예하였다.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그를 불러 함께 담론한 후 매우 기뻐하였다. 누가 “처사의 신분으로 임금의 뜰을 밟으니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마음이 조정에 치달리는 자는 세속을 질곡과 같이 여기겠지만, 마음이 이 두 가지에서 떠난 자는 시정이나 조정이 바위 굴 속일 뿐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통은선생(通隱先生)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종산(鍾山)에 살면서 전심으로 염불하여 나이 들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하루는 공중을 향해 “부처님이 오시어 나를 맞이한다.”하고는, 합장한 채 갔다.
찬(贊) 속지는 ‘시중이나 조장이 바위 굴 속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그렇다면 서방이나 동토(東土)가 다를 바 없다 하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염불하며 왕생할 길을 찾았으니, 그는 진정 이롭고 해로움을 알았던 것이다. 고인의 이런 송(頌)이 있다. ‘높은 산이나 평지가 모두 서방이나. 집에 이르지 못한 자는 희론하지 말라.’
정 목경(鄭牧卿)
당(唐) 정목경은 형양(滎陽) 사람이다. 가족과 함께 염불하다, 개원(開元) 중에 심한 병이 들었다. 누가 어육(魚肉)을 먹어볼 것을 권하자 단호히 거절하며 손에 향로를 들고 왕생을 발원하였다. 그러자 기이한 향기가 가득히 서리더니 별안간에 갔다. 장인인 상서(尙書) 소정(蘇頲)의 꿈에, 보배의 못에 연꽃이 만발한데 목경이 그 속에 앉아 있었다.
장 원상(張元祥)
당(唐) 장원상은 평소부터 염불을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가족을 재촉하여 “서방의 성인이 나를 기다리시며 재계를 마치고 함께 가자고 하신다.” 하더니, 재계를 마치고는 향을 피우고 서쪽을 향해 죽었다.
손량(孫良)
송(宋) 손량은 전당 사람이다. 숨어 살며 널리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나, 그 중 더욱 <화엄경>에서 지취를 얻었다. 대지(大智) 율사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하루에 만 번의 염불을 하여, 이렇게 20년 동안 쉬지 않았다.
하루는 가족들에게 스님을 청해 염불하여 왕생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게 하였다. 스님들이 모여 얼마동안 염불하고 있노라니, 공중을 향해 합장하며 “부처님과 보살이 이미 왕림하셨다.”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죽었다.
찬(贊) < 화엄합론(華嚴合論)>에는 ‘정토에 왕생하려 하는 보살은 일승대도(一乘大道)를 깨닫지 못한다’ 하였으나, 이 노인은 화엄의 지취를 얻었으면서 어찌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랬을까? 대개 합론은 우선 일부 모양에 집착한 범부를 위하여 그 집착하는 견해를 파했던 것으로,
이는 사정토(事淨土)를 얻었고 이정토(理淨土)는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노인은 사(事)와 이(理)에 원통하여, 화장 (華藏)과 연지(蓮池)가 하나이지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가 왕생을 구했던 것은 의심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정토를 닦는 자는 화엄의 행원품을 의지하고 <합론>은 참고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원자평(元子平)
당(唐) 원자평은 경구(京口) 광음사(觀音寺)에 우거하며 염불하였다. 어느날 홀연히 공중에서 음악소리를 듣고 서쪽을 향하여 앉아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며칠동안 끊이지 않았다.
유선(庾銑)
양(梁) 유선은 신야(新野) 사람이다. 무제(武帝)가 불러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염불에만 전념하였다. 어느날 저녁, 자칭 원 공이라는 도인이 나타나 선(銑)을 ‘상행선생(上行先生)’이라 부르고는 향을 주고 가면서 4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죽는 날, 공중에서 ‘상행선생은 이미 안양에 태어났다 .’ 하는 말이 들려왔다.
송만(宋滿)
수(隋) 송만은 상주(常州) 사람이다. 콩을 헤아리면서 염불하여 30 석의 콩을 쌓았다. 개황(開皇) 8년[588] 9월, 이것들을 스님들께 공양하고는 앉아서 갔다. 사람들이 보니, 하늘꽃과 기이한 향기 속에서 만(滿)이 공중에 올라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분양 노인(汾陽老人)
당(唐) 분양 노인은 법인사(法忍寺)에서 빈 방 하나를 빌려 기숙하면서 주야로 염불하였다. 정관(貞觀) 5년[631], 목숨이 다하는 날, 큰 광명이 두루 비치는 가운데 서쪽을 향해 죽었다. 사람들이 보니 연대(蓮臺)를 타고 있었다.
원자재(元子才)
당(唐) 원자재는 윤주(潤州) 관음사(觀音寺)에 살면서 <미타경>을 읽으며 염불하였다. 어느날 조그만 병이 들었는데, 공중에서 향기와 음악소리가 들려오며, 누가 ‘거친 음악이 사라지고 세밀한 음악이 이어서 들려올 때, 군은 반드시 가라.’ 하는 소리를 듣고 염불하며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며칠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 거친 음악과 세밀한 음악: 거친 음악이란 징과 북 따위의 타악기로만 연주하는 음악. 세밀한 음악은 관현악기로 내는 경쾌하고 맑은 소리의 음악을 말한다.
오자장(吳字章)
원(元) 오자장은 소주(蘇州) 사람으로, 대대로 의업(醫業)에 종사하였다. 형인 자재(子才)와 함께 운옥(雲屋) 화상을 참예하고 염불을 정근하여 온 집안이 불법을 숭봉하였다. 지정(至正)년 간에 병 없이 합장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죽었다.
하담적(何曇迹)
원(元) 하담적은 나이 18세에 보살계를 수지하며 염불하던 이다. 어느날 사고(四鼓: 오전 두시 경)에 일어나 염불을 하고 있노라니, 어떤 사람이 “너무 이르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의 금상(金相)과 깃발과 꽃이 와서 맞이합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죽었다.
왕전(王闐)
송(宋) 왕전은 사명(四明) 사람으로, 호를 무공수(無功叟)라고 하였다. 모든 선림의 종지와 천태의 교의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정토자신록(淨土自信錄)>을 저술하였다. 만년에는 염불에 전심하며 앉아서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자욱하였다. 다비에 붙여 콩만한 사리 108 낱을 얻었다.
범엄(范儼)
송(宋) 범엄은 인화(仁和) 사람이다. 세상의 일에 무심하여, 그의 아들이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으나 엄(儼)은 못 본 체하며 “나는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하며, 날마다 <법화경>을 읽고 아미타불을 염하기에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날 보현보살이 육아(六牙)의 흰 코끼리를 타고 금색 광명을 놓으며 엄에게 말하기를, ‘내일 묘시(卯時)에 반드시 가라.’ 하시는 것을 보고, 다음날 저녁, 불 보살이 와서 맞이하자 자리에 앉아 합장하고 갔다.
육원(陸沅)
송(宋) 육원은 도호(道號)를 성암(省菴) 거사라 하고 명(明)의 개울가에 살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향을 피우고 가부좌하고 앉아 눈으로 다른 것을 보지 않고 먼저 게(偈)를 읊기를 새벽에 일어나 손을 씻고 패엽(貝葉)을 펼치니 복을 구하지도 않고 재앙도 바라지 않네. 세상 인연 끊어진 곳, 그것을 따라 끊어지나니
겁화(劫火)의 광명 속에서 한 바탕 춤추네. 하고는, 그런 다음에 염불을 하고 경을 읽되, 더디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아 마치 구슬을 꿰듯 하였다. 이렇게 매일 <법화경> 한 번을 읽고 미타 만 번을 부르면서 한결같이 서방을 염원하였다. 나이 85세 나던 해 4월 6일,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갔다. 염습할 때, 어디서 풍겨오는지 연꽃향기가 진동하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입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충(孫忠)
송(宋) 손충은 사명(四明)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서방을 사모하여 마을의 동쪽에 암자를 짓고 염불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스님 백 명을 청해 염불하게 하더니, 갑자기 허공을 향해 합장하고 손으로 쌍인(雙印)을 짓고 미소하며 죽었다. 온 마을이 하늘 음악과 기이한 향기가 점점 서쪽을 향하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염불하여 또한 앉아서 죽었다.
심전(沈詮)
송(宋) 심전은 전당 사람이다. 처 시(施)와 함께 정토를 전심하여 평소의 모든 선행을 모두 서방에 회향하였다. 나중에 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목숨을 마쳤는데, 모두 화불(化佛)이 석장을 잡고 접인해 가는 것을 감응하였다.
당세량(唐世良)
송(宋) 당세량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계행을 청정히 지키며 일심으로 염불하여 , 늙고 병이 들었으면서도 자리에 눕지 않고 <미타경> 10만 번을 읽었다. 어느날 식구에게 “부처님이 와서 나를 맞이하신다 .” 하고는, 예하고 앉아서 죽었다.
이(利) 스님이 그 때 도미산(道味山)에 머물고 있었는데, 간밤 꿈에 서방의 기이한 향기와 깃발과 꽃과 하늘음악이 들려오는 가운데 공중에서 ‘당세량은 이미 정토에 태어났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공(計公)
송(宋) 계공은 사명(四明) 도원(桃源)의 대장장이였다. 나이 70에 두 눈을 실명했는데, 그 때 그 마을에 잠학유 (昝學喩)가 벽과도(擘窠圖: 글씨나 그림을 새긴 판)를 인쇄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염불하기를 권장하였다. 계(計) 공이 처음에 그림 한 장을 받아 36만 번의 염불은 채웠고, 염불이 넉 장의 그림에 이르러서는 두 눈이 밝아졌다. 이렇게 3년 동안 열일곱 장의 염불을 채웠다.
어느날 숨이 끊어졌다가 반나절 만에 다시 소생하여 “부처님이 그림 여섯 장을 나누어 잠학유에게 주게 하였다. 그는 당초에 나를 인도해 준 분이다. 또한 그림 한 장을 나누어 이이(李二) 공에게 주게 하였다. 그는 그림을 나누어 준 분이다. 그러니 그의 아들에게 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하셨다.” 하고는 목욕하고 서쪽을 향해 영원히 갔다.
진군장(陳君璋)
원(元) 진군장은 황암(黃岩) 사람이다. 성품이 신중하고 과묵했으며, 나이 40에 부인 섭(葉)씨와 함께 <법화경>을 읽으며 염불에 전념하였다. 60에 큰 병이 들더니, 하루 저녁에는 아들 경성(景星)에게 부축하게 하여 앉고서는 “내가 이젠 돌아가야겠다.” 하였다.
아들이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 “숨을 곳으로 간다.” 하였다. 그리고는 또 “내가 죽으면 반드시 사문의 다비법을 따라야 한다.” 하고는, 합장한 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갔다.
장전(張詮)
진(晋) 장전은 농부였다. 성품이 고상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농사짓는 틈틈이 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벼슬을 주며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가난을 즐거워 했으며, 심양(潯陽)의 태수로 천거했으나 웃으며 “고인은 무릎을 펼만한 곳으로도 만족하게 여겼다.
어찌 뜻을 굽혀 가면서 녹을 구해 영화를 누리는 일이 있었겠는가.”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여산에 들어가 원 공의 연사(蓮社)에 의지하여 내전(內典)을 연구하여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송(宋) 경평(景平) 원년[423], 병 없이 서쪽을 행해 염불하고 편안히 누워 죽었다.
궐공칙(闕公則)
진(晋) 궐공칙(궐공즉으로도 읽음)은 여산의 연사로 들어갔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친구가 낙양 백마사(白馬寺)에서 그를 위해 밤중에 기제(忌祭)를 지내고 있노라니, 갑자기 숲과 전각들이 금색으로 변하면서 공중에서 ‘나는 궐공칙이다.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랬더 니 지금 이미 왕생하였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찬(贊) 임종에 상서로운 일을 감응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 죽은 후에 다른 곳에서 금색을 나투며 왕생을 알려 온 사실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지요(李知遙)
당(唐) 이지요는 정토의 가르침을 숭봉하여, 대중을 이끌어 다섯 차례의 염불회를 가졌다. 후에 병이 들더니 갑자기,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향로를 들고 방을 나가 정례하였다. 그리고서 공중에서 ‘그대를 인도하여 정토에 왕생케 하노니, 그대는 이제 금교(金橋)에 오르라.’ 하는 게(偈)를 듣고는, 자리에 올라 앉아 죽었다. 대중이 모두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고호상(高浩象)
양(梁) 고호상은 동평(東平) 사람으로, 문을 닫아걸고 정좌하여 <무량수경>만을 읽었다. 일찍이 정(定) 중에서, 자신이 못 위에서 홍련을 타고 있는데, 처음에는 부처님을 보지 못했으나 연꽃 속에서 마음을 기울여 부처님께 예배하며 부처님의 얼굴을 생각했더니, 광명이 먼 곳에서 비춰오는 것을 보았다. 어느날 저녁, 많은 보살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는 즉시 죽었다.
찬(贊) 옛날 두 스님이 연꽃이 피고 지는 것을 생각하고는 나중에 동시에 정토에 왕생한 일이 있었다. 상(象)의 몸이 홍련을 탔다는 것도 역시 관상(觀想)이 정성스러운 소치이리라.
서육공(徐六公)
송(宋) 서육공이란 분은 가흥(嘉興) 사람으로, 농부였다. 부부가 나물만 먹으면서 40년 동안 염불을 정근하였다. 미리 감실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가 임종에 베옷과 짚신을 갈아 신고 감실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있더니, 잠시 후에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 하고는 곧 죽었다.
육준(陸俊)
송(宋) 육준은 전당 사람이다. 젊어서는 공문(公門)에 종사했으나 나이 들어서 이를 버리고 오로지 정토만으로 업을 삼았다. 부처님을 대하여 참회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고, 도우(道友)와 만나 정토의 인연을 말할 때는 겨우 열 마디만 하면 슬피 울며 감탄하였다.
임종에 원정(圓淨) 율사에게 서방을 간청하더니, < 관경>을 읽다 상품(上品)에 이르러 정(淨)이 “이젠 가시오.” 하니, “성인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잠깐만 기다리겠습니다.” 하더니, 잠시 후에 갑자기 일어나 죽상(竹牀)으로 가서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 무량수경>에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금방 눈물을 흘리는 자는 모두 숙세에 선근의 소치다.’ 하였다. 준(俊)이 슬피 운 것은 마음속에서 감동하여 얼굴에 나타난 것이니, 그의 왕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요즘 희롱삼아 정토를 말하는 자는 어찌 옳을 리가 있겠는가.
황타철(黃打鐵)
송(宋) 황공은 담주(潭州) 사람이다. 본시 군오(軍伍) 를 지냈으나 쇠를 다루는 일로 생계를 삼았다. 망치를 칠 때마다 입에서 염불을 끊이지 않더니, 하루는 병없이 이웃 사람에게 이렇게 송(頌)을 말하고는 갔다. 딱딱! 쿵쿵! 오랫동안 단련하여 무쇠가 되네 태평이 가까워 오니 나는 이제 서방으로 가네
가가당당 呵呵璫璫 구련성강 久鍊成剛 태평장근 太平將近 아왕서방 我往西方 그 송이 호남지방에 널리 퍼져 염불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찬(贊) 황 공은 그다지 남다른 재능도 없이 그저 입에서 염불을 끊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본받아 실행하려고는 않고, 기이하고 교묘한 것만을 찾으며 마침내 세월을 허송하고 만다. 아! 이른바 쉽고 간단한 길을 버리고 도리어 어려운 길을 찾으려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연화태공(蓮花太公)
대명(大明)의 연화태공이란 분은 월(越) 사람이었다. 성품이 순박하여 오직 밤낮으로 염불을 끊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죽은 후 관 위에 홀연히 연꽃 한 송이가 피어 났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경탄하여 연화태공이라 불렀다.
화거사(華居士)
대명(大明)의 화 거사는 강천(江千) 사람이다. 성품이 순박하여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법이 없었다. 중년에 가업을 자식들에게 전하고는 혼자 방 한 켠에 살면서 세상 일에 관계하지 않고 오직 밤낮으로 염불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나중에 목숨이 다하는 날 ,
때가 이른 것을 스스로 알고 옷을 갈아입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손수 의관을 단정히 하고는 단정히 앉아 식구들에게 고별하고 갔다. 그의 아들이 미리 관을 만들어 두었다가 감실로 바꾸게 되었는데, 이는 사문의 법을 따른 것이었다. 감실을 들어 옮기는 날, 구경꾼이 담을 치듯 모여들어 원근이 추모해 마지 않았다.
총론 어떤 이가 “정명(淨名: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이름)과 방(龐: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은 방온龐蘊을 이름) 거사는 어찌하여 왕생을 구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대가 스스로를 평가해 보라. 만약 두 공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왕생을 구해야 하는 것은 굳이 논할 필요가 없겠거니와, 설사 다시 오신 금속여래(金粟如來: 정명의 전신이라 한다)라 하더라도 다시 미타를 친견한다 하여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명은 석가를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이요, 방 거사도 마조(馬祖)를 참예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 한 것은 정명의 말이 아닌가? ‘만법과 짝하지 않은다’. 한 것은 방 거사의 말이 아닌가? 그대가 하루 아침에 정토를 밟는다면 반드시 ‘어찌 자기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를 바라겠으며, 어찌 자기의 생각이 만법과 짝하지 않기를 바라겠으며, 어찌 두 공이 일찍이 정토에 있는 적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말할 것이다.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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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의 왕생(尼僧往生)]
연지대사 왕생집 4권
대명(大明) 비구니
수(隋) 대명 비구니는 방에 들어가 예념(禮念)할 때마다 먼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입에 침향(沈香)을 머금었다. 문제(文帝)의 왕후가 매우 가까이 하였다. 죽는 날, 침향이 방에 가득하더니, 잠시 후에 광명이 구름과 같이 일며 은은히 서쪽을 향해 사라지는 것을 온 대중이 보았다.
찬(贊) 어떤 비구는 <법화경>을 독송하여 후에 영이(靈異)한 과보를 감응했고, 또 어떤 스님은 <지장경>을 독송하여 수특(殊特)한 예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도 괴이쩍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염불하는 자로서 과연 몇 사람이나 명(明)과 같이 하는 자가 있는가? 누구라도 이렇게만 염불한다면 천이면 천 사람, 만이면 만 사람, 누구라도 왕생하지 못할 자가 없다.
정진(淨眞) 비구니
당(唐) 정진 비구니는 장안 적선사(積善寺)에 살면서 누더기를 걸치고 걸식하며 <금강경> 10만 번을 독송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어느날 제자에게 “다섯 달 동안에 열 번이나 부처님을 보았고 두 번 보련화(寶蓮花) 속에서 동자가 뛰노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미 상품(上品)을 얻었다.” 하고는, 가부좌하고 죽었다. 상서로운 광명이 암자에 가득하였다.
오성(悟性) 비구니
당(唐) 오성 비구니는 여산에서 염불하며 지극히 왕생을 발원하였다. 어느날 홀연히 공중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 곁에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중품(中品)에 왕생하게 되었다. 함께 염불정진하던 이들이 모두 연꽃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희들도 노력하라.” 하고는 갔다.
찬(贊) 상품과 중품의 지위를 두 비구니가 능히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안으로 스스로 실행했던 얕고 깊은 정도를 살펴보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밖으로 감응의 낮고 못하고를 살펴보았기 때문으로, 괜한 말이 아니다.
능봉(能奉) 비구니
송(宋) 능봉 비구니는 전당 사람으로, 정업만을 전수하였다. 어느날 부처님의 광명이 몸에 비치고 공중에서 따뜻한 말로 위로하는 소리를 꿈 꾸고, 제자들에게 “나의 왕생할 때가 이르렀다.” 하더니, 잠시 후 봉(奉)이 큰 소리로 염불하는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 가보니, 합장하고 서쪽을 향하여 앉아서 갔다. 기이한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고 음악소리가 서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법장(法藏) 비구니
송(宋) 법장 비구니는 금릉(金陵) 사람으로 일심으로 염불에 뜻을 두었던 이다. 밤에 불보살이 찾아오시고 광명이 절을 비치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죽었다.
총론(總論) 부처님께서는 이모가 출가하려 하시자 정법이 이로 말미암아 감손하게 될 것이라고 한탄하셨다. 그러나 만약 여인으로서 출가한 자가 모두 위의 다섯 비구니만큼만 한다면 정법이 더욱 창성할 것이다. 그러나 세태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부처님의 예언이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아! 진정으로 출가한 남자도 요 근래에는 그다지 찾아보기 어렵거든, 하물며 여인이겠는가. 나는 유감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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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의 왕생(婦女往生類)]
연지대사 왕생집 5권
수(隋) 황후
수문제(隋文帝)의 황후는 성이 독고(獨孤)씨로써, 비록 왕궁에 살았으나 여자의 몸이 된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어느날 아미타불을 부르다 8월 갑자(甲子)에 죽었다. 그 때 영안궁(永安宮) 북쪽에서 갖가지 음악이 진동하고 기이한 향기가 흘러나왔는데, 그것은 공중으로부터 흘러오는 것이었다.
임금이 사제사나(闍提斯那)에게 " 이것이 무슨 상서인가?" 하고 물으니, 사나는 "정토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호를 아미타불이라고 하십니다. 황후는 지은 업이 고결하여 저 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서가 나타났을 뿐입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찬(贊) 궁중의 귀총(貴寵)을 버리고 정토를 바래 왕생한 이로서, 예전에는 위제(韋提)가 있었고, 지금은 이 분을 보겠다.
* 사제사나(闍提斯那): 원용願勇이라고 번역. 사견외도邪見外道. * 위제(韋提): 승묘신(勝妙身)으로 번역. 마갈타국의 빈비사라왕의 황후이며, 아사세왕의 어머니. 이 위제(희) 부인의 청(請)으로 부처님께서 <불설관무량수경>을 설하시게 되었다.
요(姚) 노파
당(唐)의 요 노파는 범행(范行)이라는 노파가 권하여 염불하게 되었다. 임종에 불보살이 와서 맞이하자 부처님에게 " 아직 범행 노파에게 고별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 잠깐만 공중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아뢰었다. 범(范)이 오자 노파는 서서 죽었다.
찬(贊) 갈 길이 다달아 범(范)에게 고별한 것은 근본을 등지지 않은 것이요, 부처님이 공중에서 서서 기다리신 것은 늘 중생의 뜻을 따르신 것이다. 우뚝 서서 간 것도 기이한 일이다.
온정문(溫靜文)의 처
당(唐) 온정문의 처는 병주(幷州) 사람이다. 오랫동안 병석에서 누워지내자 정문이 권하여 염불하게 하였다. 1년 만에 홀연히 정토를 보고, 그의 남편에게 "저는 이미 부처님을 친견했습니다. 다음달에는 가게 될 것입니다." 하고, 부모님에게는 "지금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나이다. 부디 일심으로 염불하여 후일 서방에서 만나뵙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하고는 갔다.
호장(胡長) 노파
송(宋)의 이(李)씨 호장 노파는 상우(上虞) 사람이다. 남편이 죽은 후 밤낮으로 큰 소리로 염불하고 <미타경>을 독송한 지 무려 10여 년이나 되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비단 보자기로 닾어주면서 " 할머니는 15일 자시(子時)에 왕생할 것입니다." 하였다. "스님께서는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 할머니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노파는 친지들과 고별하고, 때가 되자 기이한 광명 속에 단정히 앉아서 갔다. 7일 만에 화장하니, 치아는 백옥과 같고 혀는 홍련과 같고 누동자는 포도와 같으면서 모두 정밀하고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었다. 사리는 헬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날 화장한 곳에 꽃 한 송이가 피었는데, 마치 흰 양귀비와 같았다.
찬(贊) 몸의 여러 기관은 부서지지 않았고 사리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하니, 세상에서 흔히 여자는 불결한 몸을 가졌다는 말이 천부당만부당 하지 않은가.
정씨(鄭氏)
송(宋)의 정씨는 전당사람이다. 날마다 <관음경>을 독송하고 염불을 끊이지 않았다. 나중에 병 중에서 목욕을 하고는 서쪽을 향해 앉아 가족들에게 "경쇠 소리가 들리느냐? 정토의 여러 성인들이 장차(且) 오시려 한다." 하더니, 얼마 후에 합장하고 매우 기뻐하며 "불보살님이 오셨다. 관음보살님은 손에 금대를 들고 계시고, 여래께서는 나를 이끌어 자리에 오르게 하신다." 하고는, 즉시 죽었다.
진씨(陳氏) 노파
송(宋) 진씨 노파는 전당사람이다. 영지(靈芝) 율사에게서 보살계를 받고 일심으로 염불하면서, 하루에 천 배의 절을 하였다. 어떤 때는 경상(經床) 위에 사리가 흩어진 적도 있었다. 임종에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 곁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채 반 시각도 안 되어서 단정하고 의젓하게(凝然) 움직이지 않았다.
황씨(黃氏)
송(宋) 황씨는 사명(四明) 사람이다. 일찍 남편을 잃고 친정에 돌아와 정업 (淨業)을 정성들여 수행하였다. 임종에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 인 (印)을 맺고는 천천히 걷다 우뚝 서서 죽었다. 가족들이 땅에 재를 뿌리고 왕생한 곳을 시험했더니 연화 한 송이가 재 속에서 피어났다.
찬(贊) 재를 뿌렸다는 이야기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부처님이 오셔서 맞이하는 것을 보았고, 인(印)을 맺고 서서 갔다는 사실로써 연품(蓮品) 에 올랐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왕씨(王氏) 부인
송(宋) 형왕(荊王)의 부인 왕씨는 정업을 전수하여 밤낮을 잊을 지경이었다. 곁에서 모시는 자들이 그를 본받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한 첩만이 게을러 부인이 나무라자 마침내 크게 깨닫고 정진하더니, 갑자기 병 없이 죽었다. 다른 첩의 꿈에 나타나
"부인의 가르침을 입어 이미 안양에 왕생하였소." 하고 말하였으나 부인은 믿지 않았다. 얼마 후 부인의 꿈에 그 첩과 함께 보배의 연못을 여행하게 되었다. 어떤 꽃을 보니 하늘 옷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양걸(楊傑)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꽃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앉아 있었는데 마우(馬圩)라고 적혀 있었다.
다시 금대를 바라보니 광명이 휘황하였다. 첩이 이곳을 가리키며 "부인께서 태어날 곳입니다." 하였다. 꿈에서 깨어나서는 더욱 정진에 힘썼다. 81세 나던 생일날, 새벽에 촛불을 들고 향을 피운 채 관음각(觀音閣)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친지들이 막 차림새를 갖춰 헌수(獻壽)하려 하자 이미 서서 죽었다.
찬(贊) 여기까지 여인으로 서서 죽은 자가 세 사람이나 있었다. 금대가 휘황하였다는 것은 상품(上品)임을 알 수 있다. 누가 규각(閨閣: 부녀자의 거실. 곧 여인을 뜻함)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하던가!
풍씨(馮氏) 부인
송(宋) 광평군(廣平郡)의 풍씨 부인은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다. 자수 심(慈受深) 선사로부터 재계염불(齋戒念佛)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는 깊이 믿고 힘써 행하여 10년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싫어하여 사람들이 괴이쩍게 여기니
"청정한 세계에서 잘못되어 이곳에 왔다. 사바의 인연이 다하면 서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이 괴이할게 있겠는가." 하였다. 임종에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여 가족들에게 " 나는 이미 정토로 돌아갔다. 부처님의 세계를 보니 화엄이나 <십육관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고는 영원히 갔다. 3일 후에 시체를 들어 옮기니 생시와 같았고, 기이한 향기가 진동하였다.
왕씨(王氏)의 딸
송(宋) 길안(吉安)의 왕씨 딸은 미타․금강․관음 등 여러 가지 경전을 독송하면서 염불로 안심입명 (安心立命)을 찾았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이미 염습을 했는데도 더러운 피가 흘러나왔다. 딸이
"만약 제가 효성스러웠다면 더러운 냄새가 나지 마소서." 하고 발원하니, 이내 피가 멎었다. 아버지가 후실(後室)을 들이자 함께 정업을 닦았다. 나중에 병이 들어 스님에게 정토관법(淨土觀法) 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하고는, 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편안히 누워 관음이 손을 들고 있던 깃발을 잡고는 고요히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땅에 재를 뿌리고 태어난 곳을 시험했더니, 재 속에서 연꽃 몇 송이가 피어났다
주씨(周氏)
송(宋) 주씨 묘총(妙聰)은 주원경(周元卿)의 딸이다. 그의 어머니가 화대(花臺)에 왕생한 상서를 감응하고는, 자신이 새 옷을 갈아입고 부처님의 누각 위에서 예를 드리고 염불하는 것을 보고는, 식구들에게 "부지런히 정업을 닦으셔요. 서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서쪽을 향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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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인(破戒人)의 왕생]
연지대사 왕생집 6권
장선화(張善和)
당(唐) 장선화는 소 잡는 직업을 가졌던 자이다. 임종에 소떼들이 사람 말을 하며 목숨을 보상하라고 아우성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 처를 불러 “속히 스님을 불러 나를 위해 참회하게 하라” 하였다. 스님이 와서 “<관경(觀經)>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임종에 악상(惡相)이 나타나는 자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 라고요”하고 깨우쳐 주었다. 그러자 화(和)가 “지옥이 눈 앞에 닥쳤습니다. 향로를 잡을 틈도 없습니다.” 하고는, 왼손에는 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향을 잡고는 서방을 향하여 지극하게 염불하더니, 미처 열 번도 채 채우기 전에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한다.” 하고는 죽었다.
찬(贊) 지옥이 눈 앞에 닥친 것을 알고는 손으로 향로를 받들었다는 것은, 사정이 급박하고 마음이 조급하여 간절하고 정성스러웠을 뿐 그 밖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을 것이니, 비록 열 번을 채 채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가롭게 백 천만 억념(念)을 하는 자를 훨씬 뛰어넘었을 것이 아닌가. 그가 왕생했다는 사실은 결코 의심할 의지가 없다 하겠다. 혹시 보살의 시현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지 모르나, 그럴 수도 있겠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장종규(張鐘馗)
당(唐) 장종규는 닭 잡는 백정이었다. 병이 극심하여 중태에 빠져 누워있는데, 붉은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닭 떼를 몰아 그를 쪼아대니 피가 흘러 온 얼굴을 덮는 것을 보았다.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스님이 그를 위해 불상을 모셔주고 염불하도록 가르쳤다. 얼마 후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편안히 갔다.
웅준(雄俊)
당(唐) 웅준은 성도(成都)에 살았다. 기백과 용기가 지나쳐 계율 따위는 아예 무시했다. 일찍이 중노릇을 그만두고 군인이 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중이 되었다. 그리하여 경에 ‘한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80억 겁의 생사중죄를 면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마침 이런 일도 있었구나!”하였다.
이로부터는 비록 악한 일을 저지르면서도 염불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미(丁未) 2월에 갑자기 죽었다가 하룻밤을 지나 다시 소생하여 “명부에 가니 주인되는 자가 ‘너를 잘못 데려왔다. 너는 본시 염불에 큰 믿음이 있었던 자가 아니니, 지금 인간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더욱 염불에 힘써라’하지 않겠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지옥에서도 도망할 틈이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후에 산에 들어가 재계하며 염불하였다.
4년이 지난 신해(辛亥) 3월에 스님들을 모우고는 “이젠 내가 갈 때가 되었다.너희들은 성(城)으로 돌아가 나를 아는 자들을 만나거든 나를 대신해 말하라. 준(俊)은 염불하여 왕생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지옥은 사람을 도망하게 하는 법이 없다고.”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다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향기와 비린내는 한 그릇에 담지 못한다. 악한 짓을 하다 염불을 핟 하면서 어찌 왕생할 수 있겠는가. 아! ‘마침 이런 일도 있었구나!’하고 말한 것이나. 부처님을 부르면 죄를 멸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은 골수에 새겨진 것이었다. 곧 이 한 생각의 힘은 만균(萬鈞: 30만 근)보다 무겁다. 임종에 업을 바꾸어 왕생했다는 사실을 어찌 의심하랴.
유공(惟恭)
당(唐) 유공은 법성사(法性寺)에 살았다. 선량한 자를 우습게 여기고 나쁜놈들 만을 가까이 하니 술주정뱅이 노름꾼 따위가 언제나 그의 주위에 모여 들었다. 그러다 잠시 틈이 나면 염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절에 영규(靈巋)라는 자도 한 패거리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말했다.
‘영규는 악을 짓고 유공도 뒤지라면 서러워 할 지경이다. 지옥은 천 겹, 둘 다 들어가도 마다하지 않는다.’ 공(恭)이 그 말을 듣고는 “내가 비록 악업을 짓긴 했지만 지은 죄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마침 정토 교주께서 나의 허물을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도탄에서 건저주실 것이다. 어찌 다시 악도에 떨어지랴.” 하였다.
건녕(乾寧) 2년(895), 병이 위독하게 되었다. 그 때 규(巋)가 밖에서 돌아오다 어린애들처럼 때때옷을 차려입은 영인(伶人)* 몇 명을 만났다. 어디서 오는 자들인가를 물으니 “서쪽에서 왔소. 공 상인(恭上人)을 맞이하려 하오” 하더니 한 사람이 품 속에서 금병(金甁)을 꺼냈다.
병 속에는 연꽃이 있었는데 마치 주먹을 쥔 것처럼 오무라져 있었다. 잠시 후 차츰 꽃잎이 벌어져 사발만 해지니 그 광채가 눈이 부셨다. 이들은 절을 향해 내달음질 치더니 금새 보이지 않았다. 규가 절에 도착하니 종소리가 울려왔다. 공이 이미 죽은 것이었다.
형가(瑩珂)
송(宋) 형가는 잡천(霅川)의 요산(瑤山)에서 배웠던 자였으나 술 고기를 가리지 않았다. 어느날 홀연히 파계로 인하여 악도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함께 사는 자에게 부탁하여 계주(戒珠)선사가 펴낸 <왕생전(往生傳)>을 구해 읽었다. 한 분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머리를 끄떡거렸다.
그런 후에 방안에서 서쪽을 향해 선상(禪椅)을 놓고 음식을 끊어가면서 염불하였다. 3일째 되는 날, 꿈에 부처님이 “너는 10년을 더 살 수 있다. 우선 더욱 정업에 힘서야 한다.” 하였다. 그러자 가(珂)가 부처님에게 “설사 백년을 산다 해도 이 세계는 탁악(濁惡)하여 정명(正命)을 잃기 쉽습니다.
원하는 바는 하루빨리 안양에 왕생하여 여러 성인들을 모시고 싶습니다.”하고 아뢰었다. “너의 뜻이 그렇다면 3일 후에 반드시 너를 맞이하리라.” 그날이 되어 대중에게 <미타경>을 독송하게 하고는 “부처님과 대중들이 모두 여기에 오셨다”하고, 고요히 갔다.
* 왕생전(往生傳) : 송나라 비산계주(飛山戒珠)가 저술한 <계주전(戒珠傳)>을 이름. 양(梁), 당(唐), 송(宋)의 고승전 중에서 정토왕생한 75인의 사적을 뽑아 엮은 것.
중명(仲明)
송(宋) 중명은 산음(山陰) 보은사(報恩寺)에 살면서 평소 계행을 지키는 법이 없었다. 나중에 병이 들어 동학인 도영(道寧)에게 “나는 지금 마음이 매우 어지럽소. 무슨 약으로 치료하면 좋겠소?”하고 물었다.
영은 호흡을 따라 염불하게 하였다. 명은 가르친 대로 시행하였으나 7일 째 되는 날에는 힘이 이미 탈진하였다. 영이 이번엔 눈 앞의 불상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렇게 오래하여 홀연히 두 보살을 보았고, 다시 부처님을 보고는 눈을 감고 갔다
오경(吳瓊)
송(宋) 오경은 임안(臨安) 사람이다.
본시 중이었으나 도를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가 전후에 두 번 장가들어 아들 둘을 얻었다. 짐승을 잡고 술을 파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푸줏간에서 닭이나 오리 따위를 죽여 이것을 치켜들고는 “아미타불님! 이 몸 어서 데려가오”하며 연신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칼 질을 하여, 고기를 썰 때마다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눈 위에 계란같이 생긴 혹이 생기자 몹시 두렵고 걱정이 되어, 초암(草庵)을 짓고 처자를 흩어버리고서는 염불과 예참으로 밤낮을 잊을 지경이었다. 소흥(紹興) 23년(1153), 사람들에게 “경(瓊)이 이젠 내일 숳시(戌時)에 떠나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다음날 저녁 베옷으로 술을 바꾸어 마시고는 이렇게 노래 한 수를 지었다.
술과 같이 다 공(空)한 것 무슨 선종(禪宗) 따위 물으랴 오늘은 부디 안녕히 명월청풍(明月淸風)과 같이 似酒皆空 사주개공 問甚禪宗 문심선종 今日珍重 금일진중 明月淸風 명월청풍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합장 염불하다가, “부처님이 오셨다”하고 부르짖고는 죽었다.
김석(金奭)
송(宋) 김석은 회계(會稽) 사람으로, 어부였다.어느날 갑자기 크게 반성하고 계행을 지키며 정진하여 하루 만 번의 염불을 오래토록 지속하였다. 나중에 병 없이 가족에게 말하기를 “아미타불과 두 보살이 모두 오셔서 나를 맞이한다. 나는 이제 정토로 돌아가련다”하고는,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석(奭)의 일은 선화(善和)나 종규(鐘馗)와는 다르다. 저들은 평소에는 악업을 짓다 임종에 이르러 정성을 다했거니와, 이 이는 미리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오랫동안 선업을 닦았다. 왕생의 품위도 필시 저 두 사람보다는 나을 것이다
총론(總論) 끝없이 넓은 고해(苦海)는 그 언덕이 머리를 돌이키는 데 있고, 한없는 시간에 쌓인 어둠은 그 밝음이 햇불 하나에 있다. 정토가 악인을 버리지 않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허물을 고치는 곳에 다시 살아날 문이 있음을 깨닫고 통렬히 자신의 허물을 뉘우친다면 옳거니와, 업을 가지고도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란다면 어림없는 노릇이다.
예전의 악인들은 이것으로 약을 삼았으나, 요즘의 악인들은 이것에 집착하여 병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전의 악인은 악인이면서 선인이었으나, 요즘의 악인은 악인 중의 악인이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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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생의 왕생]
연지대사 왕생집 7권
용(龍)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용 한 마리가 있었는데 금시조(金翅鳥)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몸을 받았으나 이제가지 살생한 적이 없이 물결 속을 희롱하고 다녔다. 그러므로 목숨이 다한 후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국토에 태어날 것이다” 하였다.
찬(贊) 자비한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 것이 정업의 정인(正因)이다. 용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랐으니 왕생은 진정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앵무새(鸚鵡)
당(唐) 정원(貞元. 785-805) 중에 하동에 배(裵)시 성을 가진 자가 앵무새 한 마리를 길렀는데, 늘 염불하면서 오후에는 먹이도 먹지 않았다. 임종에 열 번 염불하고 숨이 넘어갔는데 불에 태워 사리 10여 낱을 얻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투명하고 맑았다. 혜관(慧觀)스님이란 분이 벽돌을 구워 탑을 세우고 이 신비한 일을 널리 알렸다. 성도(成都)의 윤 위고(尹韋皐)가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 공상(空相)을 무념에서 깨달아 진골(眞骨)을 죽음에서 남겼네.’ 하는 구절이다.
구욕새(鴝鵒) 1
송(宋) 황암(黃岩) 정등사(正等寺)의 관(觀) 공이 구욕새를 길렀는데, 말을 할 줄 알아 늘 염불을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서서 죽길래 흙을 파고 묻었더니 그 자리에서 붉은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기이하게 여겨 파 보니 혀 끝에서 돋아난 것이었다. 영지율사(靈芝律師)가 이 사실을 찬탄한 적이 있다. ‘새장에 갇혀 서서 죽은 것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죽은 후 붉은 연꽃도 너무나 신기하다’라는 구절이다. * 구욕새(鴝鵒): 흔히 ‘팔가(八哥)새’라 한다. 때까치 비슷하게 생긴 새로 사람의 말을 할 줄 안다.
구욕새(鴝鵒) 2
담주(潭州)에 어떤 자가 구욕새를 길렀는데 이 새가 염불할 줄을 알았다. 죽은 후에 관에 넣어 장사지냈는데, 홀연히 연꽃 한 송이가 그 입에서 나와 피었다. 어떤 이가 이렇게 노래한 것이 있다.
신비한 새 한 마리 있었네. 이름은 팔가(八哥)였네 스님 입을 따라 미타를 염할 줄 알아 죽은 후 평지에 묻으니 연화가 피었네 사람으로 그럴 줄 모르면 아! 어찌해
有一靈禽號八哥 유일령금호팔가 解隨僧口念彌陀 해수승구념미타 死埋平地蓮花發 사매평지련화발 人不回心爭奈何 인부회심쟁나하
찬(贊) 앵무나 구욕한테 사람이 염불을 가르치는 경우는 흔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찌하여 왕생하는 경우는 보지 못하는가. 아! 세상 사람들의 경우만 해도 누구나 염불의 가르침을 듣긴 하지만 어떤 이는 신심으로 염하는 자도 있고 어떤 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염하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은 많으나 왕생하는 자는 드문 것이다. 저 앵무나 구욕만이 어찌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총론(總論) 어떤 이는 ‘사람은 신령하고 축생은 어리석다. 어떻게 축생이 왕생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성정(性情)이 있는 것은 모두 부처의 영각(靈覺)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말이다. 미혹함이 두텁고 엷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사람과 축생으로 나뉘어지지만 신령하고 어리석음이 균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꿩이 <법화경>을 듣고 다음 생에는 스님이 된 적도 있었고,
소가 부처님의 얼굴을 보고는 죽어 천상에 태어난 사실은 분명히 여러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지옥 중생이나 귀신이나 축생도 모두 나의 국토에 태어나과저’했던 것이 법장비구의 본원(本願)이었음에랴. 안타까운 점은, 사람으로서 축생의 왕생을 보고도 무덤덤히 깨달을 줄 모르고 오탁(五濁)을 감수하거나 꼼짝할 수 없이 윤회에 빠져, 숨 한번 쉬지 못하면 형체가 비늘이나 깃털로 바뀌어도 스스로 그런 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왕생집 (往生集)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