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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 ‘인생 말씀’이 있으신가요? (느8:1-6)
오래전 강남이 개발되기 전에, 논밭을 갈며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던 부부가 강남 개발과 함께 졸지에 땅 부자가 되었는데 그런 부부들 중에 많은 쌍이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때는 물론 오늘까지도 우리 시대의 문제는 산업 문명이 발달하고 정보 문명은 엄청나게 향상됐지만, 그에 비례하여 정신문명이 따라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땀 흘리고 애써서 돈을 벌고 좋은 집과 자동차를 사며 삶은 어느 정도 윤택해졌지만, 마음이 황폐화 되어 가는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외형적인 성장이나 물질적인 넉넉함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심령의 평안’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이 삽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살고, 이 나라와 민족이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위대한 심령 부흥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온갖 어려움과 방해 속에서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축했습니다. 이젠 됐다 싶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성전 수문 앞에 모여서 소위 ‘심령 대 부흥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들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축했습니다. 각자가 살 집도 다시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다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에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이 부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면 그 마무리도 하나님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복 받기를 사모합니다. 또 복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시작은 다들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모한다고 해서, 기도한다고 다 복을 받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음에 있어 기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빨리 복 받는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성경만 읽으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도는 기도로서의 기능이 있고 말씀은 말씀으로의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길지어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이 전제될 때 기도의 응답이 보장될 수 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축복하시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조의 과정에서 세상에 없는 것들을 있게 하시고 세상에서 안 되는 것들을 되게 하실 때,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렇듯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축복하십니다. 즉 말씀으로 복을 약속하시고 말씀으로 그 복을 완성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에게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이고 끝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과 말씀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기도입니다.
실제로도 성경에서 보면 첫 책인 창세기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예전에 김구 선생은 일제 36년의 수탈을 겪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두 배 정도의 기간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역시나 나라의 해방이고 본국 귀환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돌아오게 하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한 대로 응답받았습니다.
본국에 돌아와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성전과 고향 땅을 보며 그들은 다시금 ‘예루살렘 성을 회복시키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기도한 대로 응답받았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 본문인데 보면 모든 게 소원대로 되었고 기도한 대로 응답받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왠고 하니, 오랜 환난의 기간을 거치면서 그들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복의 마무리가 말씀이어야만 그 말씀에서부터 또 다른 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깨달은 것을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소원하는 것도 좋고 원하는 것이 응답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지만 항상 복의 시작은 말씀에서부터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혹은 신년 예배 때 올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카드를 하나씩 받으셨는데, 혹시 그 내용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아무튼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년 말씀 카드는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년 말씀 카드의 내용이 어떠하냐가 아니라, 그것과는 별개로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 ‘지금’ ‘나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제와 어제, 그리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붙드셨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로서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놓고, 오늘 내게 있어야 할 것들을 위해 기도할 때라야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오늘 나에게 있어야 할 복들을 채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여러분에게 권면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내게도 응답이 있기를 사모하신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에게는 첫째는 ‘내 인생 말씀’이, 둘째로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사진작가 한 분이 평생에 다시는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사진을 들어 보이며 자신의 ‘인생 사진’을 건졌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에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도 그 말씀을 ‘인생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저는 제 인생 말씀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신 요한복음 14:1절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무슨 일에서나 항상 요한복음 14:1절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다시 기도할 힘을 얻고, 다시 믿음을 일으키고, 다시 소망을 붙잡습니다.
그렇게 해 보니 좋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도 권면을 드립니다. 인생에서 언제든 나의 믿음과 기도와 소망을 붙잡아 줄 나만의 인생 말씀이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인생 말씀 하나로 다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이 이만삼천백사십오 절이고 신약은 칠천구백오십칠 절로 도합 삼만천백이 절 말씀이 성경에 있는데 어찌 달랑 한 절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었고 알았다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린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매일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며, 믿으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 하나님은 말씀으로 축복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었고 말씀대로 되기를 기도했기에 지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됐고 원했던 복을 받았다고 여기는 시점에서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 말씀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된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되었음을 확인하고 감사하고자 함이고, 둘째로 그들은 축복이 완성된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자리가 다시 축복의 시작점이 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성경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에벤에셀!’
앞서 두 가지 이유 중 전자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이라면 후자는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린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에벤에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앞서가는 곳에 축복은 뒤따라옵니다. 따라서 인생은 우리가 무엇을 좇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결과도 달라집니다.
북미대륙과 남미 대륙을 보자면 영국의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잘 믿어보자’라는 이유로 북미대륙에 왔습니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유럽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남미로 갔습니다. 목적은 황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남미 대륙을 찾았던 사람들은 황금도 잃었고 삶의 가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북미대륙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하나님도 찾았고 자유와 번영과 행복을 동시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잘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어느 가수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이라고 하면서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고 노래했던 게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찌해야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지를. 그러나 우린 압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즉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린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성경은 하루에 한 절만 읽으려 해도 잘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사실 하루에 말씀 한 절 읽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3절을 보세요. 그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우리 시각으로 대략 6시간 정도가 됩니다. 요즘엔 목사의 설교가 조금만 길어져도 벌써 시계부터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성도들이 대다수라는데, 어느 주일 아침을 택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경 봉독만 6시간 동안 계속한다면 과연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런데 13절을 보면 그렇게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저들은 이튿날 말씀을 듣기 위해 또 모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포로 이전 상황과 비교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포로 이전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세웠습니다. 성벽도 굳건히 했고요. 그러나 그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이 없었습니다. 아니, 말씀이 없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 말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맞이한 현실이 나라의 패망과 포로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금 성전을 세웠습니다. 성벽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 찾아 나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상황들을 오늘을 사는 나의 삶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크든 작든 우리에겐 살 집이 있습니다. 좋든 싫든 출근할 일터가 있고, 매일 당면하며 살아가야 할 삶의 여러 현장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우린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요?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은 신앙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멸망했다더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더라. 70년 만에 극적으로 해방되어 본토로 돌아왔다더라는 이야기들이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로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 그들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입니다.
‘말씀 없이 사는 인생은 망하더라!’ 이게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3장에서 마음 밭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을 받는 순서를 보세요. 말씀을 깨닫는 것은 둘째 문젭니다. 먼저는 ‘말씀을 듣고’가 우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매일매일을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매일이 복 되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매일 말씀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시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그냥 읽으시라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어야만 읽다 보면 어느 구절 어느 대목에서 축복하실지를 하나님이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라도 복 받기 위해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매일 성경을 읽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단은 말씀을 들어야 깨닫게 됩니다. 깨달아야 믿게도 되고, 믿어야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축복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성도가 접하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십니다. 두 번째가 예수님이 오실 것과 오신 것을 기록한 성경이 말씀이고, 세 번째로 성경을 오늘의 삶에 적용하도록 해석하여 전하는 목사들의 설교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제 말을 다 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으려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형태로든 말씀이 있는 곳엔 영혼이 치유될 것이고 그리되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복 받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곳에 복이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여러분은 병원에 한 번 이상씩은 가 보셨을 겁니다. 어떠셨습니까?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사에게 가서는 말을 참 잘 듣습니다. 가슴을 걷어 올리라고 하면 남녀 불문하고 주저 없이 걷어 올립니다. 엉덩이에 주사 한 대 맞읍시다 하면 부끄러움 없이 엉덩이를 드러냅니다. 또 수술하겠습니다 하면 전신까지 내맡깁니다.
왜 그럴까요? 의사가 내 병을 고쳐 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도 같은 이치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안 듣고에 따라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있고 없고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면 하나님이 내게 뭐라 하시는 지를 잘 들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대로 나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의사의 말엔 그러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엔 왜 그리 조건이 많은지요? 왜 그리 이유가 많고 토를 다는지요?
이제부터라도 다시 해 보세요. ‘매일 성경을 읽자!’ ‘성경에서 나의 인생 말씀을 찾자!’ ‘성경에 기록된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 그리고 그 ‘말씀 붙들고 하루를 살아 보자!’고.
우리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복은 의외로 빨리 내게도 있게 될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 말씀을 붙잡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매일을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 안에서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댓글 하나님께 더 기도보다 빠른 응답 성경책을 읽는 삶을 살수있게 도와주소서
한없이 나약하고 의지없는 삶이 안되길 오늘도 반성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일말씀 들으면서 또 뉘우칩니다
연초에 주신 말씀이 기억이 나질
않더라구요. 연초에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긴 시작한 말씀도 바쁘다는 이유로
읽지 못하고 있는 저의 자신을 보면서
참 이토록 주님께 무심해질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맘을 잡고 주님께 다가 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