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은 한때
장안의 건달들과 놀기도 하고
거지 행색으로 지낸 적이 있다.
당시 정권의 핵심 세력인 안동김씨와
노론의 눈을 속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保身策이었다.
그가 무더운 여름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부인 여흥민씨가 화계사를 자주 왕래했던 까닭에
자연스러운 발길이었다.
그가 화계사에 들어서자
느티나무 아래에 있던 동자승이
시원한 꿀물을 담은 사발을 들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흥선대원군에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기이하게 여긴 흥선대원군이
기다린 이유를 묻자
동자승은 말없이 그를 萬印스님에게 안내했다.
만인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석파는 만인스님에게 안동김씨 세도정치에서 벗어나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묘책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마지못해 만인스님은 “충청도 덕산의 가야산 가야사 금탑 자리가 왕이 나올 帝王之地라고 알려줬다.
석파는 부친인 남연군 묘를
그 자리로 이장했다.
본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니
500리나 떨어진 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장한 후 3년이 흐른 임자년(1852)에
둘째 아들 熙를 낳았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계해년(1863) 철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다.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대원군은 어린 고종의 막후에서 오랫동안 섭정했다.
이런 인연으로 대원군은
화계사 중창을 위해 시주했으며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남겼다.
화계사, 명부전 현판과 명부전 주련은
대원군이 썼다.
석파의 글씨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요 즐거움이 아닌가.
‘화계사’ 현판 왼쪽 하단에
石坡 大院君章이란 落款이 선명하다.
흥선대원군의 호방한 성품이
풍기는 예서 작품이다.
명부전 현판은 한눈에 봐도 걸품이다.
가늘고 굵은 획은 추사의 의발을 전수받기에 충분한 추사체의 묘법을 유감없이 구사했다.
結構와 間架에 자유로운 변화를 주어
회화성을 마음껏 발휘했다.
주련은 행서로 섰다.
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見聞瞻
禮一念間 利益
人天無量事
지장보살 위신력은,
항하사겁에도 다 말할 수 없네,
한 생각만으로 보고 듣고 예배하여도 인간과 천상의 이익은 한이 없어라.
일주문의 ‘삼각산 화계사’
門額은 無如居士 신경희의 뛰어난 작품이다.
각 획이 힘줄만 있을 뿐 살이 없다.
빈틈이 전혀 없고 꼬장꼬장한 필세다.
그는 한의사로 1950년 대한불교달마회를 창립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을 역임(1976)하면서
禪書 ‘無門關譯解’를 펴는 등
“禪心醫心一如의 경지의 거사라고 숭산행원 스님은 말했다.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안로공체로 유명하다.
화계사는 숭산스님에 의해
시작된 관음국제선원의 산실로서 외국인 스님들과 불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는
참선 수행과 국제포교의 중심사찰이기도 하다.
숭산스님은 필자에게 法光이라는
호를 주시면서 如何是 法光이냐.
無風起浪입니다.
스님은
Only Don’t Know 오직 모를 뿐
just do it 단지 할 뿐이라 하셨다.
그 시절 벽암 노스님의 법향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