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州李門(전주이문) 李 琉(이류):(1417~1468)-(조카를 들어내고 王이 된 世祖)
癸酉靖難(계유정란)을 일으켜 電擊的(전격적)으로 皇甫 仁(황보 인)等(등) 現職(현직) 領議政(영의정)을 비롯한 政丞(정승)들을 誅殺(주살)하고, 領議政(영의정)에 오른 人物(인물)은 바로 世宗(세종)의 둘째아들로 野心(야심)에 찬 首陽大君(수양대군)李琉(이류)였다. 靖難(정란) 이튿날인1453年 10月 11日에 領議政(영의정)에 오른 首陽大君(수양대군)은 判吏兵曹事(판리병조사)를 兼(겸)하여 人事權(인사권)과 兵權(병권)을 함께 掌握(장악)하고, 査頓(사돈)인 鄭麟趾(정인지)를 左議政(좌의정),또 다른 査頓(사돈)으로 며느리의 親庭(친정)아버지 韓確(한확)을 右議政(위의정), 自身(자신)을 도왔던 崔恒(최항)을 임금의 秘書室長格(비서실장격)인 都承旨(도승지)로 삼는 等(등) 朝廷(조정)大臣(대신)들을 自身(자신)의 側近(측근)들로 온통 채워버렸다. 首陽大君(수양대군) 李琉(이류)는 世宗(세종)의 18王子(왕자)中(중) 둘째로 世宗(세종)이 世子時節(세자시절)에 태어나 12歲(12세)에 大君(대군)에 封(봉)해졌다. 首陽(수양)은 曾祖父(증조부)太祖(태조)의 武藝(무예)를 이어받은 듯 武術(무술)과 兵書(병서)에 밝았고, 性品(성품)이 适适(괄괄)하고 名譽(명예)와 權力慾(권력욕)에 執着(집착)이 强(강)한 것은 할아버지 太宗(태종)을 닮은 듯 했으며, 好色(호색)하고 若干(약간)있는 放蕩(방탕)끼는 伯父(백부)讓寧大君(양영대군)의 世子時節(세자시절)을 聯想(연상)케 했다 한便(편) 頭腦(두뇌)가 明晳(명석)하고 學文(학문)이 남보다 뒤지지 않음은 世宗(세종)의 性品(성품)을 이어 받음이 아닌가 싶었다. 1450年 世宗(세종)32年 2月 17日,해질 무렵 어질기 그지없던 聖君(성군)世宗(세종)이 享年(향년) 54歲(54세)로 눈을 감으면서, 兄(형)인 讓寧大君(양영대군)에게 아무쪼록 王室(왕실)의 기둥이 되어 달라는 付託(부탁)과 함께, 먼저 가게된 것을 容恕(용서)해 달라는 表情(표정)을 짓고, 首陽(수양)을 비롯한 安平(안평)·臨瀛(임영)·錦城大君(금성대군)等(등) 綺羅星(기라성)같은 王子(왕자)들에게는, 兄弟(형제)가 和睦(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特(특)히 世子(세자)와 世孫(세손)을 잘 보살펴 주라는 懇曲(간곡)한 遺言(유언)을 남겼다. 世子(세자)는 2月 22日 登極(등극)하니 나이 37歲(37세), 이가 곧 病弱(병약)한 文宗(문종)이었는데, 不幸(불행)하게도 王位(왕위)에 오른지 2年 3個月(3개월)만에 39歲(39세) 나이로 世上(세상)을 등져버리니 남겨진 後繼者(후계자)는 이미 어머니 마져 잃어버린 열두 살 고아 李弘暐(이홍위) 이였으니, 이가 곧 悲運(비운)의 王(왕)端宗(단종)이었다. 文宗 亦是(문종역시) 臨終(임종)에 즈음하여 伯父(백부) 讓寧大君(양영대군)을 비롯하여 首陽(수양)等(등) 兄弟(형제)들에게 어린世子(세자)를 付託(부탁)하였는데, 首陽(수양)은 曖昧(애매)하게 自身(자신)에게는 어린王(왕)을 爲(위)한 攝政(섭정)의 顧命(고명)이 있을 것으로 期待(기대)했다가 틀어져 버리고, 雪上加霜(설살가상)으로 皇甫 仁(황보 인)·金宗瑞(김종서)等(등) 重臣(중신)들이 어린 王(왕)을 保護(보호)한다는 빌미로 王(왕)의 宗親(종친)들을 色眼鏡(색안경)을 쓰고 살피니 首陽(수양)의 눈에는, 王(왕)은 어린애에 不過(불과)하고 權力(권력)은 大臣(대신)들 손에 놀아나는 느낌이라, 王權(왕권)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慾求(욕구)가 發展(발전), 이를 名分(명분)삼아 結局(결국) 王位纂奪(왕위쟁탈) 구테타로 靖難(정란)을 敢行(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兄弟(형제)들 사이에도 피를 틔기는 骨肉相殘(골육상잔)이 벌어지니, 兄(형)首陽(수양)의 野心(야심)을 꿰뚫어 보고 맞선 아우 安平大君(안평대군)을, 그의 養母(양모) 成氏(성씨)와 奸通(간통)했다는 恥事(치사)스런 罪目(죄목)을 씌워 죽이고, 安平(안평)의 아들도 珍島(진도)로 歸養(귀양)보냈다가 亦是(역시)죽였다.
安平(안평)은 世宗(세종)의 아우로 일찍 世上(세상)을 뜬 誠寧大君(효령대군)의 養子(양자)로 들어갔는데, 誠寧大君(성령대군)의 未亡人(미망인)으로 安平(안평)의 養(양)어머니였던 成氏(성씨)가 安平(안평)과 나이가 엇비슷하고 姿色(자색)이 뛰어나다보니, 權力(권력)에 미친 者(자)들이 더러운 罪目(죄목)을 씌워 安平(안평)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이다.安平(안평 )은 憤(분)을 못이겨 피를 吐(토)하며 兄(형)에 對(대)한 怨恨(원한)을 품은채 死藥(사약)을 들이키니,나이 36歲(세),聖君(성군)世宗(세종)의 立場(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安平(안평)의 죽음을 傳(전)해들은 成氏夫人(성씨부인)은 목을 매自殺(자살)하고 말았다. 首陽(수양)이 領議政(영의정)에 오른 지 3年이 지난 1455年, 端宗(단종)의 나이 15歲(15세), 首陽(수양)의 側近(측근)들에게 둘러 쌓인 端宗(단종)은 龍床(용상)에서 都底(도저)히 배겨날 수가 없는 地境(지경)이라, 그 해 閏 六月(윤유월)11日 結局(결국) 王位(왕위)를 首陽(수양)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듬해 6月 宮中(궁중)이 피 鐵鉀(철갑)이 된 死六臣事件(사육신사건)이 있었고, 端宗(단종)은 江原道(강원도) 寧越(영월) 山(산)골에서 목이 졸려 屍身(시신)이 江(강)물에 던져져 버리는 慘禍(참화)를 입으니 端宗(단종)의 나이 17歲(17세), 이렇게 하여 王(왕)이 된 世祖(세조)의 心氣(심기)는 不便(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世子(세자)로 삼았던 맏아들 暲(장)이 20歲(20세) 나이로 非命橫死(비명횡사)해 버렸고, 때를 같이하여 世祖(세조)自身(자신)은 몸에 皮膚病(피부병)이 붙어 便(편)할 날이 없었다.世祖(세조)는 人間的(인간적)인 苦惱(고뇌)에서 헤어나질 못한 채 權座(권좌)14年을 겨우 누리고, 1468年 9月 7日 52歲(52세) 나이로 그만 저승食口(식구)가 되고 말았다. 마음의 葛藤(갈등)과 肉體(육체)의 괴로움에 밤낮을 시달리던 不遇(불우)하기 짝이 없었던 임금이었다고 歷史(역사)는 記錄(기록)하였다. 世祖(세조)의 둘째 아들 晄(광)이 20歲(20세)에 王(왕)이되어 뒤를 이었는데 겨우 1年만에 죽으니 이가곧 睿宗(예종)이었고, 이어 王位(왕위)에 오른 成宗(성종)은 世子(세자)로 죽은 맏아들 暲(장)의 아들이었는데 38歲(38세)로 生(생)을 마쳤으며, 稀代(희대)의 暴君(폭군)으로 世上(세상)의 웃음꺼리가 되었던 燕山君(연산군)은 곧 李暲(이장)의 孫子(손자)였으니, 世祖(세조)에게는 長曾孫(장증손)이었다. 京畿道(경기도) 南楊州市(남양주시) 榛接邑(진접읍) 富平里(부평리)에 國家事蹟第197號(국가사적제197호)로 指定管理(지정관리)되고있는 光陵(광릉)이 곧 世祖(세조)의 무덤이다. 출처 歷史와 人物 [출처] 全州李門(전주이문) 李 琉(이류):(1417~1468)-(조카를 들어내고 王이 된 世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