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가 손에 들었던 탄피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내 던진다. 조용한 복도에 맑은 금속음만이 메아리친다.
#7 위험한 산책
해가 슬슬 기울어져가는 시각. 센트럴 파크 근처의 골목.
이번엔 으슥한 이 장소와 뭔가 어울리지 않는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코트를 걸친 갈색 긴 생머리의 카트린느가 뭔가 고심하고 있다.
“앙? 어때 아가씨, 잠깐만 시간 내 달라구~ 헤헤.”
카트린느의 고민 거리는 바로 이것.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거리를 여자 혼자 걷다보면 종종 이런 파리떼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간단한 말로 건달, 또는 치한이라고 부르는 작자들이다.
올해로 서른살이 된 젊지 않은 나이의 카트린느이지만 변장술이라던가 그런 것을 제외하고라고 기본적으로 제법 동안인 탓에 더욱 그런 벌레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보통 간단한 건달들은 여자 쪽에서 똑 부러지게 거절하면 어지간하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이번 녀석들은 제법 끈질긴 모양이다. 이미 오래전에 손을 더럽히는 일 따윈 관둔 카트린느이지만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기 시작한다. 내심 그다지 빠르지도 않은 이런 지름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고 있기도 하다.
치근거리던 건달들은 어느덧 카트린느의 어깨에 손을 얹기도 하고 점점 기분 나쁜 짓을 하기 시작한다.
“이봐 당신들...”
카트린느가 천천히 입을 연다. 눈썹이 약간 치켜올라간 것이 눈에 뜨인다.
“앙, 뭐야? 더 크게 말해보라구~”
건달 중 하나가 기분나쁜 어조로 귀에 손을 갔다대며 말한다.
“슬슬 그만두지 않으면...”
“흐음, 이런 골목길에서 뭐하고 있는 거지?”
카트린느의 말이 어디선가 나타난 새로운 인물의 말에 의해 끊긴다. 건달들이 흠칫하며 돌아본 곳에는 회색 정장과 버버리 코트 차림의 회사원 분위기가 풍기는 한 남자가 서 있다.
“뭐야, 넌 또. 내일도 온전히 출근하고 싶으면 대충 지나가라구! 우린 이 아가씨와 좀 놀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그 아가씨는 그다지 놀고 싶어하지 않은 것 같은데?”
건달의 노골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회사원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채 살짝 웃으며 말한다. 건달 패거리들이 모여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간다.
“쓸데 없는 참견을 좋아하는 모양이시군 그래? 어디, 지갑 구경이라도 할까?”
한 녀석이 주머니칼을 꺼내든다.
“지갑이라. 그것보다 더 좋은 걸 구경시켜줄까?”
회사원은 손을 천천히 품 속에 집어 넣는다. 칼을 꺼내든 녀석이 약간 흠칫한다.
“뭐... 뭐야. 웃기지 말라고. 그딴걸 코트 주머니 속에 넣는단 말야?”
“글쎄, 어떨까? 마침 오늘 부장에게 좀 깨져서 내 기분이 썩 안 좋거든? 이런 골목에서 건달 몇 녀석쯤 사라져도 3류 조간지 구석 기사에도 못 들테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손을 조금 움직인다. 품 속에서 ‘찰칵’ 하는 금속음이 들린다.
“뭐... 뭐야, 이 새끼. 미친거 아냐?”
“별 미친 자식을 다 만나는 군. 제길. 관두자.”
건달들이 조금씩 주춤거리더니 이내 달아나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형편없는 3류 건달들이군.”
“아.. 저기.. 고맙습니다.”
카트린느가 제법 숙녀답게 인사한다.
“뭘요, 웨이트리스 아가씨.”
회사원의 대답에 카트린느가 흠칫한다. 그제서야 상대방의 얼굴을 살펴보는 카트린느. 그는 다름아닌 에드가 네스 형사였다.
네스가 약간은 어리둥절한 듯 카트린느를 바라봤다. 순간 그녀는 아차 싶었다. 네스는 아직 자신이 기혼이라는 것을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건 단지 그녀가 그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표면상의 인연이라고는 식당에서 한 번 종업원과 손님으로 만난 적 밖에 없는 주제에 뒷조사라니.. 어떠한 이유를 갔다 붙여도 전혀 설득력 없는 일이 아닌가.
“아아... 제 손에 낀 반지를 보신 모양이군요.”
네스의 말로 그나마 겨우 위기를 넘긴 카트린느.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이신가요? 리틀 이탈리아에서 여기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네스가 묻는다.
“아, 근처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요.”
카트린느가 망설임없이 말한다.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당신 같은 분을 이런 시간에 혼자 걷게 하다니, 별로 예의가 없는 친구로군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카트린느가 맞장구치며 미소짓는다. 하지만, 만약 안토니오에게 밤길이 무서우니 함께 가달라고 묻는다면 분명 내 이마에 손을 짚어 볼 것이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런 생각을 해 보는 카트린느였다.
어느덧 두 사람은 어떤 허름한 아파트 앞에 다다랐다.
“여기에요. 여기부턴 괜찮으니까 그만 가 보세요. 실례했네요.”
“아닙니다. 경찰이 할 일이니까요.”
“아깐 데이트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겸사겸사 랄까요. 그럼 이만.”
“네, 그럼.”
네스는 가볍게 목례한 뒤 카트린느가 걸어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뒤로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흐응? 저 사람, 뭐 가는 방향이었다거나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나랑 같이 와준거야? 이외로 순진하네?”
현관으로 들어갔던 카트린느가 어느새 다시 나와 있다.
“뭐, 혹시 모르니까 말이지.”
그러고는 들어갔던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안토니오의 아파트. 초인종이 울리고 안토니오가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간다. 안토니오는 이번에도 역시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부업으로 악사일을 하고 애까지 있지만 언제 어디서 안토니오를 노리는 자객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안토니오는 그런 업계의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행히 문 밖에는 카트린느가 서 있다.
“뭐야, 온다던 시간보다 13분 늦잖아?”
신용을 중시하는 이쪽 업계, 그 중에서도 카트린느 같은 정보원들은 그야말로 정확한 정보를 정해진 시간내에 전해줄 필요가 있다. 시간은 곧 신용인 셈이다. 카트린느는 언제나 자신이 선언한 시간 내에는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 주어 왔고, 그 버릇은 일상생활에서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가 스스로 말한 시각에 13분이나 늦었다라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다.
“응? 아아.. 오늘 좀 이래저래 꼬였거든..”
“왜, 또 누가 30대의 아주머님께 시비를 거셨나?”
“그 뿐이면 좋게? 또 만났어. 그 형사. 쳇, 기껏 칼라렌즈까지 껴 가면서 신경써서 변장했는데 말이지...이 근처는 위험하다고 바래준다는 통에 적당한 아파트로 걸어가서 따돌리느라 좀 시간이 걸렸지.”
카트린느가 말하면서 미간을 찌푸린다. 네스에게 변장을 들켰다는 사실도 화가 나지만, 역시 더 화가 나는 건 안토니오의 30대 아주머님이라는 말인 듯 하다.
“꽤, 자주 만나네?”
“무슨 뜻이야 그거? 말했잖아. 그 인간도 이 주변에서 산다고. 재수 없게 겹친거지 뭐.가만, 그런데.. 아이리스는?”
“모르겠어. 기껏 좀 일찍 돌아왔는데.. 집에 없네.. 장이라도 보러 간 건가 했는데 냉장고도 꽉 차있고 말이지.. 무엇보다.. 학교에서 돌아 왔었던 흔적이 없어..”
그 말을 하는 안토니오의 표정이 다소 어둡다. 그러고보니 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걱정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흐응... 뭐 청소년 유괴 뭐 그런거 아닐까? 아이리스, 피부도 하얗고 조용조용해서 꼭 부잣집 따님 같잖아.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고.. 결국엔 살해.. 뭐 그런..”
장난스레 말을 던지던 카트린느는 안토니오와 눈을 마주치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말을 하는 것을 멈췄다기 보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굳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안토니오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제서야 카트린느가 숨을 몰아쉰다.
“푸하... 어이어이, 놀랬잖아. 오랜만인데? 그런 눈빛? 장난이야 장난~”
“장난으로라도 그딴 소리 하지말라구. 너 말고 다른 사람이 그딴 소리 했으면 벌써 한 방 날아갔을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뭐, 걱정하지마. 어디 친구 집에라도 놀러갔나보지. 고등학생이잖아. 해질녁이면 꼬박꼬박 들어오는 나이는 지났다구.”
“그럴까..”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듯 안토니오가 말한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에드가 네스의 집. 네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코트를 벗는다. 아내가 문소리를 듣고 주방에서 나온다.
“이제 와요?”
“응? 아아. 응. 오는 길에 또 왠 건달들이 있어서 말이지.. 성실한 경찰 흉내 좀 내 주고 왔지.”
“그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이런 이런,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게 바로 경찰이잖아? 그 덕에 뉴욕이 이 정도로 돌아가고 있는 거라고... 응? 잠깐.”
걱정하는 아내에게 또 언제나 하던 말을 해 주려던 네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소파로 다가간다. 소파위엔 아들 다니엘의 것인 듯한 책가방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뭐야, 손님이라도 온거야?”
네스가 처음보는 책가방을 발견하고는 문득 말을 던진다.
“다니엘의 학교 친구라나봐요. 숙제를 도와주러 왔다는데, 마침 저녁 시간도 되고 해서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어요.”
“흐응? 그 녀석 어지간해선 친구 데려오는 건 싫어하잖아? 친구는 많은 듯해도 말이지..응? 오호라~”
역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서던 네스가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주방엔 다니엘과 웨이브 진 눈부시게 흰 금발, 머리색 만큼이나 흰 피부에 단정한 교복 차림의 예쁘장한 여학생 하나가 앉아있다.
“뭐래? 여자친구? 짜식, 제법인데?”
네스가 아내에게 소곤거린다.
“당신도 참...”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어? 아빠~ 좀 일찍 오셨네요.”
다니엘이 이제야 네스를 보고 인사한다.
“요 녀석, 이제야 애비가 눈에 보이냐? 앞에 이런 귀여운 아가씨를 앉혀 놓고 있으니 뭔들 눈에 들어오겠어? 밥은 제대로 들어가냐?”
네스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놀리듯 말한다. 다니엘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아..아.. 아빠!!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
그러며 맞은편의 눈치를 보는 다니엘, 네스는 그 아이에게로 다가간다.
“난, 에드가 네스. 다니엘 녀석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야. 아가씨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약간 흠칫하던 아이는 곧 입을 연다.
“아이리스.. 아이리스 화이트.”
“아이리스라, 예쁜 이름이구나. 그 모습처럼 말이지.”
“아.. 고맙..습니다..”
아이리스가 약간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숙제를 도와주러 왔다고 했었나? 어떤 거지? 아, 잠깐잠깐. 한번 맞춰 보지. 수학이지?”
네스의 말에 아이리스가 약간은 의아한 표정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맞는 모양이군. 아, 너무 깊이 생각하진 않아도 돼. 이 아저씨는 찍기 실력이 좀 좋거든.”
네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어딘지 인상 좋은 아저씨... 아이리스는 네스에게서 왠지 안토니오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 좋은 인상 뒤에 왠지 보이지 않는 다른 모습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까지도 비슷했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가도 집에서 걱정 안 하니? 연락은 미리 했어?”
네스가 제법 부모다운 말을 꺼낸다. 아이리스가 뭔가 생각한다. 안토니오는 오늘 늦는다고 했었다.. 안토니오는 보통 늦는다고 하면 적어도 10시는 되어야 돌아온다. 지금 시각이...
“벌써 8시야.”
카트린느가 말한다. 옆에 앉아있는 안토니오는 잠자코 아무 말도 없다.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아이리스는 네가 생각하는 정도의 어린애가 아니니까 말야.”
그런 말을 해 본들 안토니오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동안 안토니오는 아이리스를 밤 8시 이후에 집 밖으로 혼자 내 보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이 주변의 밤 거리는 보통의 행인이 혼자 지나다닐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약에 취한 칼잡이가 나타날지 모르는 곳... 과장 같지만 이 주변의 현실이었다. 더구나 이런 일은 1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토니오는 이미 평상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휴우... 거참...”
카트린느가 포기의 뜻을 담은 한숨을 내 쉰다. 일전에 카트린느는 한 날라리 녀석이 장난삼아 아이리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보고 쫓아내 버린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카트린느였다. 만일 그 사실이 안토니오의 귀에 들어간다면 다음날 센트럴파크 잔디밭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될 것이 뻔하다.
“정말 혼자 갈 수 있어?”
“응. 이 주변 길은 다 알아.”
“아.. 그.. 그래도... 지금 좀 늦은 시간이니까..”
“그래서..?”
“아..아니.. 그러니까 역시 아이리스 혼자 가는 건...”
이쯤 되면 다니엘이 딱해 보이기까지 하다. 어째서인지 허둥대는 다니엘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리스가 다시 말을 꺼낸다.
“...그 얘기는...바래다주겠다는 거야?”
“아..아니.. 그게.. 응? 아..아아.. 응! 집까지 바래다 줄께!”
“...그래.”
말을 끝낸 아이리스는 다시 뒤돌아서서 네스의 집을 나선다. 그 뒤를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은 다니엘이 따라 나간다. 멀찍이 서서 이 상황을 관찰하던 네스가 고개를 휘젓는다.
“아직 멀었군.. 저래서야...”
9시 가량 되어가는 시각. 가로등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어둑어둑한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앞서 가는 사람은 아이리스, 그 뒤를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다니엘이 뒤따른다. 대체 바래다주겠다는 건 어떻게 된 건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면만 바라보며 걷고 있는 아이리스와 달리 다니엘은 보폭도 일정치 않고, 자세도 왠지 웅크리고 있으며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문자 그대로 불안 그 자체다.
“어..엄청나네.. 난 이런 시간에 밖에 돌아다니는 건 거의 처음이야. 뭔가 으스스하다. 아이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아?”
“별로. 무섭다고 생각하니까 더 두렵고 불안해지는 거야.”
“에에?”
“...라고 안토니오가 말했어.”
“아..아이리스는 이런 길을 걸으면서도 별로 무섭다거나 하지 않아?”
“왜?”
“왜...라니... 이렇게 으슥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길은 좀 그렇잖아.”
“단지 불빛이 없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을 뿐, 낮에 걷던 길과 같은 길이잖아.. 그게.. 왜 무서운거야?”
너무도 당연한 듯 묻는 아이리스. 대답을 하기 막막할 정도다.
한참 동안의 정적...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밤길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던 아이리스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뒤에는 여전히 어딘가 불안한 태도의 다니엘이 서 있다.
“그런 태도로 걸어다니는 사람일수록 시비 걸릴 가능성이 커. 이런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나쁜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만만한 사람에게 시비를 거니까.”
“...그것도... 안토니오 씨가...?”
“응.”
과연 아이리스의 말대로 일까. 지나가면서 불량해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스쳐지나갔지만, 딱히 이쪽에 뭔가 접근해 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금 뒤 다니엘이 말을 꺼낸다.
“아이리스는 나보다 훨씬 강한 거 같아.”
“별로.. 너랑 싸우더라도 못 이길테니까.”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뭔가 머뭇거리며 다른 대답을 찾는 다니엘을 아이리스가 가만히 돌아본다.
“그러니까.. 그 뭐랄까.. 내면의 강인함이라고 해야 하나.. 으음.. 그게...”
‘툭’
“엣?”
손을 휘저어가며 허둥지둥 뭔가 마땅한 말을 찾아내던 다니엘의 왼손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돌아보니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서 있다. 멀리 가로등의 불빛이 상대의 얼굴을 슬쩍 비춘다. 말도 안 나오게 생긴 엄청난 인상이다.
“뭐야?”
아무래도 조금 전 다니엘의 손에 닿은 모양이다.
“예..옛? 아..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건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멀쩡히 지나가는 사람을 쳐! 어떻게 이 무례를 보상할텐가? 꼬마?”
상대가 점점 얼굴을 들이민다. 가까워질수록 다니엘은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 할 수 있었다. 보면 볼수록 더욱 험악한 인상이다.
“안토니오, 벌써 와 있을지도 몰라. 빨리 가자.”
갑자기 아이리스가 다니엘의 옷깃을 잡아끈다. 다니엘은 얼떨결에 끌려간다. 황당한 건 시비걸고 있던 불량배. 아마 이런 전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어.. 어이, 어이!”
순간 당황했는지 멈춰서 있던 불량배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쫓아온다. 그리고는 아이리스의 손목을 잡아채 당긴다. 그 바람에 할 수 없이 아이리스가 돌아선다. 손목이 아픈지 약간 눈썹을 찌푸린다.
“어이, 너. 어른이 말하는데 뭐 하자는 거야? 앙?”
“그럼, 뭔가.. 용건이라도..?”
아이리스는 대답하며 손을 빼려 하지만 꽉 잡힌 손목은 빠질 기미가 안 보인다.
“몰라서 물어? 지나가는 행인을 친 보상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는거다.”
“그런건 보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정 뭔가 보상이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정식의 과정을 거쳐 신고하시는 게...”
느릿느릿 약한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이야기 하는 아이리스. 다니엘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상대는 점점 약이 오르는 모양이다. 상대가 손가락으로 아이리스의 턱을 들어올리며 말한다.
“어이 아가씨, 보아하니 뭔가 그 쪽으로 줄이 있는 모양인데 말야. 이 동네는 그런게 안 통하는 곳이라는 거 알고 있어? 앙?”
비슷하긴 하지만 틀렸다. 경찰에 끈이 있는건 오히려 다니엘 쪽이니까. 갑자기 다니엘이 달려들어 불량배의 손을 뿌리쳐 낸다.
“그... 그만둬!”
“!?”
그러며 아이리스의 앞으로 막아서는 다니엘. 나름대로 강하게 보이려 애쓰지만 여전히 얼굴엔 불안이 가득하다.
“뭐야, 여자 앞에서 폼 잡아보고 싶다 이거야? 흐응, 그런 걸 보면 난 더 장난을 치고 싶어지거든~”
상대가 손바닥을 들어 다니엘의 머리를 후려친다. 피하거나 하는 동작도 없이 그대로 맞아 나가떨어지는 다니엘. 상대는 다니엘을 뒤로 한 채 다시 아이리스에게 다가선다.
“자, 그럼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해 볼까?”
그러며 상대가 손을 뻗치려는 찰나, 다니엘이 다시 달려든다.
“그만하라니까..!!”
그 통에 불량배는 다니엘과 함께 넘어진다. 그리고 한 방, 다니엘이 날린 주먹이 들어갔다. 제법 세긴 했지만, 워낙에 체격차이가 나는 관계로 그다지 효과는 없는 듯 하다. 일단 상대의 화를 제대로 돋우기엔 충분해 보이긴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상대가 다니엘을 발로 걷어찬다. 이번에도 다니엘은 멀리 나가떨어진다.
“아윽..”
“좋아, 그럼 일단 네 녀석과 먼저 이야기 하도록 하지..”
“...아...아이리스 도망가..”
그 와중에도 겨우겨우 말하는 다니엘, 하지만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불량배 쪽이었다. 녀석은 아이리스의 손목을 잡아채 다니엘 쪽으로 그녀를 밀어 놓는다.
“안 되지. 넌 여기서 이 녀석이 얻어맞는 꼴을 구경해 줘야겠어. 혼자 이래봐야 심심하니까 말이지...”
그러며 상대는 천천히 다니엘에게 다가선다.
길 건너편 골목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또 다른 눈이 있다.
“설마설마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치안이 안 좋은지..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겠군. 하아.. 슬슬 나서야 할까..”
그러며 네스는 피우던 담배를 벽에 비벼 끄고는 옆으로 던진다. 꽁초를 버리다니.. 경찰이 할 행동은 아니다. 뭐.. 그런건 접어두도록 하자.
그러는 사이 다니엘은 몇 대 더 얻어맞고 있었다. 다음 발이 나가려는 사이, 이번엔 아이리스가 막아선다. 평소와 비슷한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약간 눈에 힘이 들어가고 입을 꾹 다문 모습이다.
“정말, 귀찮은 콤비구만 그래. 넌 일단 저리 비켜 있어!”
그러면서 상대가 손을 들어 아이리스를 밀쳐 쓰러뜨리는 찰나,
“아이리스!”
불량배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다. 인도 저편에서 한 남자가 달려온다. 단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다소 긴 갈색 머리에 대충 입은 정장. 다름아닌 안토니오다. 황급히 달려와 넘어진 아이리스 옆에 선 안토니오는 그제야 그 옆에 쓰러져 있는 다니엘과 앞에 서 있는 불량배를 확인한다. 이 정도면 대충 상황파악은 된 셈이다.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제법 점잖게 묻는 안토니오. 뭐, 일단 아직은 거리의 악사 안토니오이니까...
“앙? 보면 몰라? 이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어와서 사과를 요구하는 중이다.”
그러며 녀석은 다니엘을 가리킨다.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한 모습이다.
“뭘 어쨌는지 모르지만 좀 과하신 것 같군요. 그 쯤 해 두시고 물러나시죠.”
“뭐가 어째?!”
그러며 녀석은 이번엔 안토니오에게 다가선다.
“하하.. 이러지 말고 점잖게 해결합시다.”
그러면서 점점 뒷걸음질치는 안토니오. 하지만 조금 뒷걸음질치자 가로등에 등이 닿는다.
“점잖게? 점잖게 어떻게 해결할 거지? 앙?”
불량배는 안토니오의 멱살을 잡아쥐며 금방이라도 때릴 태세다.
“글쎄. 어떻게 해 줄까?”
“앙!?”
갑자기 안토니오의 음성이 바뀐다. 녀석은 문득 자신이 상대하던 남자의 눈빛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멱살을 쥔 것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있지만, 아이리스에게 손을 댄건 그다지 넘어가고 싶진 않은데 말이지. 어떻게 해 줄까. 내겐 내 말 하나면 네 녀석 주변의 관계자를 모두 알아다 줄 친구 하나가 있지. 돈이 좀 들긴 하지만, 상관없어. 일단 네 주변의 사람들을 2 주에 하나씩 없애주지. 그러면 세상에 너란 녀석이 존재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테지. 그러다가 널 아는 사람이 오직 나 뿐인 날이 오면, 그 날엔 네 차례다.”
“지..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상대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조금씩 떨리고 있다.
“어쩔거냐. 지금 당장 이걸 놓고 좋게 사라져라. 그럼 너에 대해서 잊어줄 의향도 있다.”
그렇게 가만히 말하던 안토니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다시 아까의 장난끼가 보이는 눈이다. 목소리도 다시 아까처럼 커진다.
“자, 우리 너무 험악하게 이러지 말고 그냥 좋게 헤어집시다. 어떻습니까?”
“이... 쳇.. 너.. 운 좋은 줄 알아!”
그러며 녀석은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그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나 싶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한다.
“다니엘이라고 했지? 괜찮니?”
안토니오가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아...네...”
다니엘이 여기저기 상처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제법 사내 아이 다운 구석이 있구나, 너. 아직 힘은 한참 멀었지만 말이지.”
안토니오의 말에 다니엘은 풀이 죽는다.
“아이리스, 괜찮아?”
이번엔 아이리스 쪽으로 돌아보며 묻는다. 아이리스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좀 털어내고는 일어선다.
“...응.”
“다행이네. 다니엘, 집에 갈 수 있겠니?”
“네? 아.. 네..네.”
“여기까지 아이리스를 바래다 줘서 고맙다. 돌아가도 별일 없겠지?”
“아.. 네. 저..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듯 걸어가 버리는 다니엘.
“우리도 가자.”
안토니오가 아이리스의 어깨를 감싸며 집으로 향한다. 아이리스는 그러며 슬쩍 뒤를 돌아본다. 멀리 다니엘의 뒷모습이 보인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걸음이 느려지나 싶더니 한숨을 내쉬는 다니엘. 그렇게 꼴사납게 되어버린 자신이 한심한 모양이다.
“우습게 되었더구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하는 다니엘. 뒤에는 어느새인가 네스가 서 있다.
“아.. 아빠?! 설마 따라오신 거에요?”
“이런 밤길에 고등학생 둘만 내 보내서 쓰겠냐? 둘의 데이트도 염탐할 겸해서 따라나왔...풋.. 크크크..”
“으.. 왜 웃는 거에요!!”
“크크크, 왜냐니.. 생각을 해 봐. 나란히도 아니고, 하다못해 앞장 선 것도 아니고 바래준다더니 여자애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꼬락서니라니.. 게다가 폼은 요래가지고...쿡쿡..”
첫댓글 ^^ 며칠 조용하다 싶었더니 글을 안보따리 가지고 오셨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