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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5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마태오 5,43-48
사랑도 믿음이고 미움도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감정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다른 세상에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사는 세상입니다.
고정원 씨는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이 세상이 두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당연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쳐다보기만 해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이 화가 나면 무작정 걸어서 화가 발생한 곳에서 멀어지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미움의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금 복음은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마치 이 지상에서 떠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누구는 하느님 나라에 살고 누구는 지옥에 삽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대로 감정을 발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제 묵상 내용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거울과 오은영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 이 세 가지의 도움으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말썽부리며 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다정함의 과학』, 켈리 하딩 박사는 의사로서 사람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도록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가 의대에 입학해 해부학 교수에게 처음 받았던 것은 한 인물의 간단한 소개였습니다.
“9번 테이블: 폴, 공장 노동자, 사망 원인: 폐 암종.”
처음엔 그래도 자신의 테이블에 누워있는 시체가 한 인간의 존엄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르고 쪼개고 분해하고 하다 보니 점점 폴이라는 한 인물의 시신이 아닌 하나의 교육
보조재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점점 잊어가고 환자를 약물과 수술로 치료해야 한다는 물질적 세계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사인 그녀가 『다정함의 과학』이란 책을 쓰게 된 것일까요?
이 책은 수술과 약물보다 사랑이 인간의 몸까지 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사로서 많은 비판을 받을만한 내용입니다.
그녀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자신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켈리 박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문법이 전혀 맞지 않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보낼 때 문법을 꼼꼼히 따지던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인 딸은 이 문자를 받고 곧바로 엄마에게 뇌졸중이 왔음을 깨닫고 곧바로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어머니는 오른 손을 쥐었다 펴는 것 외에는 움직일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켈리는 손으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신호를 만들었습니다.
“I(꼭 쥐기) LOVE(꼭 쥐기) YOU(꼭 쥐기).”
그날 켈리와 어머니는 수도 없이 서로의 손을 세 번씩 꽉 쥐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어머니는 걱정하는 딸에게 괜찮다는 엄마만의 리듬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2주 동안 어머니 옆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다가 더는 어머니가 손을 쥘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의사 수업을 할 때 그렇게도 세세하게 해부하던 인간의 육체만 남은 어머니.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 간 걸까? 영혼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켈리의 거의 두 살이 다 된 사랑스러운 아들 제이를 자주 돌봐 주었습니다.
제이는 자신과 놀아주던 할머니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더 자주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켈리가 할머니가 매우 아프다고 말할 때마다
제이는 “할머니는 내 마음 안에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화장하던 날 밤, 제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제이를 켈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말을 갓 시작한 제이는 켈리의 품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습니다.
켈리는 어둠 속에서 활짝 웃으며 아들을 더 꽉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이가 갑자기 켈리의 손을 잡고 세 번을 꽉 쥐었다 폈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처음 엄마 손을 꽉 쥘 때 엄마는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이상하다는 점을 느꼈으며, 세 번째 잡아줄 때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제이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고, 엄마는 완전히 잠이 달아났습니다.
“사랑해”라고 말할 때 손을 세 번 꽉 쥐었다 펴는 것은 켈리와 엄마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제이는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엄마의 손을 잡는 적도 없었습니다.
증거 중심으로 일하는 의사로서의 켈리는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엄마의 딸로서의 켈리는
“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나는 여전히 네 곁에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소위 ‘토끼 효과’를 발견합니다.
한 사랑 가득한 여성이 준 음식을 먹은 토끼들만 특별히 더 건강하다는 실험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의 환경 안에 살게 하여 인간의 감정으로 일어나는 병까지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화병이 있는데, 이것은 약물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서만 치유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고 미워하며 살았던 것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용서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드라마 중 ‘로스트’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객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며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괴물도 나타나고 이상한 생명체도 나타나지만, 또 그 사람들 안에서 불목과 의심과 미움과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가끔 죽었던 사람들도 등장하고 이전에 지었던 잘못과도 연결되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참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다 익사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곳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계’였고 여기에서 진짜 선인과 악인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연옥의 역할도 하는데 이 지상에서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들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황당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생존하려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본인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게 자신들이 죽었음을 인정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감정을 털고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죽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이 세상의 미움 속에 남겨집니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 감정을 규정합니다.
지옥에 머물며 천국의 감정을 느낄 수 없고 천국에 살며 화를 내거나 음탕한 마음을 품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증거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에 대한 용기 있는 결단이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5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5,43-48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갑시다!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만큼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강론>
(2025. 3. 15. 토)(마태 5,43-48)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들을 때마다, ‘원수와도 같은 그 사람’부터 떠올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너무나도 지키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주님의 사랑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왜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예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딴섬 같은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늘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그 사랑을 믿고, 깨닫고,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사랑 실천이 시작됩니다.
2)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하는 일’로만 생각하고, ‘받는 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순간부터 주님에게도, 또 이웃에게도
원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위선자입니다.
정말로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즉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예수님(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이웃들의 사랑을
깨닫고, 고백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실천하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계명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라는 시편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저를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까?”로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한낱 죄인일 뿐인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나를,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하느님은 살인자 카인도 보호해 주신 분입니다(창세 4,15).
우리는, ‘보잘것없는 나’를 주님께서, 또 이웃들이 변함없이 사랑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꾸짖지 않고 잔치를 벌입니다(루카 15.24).
말하자면 ‘밥부터 먹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선 먼저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 준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때부터 진짜 회개를 시작하게 되고, 사랑 실천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습니다(루카 15,28-30).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용서를 실천하지도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큰아들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4)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그것은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무슨 상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과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라는 뜻이고,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과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