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힘들어
박래여
딸이 왔다. 역시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살맛이 나는 것 같다. 온종일 푸름만 보다가 딸 웃는 소리를 들으니 사람 사는 것 같다. 연일 폭염이란다. 오후가 되면 시들시들 해 지는 상추와 비트에 물을 주고 고추 골에도 물을 준다. 오이도 토마토도 주렁주렁 달린다. 텃밭 골에도 집 주변에도 풀이 신나게 자란다. 호미를 들고 매 줘야 하는데 땡볕에 나가기 싫어 바라만 본다. 이러다가 우리 집 풀숲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우체통에 알을 깐 딱새 부부는 다섯 마리를 부화했다. 틈날 때마다 살그머니 들여다본다. 하루가 다르게 털이 솟고 내 기척에 입을 딱딱 벌린다. 어민 줄 아나보다. 벌레라도 잡아 먹여줄까. 혹 어미 새가 시샘할까봐 조심스럽다. 해마다 이맘때는 파르스름한 새알 구경도 하고, 새끼들 구경도 한다. 아기 새가 날 수 있을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어미 새와 아비 새는 제 몸 돌보지 않고 다섯 마리 새끼를 먹이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새가 한 마리 두 마리 날아가는 것을 본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식을 품에서 놓아버리지 못한다. 먹이고 입히고 키워서 시집장가 보내면 손자손녀 키워준다고 또 허리가 굽는다. 나는 아직 손자손녀를 안아보지 못했으니 그 심정 다 알 수는 없다. 자식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집에서는 친정 부모든 시부모든 손자손녀를 돌보는 것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요새는 혼자 벌어서 애들 공부 뒷바라지도 힘들다. 둘이 버는데 애들이라도 봐 줘야지.’ 그런 부모들이 많다. 자식들 모두 품에서 떠나보낸 줄 알아도 죽을 때까지 자식들 걱정에 목이 메는 것이 부모다.
농부가 마음공부 떠난 지 열흘이 넘었다. 딸에게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딸이 바다보고 오잔다. 삼천포로 갔다. 푸른 바다를 보니 속이 탁 터 인다. ‘울릉도 바다를 보다 삼천포 바다를 보니 너무 작다.’ 내 말에 딸이 웃는다. 노산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박재삼 문학관에도 들렀다. 다정다감한 시편을 읽으니 참 좋다. 나는 여운이 긴 서정시가 좋다. 노산 공원은 추억이 많다. 기억 저편에 있는 이미 빛바랜 추억들, 젊은 날의 한 때를 기억나게 하는 장소, 지팡이를 세워놓고 빈 의자에 앉았다.
해송 사이로 보이는 바다,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바위들, 바다에 가면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싶었다. 바닷바람도 후덥지근하고 비릿한 갯냄새가 묻어온다. 멍 때리기 하는 것도 고단하다. 나는 딸의 손을 잡았다. ‘되다. 가자.’ 딸에게 의지해 먼 길을 걸었다. 시부모님 모시고 다니던 갯장어 구이 집을 찾아들었다. 갯장어는 민물장어만큼 고소하지 않았다. 딸은 비리단다. 가격도 만원은 더 올랐다.
물가는 자꾸만 치솟고 거리엔 관광객조차 뜸하다.
어시장에 들렀다. 단골 어물전에서 멸치와 다시마를 샀다. 가격이 엄청 올랐다. 앞으로 멸치 값이 더 오를 전망이란다. 바닷물이 뜨거워져 멸치가 안 잡힌단다. 멸치도 다시마도 아껴 먹어야겠다. 붐비던 수산물 시장도 한산하다. 물가가 비싸지니 관광객도 확 줄어들었단다. 주인은 많이 깎아준다며 가능하면 현금을 달란다. 마침 현금이 있어 줬다. 커피 한 잔도 카드결제를 하는 세상이다. 현금 지니고 다니는 사람도 쉽지 않을 텐데.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하고, 부자를 더 부자가 되게 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 같다.
삼천포를 벗어나기도 전에 눈이 절로 감긴다. 내 몸은 오래 차타는 것도 힘에 부친다. ‘엄마, 오늘 너무 많이 걸은 것 같아. 괜찮겠어요?’ 괜찮다면서 수영장부터 들렀다. 물에서 피로를 푸는 방법이 내 몸에 맞다. 살살 걷다가 나왔다. 만신이 아프다. 무리하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저질 체질이다. 이런 상태로 언제까지 살아갈까. 문득 내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 궁금하다.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생에 대한 애착이 달라질까. 조금 일찍 죽으나 조금 늦게 죽으나 마찬가지 아닐까. 아파가면서 노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이다. 쓸쓸하다. 고단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02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