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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 15 요한의 아들 시몬 - 요 21: 17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 내 양을 먹이라 ( 21: 15-25 )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 21: 15 요한의 아들 시몬 -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요한의 아들 시몬아’는 예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 불렀던 이름이다(요 1: 42).
예수님이 지어주신 '반석'(베드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요 18: 17, 25, 27) 이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책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을 주기 위해서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아침 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 (마 16: 16).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마 26: 33)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었다. (마 26: 35).
그러나 그는 그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었다. 그것은 그의 수치스러운 실패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연약했지만, 그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였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의 고백은 그의 신앙고백이었고 그의 사랑의 고백이었다.
2]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이름은1: 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3]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다른 제자들은 어떠하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부하던 베드로의 자신감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 마 26: 33, 35 –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 눅 22: 33 -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 요 13: 37 -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개역 성경의 난하 주(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these로 되어 있다).
(1)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① '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② '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③ '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고기 잡는 도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 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 막 14: 29 -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4]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신적 사랑, 헌신적인 사랑"으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로(애정)로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답했다.
이 단어의 구분을 요한은 특별히 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인간적인 사랑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 요 3: 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 5: 20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 요 14: 21 -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요 16: 27 -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 혹자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 16. 5: 20. 14: 21. 16: 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 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주석 참조).
5]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주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전도자로 부르셨다. 전도와 목양(牧羊)은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집이다. 교회는 주께서 사랑하셔서 피 흘려 사신 백성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들은 하나님의 양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며 보살피라고 세움을 받은 자들이다.
* 행 20: 28 -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 벧전 5: 1-4 –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베드로는 이제 전도와 목양의 사명을 기억하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본 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 '먹이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양들을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 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요 21: 16 내 양을 치라 -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되어서 질문하시고 본 절에서는 베드로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묻고 계신다.
베드로의 대답은 전 절에 종속시키면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로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1]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두 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 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 같다.
2]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 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구절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3]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주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 자이거나 믿지 않는 자일 것이다.
주께서는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받으실 때마다 반복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양(牧羊)은 베드로에게 주시는 사명이다. 전도와 목양은 하나님의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교회와 성도들의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며 헌금해야 한다. 또 성도들은 전도자들과 또 전도와 목양을 위해 일하며 협력하는 모든 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자들이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후 목양의 사명을 일깨우신 것은 목양의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일 중에 영혼들을 다루는 일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세상에서 질병들을 치료하는 의사들보다 더 위험한 직업도 없겠지만, 사람의 영혼과 인격의 결함들은 육신의 질병들보다 더 치료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구원은 영적 병들을 치료하는 일과 같고 교회는 그런 병원과 같다. 인간의 죄성(罪性)은 여러 종류의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다. 그것은 뿌리뽑히지 않는 질병과 같다. 그런 죄인들을 다루며 가르치며 책망하며 위로하며 돌보는 것이 목양이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것은 주의 십자가 사랑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만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죄로 병든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양들을 사랑해야 한다.
요 21: 17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
예수께서는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계신다. 베드로는 아마도 자신이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순간 그는 근심하여lupevw(뤼페로) "고통 하다, 슬프게 하다, 서운하다"의 뜻으로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진심으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기노스코)라고 말했다.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같은 의미의 질문과 대답을 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세 번이나 부인하여 떨어진 명예를 확실히 회복시켜 주셨고, 베드로에게도 자신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1]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하여 Living Bible은 본 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2]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베드로는 예수의 세 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바 어쩌면 자기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다.
3]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 말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
* 요 2: 25 -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 요 16: 30 -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알고 있다.
혹자는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 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의 번역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 번찌의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나 교만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 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Bultmann).
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 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분부(마 28: 19-20. 막 16: 15-18. 눅 24: 46-48)와 비교된다.
* 마 28: 19-20 –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막 16: 15-18 –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 눅 24: 46-48 –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21: 15-17 )
디베랴 바다는 베드로의 생애에 잊지 못할 장소의 하나다. 베드로의 마음에 영원히 간직할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곳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나간 제자들을 찾아 세 번째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실의에 차 자신들의 할 바를 알지 못한 그들은 시몬 베드로를 따라 바닷로 갔으나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시고 그들에게 와서 먹으라고 부르셨다. 식사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① 예수님의 첫 번째 물으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의셨다. 그 자리에는 다른 여러 명의 제자도 함께 있었는데 유독 베드로를 향하여 매우 난처한 질문을 반복하여 세 번씩이나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 대한 특별하신 사랑과 그에게 주시고자 하는 목자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보여주는 사랑이란 말이 헬라어 원어에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예수님이 물으신 사랑은 ‘아가파오’요,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필레오’였다.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질문은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신 사랑을 ‘아가파오’란 단어로 표현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내신 사랑이다. 이처럼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2: 37).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신 사랑은 이런 사랑의 표준에서 “네가 나를 사량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주님이 물으신 아가파오의 사랑이 아니였다.
베드로가 말한 사랑은 ‘필레오’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의 고상한 사랑을 의미한다. 친구로써 나타내는 사랑이였다.
② 예수님의 두 번째 물으심
예수님은 두 번째 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두 번째 물으심에도 아가파오란 단어를 쓰셨다. 이곳에서 빠진 것은 “이 모든 사람들보다”란 말이다.
베드로의 자신 없는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사랑은 아닐지라도 “너는 나를 아가파오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으심에 베드로는 이전과 똑같은 답변을 드렸다. 베드로는 이때에도 아가파오로서의 사랑에서가 아니라 필레오로서의 사랑을 지니고 있음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한 것이다.
③ 예수님의 세 번째 물으심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이 물으심에서 사용하신 사랑이란 표현은 아가파오가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한 필레오란 단어였다.
주님은 여기서 그러면 너는 나를 친구로서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같은 사랑에 대한 질문에 근심했다. 베드로는 사실상 친구로서의 사랑도 주님께 갖지 못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2) 내 어린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이 사랑의 물으심은 또한 베드로에게 목자로서의 사명을 주시기 위한 사랑의 확인임을 알 수 있다.
①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기의 양을 맡기시지 아니하신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량하느냐?”라고 물으신 후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 교회의 양 떼들은 바로 주님의 양들이다. 그가 피로 값 주고 사신 귀한 양들이다. 이들을 먹이고 기르는 목자들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② 양들에 대한 사랑은 주인이 되신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목자들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예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이 양을 사랑할 때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앞서야 한다. 주님은 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 그의 양 떼를 맡기신다.
우리는 주님을 아가파오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베드로처럼 필레오의 사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고전 1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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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자기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 불만이 없는 사람이지요.
싱그러운 향기와 더불어 기분 좋은 미소가 바람과 함께 솔 솔 솔~~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