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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기술의 사회사>(루스 코완 지음, 김명진 옮김, 궁리 펴냄). ⓒ궁리 |
1장에서 코완은 이주자들이 원주민의 기술을 빌려 사용하는 경우와 이주자들이 자신의 기술을 새로운 조건에 적응시키는 경우에 주목하면서 유럽의 기술이 미국에 그대로 이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장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식민지 시기의 자족적 농부에 관한 신화이다. 코완은 자족성이 산업화 이전 시대에 향수를 가지는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개념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부유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장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3장은 당시에는 중상주의적 교의가 강했고 장인의 분포 밀도가 너무 낮아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못했다는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4장은 1780년에서 1820년까지의 초기 산업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코완은 미국 산업화의 독특한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은 유럽에 비해 토지가 저렴한 반면 노동력이 비쌌고 이에 따라 노동 절약형 기술 혁신이 촉진되었다는 점, 독립 이후 미국에서는 많은 양의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병기창을 중심으로 기술이 발전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부품의 호환성을 골자로 하는 미국식 생산 체계(American System of Manufacture)와도 맞물려 있는데, 코완은 미국식 생산 체계가 출현하고 확산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4장은 에번스, 휘트니, 슬레이터 등과 같은 미국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기술의 역사가 곧 사람의 역사라는 점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게 한다.
5장은 산업화 과정에서 종종 경시되어 왔던 운송 혁명에 초점을 두고 있다. 대략 1790년부터 1870년 사이에 미국은 도로, 운하, 증기선, 철도 등을 매개로 운송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운송 혁명을 통해 전국적 시장이 창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지만, 코완은 미국의 몇몇 주들이 연방을 탈퇴하지 못하게 하는 운송 혁명의 정치적 효과도 강조하고 있으며, 운송 혁명이 미국의 기술자 집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6장은 1820년부터 1920년까지의 약 100년 동안 기술사의 주역인 발명가, 기업가, 엔지니어가 어떤 활동을 전개해 왔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여기서 코완은 유명한 기술사학자인 토머스 휴즈가 제안했던 '기술 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이란 개념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코완은 기술 시스템이 "인공물과 조직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코완에 따르면, "발명가들이 인공물을 발명했고, 기업가들이 조직을 만들어냈다면, 엔지니어들은 시스템을 건설했다." 이 장이 집단 전기(collective biography)라는 독특한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7장은 1870년에서 1920년 사이에 이루어진 미국의 본격적인 산업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코완은 산업화가 대단히 오랜 세월이 걸린 복잡한 과정이기 때문에 혁명이란 용어를 채택하고 있지 않지만, 이 시기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영국에서 전개된 (제1차) 산업 혁명에 대비하여 제2차 산업 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7장에서 코완은 전신, 철도, 전화, 석유, 전기 등 5개의 기술 시스템에 초점을 두면서 미국이 전(前)산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탈바꿈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기술 시스템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코완은 이를 매우 산뜻하게 다루고 있어 독자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코완은 아이에게 줄 빵을 구하는 여성의 사례를 통해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에 대한 의존성이 줄어드는 대신 기술에 대한 의존성이 커졌다는 점을 매우 감수성 있게 파헤치고 있다.
8장과 9장은 이전의 통사적 기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에 해당한다. 8장은 산업화가 미국인의 노동 생활에 미친 영향을, 9장은 기술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산업화의 영향을 논의하는 코완의 시선은 노동자는 물론 농부와 가정주부도 포괄하고 있다. 특히 스토브의 등장을 매개로 가사 노동이 어떻게 변모했는가를 분석한 사례가 흥미로운데, 코완의 또 다른 책 <엄마에게 더 많은 일을(More Work for Mother)>에서 논의한 세탁기의 사례가 추가로 논의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기술의 이미지와 관련해서는 19세기 말 기술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기술을 통해 창조성과 자유라는 낭만주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게 분석되고 있다.
10~13장은 20세기의 역사를 지배했던 네 가지 기술 시스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자동차, 항공우주, 전자통신, 생물기술이 그것이다. 여기서 코완은 유명한 과학기술학자인 브루노 라투르가 제안한 기술과학(technoscience)이란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술과 과학을 구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코완은 네 가지 기술 시스템의 성장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면서 해당 기술 시스템이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에도 주목하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면성을, 항공우주의 경우에는 전쟁과 평화의 이중성을, 전자통신의 경우에는 사회적 통제라는 화두를, 생물기술의 경우에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 기술의 사회사>는 미국 기술이 변화해 온 과정에 대한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 당시의 맥락을 고려한 흥미로운 역사학적 해석을 담아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서구 기술 전반이 아닌 미국 기술을 대상으로 삼고 있고 20세기를 다룬 3부의 내용이 소략하다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이 책의 본질적 한계라기보다는 앞으로 더욱 보완되어야 할 과제로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20세기 기술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역자 김명진이 쓴 <야누스의 과학 : 20세기 과학기술의 사회사>(사계절 펴냄)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기술사는 아직 충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분야이며, 역자는 이를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분야"로 표현하고 있다. 아직도 '기술사' 하면 기술의 역사보다는 고급 기술자의 자격을 떠올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과 사회의 변화에 기술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기술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보다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명한 기술사학자인 멜빈 크란츠버그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모든 역사가 오늘날의 사회와 상관성이 있지만 기술의 역사는 가장 상관성이 큰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 기술의 사회사>가 번역된 것은 단순히 하나의 책이 발간된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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