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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분원 나눔입니다
✠ 루카 복음 6,36-3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입은 그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이는 사실,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전자는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후자는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남을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곧 타인에 대한 보복과 복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 단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게 되면, 이미 자신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와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베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먼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결코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이 악을 비추고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그렇습니다. 먼저 입은 하느님의 호의가 내 안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가 잘되기를 바라고, 그가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곧 그를 ‘위하는 마음’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흘러나오게 됩니
사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푸는 일, 그것은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고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영근 신부님 강론
3월17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루카 6,36-38
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7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다니엘 9,4ㄴ-10
루카 6,36-38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말씀은 깊은 절망감과 우울감으로 가득한 요즘 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요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시면서, 어찌 이리 큰 참담함과 혹독함을 체험하게 하시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님이십니다.
그분 마음속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엘 예언서 9장 8절)
지난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할 순간인 듯합니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더 유심히 내 발밑을 내려다봐야 할 때입니다.
더 부끄럽게 되지 않기 위해 더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부디 너무 우울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초기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아서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극복이 가능합니다.
규칙적인 운동, 산책이나 등산, 마음 비우기 작업 등이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 극복하기 힘겨울 때는 의사나 전문가의 진단에 따른 처방과 치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의(名醫)이자 주치의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다가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 보니 실망이란 단어가 자리 잡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실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결국 실망을 불러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실망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망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지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망했을 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우울증으로 진전되도록 방관하지 말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하느님 자비의 강물에 흘려 보내는 일이야말로 우울증 치료에 최선책임을 강조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한다.”
(이사야 43장 18~19절)
한편 다윗 임금은 자신에게 다가온 우울증이 하느님 은총과 자비 안에서 완치되었음을 크게 외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3장 5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조차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입니다.
암담하고 울적할수록 주님께 매달려봐야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향후 5년간을 대 피정 기간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뉴스도 끊기로 했습니다.
대신 더 깊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더 깊이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 더 의로운 세상, 더 복음적인 세상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바가 무엇인가,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강론>
(2025. 3. 17. 월)(루카 6,36-38)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을 심판할 권한은 없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남을 심판하는 일은 심판받을 죄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을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여기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는 말은, “성경을 모르는 저 무식한 놈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또는 “이 무식한 놈들아, 저주나 받아라.(지옥에나 가라.)” 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바로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인데,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기도 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구약성경 에제키엘서에,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인데, 사탄은 그 구원 사업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애를 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사탄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과 같고, 사실상 사탄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3)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 라는 말씀은 모순되지 않은가?”
루카복음 17장에,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라는 말씀이 있고, 마태오복음 18장에는 더 길고 자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형제가 죄가 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이 죄라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심판일까, 아닐까?
또 그 형제에게 가서 ‘너, 그런 짓을 하지 마라.’ 라고 꾸짖는 것은 단죄일까, 아닐까?
‘죄 짓는 형제를 꾸짖는 일’과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이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같은 일이 아닙니다.
죄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회개와 구원 가능성을 믿지 않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지옥에 갈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천국에 가 있고,
당연히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연옥이나 지옥에 가 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4)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사도들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제도는 원래 ‘정의와 선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또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은 심판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권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뜻 실현’을 위해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