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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사례]가장 큰 불사는 정토왕생. 자운스님
가장 큰 불사 정토왕생
염불각자(念佛覺者) 자운율사
[1] 10만 명 수계한 조계종 계단 확립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스님과 불자들에게 계첩을 수여한 스님은 단연,
자운(慈雲/1911년~1992년) 율사일 것입니다.
조계종 전계대화상으로 40년간 10만 명에 달하는 수계제자를 배출한 분이다.
동시에 그는 용성(용성)선사께 인가를 받고, 1947년에는 도반이었던 성철(性徹), 향곡(香谷),
청담(淸潭) 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주도한 선(禪)수행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이자 선사인 자운 스님이 40세 이후로는
염불수행에 매진해 일생동안 수많은 염불행자들을 지도한 정토의 선지식임을 아는 불자들은 그
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임종시에 아미타불의 접인을 밥도 희유한 서상(瑞祥)을 나타내며,
윤회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인 정토에 왕생한 자운 스님은,
조계종의 계단(계단)을 확립하고 정토수행의 왕성을 보여준
우리시대의 사표(師表)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율사이자 선사로 왕생한 정토조사
열반하시는 날까지 하루도 거스리지 않고 ‘아마타불’염불 10만번,
<아미타경> 48편 독송, 아미타불 예경 1080배 등을 행한 원력보살이십니다.
자운 스님은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에 대한 믿음(信), 육도윤회를 벗어난 정토에 화생하겠다는
발원(願), 염불행(行)이란 성불의 3가지 양식(자량/資糧)을 갖춘 정토수행이 가장 큰 불사라며
<정토삼부경>(법정스님역)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서방의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하는 것,
이외에 더 크고 긴요한 불사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여기 옮겨 싣는 정토사부경의 가르침과 그 인연공덕으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고 왕생정토(往生淨土)하여 이윽고는
대각을 성취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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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까지 매일 10만염불과 염불진언을 함께 수행
일종식 공양과 삼천배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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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율사의 탑비에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 명호를 칭명하면서
향기가 진동하고 묘한 수리가 청아하였으며,
염불소리와 함께 입으로부터 오색광명이
서쪽 하늘을 가득 메웠다.”라고 정토수행 완성자의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16세에 순치황제 출가시를 듣고 발심
자운당(慈雲堂) 성우(盛祐)스님은 1911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태어났으며,
7세부터 진부면 서당에서 <동몽선습>, 사서 삼경 등 유서를 공부하였습니다.
1926년 16세에 정초기도를 위해 절에 가는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혜운경윤 스님으로부터 “세속의 100년 3만6천일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더 낫다.”는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전해 듣고 발심하여 1927년 17세의 나이로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해인사로 달려가 팔만대장경 판전에서 1만 배를 올리고
혜운스님을 은사로 남천한규 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서원계를 읊었으며,
1929년 해인사 강원에서 사교과, 1932년 범어사에서 경념 율사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율장 연구를 시작하여
5부 대율을 날마다 서사(書寫)하고 지송하였습니다.
[4] 3년 장좌불와하고 용성 선사의 인가를 받아
1935년 범어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3년 동안 울진 불영사에서 눕지 않고
꼿꼿이 앉은 채 (長坐不臥)로 결사(結社)하였으며,
1937년 문경 김룡사와 양산통도사 선원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1938년 울산 학성선원에서
하안거를 지내며 선리(禪理)를 깊이 참구하여 드디어 용성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자운 스님은 같은 해,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선사로부터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깊은 뜻(서래밀지)”에 대해 선문답을 한 다음,
“청산은 항상 걷는데 백운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네.
사람이 물속을 걸어가는데 물이 옷에 붙지 않도다.
(청산상운보 백운영부동 인답수저과 수불착의상/
靑山常雲步 白雲永不動 人踏水底過 水不着衣裳)라는 오도송을 지어 올렸습니다.
용성스님은 이를 인가하고 입실건당토록 하고 전법게와 함께 의발을 전해주었습니다.
[5] 오대산 백일기도로 문수보살 계시 받아
1939년에는 일제의 식민수탈로부터 조국을 해방하고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대원을 세우고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날마다 20시간씩 백일 용맹정근으로 문수기도를 봉행하였다.
그러던 중 99일째 되는 날 황홀한 가운데 푸른빛의 사자를 타고 나타난
문수보살로부터 “너는 불교의 중흥을 위해 계율정신을 진작하라.”는 계시를 받고
심지법문(心地法門)을 통달하여, 무너진 수행가풍을 계율로 진작하는 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1940년 이후 10년간 제방선원에서 정진한 후, 본격적으로 율장 연구에도 심혈을 쏟았다.
당시 서울 대각사에서 주석하면서 희귀한 율장을 구할 수 없어
2년여에 걸쳐 삼복염천에도 두터운 장삼을 입고 날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본의 만속장경(卍續臟經)에 실려 있는 오부율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하여 연구할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1948년 37세 때 처음으로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하면서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했으며, 1951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재난에 처한 재가불자의 수행과 교화를 위해 부산 감로사를 창건했습니다.
1955년 교단정화이후 초대 해인사 주지에 추대된 이후 1981년 종단 단일 계단이 형성될 때까지
30여년 동안 수계증을 받은 수계제자가 무려 10만 여명에 이릅니다.
[6] 매일 10만 번 ‘아미타불’ 고성염불
1956년 재단법인 해인학원 이사장,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7년 범어사 주지를 지내고, 1967년 이후로는 계율과 정토수행을 하나로 보는
계정일치(戒淨一致) 수행을 제창하고 경전과 율전의 한글 번역에 매진하였습니다.
<무량수경> <자비도량참법> 등 21종에 이르는 한글본을 출간 유포했으며,
<미타예찬> <정토의범(淨土儀範)> 등 중요 정토서적 9만 여부를 거의 자비로 간행, 유포했습니다.
자운스님은 감로사에 주석하면서 주야로 여섯 차례에 걸쳐 예불과 염불을 봉행하였습니다.
매일 새벽2시에 일어나 ‘아미타불’ 고성염불을 10만 번씩 하면서
미타예경 1080번로 참회(懺悔)와 절을 겸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스님의 염불수행은 염불진언을 함께 닦았다는 점입니다.
즉 하루 30만 독씩 ‘아미타불 종자(種子)진언’을 염하였고,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와
‘무량수여래 근본다라니’ 등을 하루에 108번씩 외우면서 정진하였습니다.
또한 오후 4시 아귀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헌식 외에는
하루 한 끼만의 일중식(日中食)을 공양하면서 3천배의 정진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7] 조계종 총무원장, 역경원장으로 헌신
자운 스님은 철저한 지계행과 정토수행 가운데서도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사심없이 종무행정에 헌신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1976년 조계종 원로로 추대된 데 이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77년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조계종 대종사 법계를 품수하였습니다.
1981년 종단 단일계단 전계화상에 추대된 스님은 1987년 동국역경원에 이어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에 취임, 역경불사의 반석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세수 81세가 되던 1991년 10월 30일, 자운 스님은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종단단일계단 제12회 수계법회를 마친 후 계단에 앉아
“나는 금년말이나 내년초에 금생의 보년(報年)이 끝날 것이므로
종단 단일계단의 단주(壇主)를 고별한다.”며 입적을 예고하였습니다.
[8] 기이한 향, 광명의 서상을 보이며 왕생
과연 이듬해 초인 1992년 2월 7일(음력 1월 4일) 스님은 해인사 홍제암에서
“참다운 성품은 둥글고 밝으며 본래 공하여 광명이 시방을 극히 청정하게 비추나니
(眞性圓明本自空 光照十方極淸淨/진성원명본자공 광조시방극청정),
올 때는 청풍이 소요하듯 오고 갈 때는 밝은 달을 따라 자재하게 가네.
(來與淸風逍遙來 去隨明月自在去/래여청풍소요래 거수명월자재거)”라는 임종게를 쓴 다음
서쪽을 향해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명하면서 조용히 입적했습니다.
이 때 향기가 진동하고 묘한 음악이 청아하게 들려왔으며 염불소리와 함께 입으로부터
오색 광명이 서쪽 하늘을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세수 82세 법랍66년이었다. 스님의 장례는 해인사 연화대에서 조계종 원로장으로 거행되었는데,
다비 중 은행크기의 사리가 19과와 녹두 크기의 사리 5천여 수가 출현하였으나,
생전에 사리를 찾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큰 것만 수습하여
이를 해인사, 감로사, 경국사에 나누어 봉안 하였습니다.
[9] 정토 선양한 한국의 ‘상참괴승(常慙愧僧)’
스님은 평소 계율을 근간으로 한 염불수행과 참회를 겸수한 예참의 염불, 정토진언행을 함께 닦으며
스스로 ‘상참괴승(常慙愧僧: 항상 참회하는 부끄러운 중)’이라 하심하며 산 참다운 선지식이었습니다.
근대 중국의 정토종의 제13대 조사인 인광(인광 : 1861-1940) 대사 역시 법호를 상참괴승(常慙愧僧)이라
하여 염불을 크게 선양하였는데, 자운 스님은 한국에서 대사와 같은 정토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 법문을 듣고 무생법인 증득한 뒤에 극락세계 안 떠나고
사바에 와서 방편을 잘 알아 중생 건지고 걸림 없는 지혜로 불사 지으리,
부처님 저의 마음 아시오리니 오는 세상 이 소원 이루어 지이다.”
직접 편찬하신 <정토예경(정토예경)> 회향게의 내용 그대로
자운 스님은 해인사에서 <염불만일회>를 결사하여 관음전에서 정토왕생업을 닦았고
<정토심요> <연종보감> 등 많은 저서를 내어 정토법문을 널리 선양했으며,
서울 보국사의 대동염불회, 부산 감로사, 해인사 홍제암,
대구 만선염불원 등에서 염불결사를 조직해 정토수행을 널리 보급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개운선원)
작성자 : 慧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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