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사랑 얘기가 영 시답잖게 여겨질 때가 있다. 넷플릭스 유랑을 하다 '얻어 걸린' 이란의 명장 압바스 키아로미타스의 유작 '사랑에 빠진 것처럼'(2012)은 정말 시답잖은 줄거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촘촘한 그물을 짜놓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마지막 반전의 코믹함은 정말 기함할 정도다.
구조적으로 매우 탄탄하다. 연결되는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장면 장면들이 모두 연결된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해보면 감독이 얼마나 치밀한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 설계가 얼마나 촘촘하고 정교한지 조물주 같다 싶다. 오늘도 화려한 입봉을 꿈꾸는 감독 지망생들이 각본을 만지작거릴 때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미스터리 같기도 하다가 갑작스럽게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명언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을 떠올리게 한다.
장소가 매우 중요해 고딕체로 표시하고 그 뒤에 명조체로 장면들을 소개한다.
고급 바 리쪼 소란스러운 바 내부를 보여주는데 문득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아키코(다카나시 린)는 애인의 전화를 받고 무척 곤란해 하는 것 같다. 애인은 아키코가 둘러대는 장소에 있지 않다고 의심한다. 화장실 문을 내려 보라거나 바닥의 타일 갯수를 말해보라고 한다. 아주 친한 친구로 보이는 나기사(모리 레이코)는 애인이 하라는 대로 다 하라면 안 된다고 타박한다.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 히로시(덴덴)도 그만 헤어지라고 타이르며 자꾸 아키코보고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한다. 아키코는 한사코 내일 시험도 있고, 오늘밤 할머니를 만나야 한다며 다른 날로 미루자고 통사정을 한다. 그런데 이 바도 그렇고, 손님들도 다 수상하다. 모두 자신들의 대화에 열중하는 것처럼 굴면서 아키코와 히로시의 대화를 은근짜 엿듣고 있다.
눈치채셨는가? 아키코는 나기사와 마찬가지로 콜걸이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고 있다. 히로시는 남정네를 소개해주는 포주이고, 그 바 안의 모든 사람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었다.
택시 안 뒷자리에 앉은 아키코는 전화 음성메시지들을 차례로 재생해 듣는다. 기사는 힐끔힐끔 룸미러를 통해 뒷자리를 염탐한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아놔, 이런 내색이다. 할머니는 일찌감치 역에 도착해 손녀를 기다리며 계속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만나야 할 시간을 한참 넘겨 아키코는 밤 10시 30분에 낯선 남자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 기사에게 부탁해 역을 갔더니 그 늦은 시각까지 할머니는 손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내려라, 마음 속으로 빌었는데 끝내 아키코는 내리지 않는다.
골목과 편의점 택시는 히로시가 건넨 쪽지에 적힌 주소에 도착했는데 아키코는 잠들어 있다. 집 주인은 도통 전화를 받지 않는다. 기사가 조바심을 치다 편의점에 들어가 이 주소가 맞는지 묻는데 봉다리를 든 늙수그레한 와타나베(오쿠노 타다시)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와타나베의 집 야심한 시각인데도 전화가 연신 울려댄다. 동생이란 사람이 별로 긴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부탁하는데 당장 해달라고 한다. 콜걸을 부른 형의 사정을 알 리가 없긴 한데, 자꾸 전화해 시답잖은 일을 빨리 해달라고 졸라댄다.
와타나베는 사회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으며 지금은 은퇴해 번역하며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아키코는 그의 딸과 아내 사진을 들고 와 누구냐고 캐묻는다. 소녀가 앵무새와 대화하는 그림을 보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그림 속 소녀와 닮았다며 누군가와 닮았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듣는다고 털어놓는다.
와타나베는 아키코 고향 특산품으로 수프를 끓여놓았으니 먹자고, 와인이라도 마시며 얘기를 나누자고 하는데 아키코는 빨리 자자고 한다. 침대에 올라가 평소 어느 쪽에서 자느냐고 묻고는 벌러덩 옷들을 벗기 시작하는데 거울에 비치고 와타나베는 자꾸만 얘기를 나누자고 한다. 동생의 부탁은 마다하면서 낯설고 손녀 뻘인 아키코와 대화를 하자고 졸라댄다. 아키코는 나기사에게 들은 시답잖은 음란패설을 살을 붙여 얘기하며 저혼자 깔깔댄다. 감정노동이다.
와타나베가 전화를 끊고 돌아오니 아키코가 잠들어 있다. 얼굴에 검버섯이 보이는 와타나베는 전등 불을 꺼 편히 잠들게 한다.
와타나베의 차 안 다음날 와타나베는 등교하는 아키코를 뒷좌석에 태운 채 핸들을 잡았다. 아키코는 또 잠들어 있다. 어제 밤과 달리 하늘이 차창에 비치는데 참 맑다. 네온사인이 휘황했던 밤과 달리 사람들은 어딘가로 열심히 흘러가고 있다. 와타나베는 룸미러를 통해 아키코의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으려 배려한다.
아키코가 차에서 내린다. 시험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와타나베는 앉아 기다린다. 아키코는 계단에서 애인과 맞닥뜨려 실랑이를 벌인다. 와타나베의 시선이 둘을 쫓아간다. 그 애인이 차를 흘끔 보더니 다가와 담뱃불을 요구한다. 뜸을 들인 애인이 "당신 누구냐"고 묻는데 와타나베도 용기를 다해 "뭔 자격으로 그딴 걸 묻냐"고 쏘아붙인다. 그러자 애인 녀석은 조수석에 앉더니 노리아키(카세 료)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동차 정비 일을 하는데 아키코가 말을 안 들어 속 상하다고 털어놓는다. 노리아키는 와타나베를 아키코의 할아버지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더니 인생 상담을 한다. 아키코를 사랑하니 결혼해야 한다고 노리아키가 얘기하자 와타나베는 꼭 결혼이나 가족으로 누군가를 얽어매면 안된다는 취지로 얘기한다. 거짓을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도 얘기한다. 아예 질문하지 않거나 돌아오는 답을 그대로 믿어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얘기한다.
아키코가 시험을 마치고 돌아와 셋이 대화를 이어간다. 오랫동안 사랑했다는 아키코는 믿지 않는 노리아키는 할배를 더 믿는 눈치다. 노리아키는 차에 문제가 있다며 함께 정비소로 가자고 한다. 노리아키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정비소 직원에게 완력을 행사했던 일을 떠벌인다.
정비소 아키코는 와타나베가 진실을 얘기했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며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고 추궁한다. 와타나베는 어쩌다 저런 녀석을 사귀었느냐고 은근히 아키코를 타박한다.
순서를 기다리는데 옆에 차량이 들어오더니 운전자가 아는 척을 한다. "교수님에게 30년 전 수업을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와타나베는 잠기운이 몰려와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다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골목과 편의점 와타나베가 주차했는데 옆집 여주인이 목소리만으로 "차 좀 더 안쪽에 대시죠" 참견을 한다. 손녀와 함께 아침에 나가시는 것을 봤다고 아는 체한다. 이곳 역시 어제밤과 달리 오가는 이들로 밝게 빛난다. 어디선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들려온다.
와타나베가 어제밤 만든 수프로 요기나 하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그는 부리나케 차 열쇠를 챙겨 다시 나간다.
골목 안 와타나베가 아키코를 데려왔다. 피가 제법 흘러내려 와타나베는 약국으로 달려간다. 이번에는 창문을 열어 이웃집 여자가 아키코에게 말을 건다. 너네 엄마를 빼다박았구나를 시작으로 이웃집 와타나베가 '그 일'이 있고 난 뒤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하고 자신이 일찍이 결혼 상대로 찍었는데 그가 어느날 자신보다 훨씬 예쁜 여자를 데려와 포기했다는 등 정말 시답잖은 얘기들을 재잘거린다. 자신은 장애가 있는 동생 뒷바라지에 얽매여 아무것도 안한다는 신세한탄까지 늘어놓는다.
와타나베 집안 와타나베가 사온 약과 거즈 등으로 상처를 만지는데 딩동 벨이 울린다. 노리아키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거짓말이나 늘어놓고 말이야. 동네 사람들 다 나와봐라. 어린 아가씨나 밝히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와타나베의 거실 창문은 커튼이나 브라인드가 처져 있지 않았다. 밤에도 차량 헤드라이트가 비쳤고 낮에도 바깥 풍경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모양이다. 노리아키가 계속 소리 지르고 이웃들이 말려대는 소리만 들려온다. 와타나베는 연신 창문 밖을 내려다 보는데, 갑자기 돌이 날아와 유리창을 박살낸다. 그 순간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결국 이 영화 주제는 소통과 단절, 사랑과 이별에 대한 메타포임을 깨닫게 된다. 시답잖은 얘기를 통해 굉장히 묵직한 얘기를 시적으로 전달한다.
와타나베가 아키코와 완전 남남일까 의심이 싹튼다. 어떻게 아키코의 고향을 아느냐 말이다. 그러고보니 할머니도 아키코가 콜걸로 일한다는 풍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찾아온 것도 손녀의 진위를 알아보려 했던 것이었다. 노리아키가 정비소 직원을 패준 것도 그 전단지를 봤다는 말에 화가 나 주먹을 휘두른 것이었다.
아키코가 노리아키에게 추궁 받았던 얘기를 털어놓자 와타나베는 "누구나 할아버지는 둘이지 않느냐. 다른 쪽 할아버지라고 둘러대면 된다"고 조언했다. 팔찌나 그림 등이 둘의 만남이 이미 기획됐던 것이란 관객의 의심을 키운다. 관객도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 셋의 거짓과 진실을 치열하게 검증하고 있었다. 영화란 그런 것이라고 명장은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택시와 와타나베 승용차로 거리 풍경들을 표현하는데 그 기법이 세련되고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다. 제작비도 적게 들었을텐데 이만한 작품을 건져올린다니 대단하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유명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가장 즐겁게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감독이란 평을 들었는데 그 의미를 실감케 한다. 2016년 사망해 이 작품이 유작이 된 점은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