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디 여린 당신의 허리춤에 긴 마취 침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눈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손잡아주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그 순한 눈매에 맺혀 오는 투명한 이슬방울
산고의 순간은 이토록 무섭고 외로운데
난 그저 초록빛 수술복에 갇힌 마취의사일 뿐일까?
사각사각 살을 찢는 무정한 가위소리
꼭 잡은 우리 손에 힘 더 들어가고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편히 감는 눈동자 속에 언뜻 스쳐 간 엄마의 모습
몇 달 후 찾아와서 부끄러운 듯 내어놓은
황톳빛 비누 두 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아가 먹다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
그때 손잡아주시던 때
알레르기로 고생한다 하셨잖아요
혼자 남은 연구실에서 한동안 말을 잊었네
기어코 통곡 되어 눈물, 콧물 다 쏟았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습니다
* 김기준 : 시인, 연세대 의대 마취과 의사.
의사 시인을 감동시킨 비누 두 장
제왕절개 수술 때 산모에게는 진정제를 투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뱃속의 태아를 위해 척추마취만 한다는군요. 수술 도중 산모의 긴장과 불안은 극에 달합니다.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와 수술 기구들이 부딪치는 소리, 피부와 살을 찢는 소리를 무방비 상태로 들어야 하지요. 산모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순간입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는 마취 침을 놓고 난 뒤 불안해하는 산모의 손을 꼭 잡아줬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해보세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수술 침대에 누운 산모가 그의 손을 꾸욱 잡았습니다.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지요. 어느 순간 손톱이 그의 손등을 파고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산모가 “어머나! 선생님 손에 상처가……” 하며 당황했지요. “아니에요. 얼마 전에 생긴 피부 알레르기 때문이에요.”
몇 달 뒤 퇴근 시간, 누군가 그의 연구실 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혹시 저 기억나세요? 몇 개월 전 저 아기 낳을 때 마취하고 손 잡아주셨잖아요. 저 때문에 손에 상처가 났었는데.”
“아! 그때…….”
“그날 정말 무서워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선생님 손만 꼬옥 잡고 놓치지 않으면 모든 게 무사히 다 지나갈 것이다. 그 마음뿐이었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오히려 제가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차 한잔의 시간이 지난 후 일어서던 그녀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피부 알레르기에는 모유로 만든 비누가 최고래요. 이건 제 아이가 먹고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얼떨떨하게 서 있었습니다. 한참 후 포장을 열어보니 그 속엔 아기 손바닥만 한 황톳빛 비누 두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잊었지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끝내는 통곡이 되어 눈물 콧물 범벅이 됐지요. 그날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쓴 시가 ‘비누 두 장’입니다.
그 눈물겨운 사건(?)은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시인의 꿈을 다시 꾸게 해줬습니다. 2016년 <월간 시> 신인상으로 등단하고 시집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사물에 대한 예의'를 내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지요.
(하략 / 아래 '원본 바로가기' 참조)
〈고두현 /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Main Theme(Guitar Ver.)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Original Soundtr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