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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23, 1-12
"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스승은 한분 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23,8)
어느 스승의날 신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신학생들은 카네이션을 준비해서 교수 신부님들이 수업에 들어오시면 가슴에 달아드렸답니다.
교부학 시간이 되어 이 모 교수 신부님께서 들어오시자 신학생들은
교수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 드리려고 하자 그 교수신부님은 가슴에 달려있던 카네이션을 빼셔서
의자 위에 올라가신다음
당신 가슴에 꽂혔던 카네이션을 빼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꽂아 드리고는 신학생들과 함께 예수님을 향하여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드렸다고 합니다.
이 신선한,
충격적인 시간에 함께 했던
어떤 신학생은 그 교수 신부님의 행동에 받은 감동으로 전공을 선택 해야 했을때 교부학을 선택하셨고,
지금은훌륭한 사제로 살아가고 계십니다.
이 교수 신부님은 지금의 마산 교구장님이신 이 성효 리노 주교님이시고,
그 신학생은 황*수 신부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써 보여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이렇듯 복음은 생활안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갈때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고 마음을 건드리는 말씀을 생활안에서 아주 작은 행위로라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그분께 여쭈어 보면 어떨까요?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 50, 오늘 화답송)
(정 루치아 수녀님)
3월18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23,1-12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폴레옹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고는 보통 왕관을 씌우는 의식은 교황이 주례를 맡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자신이 모든 권력의 근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황제란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이룬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황제 즉위 후,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의 황제 권위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패배와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가 칭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그의 군은 대패했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엘바 섬으로 유배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기까지 가톨릭 신앙을 주장했지만, 자아를 누르지 못하는 그냥 종교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그 사람을 바로잡아주었던 예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본래 깊은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링컨은 오히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아갔고,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여러 번 실패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족의 죽음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으며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이후,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리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가 분열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링컨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은 그의 내면에 깊은 신앙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 기간 동안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들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의 무게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해지고, "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섭리를 정치적 결단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또 이같은 신앙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는 “하느님 아래 새로운 자유가 탄생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
라는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링컨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위안이나 심리적 안정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때 도덕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링컨이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깊어진 관계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노예제 폐지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가장 앞장서서 적과 맞서는 용맹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지만,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점점 독재자의 모습을 띠었고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국민 영웅인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칭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모습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악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지에 대한 그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 때문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자아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선한 신을 믿고 지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되어갑니다.
사울 왕이 왕이 되고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자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겸손해진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부르시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불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불리셨고, 또 제자들을 “아이들아!”(요한 13,33: 21,5)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 겸손하셨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치가 바뀌더라도 그것들은 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섬기기에 자리에 따라 자기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인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양의 종교가 아닌 참으로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직 신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려는 존재기 때문에 자아를 누를 수 있는 분은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육.마.를 누르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신은 그 사람 안에서 아직 신은 아닙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8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23,1-12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만나기만 하면 강력한 경고 말씀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날 선 발언의 이유들은?
거룩함을 가장한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말과 실제 삶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이중성 때문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앞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덕에, 그리고 조금 나이가 든 덕에,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주로 하는 일이 허드렛일에다 수렵 활동이다 보니, 늘 입고 다니는 옷은 시장표 작업복이요 추리닝입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몇 년째 배수로에 켜켜이 쌓이고 또 쌓인 낙엽더미를 제거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 보니, 참 좋은 것이 많습니다.
넘어져도 크게 충격받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높은 데 있다가 급추락하는 사람들은 기본이 전치 8주인데, 낮은 데 있다 보니, 넘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즉시 일어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가난한 사람들, 절박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어린이들, 작은 이들, 낮은 이들은 대체로 교만하거나 위선적이지 않더군요.
그들의 삶은 그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기대치가 크지 않으니, 삶이 소박하고 겸손합니다.
반면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지도자들, 고위층 인사들의 언행을 보니 엄청나게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경향이 컸습니다.
어떻게든 높이 올라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봐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니 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강론>
(2025. 3. 18. 화)(마태 23,1-12)
<말과 행실이 다르면, 그 말은 ‘빈말’이 될 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2-12).”
1) 3절의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가 아니고,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실행하고 지켜야 할 말을 해도,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가 본래의 뜻입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과 거룩한 말을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행실이(삶이) 전혀 좋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면, 그 말 자체를 귀담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 위선자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마르 1,22).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앞의 4장에 있는,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이야기에도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사탄이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성경은 성경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말은 사탄의 말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고 해도......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위선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전하는 말씀은 거룩한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의 말과 행실이 다르다면, 그 위선자는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사람이 될 뿐이고, 그들의 말은 전부 다 ‘빈말’이 될 뿐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지 간에,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과 가르치신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금하신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ㄱ).”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무도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을 능가하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수님의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을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겪었던 일들은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5) 12절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교만한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인데,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기만을
희망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