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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 23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 요 21: 25 낱낱이 기록된다면
요 21: 23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는 이 말씀이 초대교회에 잘못 알려졌던 것을 요한 자신이 스스로 밝혀주고 있다.
1]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본 절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19-22절) 상당히 오해되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잘못 이해된 이야기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회자 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형제들'이라는 칭호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동료 그리스도교인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 행 1: 15-16 –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2]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은 요한이 당신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당신의 재림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베드로는 아무런 신경을 쓸 것이 없다는 의미였는데 전자의 의미로 오해되었다는 것이다.
3]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 오해는 본서의 저자로 하여금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낄 만큼 심각한 문제였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이런 오해가 설득력 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가까이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마 16: 27-28 –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행 1: 11 –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고전 15: 51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 살전 4: 15 -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 계 2: 16 -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 계 3: 11 -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렌스키(Lenski)에 의하면 요한이 죽어 장사 된 다음에도 그가 죽지 않고 무덤 속에 살아있다는 전설이 유포(流布)되었었다고 하는데, 이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오해된 말씀이(22절)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요 21: 24 증언하고 기록한 제자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 이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
본서의 저자가 확실히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로서 베드로와 같이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 면은 없지만 반대로 온유하며 예수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본인을 본 복음서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한번도 밝히지 않은 체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식으로만 기록을 남겼다.
1]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고 본서의 저자로서 복음을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겼다.
예수의 생전에 그와 함께 하였던 제자, 더구나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증언하는 내용이 신뢰할 만큼 권위가 있음을 시사한다.
2]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본문은 요한이 쓴 이 복음서가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것임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라는 보증인을 내세우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이 복음서가 어떤 의미에서 공저(共著)로 된 창작물이었으며 저자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복음서에 대해 책임을 졌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본문을 표면적으로 이해한 데서 온 것일 뿐 어떤 증언에 근거한 얘기가 아니다. 최근의 주석 학자들은 이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 '에베소의 장로들'이라고 보기도 하고(Lenski), 사도의 증언을 확증할 수 있는 사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Barrett).
혹은 요한이 자신과 동역자들 그리고 본서의 독자들을 공동체 의식 속에 묶어 본서의 진정성을 함께 확증시키려는 의도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확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건 본문이 이 복음서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복음서의 권위를 확증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 21: 25 낱낱이 기록된다면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
사실상 본서의 글을 마감한 요 20: 30과 같은 의미로 보아도 좋다. bibliva(비블리아) "책, 두루마리 책"을 가리키는 이 말은 '파피루스'를 말하는데 현재의 종이와 달리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확실히 이 용어는 신학자 모리스(L. Morris)가 말한 것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볼 수 있다.
1]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내용 중에서 극히 일부분을 선택하여 이 책에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는 말씀은 사도 요한 당시의 교회의 공동적 증언이며 사도 요한의 글에 대한 초대교회의 확증이라고 보인다.
초대교회가 증언한 대로 이 책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증언들은 다 참된 증거들이다. 이것이 성경의 성격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이다.
요한은 20: 30에 이어 다시 한번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자기가 기록한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다는 사실을 과정법적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애쓰고 있다.
2]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만일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공동번역)는 표현은 확실히 모리스(L. Morris)가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여유있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1) 그리스도가 행하신 놀랍고도 수많은 일들을 다 기록하기에는 저자인 요한의 힘이 너무 달린다든 것.
(2)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계시된 복음은 몹시도 심원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둘 수는 없다는 것(Lenski)이 그것이다.
3] 베드로의 남은 생애 (21: 18-2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세 번째의 물음을 통하여 베드로는 그의 마음이 깨여졌다.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혈기와 교만에 대한 부끄러움으로써 이때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에는 강했지만 지금은 약해졌다. 영적으로 강해지려면 육적으로 약해져야 한다. 베드로가 이전에 육에 강했을 때에는 자신과 신념에 꽉 찾었지만, 실제로 영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넘어졌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강하게 무장된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새로운 사명을 받은 것이다.
(1) 주님의 어린양을 양육하는 목자의 자세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그의 양 무리에 대한 부탁의 말씀은 오늘날 목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명령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처럼 세 번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어떤 사명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해답은 헬라어로 나타난 뜻을 살펴 볼 때 명백하다. “먹이라”고 하신 말씀은 ‘보스코’로 먹이다, 치다, 치게하다의 뜻이다.
또 “치라”고 하신 말씀은 ‘포이마이노’로 기르는 목자 또는 목자 노릇을 하라는 뜻으로 이 말의 어원은 양을 치는 사람, 목자에게서 유래되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베드로에게 맡겨 주신 주님의 사명은 예수님의 양 무리들을 맡아 기르는 목자로서의 사명이다.
① 목자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으로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계속 부탁하신 일은 그 사명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목자장 되시는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양 무리를 다스리는 사명을 받은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② 목자는 청지기의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 주인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를 비유로 들면서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악한 종에 대하여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선언을 내리셨다.
* 눅 16: 1-13 – 불의한 청지기 –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③ 목자는 달란트의 사명을 받은 종들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야 한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시는 달란트를 받은 세 명의 종의 경우는 분명히 목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으로 보인다.
세 명 중 두 명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써 칭찬을 들었고,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 마 25: 26-30 –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 띠 띠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종말에 일어날 생애에 대해 의미심장한 예언을 들려 주셨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띠를 띤다는 말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로 이같은 자세는 일하는 종의 자세를 의미한다. 주님의 이 말씀대로 베드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계획을 자신이 세우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에 따라 복음도 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그의 생애를 마치는 일만큼은 자신의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핍박자)들에 의해 좌우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내 팔을 벌린다”고 하신 것은 장차 그의 주검이 십자가에서 순교해야 할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
(3) 네게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이 지금 향하시는 그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그 후에 다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그의 생애를 주님을 따라가는 생애여야 한다고 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또 다른 제자(요한)가 자기와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실에 대하여 평소에 그 제자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 온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래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묻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나 뜻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고 이 일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쓰시기도 하시며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쓰기도 하신다. 모두 다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주님을 위한 일군으로 사용해 주신 데 대한 고마움과 감격으로 우리의 생애가 충만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의 고난의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생애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부활하신 주께서는 기적을 행하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새벽에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셔서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히게 하셨다.
그는 숯불과 생선과 떡을 갖춘 신기한 아침 식탁도 제공하셨다. 본문에 언급된 7명의 제자들은 이 새벽에 이 사건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 주님은 제자들에게 목자의 사명을 주셨다.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다.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받은 양무리들을 가르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받는 시대가 올 것이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했다. (딤후 4: 2).
주의 종들은 주를 사랑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 주만 따르라.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눅 9: 23).
사도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주의 종들과 성도들도 다 이 길을 가야 한다.
넷째, 성도들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 두 절은 본서가 진실한 증인의 진실한 증언들임을 증거한다. 이것이 성경이다. 진리의 세계는 진실의 세계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의 기록이다. 이 진리의 증언들에 구원과 영생이 달려 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증거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신, 구약성경을 다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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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