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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들은 제국 일본에 유학 가서 어떤 사람이 되었나?
염상섭 장편소설 《삼대》의 주인공 조덕기는 교토 제3고등학교 학생이다. 자산가의 손자인 그는 식민지 정치범들을 돌보는 변호사가 되고자 교토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하려고 한다. 실제로 1920년대 교토에는 조덕기와 같은 마음을 먹었음직한 이력을 지닌 조선유학생들이 있었다. 3·1운동 남대문 시위에서 붙잡혀 6개월간 복역한 길원봉,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한종건은 현해탄을 건너 교토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각각 총독부 체제를 떠받치는 관료, 식민지 민족운동을 탄압하는 경찰로 변신했다. 처음 ‘현해탄’을 건너며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이 남대문 시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던 이 청년들을 바꾸어 놓은 것일까?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시인 정지용은 〈다시 해협〉에서 처음 ‘현해탄’을 건너던 “스물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1)고 적었다. 지식을 구하러 식민 본국으로 건너가는 식민지 청년의 복잡하고 쓰린 심정을 “담배를 먼저 배웠다”고 표현한 것이다. 임화는 정지용의 이 시를 인유하여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반문하며, “첫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 둘잿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 그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2)고 주장했다. 임화는 <해협의 로맨티시즘>이라는 시에서 현해탄을 건너는 식민지 청년이 가져야 할 진정한 마음가짐을 다음처럼 읊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靑年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었다. 3)
임화는 ‘현해탄’을 식민지 청년이 나아갈 길을 가르쳐 줄 높은 사상을 배우러 가는 입구로 노래했다. 무수한 청년들이 이곳을 건너며 자기 한 몸의 출세를 넘어서 “슬픈 고향의 한 밤”을 환히 밝히는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어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그중에서 적지 않은 청년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지사의 삶을 실제로 살다가 스러져갔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첫 다짐을 잊고 “그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생들이 출세를 추구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임화의 시편들은 현해탄을 건너는 식민지 청년들에게 단도직입의 질문을 던진다. “지사냐? 출세냐?” 현해탄을 건너는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 기로에서 고민했다. 식민지 유학의 최정점에 있었던 제국대학의 졸업생들은 결과적으로 다수가 ‘출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제국대학 입학은 “입신출세의 티켓을 쥐는 것”4)이었으며, 실제로도 졸업생 다수가 식민지 체제에서 출세했다.
‘출세한’ 그들이라고 고민이 없었겠는가? 어쩌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분열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못지 않은 수재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식민지’ 출신이라는 차별의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출세가 보장된 ‘제국대학생’이었다. 1909년의 한 통계에 따르면, 도쿄제국대학 졸업생 68%가 관공서에 고급관료로 취직했으며, 나머지도 성장일로의 일본 자본주의 민간기업체에 몸담고 있었다. 조선인 졸업생들은 일본 ‘내지’ 관료사회에서 출세하는 길은 막혀 있었지만, 총독부 식민권력 하에서의 출세는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로서의 분열을 더욱 극대화한 것은 식민본국에서 긴 세월 동안 체재해야 했던 그들의 유학 생활이었다.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근 10여 년이 걸리는 전체 고등교육을 일본에서 일본어로 받았다. 일상의 생활 언어도 일본어였다. 긴 유학 기간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 습관 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했다. 도쿄제국대학의 한 졸업생의 표현처럼 그것은 “일본인화의 과정”5)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시절을 식민본국에서 소수자로 지낸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식민본국에서의 차별의 경험은 유학생들의 반일 의식을 키웠다. 교토제국대학 졸업생 이관구는 도쿄에서의 중학과정 유학 중에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일본 관헌의 요시찰급의 감시와 민간인까지의 차별대우 때문에 망국의 한을 되씹으면서 민족적 투지를 드높일 뿐”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숙집에서도 ‘조선인 사절’이라든가, ‘일본인에 限한다’는 쪽지를 문 앞에 붙여 놓은 데가 많아서 하숙하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던 것이 조선인 유학생들의 현실이었다. 유학생들은 “조선인 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6)
조선인 유학생들은 ‘식민지(인)/제국(엘리트)’의 사이에서, ‘출세’와 ‘지사’ 사이에서, ‘일본인화의 과정’과 ‘조선인 된 슬픔’ 사이에서 분열했다. 이런 특성이 식민 권력이 조선 청년들의 도일(度日) 유학을 조선 지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친일적인’ 엘리트의 양성과정이면서 역설적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세력을 육성하는 “조선독립운동의 수원지(水源池)”7)라며 일본제국주의 통치자들의 골치를 썩인 배경이다.
이처럼, 제국대학 조선유학생 사회에서 ‘친일’과 ‘저항’은 그 출발에서부터 함께하는 두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사’와 ‘출세’라는 화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윤리적 문제를 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 하나의 논리가 ‘동족을 위한 출세’ 혹은 ‘실력양성론’이었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식민지 관료가 된 많은 제국대학 출신들은 자신의 ‘출세’를 고통에 신음하는 식민지 동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했다. 유능한 행정 관료가 되어 동족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고, 올곧은 사법 관료가 되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족을 보살폈다는 변명은 해방 이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알리바이다.
제국대학 출신 관료들의 논리는 일본 유학 자체가 안고 있었던 딜레마를 보여준다. 임화의 시를 다시 떠올려 보자. 앞서 본 시 〈해협의 로맨티시즘〉에서 임화는 도쿄(東京)를 예술, 학문, 사상 등 근대성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곳으로 선언했다.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상징 도쿄에서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현해탄을 건널 때는 슬픈 고향의 밤을 밝히자고 노래했다. 그 유명한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명제이다.
하지만 정작 도쿄(일본)의 자본주의 근대문명을 직접 대면한 많은 유학생들은 그 빛에 눈이 멀었다. 일본 문명의 세례를 받은 그들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뒤처진 자가 감수해야 하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근대화 이념은 그들이 받았던 고등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본풍을 띠게 되었다. 일본은 그들에게 근대성의 상징이었으며, 장래 조국의 발전 모델이었다.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임화적 명제는 처음부터 뒤쫓는 자가 앞선 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물론, 제국주의 일본을 칼로 치려 한 청년들도 있었다. 이재유, 이관술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하고 노동 운동을 지도하다 검거되어 옥사한 교토제국대학 졸업생 박영출, 조선인학우회를 결성하여 반일운동을 펼치다가 고문으로 죽은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의 박화영, 재(在)교토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치안유지법에 걸려 옥사한 교토제국대학 서양사 전공의 송몽규를 비롯한 많은 제국대학 학생들이 식민주의에 저항하다 죽거나 옥고를 치뤘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학생들은 그 칼을 벼리는 일본에서의 유학 기간 동안 제국 일본이 먼저 이룩한 문명에 압도되었다. 급기야 그들은 일본의 통치 안에서 그들이 성취한 자본주의 근대 문명을 식민지에 이식하는 것이야말로 “슬픈 고향의 밤”을 밝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한종건의 삶은 그 사례이다. 그는 3․1운동으로 구속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한종건은 동족을 위한 새로운 지식을 염원하며 “바다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현해탄을 건넜지만 제4고등학교와 교토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식민지 운동자를 탄압하는 경찰부 보안과장(경시)으로 변신했다. ‘현해탄’을 되짚어 돌아온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위협하는 조선인 동족들의 저항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일본 제국의 엘리트 양성제도였던 제국대학이 한국사회의 틀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를 질문하고자 한다. 민족주의적 윤리와 감성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질문은 무의미해 보일지도 모른다. 2009년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많은 인사들이 등재되어 있다. 제국대학 졸업자들 중 상당수가 민족적 예속과 변절 등 식민지 유산의 어두운 그늘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졸업생들이 한국의 언론과 출판·교육·학술, 정치와 경제 등 각 분야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유산을 남겼다. 식민지배는 근대 한국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퍼즐 조각을 빠뜨리는 것이다.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장치”였다. 1886년 포고된 제국대학령 제 1조에서는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여 학술기예(學術技藝)를 교수(敎授)하고 그 온오(蘊奧)를 공구(攻究)함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이라고 규정한다. 이후 국가 통치를 위한 엘리트 육성을 목적으로 제1제국대학 도쿄(東京, 1886)를 필두로, 교토(京都, 1897), 도호쿠(東北, 1907), 규슈(九州, 1910), 홋카이도(北海道, 1918), 게이조(京城, 1924), 타이베이(台北, 1928), 오사카(大阪, 1931), 나고야(名古屋, 1939)의 순으로 총 9개의 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9개의 제국대학 중에서도 식민지 조선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이후 그 부지 시설과 인적 집단을 대부분 승계한 국립서울대학교로 이어지면서, 한국 사회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유무형의 유산을 남기게 된다. 남북한의 헌법을 기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유진오와 최용달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1, 2회 졸업생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그 대학 출신들은 남북한 국가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경성제국대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최근 활발한 연구들이 집적되고 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지식과 문명 혹은 출세의 빛을 따라 건너갔던 조선유학생들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성제대보다 앞서 설립된 일본 본토의 5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 유학생들만 해도 729명에 이른다. (각 대학별 졸업생 수는 도쿄제대 163명, 교토제대 236명, 도호쿠제대 106명, 규슈제대 162명, 홋카이도제대 62명이었다. ) 정식 학사는 아니지만, 선과와 전수과, 위탁생 등의 신분으로 과정을 이수한 자들과 여러 사정으로 중도에 학업을 그만둔 유학생을 포함하면 1천여 명을 훌쩍 넘기는 규모의 지식인들이 제국대학 제도 속에서 교육받았다. 그들은 1942년까지 총 629명이었던 경성제대 조선인 졸업생 규모를 훨씬 상회하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8)
이들 ‘내지’의 제국대학 졸업생들은 총독부 식민통치를 유지하는 관료의 수급처였으며, 관공사립(官公私立)의 교육기관과 식민지의 언론·출판 및 경제계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남북한 국가 건설의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남북한 근대학술의 기원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제국대학은 일본만이 아니라 식민지와 해방 이후의 한국사회에서도 국가 “엘리트 육성 장치”였던 것이다.
그동안의 조사를 토대로 삼아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 학생들의 출신 계급과 인적 배경, 유학의 코스와 생활상, 유학생 그룹의 네트워크 및 사회문화적 실천들, 졸업 이후의 삶의 경로와 식민지 체제와의 관계, 해방 이후 그들이 남북한의 국가 건설에서 수행한 역할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국대학 조선유학생의 인적 배경 및 그들 후대의 계급·사회문화적 성격을 밝히는 것은 한국사회 지배 엘리트의 재생산 과정을 구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일본 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 집단을 주인공으로 하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유학생 그룹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집단전기’를 시도하면서, 동시에 제국대학 조선인 학생들 개개인의 다채롭고 복잡한 삶의 굴곡을 그려볼 것이다. 그럼, 제국대학 조선유학생 집단의 얼굴을 함께 더듬어 보자.
정지용, 〈다시 해협〉, 《정지용 시집》, 시문학사, 1935.
임화, 〈현해탄〉,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해협의 로맨티시즘〉,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문환, 《바우덕은 나일까》, 세한출판사, 1973, 64쪽.
임문환, 위의 책, 70-71쪽.
이관구, 〈意氣와 風流의 濟濟多士〉, 《나의 교우록》, 중앙일보출판부, 1977, 127-128쪽.
文部省敎學局, 〈事變下に於ける朝鮮人思想運動に就て〉(1941), 박선미, 《근대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창비, 2007, 36-37쪽에서 재인용.
1942년까지 경성제대의 법문학부 졸업생은 일본인 572명, 조선인 387명이었고, 이의학부 졸업생은 일본인 647명, 조선인 237명이었다. 조선인은 총 624명이었다. 정근식 외,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서울대학교출판부, 2011, 557쪽.
발행일 : 2018. 03. 08.
저자 정종현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조교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부,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근대 지식 · 지성사, 한국의 냉전문화, 동아시아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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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현해탄을 건너는 법 - 식민지 청년들은 제국 일본에 유학 가서 어떤 사람이 되었나? (제국대학의 유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