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차 을사년 음력 정월 18일, 서기 2025년 2월 15일.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산악회 회원 일동은 강원도 춘천시 금병산 산신령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천지신명께 고합니다. 먼저 가신 조상님들과 순국 선열, 민주 열사, 노동 열사, 선배 산악인들, 억울하게 희생된 무주고혼들께도 큰절 올립니다. 천지신명과 영령들께서 돌봐주신 덕분에 저희는 만 20년 하고도 석 달째 큰 사고 없이 매달 산행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며 자연을 배우고, 국토의 소중함을 깨닫고, 심신을 단련하고, 선후배들과 우정을 다져왔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자 좋은 친구인 자연을 아끼는 마음으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뭇가지 하나 함부로 하지 않고, 돌 한 조각과 흙 한 줌도 아끼겠습니다.
저희 회원 대부분이 이제 환갑을 넘어서고 일부는 칠순에 이른 터라 산에 오를 때마다 숨이 가쁘고 가파른 길을 내려갈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배낭을 맨 어깨와 허리는 쑤시고 결립니다. 세상은 넓고 올라야 할 산은 많은데, 앞으로 얼마나 더 산에 오를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오늘은 새롭게 동참한 회원이 있어 기쁜 날입니다. 풋풋한 50대 후반의 젊은 청년입니다. 닉네임도 아름다운 하늘길이랍니다.
비록 차린 제물은 변변치 않습니다만 그래도 늙은 몸으로 정성껏 준비해 여기까지 지고 왔습니다. 어여삐 여기시어 실컷 흠향하시고 저희를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상향"
오늘은 음력으로 해가 바뀐 뒤 첫 산행이어서 시산제를 지내는 날입니다. 애초에 알자지라 대장이 남덕유산을 가고 싶다고 거듭 이야기하는데, 저를 비롯한 회원들이 극구 말렸습니다. "시산제는 많은 회원이 참석해야 하는데, 그렇게 험한 산을 가면 되겠냐, 다음날 둘레길도 있고, 교통편도 마땅치 않고.." 등등의 사불가론을 펴니 고집을 꺾습니다. 대안으로 내놓은 게 춘천 삼악산이었습니다. 제가 또 만류합니다. "그곳은 바위가 많아 겨울에 가기엔 위험하다. 전철역에서 곧바로 가기엔 멀고 들머리와 날머리가 달라 차로 이동해야 한다" 등등의 불가론을 폈죠. 산행대장의 제안에 반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대안으로 김유정역 앞에 있는 금병산을 추천했습니다. 저는 10년 전쯤 가본 적이 있죠. 알 대장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더니 찬성합니다. 모처럼 회장 뜻이 관철됐습니다.
2월 15일 아침 상봉역에서 화장실 들렀다가 춘천행 플랫폼에 오르니 낯익고 반가운 얼굴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모두 10명. 피플러버와 그린란드 선배. 저, 산바람, 감자바우, 아톰, 알자지라, 꿈푸리, 지리산에다가 하늘길까지 모두 10명입니다. 하늘길은 우리 과 87학번으로 KBS 보도국 카메라기자입니다. 감자바우 이후 3년 만에 영입된 새 얼굴이자 막내입니다만 국장도 지냈고 자회사 임원도 거친 뒷방 늙은이랍니다. 북한산 인수봉을 거미처럼 오르내리는 암벽 전문 산꾼입니다. 닉네임도 저는 황천길을 뜻하는 줄 알았더니 인수봉에 그런 루트가 있다네요. 오로지 하늘만 빼꼼히 보여 그런 이름이 붙었답니다. 우리 산악회에는 신예지만 등산 경력으로는 베테랑 선배죠.
상봉역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아니어서 자리가 없을까봐 잔뜩 긴장합니다. 자칫하면 1시간여를 서서 가야 하거든요. 비수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다행히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습니다. 대성리, 청평, 강촌 등 친근한 이름의 역들을 지나고 마침내 김유정역에 도착합니다. 내려서 역 앞에서 제가 설명을 곁들입니다. "이 역은 원래 신남역이었는데, 이곳에서 태어난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따서 2004년 개명했습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을 딴 철도역이랍니다..."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산바람이 "자! 서봐, 서봐! 단체 인증샷 찍어야지"라며 사진 대형을 지시합니다. 분위기를 확 깹니다. 알 대장이 "설명 계속하세요"라고 재촉하는데, 이미 김이 빠졌고 더 할 말도 별로 없습니다. 김유정문학촌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그의 단편소설 제목과 주인공들 이름을 따서 조성한 조형물들을 잠시 구경한 뒤 책과인쇄박물관을 거쳐 산길을 오릅니다.
산은 편안합니다. 바위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강원도 산이어서 제법 눈이 쌓였습니다. 아이젠을 차고 길을 걷습니다. 벤치가 있는 고개에서 잠시 숨을 고릅니다. 집에서 출발한 지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배가 고픕니다. 그래도 과일이나 과자 떡 등 준비해온 간식은 산신제 지내기도 전에 먼저 먹을 수가 없어 초콜릿과 양갱 등을 조금씩 떼서 나눠 먹고 걸음을 재촉합니다. 길에 이따금 등산객이 보이긴 하지만 사람이 적어 호젓하더군요. 두 시간쯤 오르니 정상입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데 정상석은 없네요. 그래도 단체 인증샷을 찍습니다. 시계가 흐려 가까운 산봉우리들은 잘 보이는데 춘천 시내와 먼 산은 잘 안 보입니다.
정상 바로 아래 산신제 지내기 딱 좋은 나무데크가 있습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있어 실망했는데, 주위에서 서성거리니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날 기색입니다. "저희 때문에 일어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방 빼시는데 권리금이라도 드려야 되나?" "그러셔야죠." "저희 산신제 지낼 건데 기다렸다가 떡이라도 드시죠." "괜찮아요. 저희 많이 먹었어요." 훈훈한 대화가 오고갑니다.
알 대장에게 "뜬구름 총무도 사임했는데, 산신제는 정말 간단하게 지내자"고 당부했더랬습니다. 그래도 시루떡과 사과 배 등을 챙겨왔네요.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주는 빠졌네요. 알 대장이 "이번에는 술 없이 지내려고 했습니다. 미리 공지한 대로 절값도 안 받습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원래 차를 올리는 제사라고 해서 차례라고 하니 그냥 보이차로 합시다"라고 화답했습니다. 근데 뭔가 허전하긴 하네요.
강신, 초헌, 아헌, 종헌, 유식 등을 거쳐 가장 중요한 음복 순서입니다. 아톰이 가져온 비닐셸터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습니다. 8인용이라고 하는데 10명도 충분히 들어가네요. 그래도 온다고 했던 아브물까지 왔으면 비좁을 뻔했습니다. 아침에 찾아온 떡이라 그런지 말랑말랑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합니다. 다들 맛있다고 찬탄하는데 술이 없어 아쉽다는 푸념이 곳곳에서 터져나옵니다. "돼지머리 편육은?" "김치 겉절이도 있으면 좋은데" 갈수록 태산입니다. 알 대장의 표정이 구겨집니다.
즐거운 음복을 마치고 하산길입니다. 저수지 방향으로 길을 잡습니다. 이곳도 편안한 길입니다. 곳곳에 눈 녹은 진창 구간이 있긴 하지만 걷기 좋은 편입니다. 내려오면서 닭갈비집 평점을 검색합니다. 큰길가 유정명물닭갈비가 평점이 가장 높아 들어갔더니 10명이 한꺼번에 앉을 자리가 없네요. 대신 바로 옆 금병산숯불닭갈비집으로 갔는데 다행히 자리도 있고 맛도 괜찮습니다. 물김치를 비롯한 반찬도 맛있고 닭갈비도 고추장 대신 고춧가루와 간장으로 양념을 해서 텁텁하지 않고 개운합니다. 마지막에 밥 말고 우동면을 볶아 먺는 것도 일품이더군요.
즐거운 대화가 오고가고 기분 좋게 술잔이 비워지는데 뭔가 이가 빠진 듯한 느낌입니다. 5년 전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지리산과 지난해 암 수술 이후 금주 중인 감자바우에 이어 꿈푸리도 당뇨 수치가 갑자기 높아졌다면서 술잔을 사양합니다. 애써 미안한 마음을 떨치고 못 마시는 멤버들의 몫까지 마셔주기로 합니다.
김유정역에서 귀경열차를 탑니다. 자리가 많이 비었습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갑니다. 상봉역에서 내려 대합실로 걸어가며 2차 뒤풀이집을 검색합니다. 문어숙회집을 제안하니 아톰은 "어차피 지금 집에 가서 저녁을 먹기도 애매하고"라며 동의하고 그린란드 형도 흔쾌히 수락합니다. 나머지는 내일 또 걸어야 한다면서 거절하더군요. 그린란드 형이 나오니까 빨리 헤어지기가 아쉬워 자꾸 술을 마시게 됩니다. 농번기가 시작돼 형이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진짜 안 나오면 산행 올 마음이 안 날 것 같은 걱정이 교차합니다.
시산제 산행에 안 나오신 분들의 기원까지 담아 정성껏 절했습니다. 모든 회원 여러분!! 올 한해 무병 무탈하게 안산 즐산 하세요!!
첫댓글 역쒸! 회장님이십니다. 김유정을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하늘길, 반가워. 함께하지 못해 아쉽네...담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