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0년대 초반 군에 입대하였다. 논산훈련소에서 육군 기본훈련 6주를 마치고 KATUSA병으로 분류되었다.
평택 Camp Humphreys에서 3주간 소양교육을 받은 후 김포공항 울타리에 맞붙어 있던 미군부대 Kimpo Base에 배치되어
근무를 했었다. 작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장을 단 신병으로 자대헌병이 되어 정문, 후문에서 잠시 병역 의무를 다 하고
있었을 때 GI(=미군) 동료 중 아이러니하게도 ‘WHITE’라고 새겨진 이름표를 단 흑인병사가 하나 있었다. 왜 흑인인데
성은 'White'일까?
GI들은 이름표에 성만 표기하고, 우리 카투사는 성과 이름의 이니셜을 표기한다.(나의 경우 KIM Y. B.) 처음엔 흑인인 것에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며칠 지나고 보니 매우 온순하고 친절한 인성의 사람이어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같은 근무조로 매일 좁아터진 게이트 안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므로 자연히 대화가 많았다. 지금은 그나마 다 까먹었지만
내가 구사하는 영어 단어 몇십 개 안 되었다. 그래도 오래 같이 지나면 눈치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 듣는다!
내가 ‘헤이 화이트!’하고 부르면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노 화이트, 와이트!’라고 바로 잡아 주었다.
한국 사람이 'white'를 ‘와이트’로 발음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미국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로 알 수밖에...! 하긴 학교 다닐 때 ‘why'를 ‘화이’라고 발음 하지 않고 ‘와이’라고, ‘when’도 ‘휀’이 아닌 ‘웬’이라고 배우긴
했다!
설날 아침 흰 눈이 흠뻑 내렸네
설 세배 가는 길이 하얗구나
아가야 버선을 두툼히 신고
흰 눈 밟고 재 넘어 설 세배 가자 ♩♪♬♩~~
내가 어렸을 때 설 무렵 많이 듣고 부르던 ‘설 세배’라는 동요이다. 성탄절 아침에 웬 설날 노래를 꺼냈느냐하면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 아침에 눈이 하얗게 쌓이면 아이들 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서설(瑞雪)*’이라고 해서 어른들도 좋은 일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주(註)] *서설(瑞雪) : 상서로운 눈. 좋은 일이 일어날 느낌의 눈.
문화가 전혀 다른 서양에서도 우리의 설 명절처럼 최대 명절인 성탄절 아침에 눈이 내리면 ‘White Christmas'라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1967년인가? 정확한 기억은 아니고 내가 고교생 때 미국에서 온
평화봉사단원 중 Blare라는 성을 가진 한분이 우리 천안농고교에도 배정이 되어서 영어시간 중 주 1시간을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
몇 번은 영어 선생님과 함께 들어 왔었지만 이후에는 혼자 들어 왔는데 마침 12월이 되어서 우리들에게 영어로 'Jingle Bells,
Silent Night Holy Night, White Christmas’ 등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Just Like the Ones I Used Kn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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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럼 눈 오는 성탄절을 맞이했을 때 딱 부르기 좋은 노래이다. 그분은 그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아직 살아
계실까? 또 김포 Base 정문근무 동지이던 White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오늘은 성탄절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눈이 내리고 있고 이미 조금 쌓여 있었다. 난 기독교를 비롯한 그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분위기 상 성탄절 아침에 눈이 내린다니 남들이 다 말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모처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수도권은 2015년 이후 8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매스컴에서 떠들어 댄다! 거실에서 바깥 사진 몇장 찍고 밖에
나가서도 여러 장을 찍었다.
내가 중고교 시절! 12월 24일 성탄절 전야(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청소년들이 번화가에 몰려 다니며 놀고 어디 가서 파티라도
참석해야 잘 나가는 학생 축에 들었다. 우리나라 공식 명절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젊은이들에게는 연중 최대
최고의 명절이라 할만 했다.
우리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그러해서 11월이 지나기 무섭게 거리의 상가에서는 '징글벨, 고요한 밤,
White Christmas, 루돌프 사슴코' 등등의 캐롤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거리를 가득 메웠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께서 성탄절 노래 한두곡 씩은 가르쳐 주어 분위기를 높였다. 기독교 신자들은 연일 교회에 나가 여러 가지 행사
준비를 하지만 우리 같은 청소년들은 예수의 탄생 같은 것 관심없고, 성탄절 10일 전 부터는 용돈을 총 동원하여 많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서 친구들, 친척들, 이성 친구들에게 보내고 받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어쩌다 보내야 할 사람을
빠뜨리거나 내가 마음에 둔 사람들에게서 카드가 오지 않으면 이후의 관계가 묘해지기도 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서는 어디 가서 친구들과 모여서 술 마시고 노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성탄절 전야에는 오후부터
몰려다니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놀다가 밤이 깊어질수록 거리로 몰려 나와 고래고래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며 신나게
놀았다.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적지 않았는데 에너지 넘치는 젊은이들이 몰려 다니며 세를 과시하다 보니 다른 무리들과
충돌하는 일도 당연히 많아서 여기저기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했고, 파출소 안에는 적발되어 들어온 청소년들이 가득
차기도 했다.
‘White Christmas'는 ‘와이트 크리스마스’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전해 질 때는 ‘화이트 크리스마스(Fight Christmas)’로
잘못 전해져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지? ^^;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어제 저녁에도 서울시내 중심가 여러 곳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었다고 한다. 인터넷 뉴스에서 거리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니 지난 번 ‘이태원 참사’때처럼 압사 사고가 나지 않을까 두려웠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혹시
화이트(Fight)를 한 사람들은 없었는지 그런 얘기는 별로 없다!
어느 틈에 우리나라 문화가 세계를 선도한다고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모여도 옛날처럼 술에 취해 싸움질 같은 것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