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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대상44)
찬송 : 찬191장(내가 매일 기쁘게)
성경 : 역대상 26장1-32절
거룩한 주일 아침이다. 예배자로 선다는 행복이 반복되는 과정에 이 행복을 간직하고 예배자 되어 기쁨으로 주님을 경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도 깨어 있지 않으면 습관적인 모습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관중이 되어버리는 일이 일어나고 인도자로만 서곤 한다. 주님, 오늘도 행복한 예배자로 당신을 기쁨으로 경배하는 자 되게 하소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24장부터 시작된 여러 제도의 정비를 보면서 하나의 새로운 변화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게 된다. 이동하는 성막에서 성전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참으로 많은 변화들을 다윗은 하나하나 챙겨가며 새로운 성전시대를 준비하고 있음을 본다.
주일인 오늘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
본문에는 성전 문지기의 직분을 맡은 자들에 대해서 설명하며 성전 문지기 일을 맡은 자들의 직임과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특별한 사람이 나온다. 4절 말씀을 보면 ‘오벧에돔의 아들들은’이라고 소개하며 여덟 명의 오벧에돔의 자식들을 열거하고 있다. 5절에는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문지기들의 이름을 열거해 나가다가 갑자기 오벧에돔을 언급하시고 오벧에돔의 여덟 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벧에돔이 누구인가? 그는 역대상 13장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석 달 동안 모셔서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블레셋 가드지방 사람이다. 다윗이 다윗 성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 가는 중에 하나님의 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가도록 하지 않고 수레에 싣고 가다가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소들이 뛰고 흔들리는 언약궤를 붙잡았던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두려웠던 다윗은 언약궤를 모셔오지 못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그 언약궤를 모셔두었다.
그 세월이 3개월인데 석 달 동안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큰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다윗은 다시 석 달 후에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에 모시게 되었다. 그 일이 다윗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특별한 능력과 은총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집에 큰 복을 주셨는가?” 이런 연유로 다윗은 솔로몬 성전을 기획하면서 오벧에돔과 그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삼았다.
오벧에돔이란 이름의 뜻이 ‘에돔신의 예배자’라는 뜻과 ‘에돔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분명 그는 에돔신을 섬겨야 했고 그가 살았던 지방으로 보면 블레셋 가드에서 살았기 때문에 블레셋 신을 섬겨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연고인지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잘 섬긴 믿음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최초의 성전 문지기를 세우며 이런 이방의 사람을 중심에 두시고 계심이 큰 은혜가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는 듯하다. 출신이 어떠하든, 이름의 뜻이 어떠하든, 부모가 그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주었든지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오직 믿음으로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오죽하면 5절에 걸쳐 길게 기록하며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8절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오벧에돔의 아들 여덟 명이 모두 하나님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복을 주셨을 뿐 만이 아니라 그의 자손 62명이 모두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62명의 자손들 모두 오벧에돔의 덕으로 자리를 연명하는 자들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최선을 다했고 인정받는 사람들이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시각에서 성전 문지기라는 직분은 웬지 복과는 상관없는 자리로 여겨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이것을 주관하는 다윗은 아주 소중하게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 레위 찬양대와 함께 그들을 소중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하나님 나라는 주어진 은사에 따라 충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무엇을 맡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일을 성실하게 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성실함과 충성됨에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도 복 주시고 우리 자손들과도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오벧에돔이 갑자기 들이닥친 법궤를 섬기려고 자녀들과 함께 정성을 다해 섬긴 3개월의 섬김이 이들로 소중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복을 누리게 하셨음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이방의 사람들로 법궤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3개월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잘 섬겨 복을 누렸다고 한다. 다윗이 인정하고 그를 성전 문지기로 삼고 그의 자손 62명 모두를 특별 채용할 정도로 이들의 수고는 대단했던 것이다. 가문이 복을 받은 것이다.
한 사람 웃사의 죽음을 가져온 법궤, 두려움의 상징으로 왕인 다윗도 버리고 도망간 법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법궤를 유대인도 아닌 오벧에돔 블레셋 가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잘 섬길 수 있었을까? 주일 아침 큰 도전의 마음이 생긴다. 문득 이 찬양이 생각난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 누구도 증거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주를 증거하리라.’
사람은 늘 주목되는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자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순간임을 기억하게 된다. 아마 이 3개월 오벧에돔에게는 한 자리 한 자리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웃사가 만졌다가 죽은 법궤를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하고 방치해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벧에돔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을까?
분명 그는 이방인이었기에 법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어 힘들었겠지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겸손히 하나하나 배우며 법궤를 소중하게 섬겼을 것이다.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주목하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겸손히 배우려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섬기느냐가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오늘 이 종이 겸손히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종으로 하나하나 물으며 소중하게 주어진 자리에 성실과 충성으로 나아가겠사오니 이 종을 받으소서. 이 종이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자리에서 헌신하게 하시고,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조차 오벧에돔처럼 헌신하며 예배하는 자로 발견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