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을 기대하셨다면..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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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공명 -
어떤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간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 주제에 대한 경험이나 호기심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이야기는 실처럼 풀려나가고, 그래야만 거리를 좁히며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테니까. 그랬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화에 필요한 모든 것이 내겐 결여되어 있었다. 경험, 호기심은 물론, 의지마저도.
" 일 번. 나와서 풀어."
명령조의 건조하고 탁한 목소리. 조용히 몸을 일으켰지만 뒤로 밀리는 의자는 기분 나쁜 비명을 질러댔다. 애초부터 모든 게 어긋나 있었다. 처음부터. 시험문제의 1번을 틀린 것처럼.
일 번. 누구나 원하는 첫번째 숫자. '첫번째'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을, 나는 온 힘을 다해 비웃을 자신이 있다. 단순히 이름 순서로 얻어낸 번호에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었다. 이게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첫번째일지라도.
교탁 앞에 홀로 놓아진 나는 고개를 들어 지독한 초록빛 얼굴의 직사각형을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상자 안에 새겨진 분필의 잔해를 보았다. 성의없게 휘갈겨진 그것은 언제나 비뚤어진 눈을 한 채 날 내려다보았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대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앙다물곤 했다. 그때마다 머리 위로 따갑게 쏘아져 내리는 경멸적인 시선에, 이젠 익숙해진 지 오래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로 향하는 나를 아이들은 당연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 당연하다는 것이 '이해'가 아닌, '무관심'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잘 알기에, 고맙게 받아들였다.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 것만큼이나 무거운 짐은 없다. 맹목적인 관심이 얼마나 큰 부담과 상처를 주는지. 그들은 모른다.
평범함의 연속이었다. 번호를 불리고, 발표를 하고, 점수를 받고, 방학을 하고…… 변화없는 일상은 평화롭다. 그게 비록 '지루한 평화'이긴 했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밸런스를 유지하는 생활. 모든 게 순조로우면서, 단조로웠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유진이를 알게 된 건 여름방학이 끝난 직후였다. 강렬하게 존재를 알려대던 태양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약해진 햇빛을 비웃으며 긴팔을 입기 시작할 무렵, 한 아이가 서늘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피아노 칠 줄 알아?"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 우물거리는 나를 이해하기라도 하듯 아이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여유로움에 나는 포근함을 느꼈다.
"조금…."
짧막한 내 대답에도 아이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수업시간에 책상 아래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고 알았다고, 아이는 말했다. 나는 책상에 앉아있을 때마다 무릎 위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열 개의 손가락이 무릎에 전하는 감각은, 학교라는 수용소에 갇혀있던 나에게 있어 유일한 활력소이자 도피처였다.
"잘 치고 못 치고는 상관 없어. 할 줄 아는 게 중요한 거지."
미래전망적인 말투. 자신감에 찬 말투가 싫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을 가득 감싸고 있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여태 말하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또박또박 뱉어냈다. 그 아이, 유진이에게.
한번 나오기 시작한 말은 쉽게 끊이지 않았다. 한 가지를 뱉으면 두 가지가 생각났고, 다 했다 싶으면 금방 목구멍을 채우는 그것들에게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여유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번의 대화로 친구가 되었다.
평범한 아이였다. 어떨 때는 나보다 더. 하지만 얼굴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사라지지 않는 미소는 그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꾸어놓곤 했다. 나는 그게 좋았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존재. 옆에 있어도 특별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존재, 말이다.
그 후로 우리는 항상 붙어다녔다. 뭐든 지 함께하며 일상을 공유해나갔다. 오선지 곳곳에 그어진 마디처럼 우리의 곳곳엔 서로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집 놀러왔을 때 유진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리안아, 장기자랑 한번 나가볼래?"
"자랑할 만한 재주 없는데…."
뜬금없이 웬 장기자랑? 자신감이 화를 부르는 대표적인 예를 우리가 직접 경험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
"피아노 칠 줄 알잖아."
"어릴 때 누구나 피아노는 쳐 봤을걸."
다소 회의적인 내 반응에 유진이는 글쎄, 하며 옆에 있는 피아노 건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누구나 해봤어도 그 속엔 분명 너만의 특징이 있어. 너만의 감정은 네 손가락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알든 모르든 분명히 너만의 필(feel)은 있어. 문제는 그걸 드러낼 지 숨길 지의 문제야. 평범함 속에 있는 조그마한 그걸 꺼내드는 순간부터, 우린 충분히 특별해질 수 있는 거야. 평범함과 특별함은 종이 한장 차이일 뿐이니까.
말을 마친 유진이는 양손으로 C 코드를 눌렀다. 가장 기본적인 코드. 도, 미, 솔. 두 개의 C가 청아한 울림을 내며 공명했다. 평범한 세 개의 음이 만들어낸 특별한 화음….
우리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들으며, 나와 유진이는 무대에 올라선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만들어낸 하모니를 가슴에 안은 채. 심드렁한 얼굴을 한 관객들의 표정에 선물할 변화를 위해.
서늘한 조명이 마이크를 손에 쥔 유진이와 검은색 그랜드피아노 앞에 앞은 나를 비춘다. 정적이 여유있게 우리의 준비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앞에 있는 검은색 백조의 몸통을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그 거대한 몸집 만큼 우리에게 특별함을 선물해 줘."
건반 사이로 스며드는 손가락이 천천히, 이내 빠르게,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잔잔한 울림이 공기를 타고 순식간에 확산되며 강당을 채운다. 하나, 둘, 셋. 반주에 맞춰 유진이의 청초한 목소리가 노래를 퍼뜨린다. 우리가 만들어낸 공명은 이내 열기가 되어 무대에 쌓이고, 가득 차오른 열기가 강당을 뒤덮는 순간 터져나오는 환호성 소리.
건반을 파고드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짜릿함이 전해져 온다. 검은 백조의 투명한 몸에 비춰진 내 얼굴이 날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진심으로 즐기는 표정. 처음 지어보는 듯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이 느낌. 고개를 들자 유진이의 모습이 보인다.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유진이가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듯 맑은 웃음을 터뜨린다.
서늘했던 조명이 뜨겁게 달궈졌는지 내 몸이 온통 열로 가득하다. 서늘했던 무대가 더없이 휘황한 모습으로 변했다. 우리는 평범했다. 그리고 이 위에서 뜨겁게 특별해졌다. 단지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우린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평범한 일상. 하지만 내가 달아오르는 그 순간. 평범함에 변화가 생긴다.
- FERMATA
첫댓글 재밌어요 ~교훈을 주는 소설이랄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