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
황악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1000m 가량 높이의 운수봉과 형제봉이 사이좋게 어울려 만든 산이다.
황악산 북쪽은 충청도,
남서는 전라도,
남동은 경상도가 위치해 있다.
직지사는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이란 명필 門額이 불자들을 맞이한다.
장중한 맛이 풍기는 육조체 해서로 여초 김응현의 득의필이다.
황악산의 ‘黃’은 청, 적, 백, 흑의 5색 가운데 중앙을 상징하듯,
직지사는 우리나라 중심부에 위치한 으뜸가는 절이라는 뜻에서 東國第一伽藍이란 문액을 걸었다.
일주문에 걸려있는 황악산 직지사는 운필이 여유롭다.
간가 결구에 빈틈없는 짜임새는 서법의 전형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필획이 매우 굳세면서 고풍스럽다.
왼쪽에 庚寅夏節이란 관지와 함께 曺允亨印이란 낙관이 찍혀있다.
일주문 다음에는
불이문에 해당하는 紫霞門이 나온다.
자는 자금색으로 저녁노을과 같이 붉은 기운이 설린 황금색을 의미한다.
紫霞는 부처님의 기운이 안개와 같이 피어오르는 형상으로 불국정토를 뜻한다.
이 편액은 필획이 굵고 굳세다.
관지와 명호가 없어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없지만 명필이다
직지사 大雄殿과 天王門 편액은
그동안 누구의 글씨인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一堂 李完用(1858-1926)이 썼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그의 사후 이듬해인 1927년에 나온 「一堂紀事」에서 발견된다.
이완용이 66세이던 다이쇼(大正) 12년 “11월 (원문에는 月이 日로 잘못 판각됨) 25일 金泉郡 直指寺에 2종의 扁額을 書送(써서 보냄)하다. 직지사의 대웅전과 천왕문의 板額이다.”(11월 25일 金泉郡の 直指寺に二種の 扁額を 書送す 直指寺の 大雄殿及天王門の 板額なり(一堂紀事 p. 746) 라는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일당기사」에는 이완용이 직지사 대웅전과 이외에 昌德宮 含元殿을 비롯한 10종의 현판 글씨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필력으로 보면 이완용은 당대의 명필이 분명하다.
그러나 매국적인 친일 행적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蔡邕은 筆論에 ‘글씨란 마음을 풀어내는 것이다.
’(書者散也),
蘇軾은 ‘글씨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반영한다.’(書像其爲人),
柳公權의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心正筆正)
劉熙載는 書槪에서 ‘글씨가 곧 그 사람이다.’[書如其人]
또 구양수는 ‘단지 글씨만 아끼지 말고 사람의 됨됨이를 봐야 한다.’(愛其書者 兼取其爲人也)고 말했다.
사람과 글씨가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다.
이완용이 서예에 뛰어났다 하더라도 사람 됨됨이가 올바르지 않았던 탓에 그의 글씨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가 없다.
글씨란 그 사람의 학문, 재능, 성격, 의지 등 한 개인이 지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반영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서예의 아름다움은 마땅히
심정 인정 필정 서정으로 인식하는게 아니던가.
慧麟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