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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245장
<요한계시록 21:9-14>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추가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이어집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랑되신 예수님의 신부로서 존재하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요. 새 예루살렘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상징하고, 또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먼저 9절을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에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려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일곱 대접 재앙을 내렸던 천사가 이제는 새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심판과 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라는 것을 말해 주는 거죠. 쉽게 생각해서 하늘에 떠 있는 저 태양은 우리 지구를 생명의 공간이 되게 하는 일등 공신이지요. 태양이 없으면 지구는 당장 죽음의 공간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같은 태양계의 혹성인 예를 들어 지구와 가까이에 있는 금성이나 화성은 태양이 생명을 살 수 없는 이유가 되고 있지요. 금성은 태양과 너무 가깝고, 게다가 태양 빛과 열을 받아드리지만 너무 두꺼운 이산화탄소층 때문에 그 열을 반사시키지 못해 생명체가 살 수 없을 만큼 뜨겁습니다. 반면 화성은 태양과 멀리 떨어져서 춥기도 하고, 공기가 희박해서 태양열을 저장하지도 못하지요. 태양은 변함없는 태양인데 태양열을 잘 받아서 필요한만큼 저장할 수 있으면 태양은 생명의 빛, 생명의 열이 되는 것이고, 그게 안되면 태양은 오히려 죽음의 빛과 열이 되는 겁니다.
왜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누굴 더 좋아하셔서 구원을 주시고, 누굴 더 미워하셔서 제외시키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진리이시지요. 그 하나님을 제대로 받아드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구원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그 한계 앞에서 내 생명은 소멸되고 마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심판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은 별 개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조율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생명의 삶을 살아가려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완성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죠.
9절 마지막에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그 신부는 10절 마지막에 ‘하늘에서 내려 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앞부분 2절에서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말했었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새 예루살렘은 이 땅에서의 교회가 완성된 모습이고, 더 나아가 교회의 구성원인 모든 성도들의 완성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모양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 구절에서 여러 성도님들은 어디에 더 눈길이 가시는지요? 귀한 보석이라는 말, 벽옥 수정 같은 보석입니까? 아니면 11절 첫 부분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인가요?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세상적인 것에 물들어 살고 있는지를 이런 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자체보다도 세상의 금은보석에 더 마음과 관심이 가게 되는 거죠. 하지만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이런 보석들 때문에 아름답고 화려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아름답고 화려한 거죠. 이런 보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일 뿐이지 이런 보석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은 아닙니다.
12~14절까지는 열둘이라는 숫자가 계속 반복되지요. 12절에서는 열두 문, 열두 천사,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 13절에서 열두 문이 동서남북으로 세 개씩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14절에서는 열두 기초석, 어린 양의 열두 사도, 열두 이름 등이 언급됩니다. 열둘 즉 12라는 숫자는 닫혀 있고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려있는 의미에서의 완전수이지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자에게 평등하고 공평하게 열려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에서의 1,2,3,4 숫자는 등수나 서열이나 계급이나 규모의 크고 작음과 높고 낮음을 의미하지만 새 예루살렘에서의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 거기에 어떤 차이도 서열도 계급도 없지요. 내가 1번에 서 있어도 1등이 아니고 12번에 서 있어도 꼴등이 아닙니다. 1번에 있어서 받는 특혜도 없고 12번에 있어서 받는 불리함이나 손해도 없지요. 그러니 아직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어서 숫자의 지배를 받고 그래서 숫자에 여전히 민감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가 가게 될 새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숫자에 너무 얽매이거나 집착하지는 말아야 하는 거죠. 주님 앞에 가면 이 세상에서의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어린 양의 신부 또는 아내라는 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그리고 반복되는 열둘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시면서 천국에서의 삶과 생활 문화를 더 잘 익혀가면서 날로 천국에 더 가까워져 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댓글 왜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누굴 더 좋아하셔서 구원을 주시고, 누굴 더 미워하셔서 제외시키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진리이시지요. 그 하나님을 제대로 받아드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구원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그 한계 앞에서 내 생명은 소멸되고 마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심판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은 별 개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조율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생명의 삶을 살아가려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완성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죠. 아직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어서 숫자의 지배를 받고 그래서 숫자에 여전히 민감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가 가게 될 새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숫자에 너무 얽매이거나 집착하지는 말아야 하는 거죠. 주님 앞에 가면 이 세상에서의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되새기시면서 천국에서의 삶과 생활 문화를 더 잘 익혀가면서 날로 천국에 더 가까워져 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