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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복음 16,19-31
오늘 복음은 극명하게 서로 대칭되는 두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의 종교적, 도덕적 삶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지극히 가난했고 다른 사람은 날마다 잔치상을 차릴만큼 호화스런 생활을 했다고만 알려줍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한데, 현세에서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워먹을 만큼 가난에 찌들린 삶을 산 이의 이름만 <라자로>라고 복음은 들려줍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부귀영화를 누린 이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문득 얘기 하나가 떠오르네요.
어떤 젊은 순례자가 긴 여행 끝에 현자 '아부 야디드'가 사는 마을에 와서 현자에게
"보다 확실하고 빠르게 하느님께 도달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아부 야디드가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라고 대답하자 젊은이는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그렇다면 다른 이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라." ᆢ "왜요?"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시는데 너의 마음을 찾아 오셨을 때 하느님을 향한 너의 사랑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께서 다른 이의 마음속에 새겨진 너의 이름을 보신다면 분명히 그분께서는 너를 더욱 더 큰 애정으로 바라보실 것이다."
이제 복음 구절들을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가 대문 앞에 와서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부자들은 기름진 고기를 먹고 빵으로 손의 기름을 닦아 내 던지고 굶주린 이는 그것으로 배를 채우려 했던 것입니다.
부자가 라자로란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라자로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보지 못했을 뿐입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드린 청을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답합니다.
그 부자의 형제들 역시 같은 식의 삶을 살고 있어서 죽은 사람이 살아서 찾아간다고 해도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할 것은 뻔하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젼, 신문에서 재해 소식을 접하고도 내 삶의 방식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아니, 멀리 갈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일들, 가난한 이들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지는 않는지요?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싫으니까요.
오늘 복음의 부자는 보지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보고서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만큼 굳어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란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원문은 그 의미가 좀 더 강합니다.
"애간장이 탄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앞에 예수님의 마음은 녹아내립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이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우리의 사랑에 대해 심판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참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마음으로 귀기울이는 것을 배워야겠습니다.
연민의 마음을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3월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루카 16,19-31
두 삶의 방식과 두 상반된 결과: 십자가와 부활, 부활과 십자가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는 천국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해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다음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의 줄거리입니다.
미국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세인트피터즈버그에 톰 소여라는 개구쟁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톰은 일찍 부모를 잃고 고모인 폴리 아줌마 밑에서 자랐는데, 공부는 싫어하고 장난과 모험을 좋아해 언제나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말썽을 부리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토요일, 폴리 아줌마는 말썽을 피운 톰에게 벌을 주기 위해 마당 울타리를 페인트칠하라고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칠하던 톰이었지만, 곧 묘안을 떠올려 친구들에게 울타리 칠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고 속여 오히려 친구들로부터 사과, 구슬 등의 물건까지 받으며 일을 시키고 자기는 편히 쉬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톰은 자신의 재치와 영리함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삶을 가볍게 여기고 책임감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톰에게 변화의 시작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밤, 톰은 마을에서 방랑아 취급받던 친구 허클베리 핀과 함께 공동묘지로 가게 됩니다. 허클베리 핀은 늘 자유롭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아 톰이 매우 부러워하던 친구였습니다.
두 소년은 공동묘지에서 죽은 고양이로 사마귀를 치료하려는 미신적인 의식을 하려고 갔다가
우연히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을의 의사 로빈슨이 인디언 조라는 악명 높은
사람과 머프 포터와 다투는 모습을 숨죽이며 보던 톰과 허클베리는, 인디언 조가 의사 로빈슨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 죄를 머프 포터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면까지 전부 보게 되었습니다.
두 소년은 살인을 목격한 충격에 사로잡혀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하지만, 톰은 이후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톰은 그 죄책감을 잊으려 다시 모험과 놀이에 몰두합니다.
친구 조 하퍼와 허클베리 핀과 함께 해적으로 가장하여 섬으로 도망쳐 며칠을 보내며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폴리 아줌마와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톰은 자신이 무책임하게 행동한 것을 깨닫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톰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머프 포터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톰은 자신이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처형당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톰은 내면의 두려움을 이기고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 인디언 조가 진짜 살인자라는 것을 밝히게 됩니다.
법정에서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힌 톰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디언 조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얼마 후 톰과 허클베리는 보물을 찾는 또 다른 모험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을 근처의 낡은 폐가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인디언 조와 그의 공범이 숨겨둔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톰은 허클베리와 함께 이 보물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오히려 인디언 조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위험에 처할 뻔합니다.
이 과정에서 톰은 점점 자신의 용기와 책임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제 톰에게 있어 모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함께 동굴로 소풍을 떠난 톰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 베키와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어둠과 공포 속에서 톰은 베키를 위로하고 책임지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톰은 우연히 인디언 조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톰은 가까스로 동굴에서 탈출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인디언 조는 동굴 속에 갇혀 굶어 죽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톰과 허클베리는 동굴에서 인디언 조가 숨긴 보물을 찾아내어 큰돈을 얻게 됩니다.
뜻밖의 부자가 된 톰과 허클베리는 이 보물을 나누어 갖기로 합니다.
하지만 톰은 돈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부유함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반면, 허클베리는 갑자기 얻게 된 부와 규칙적인 삶이 부담스러워 다시 방랑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톰은 그런 허클베리를 이해하며, 함께 자유롭게 살기를 제안합니다.
톰 소여의 진짜 모험은 재미를 찾는 데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모험으로 바뀝니다.
위 이야기에서 톰 소여는 마냥 놀기 좋아하는 무책임한 소년에서 벗어나 점점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즐거움만 추구하던 부자 같은 모습에서, 양심의 가책과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는 라자로의 모습을 거쳐,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삶의 가치를 깨닫고 천국 같은 내면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자와 라자로를 연결하기 위해 오늘 복음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좀 단어의 뜻을 살펴보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ἀναπαύεται”(anapaúetai)입니다.
뜻은 “쉬다, 위로를 받다”란 뜻입니다.
라자로가 죽음 뒤에 받는 것이고, 부자는 이것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샤밧’, 곧 ‘안식’, ‘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마태 11,28)고 하신 말씀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안식은 십자가에서 오고, 안식을 찾는 이들에겐 십자가를 준다는
시스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쉼과 안식을 찾았고, 라자로는 십자가의 길을 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안식을 찾은 부자는 영원한 십자가가 준비되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산 라자로에게는 영원한 쉼과 안식이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버리고 안식을 누리려다 결국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은 십자가 뒤에 옵니다.
그러나 사막 여유와의 관계를 통해 안식을 포기하는 법을 배웁니다.
관계를 위해 십자가 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부자에서 라자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사랑을 알게 된 그는 장미꽃에게로 돌아갑니다.
비록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그런 죽음은 부활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안식을 누리며 위로를 받으려 하면 타인을 착취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안식을 포기하면 다른 이를 편안하게 하고 위로를 주고 휴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숫자 40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 것인지, 벌써 위로와 안식을 살아서 십자가만 남게 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6,19-31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5-26)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 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강론>
(2025. 3. 20. 목)(루카 16,19-31)
<부자들과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19-26)”
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렇게 살지 마라.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저승에서 정반대의 처지로 떨어질 것이다.” 라는 경고.
<지금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경고입니다.>
바로 앞의 13절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말이 있고, 15절에는 예수님께서 그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4-15)”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바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 ‘돈을 좋아하는’이라는 말과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이라는 말은, 그들이 ‘위선자들’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들은 세속의 부유함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잘난 체 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의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복을 안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부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한 위선자들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순전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고, 가난한 사람들 자신들도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에 중요한 상들을 많이 받은 유명한 영화에서,
“부자인데도 착한 것이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것이다.” 라는 대사가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히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지도 않고, 또 나쁜 사람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라자로가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며가며 먹을 것을 던져 주었습니다(21절).
아마도 그 부자는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자기는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1절의 말을 다시 잘 보면, 부자는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그냥 준 것이 아니라 개들에게 주듯이 던져 주었습니다.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라자로를 ‘개 취급’ 한 것입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는 말은, 부자가 라자로에게 무엇인가를 조금씩 던져 주긴 했지만, 그것은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인데, 뜻으로는 라자로가 먹는 것을 개들이 가로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개들’이라는 말이 우상숭배자들을 뜻할 때가 많기 때문에(마태 7,6), 여기서도 ‘개들’을 우상숭배자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다면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은, 부자의 초대를 받고 온 이방인들이(우상숭배자들이) 라자로를
모욕하고 조롱한 것을 나타낸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전부 다 부자의 죄입니다.
4) 부자가 저승에서 한 방울의 물을 아쉬워하고
애원하게 된 것은 ‘인과응보’입니다.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인데, 그것은 이승에서
그 부자가 라자로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제대로’ 주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을(28절)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러나 전체 내용을 보면, 그는 저승에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채로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