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순간순간
박래여
아침 여섯시, 고라니가 운다. 뻐꾸기도 울고, 꾀꼬리도 나무 그늘을 날며 울고 곤줄박이도 운다. 우듬지에 올라앉은 딱새도 운다. 새들의 합창이 왜 슬프게 들릴까. 고라니는 밤새 함께 있던 짝이 인사말도 없이 사라졌나보다. 뻐꾸기는 도망간 고라니를 봤다고 알려주고 꾀꼬리는 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다고 위로하는 것인가. 슬그머니 빈 옆자리를 본다. 새벽 일찍 감산에 갔을까. 사랑방에 앉아 있을까.
쪽마루에 나앉아 사랑채 위를 곱게 치장한 능소화도 소나무 아래 매혹적인 산나리도 소란스러운 아침을 꽃잎 활짝 열고 바라본다. 능선을 넘어오던 햇살이 멈칫한다. 장마철이라는 유월 말인데 비는 하루 오고 햇살만 따갑다. 햇살이 그리우면 마당을 걷는다. 잠깐 행복이다. 햇살이 내 몸의 그림자를 만들면 슬슬 피하고 싶어진다. 사람은 늘 작은 행복과 큰 고통을 번갈아가며 마주하고 산다. 행복도 불행도 고통도 번뇌도 편안함도 잠깐씩 스쳐가는 바람 같은 존재인가.
깻잎 몇 장을 따고 약 덜 오른 풋고추 대여섯 개를 딴다. 잔디밭도 푸성귀도 물기를 머금고 있다. 툭툭 물기를 턴다. 신발을 촉촉하게 적시는 물기는 능선을 넘어오는 햇살에 금세 마르리라. 고추가 붉어지고 있다. 몇 개의 고추 끝부분이 새빨갛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에서 솟아나는 핏방울 같다. ‘고맙다. 잘 자라주고 주렁주렁 달려줘서. 사랑한다.’ 나는 속삭이며 살살 쓰다듬어준다. 고추가 수줍게 웃는다. 사람과 식물이 소통할 수 있고, 사람과 동물이 소통할 수 있다면 세상에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수확한 것을 씻어 식탁을 차린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썰어 올리브유에 덖다가 매운 고추와 달걀을 풀어 굵은 소금을 친다. 내가 토마토버무리라고 부르는 반찬이다. 바깥이 수런거린다. 귀가 속삭인다. ‘농부가 왔어. 밥 차려.’ 밥상은 간소하다. 조금 모자란 듯 적게 먹어야 속이 편한 나이를 산다. 밥 차리기 귀찮아하던 나도 마음이 바뀌었나보다. 가끔은 조물조물 농부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 밥상을 차린다. 삼식이 아저씨를 곁에 둔 여자들은 삼식이 아저씨가 집을 비우면 행복하다는데. 그 아저씨가 3주간이나 떠나 있다 오면 반가운 것은 웬일인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할 동안 농부는 커피를 탄다. 나는 어제 들어온 복숭아 두 개를 씻어 커피 잔 옆에 놓는다. 농부는 인터넷 뉴스를 켠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즐겨보는 농부는 시사나 정치면에 관심이 많다. 나는 정치면이나 시사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살이 매일반이다. 정치꾼은 정치에 목숨 걸고 농부는 농사에 목숨 걸고, 학생은 공부에 목숨 건다. 목숨 건다는 것은 어패가 있는 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달라이라마의 명상 집 『행복』을 편다. 행복도 불행도 마음 먹기다.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을 알차게 살면 저절로 행복하고 편안해진다. 고통은 마음에서 오는 거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삶은 행복의 연속이 되지 않을까.
딸은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농부와 바통 터치를 야무지게 했다. 나는 또 언제 올 거냐고 묻는다. 애들 오라 가라 하지 않고 부부끼리 잘 산다고 큰 소리 쳐 놓고 막상 딸이 떠난다니 언제 올 거냐고 묻는다. ‘몰라. 할 일이 많아.’ 딸의 대답에 힘이 빠진다. 부부 사이 기쁨조요 윤활유인 딸이다. 데리고 살자니 딸의 남은 인생을 생각해야 하고, 떠나보내자니 혼자 밥이나 제때 끓여 먹을지. 노심초사는 어미의 전유물이다. 그런 관심조차 내려놓아야 서로 편한데.
혼자 수영장에 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왜 혼자냐고 묻는다. 딸은 밥벌이 하러 갔다고 했다. ‘어미 보호자 노릇 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저도 쉬어야지요.’ 수영하기도 싫어진다. 왠지 몸이 오슬오슬 한 것이 물이 차갑게 느껴진다. 기운이 빠지니 몸살기가 도는 건가. 농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땀복을 벗어낸다. 오후에 감산 방제를 하러 갔다. 농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병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다시 달라이라마의 『행복』을 잡았다. 평정심 찾기를 청하면서.
202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