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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般若波羅蜜經
제1강 금강경의 이해
무비스님 금강경 강의
출처 : 염화실
소의경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시간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가지고 25강에 걸쳐 강의를 할 무비스님입니다. 지금부터 금강경의 이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강경은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의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생활의 지침서, 수행의 지침서, 인생의 지침서가 되는 의미로서의 소의경전입니다. 금강경에 의지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고 수행을 하고 생활해 나간다 하는 뜻으로 소의경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를 팔러 갔다가 이 금강경 한구절을 듣고 나무를 내려놓고 다이아몬드를 한 짐 지고 돌아온 사례가 있습니다. 뒤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여러분도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몇 푼어치 안 되는 인생의 나무를 내려놓고, 대신에 다이아몬드를 한 짐 짊어지고 돌아가는 기회가 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금강경의 위치
우선 이 금강경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다시 말해서 팔만대장경에 비춰봤을 때 이 금강경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이러한 것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가지 입장에서 살펴보겠는데 첫째는 전통적인 관점 다시말해서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살펴보고 두 번째는 근세에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아서 교리발달사적인 관점에서 금강경이 어느 시대에 결집이 되었는가 하는 입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교상판석의 입장에서 금강경-
첫째 전통적인 관점 즉 교상판석의 입장에서 금강경을 살펴본다면 오시교(五時敎)라고 하는 교상판석을 하는데 오시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일대시교를 5시기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화엄경을 설하는 때를 잡고 두번째는 아함경을 설한 때 세번째 방등경을 설한 때 네 번째 반야경을 설한 때 다섯번째 법화열반을 설한 때 이렇게 해서 화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 이렇게 오시교라고 해서 다섯 시기로 나눕니다. 이것은 불교학에 있어서 과거의 전통적인 교학자로서는 천태지자 스님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스님이 팔만대장경을 전부 섭렵을 하시고 거기에 따라서 나눈 5시교입니다. 그 외 다른 많은 스님들도 팔만대장경을 여러 가지로 교상판석을 한 것이 있습니다만 천태5시교라고 하는 것은 가장 대표적 인 것이고 가장 타당성 있는 분류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오시교에 맞춰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깨달으시고 나서 삼칠이 21일 동안 법열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다시말해서 ‘당신의 깨달음이 진실한 것인가?’‘참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인가?’‘아니면 이것이 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것도 검토를 하시고 따라서 당신의 깨달음에 아주 기쁜 법희선열을 누린 시기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맞춰서 후대에 편집하고 결집한 것이 화엄경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최초화엄삼칠일(最初華嚴三七日) 최초에 21일동안 법열을 누리고 있는 그 부처님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그려놨다 해서 최초삼칠일이라고 하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경은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에 다시말해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경지를 조금도 방편없이 이야기하다보니 너무 수준이 높아서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이 수준을 아주 낮춰서 유치원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설하신 것이 아함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동안 아함부의 경전을 설하셨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인생의 괴로움’이라든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괴로움을 어떻게 소멸할 것인가’‘소멸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다시말해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하는 이와 같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의 고통의 문제 그 고통의 해결의 문제 이러한 것을 소상하게 설명한 내용이 소위 아함경12년 동안의 설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느 정도 수준이 높아지니까 방등경이라고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경전의 내용을 8년간 설하셨다 이렇게 보고요. 그 다음 21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팔만대장경에 있어서도 600권이라고 하는 아주 방대한 경전입니다. 제일 많지요. 횟수도 2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하니까 얼마나 방대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려고 하는 금강경은 사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지 아닙니까. 그래서 이 21년간 설하신 반야부경전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법화경 내지 열반경을 또 8년간 설하신 것으로 봅니다.
최초에 화엄경을 삼칠일간 아함경을 12년간 방등경을 8년간 21년간을 반야부, 마지막 8년간을 법화열반경을 설하셨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전통적으로 부처님 경전을 교상판석하는 오시교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또 법화경 신해품에서 궁자의 일생과 연관시켜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려서 어떤 아이가 집을 우연히 나가게 됐는데 평생을 거지 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다니다가 어느 마을에서 수완이 좋아가지고 재산을 많이 모으게 되어서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거부장자가 되었다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아무리 거부장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으니까 자나깨나 잃어버린 자식을 찾고자 했었습니다.
그런데 못난 자식은 어려서부터 집을 나가서 여기저기 품팔이를 하면서 거지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버지가 사는 거부장자의 집 문 앞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그 자식을 알아보게 되고 그 자식을 얼른 영접해 들여서 자식이라 알리고 재산을 물려주려고 했지만은 이 자식은 너무나도 근기가 하열하고 부잣집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신세였었기 때문에 얼른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가게 되고 한쪽에서는 잡으러 가게 되고 기절을 하기에 까지 돼죠. 그래서 아버지는 방편을 써서 거지처럼 차려입은 일꾼들을 시켜서 그 자식을 달래서 품팔이를 다시 시키게 되고, 그래서 자기 집에서 품팔이를 하게 되고 자기집에서 청소를 하고 똥을 치게 되고 또 거기에서 품값을 받게되고 이러한 처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가 차츰차츰 그 집을 자유롭게 출입을 하게 되는 실정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집의 재산상황도 알게 되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는 이 사람은 사실은 본래 나의 자식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은 이 자식에게 물려주니 여러분들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법화경 신해품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이야기에 근거를 해서 천태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일생 설하신 모든 경전의 내용을 이 다섯시기에 맞춰서 전부 부합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아함경은 거지생활을 하는, 그 거지생활도 자기 아버지 집에서 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러한 상황들 이러한 것들은 말하자면 우리 중생들의 못난 생활을 그대로 비유한 것이고요. 그다음 차츰차츰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을 뜨고 해서 부처님의 재산상황도 알게 되고 부처님의 도량이나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 세계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는 그런 이야기 하며 나중에는 부처님의 재산상황 다시말해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다 전수받게 되는 그래서 법화경과 열반경의 경지까지 이끌어 올리게 되는 그런 내용으로 아주 잘 부합을 시켜서 일대시교 팔만대장경을 5시교에 맞추는 것이 가장 타당한 교상판석이라고 그렇게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은 이 금강경은 결국 반야부 경전, 영지보물반야시(令知寶物般若時)로 표현되는, 그 보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보물을 다 알게 해주었다” 하는 것이 말하자면 금강경 내지 반야부의 이야기인데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보물을 우리가 다 알게 되는 일이다” 이렇게 봅니다. 알게 되면 갖게 되겠지요. 결국은.
그래서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금강경을 공부하는 일은 잘만 하면은 정말 몇 푼어치 안 되는 나무를 팔러갔다가 그 지게에 다이아몬드를 한 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와 같이 횡재를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입니까. 그래서 부처님의 보물,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통째로 알 수 있는 그 가르침이 바로 반야경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가업을 전부 우리가 전수받는 법화경 열반경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재산을 모르고 물려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재산을 잘 알고 물려받았을 때 그 재산의 효용가치가 있는 것이고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삼귀의(三歸依)를 하는데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慾尊)”이러죠.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한다.”이렇게 돼 있습니다. 법에 귀의한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법은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을 우리가 모두 공부해서 잘 아는 일, 이것이 바로 삼귀의의 본래 뜻입니다. 정말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잘 공부하면은 바로 우리가 삼귀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고 따라서 부처님의 보물인 법을 다 알게 되는 일이고 그것은 곧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잘 알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우리는 제대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삶의 아주 값진 교훈을 얻게 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는 금강경의 위치가 되겠죠. 교상판석을 대강 말씀드리고 다음은 교리발달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교리발달사적인 관점에서의 금강경-
옛날에는 교리발달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이 없었습니다. 서양학문이 들어오면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 전통 동양의 학문을 모두 서양식으로 재정리한 것이 소위 교리발달사적인 관점에서 팔만대장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이 되겠는데요.
처음에는 근본불교라고 해서 초기불교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와 그리고 부처님 열반 후 100년 내지 200년 가까운 시대를 근본불교시대 혹은 초기불교시대 간혹 혹자는 원시불교라고도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입장에서 보면 원시다운 불교이기도 하지요.
그다음은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라고 해서 불교가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부파가 나누어집니다. 상좌부(上座部) 대중부(大衆部) 크게는 그렇게 나눠지지요.
그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지기 전에 20개 부파불교 혹은 26개 부파불교가 있었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만치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내지 300년이 되다보니까 각자 성향에 따라서 또 취향에 따라서 좋아하는 불교내용이 있고, 생활규범에 있어서도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20개 부파까지 나눠졌다는 것이죠.
그것이 크게는 대중부와 상좌부라 이렇게 나누는데 대중부는 불교에서 좀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대중부 불교라고 하고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상좌부 불교라고 합니다. 한 예로 계율의 문제라 하더라도 어디 가서 탁발을 해오면 그 음식을 정말 12시가 넘기 전에 다 먹어야지 12시가 넘으면 절대 못 먹게 되어 있는 그런 아주 소소한 정말 별 것도 아닌 그런 계율을 가지고도 옳으니 그르니 따졌었습니다. 상좌부 다시 말하면 보수적인 파에서는 12시가 넘으면 여하한 음식도 남겨둬서는 안된다 그렇게 주장하는 파고, 또 대중부 다시 말해서 좀 더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뭐 소금같은 거야 그거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 설사 좀 남도록 얻어왔다손 치더라도 남는 것은 내일 먹어도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또 음식을 먹는 시간도 꼭 12시가 되기 전에 먹어야 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그래서 12시에서 한 10분쯤 경과 되는 것은 봐주자. 시계가 없었으니까 해의 그림자 손가락 마디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10분이나 20분 될까요. 그 정도 시간은 그래도 봐주자 이렇게 좀 더 진보적인 입장에서 주장하는 게 그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너무 소견이 막히고 융통성 없고 옹졸한 모습입니다만 그러나 원칙주의자들이니까 원칙을 지키자고 하는 데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나씩 하나씩 우리 마음대로 편리에 따라서 고쳐나가고 변해나간다면 뒷날 200년 300년이 지나면 얼마나 변해지겠는가 그러니까 이건 철저히 지켜야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좌부죠.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중부는 그거 뭐 한 2,30분 이정도 시간 지나서 먹는 거야 어떻겠느냐. 멀리 탁발 갔다가 절에 돌아오니까 시간이 좀 늦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래서 그것이 끊임없이 충돌을 하고 대립을 하다가 결국 대중부와 상좌부를 이렇게 나누게 되지요. 그것이 오늘날 대승불교권에서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 대승불교 이렇게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소승불교는 상좌부 불교 다시 말해서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소승불교권의 수행자들이고 좀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대승불교라고 하는 입장으로 흐르게 된 거죠. 그래서 지금 남방불교는 우리는 소승불교라고 하지만 그쪽에서는 상좌부 불교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상좌부 불교라고 불러야 옳지요.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굳이 소승불교 소승불교 이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대승경전이 없어요 그쪽에는. 그래서 대승경전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끝까지 소승불교 소승불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상당히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냐, 정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선택을 해서 불교에 귀의하고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도 이왕이면 좀 근사한 불교 가장 수준 높고 좋은 불교를 선택해야 옳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입장에서는 사실은 소승을 폄하하고 대승을 높여서 대승을 따르는 것이 사실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티벳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쪽은 주로 대승불교가 발달을 하고 그 외 나라 태국이라든지 미얀마라든지 스리랑카라든지 이런 불교는 소승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상좌부 불교지요.
경전에도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소승불교의 소의경전은 아함부경전입니다. 또는 4아함 북방에서는 4아함이라고 하는데 그쪽에서는 5니까야라고 해서 역시 아함경을 그렇게 부릅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의경전이 되어있고 이쪽 대승불교에서는 소승경전을 포함한 그 외 많은 대승경전을 많이 의지를 하죠.
그것이 시대적으로 보면 400년 내지 500년 부처님 열반 이후 500년 쯤 됐을 때는 확실하게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부처님 근본정신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 입장에 있어서 불교를 좀 더 각색하고 그 시대 상황에 맞도록 하고 그래서 새롭게 편찬된 경전이 많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이게 소위 대승경전이라는 거죠.
교리 발달사적으로는 그렇게 봅니다.
과거에 대장경을 해석했던 식으로 보면 무엇이든지 전부 석가모니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것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은 현대적인 불교연구에 입각해서 보면 엄연히 이 소승불교는 성문화 된 것이 한 200년 내지 300년 경에, 열반 300년 경에 성문화 되었고 그것은 석가모니 세존의 친설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고 꼭 친설이라고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소승경전도요.
대승경전은 한 500년 부처님 열반 후 500년 경에서부터 많은 경전이 결집되기 시작하는데 그 근본 뜻은 말하자면 대승불교 운동으로부터 일어나는데, 그 대승불교운동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부처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대승불교 운동이예요. 딴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이 대승불교는 정말 불타 세존께서 이 땅에 불교를 가르쳐서 만중생들을 제도하겠다고 하는 그런 참다운 뜻이 제대로 표현된 가르침이 대승불교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그 당시 깨달으신 분 역시 석가모니가 깨달았다면 그 누구도 다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뜻에 입각해서 수많은 깨달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분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입각해서 새롭게 그리고 더욱 더 시대에 맞는 부처님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서 결집된 경전들이 소위 대승불교 경전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금강경도 역시 초기 대승불교 경전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대승불교를 세분화 하면 초기대승, 중기대승, 후기대승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접하고 있는 금강경 반야심경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게 알려져 있는 그런 경전들은 모두가 대승불교경전입니다. 아함부 경전과는 차원이 다르죠.
그리고 동양에는 일찍이 주역이라든지 대학이니 중용이니 노자니 장자니 하는 것이 있어서 소승불교경전 아함부경전 가지고는 이미 아주 높은 정신세계에 도달해 있는 이 쪽 동양사람들을 교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승경전이야말로 그들의 정신을 훨씬 능가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는 선호할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쪽에서는 대승불교를 아주 선호하고 대승불교 대승불교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대승불교는 불교가 가장 발달한 불교다 이렇게 봅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물질문명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얼마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옵니까. 매일매일 다르지 않습니까.
역시 정신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근본불교시대에서 부파불교시대로 그리고 소승불교에서 다시 대승불교 이렇게 넘어오면서 크나큰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권이다 이렇게 보고 대승경전을 아주 선호하는 입장이죠.
그러면서 티벳같은 쪽에서는 밀교가 발달을 했고 또 중국에서는 다시 달마대사가 건너오면서부터 선불교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그 영향을 받아서 대승불교 플라스 선불교 이렇게 해서 때로는 선불교를 주장하고 때로는 대승불교를 주장하고 이렇게 해서 상당히 훌륭한 조화를 이루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만나서 그 중에서 가장 선호한 경전이 금강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날에도 그 경전을 소의경전 우리가 의지해서 생활하고 수행하고 인생의 지침서로 삼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첫 강의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는 금강경의 위치 그리고 교리발달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금강경의 위치를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상입니다.
작성자 : byunsdd
무비스님 - 제1강 금강경의 이해
첫댓글 무비스님 - 제1강 금강경의 이해
주소 : https://youtu.be/HyvUvmeJv_g?si=plUWDuZhKP-hnx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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