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월) 불의한 폭행 속에서도 전도할 기회를 만드는 사람
사도행전 21:27~40
오늘의 찬송(새 440장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 바울이 결박됨 21:27~36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 설교할 기회를 만드는 바울 21:37~40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오늘의 말씀 요약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백성과 율법을 비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고 바울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폭행할 때, 천부장과 군인들이 바울을 결박해 영내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요청해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얻습니다.
* 바울이 결박됨 21:27~36
성령이 미리 말씀해 주셨듯이(20:23),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당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섞어 가면서 바울을 비난하고 폭행하며, 심지어 죽이려 합니다. 회심 전에 바울은 유대인 입장에서 신자들을 박해했는데, 지금은 신자로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합니다. 천부장이 소식을 듣고 군인들을 동원해 바울을 구금하려 합니다.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라고 나중에 밝혀지는데(23:26), 그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해 끌고 가고, 무리는 바울을 없애 버리라고 외치며 따라갑니다. 이러한 광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를 생각나게 합니다(눅 23:18).
* 유대인들이 바울을 증오해 죽이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위협당할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나요?
* 설교할 기회를 만드는 바울 21:37~40
바울은 천부장과 헬라 말(그리스어)로 대화를 시도합니다. 당시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만이 헬라 말을 했기에 천부장은 바울에게 놀랍니다. 요세푸스 기록에 따르면, 광야에서 무리를 데리고 반란을 이끌던 애굽인 주동자는 주후 54년경에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육 평판이 좋은 다소시의 시민임을 밝히면서, 백성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습니다. 바울이 층대 위에 섰다는 것은 안토니오 요새에 올라가는 돌계단에 섰다는 뜻이며, 손짓한 것은 대중 연설을 시작할 때의 관용적 몸짓입니다. 바울은 위기 상황에서 말할 기회를 만들어, 당시 유대인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 폭행과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 바울이 말할 기회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 복음으로 인해 위협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억울하고 위태로운 상황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지혜와 믿음을 제게도 주소서.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당연한 고난에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리기 원합니다. 복음에 사로잡혀 한 치도 물러섬 없도록 용기를 북돋우시는 하나님의 손을 힘껏 붙들게 하소서.
첫댓글 아멘.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따라와서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무리를 충동질합니다. 있지 않은 소문까지 만들어서 모함하기까지 하지요. 심지어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함께 바울을 잡아 폭행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영내로 끌어옵니다. 바울은 무리의 폭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구하기위해 로마의 천부장을 사용하십니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바울은 천부장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해서 영내에서 무리를 향해 복음을 전합니다. 방금 전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향해 담대함과 확신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악한 기회도 선으로 바꾸어 주시고, 복음을 전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습니다. 우리 삶의 악한 일조차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각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담대함과 긍휼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바울이 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박해와 결박과 환란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이미나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가 있을거라는 예고를 하셨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믿기전에는 지금의 유대인들 처렴 예수님을 믿는자들에게 똑같이 박해를 했던 사람으로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는 바울 혼자가 아닌 하나님이 그때마다 동역자를 붙혀주시고 도울자를 보내주사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하려는 자들을 막으시며 끝까지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일은 내생각과 내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기에 우리가 하고싶다고 하는것이 아닌 성령께서 나를 세워 쓰시고자 말씀하실때 우리는 순종하며 나사가는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붙잡아가는 자들에게 천부장을 보내사 죽음을 면하고 그길앞에서 복음을 전할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중간에 끝치지아니하고 한번 시작 한 일에는 끝까지 도우심으로 주님의 일하심가운데 승리하는줄 믿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줄 믿습니다
아버지의 나라 위해.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간다 할지라도 끝까지 주님과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에 둘러쌓여 맞는 중에 군사에게 끌려간 바울은 천부장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을 위한 변호 대신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허락 구합니다.
이 순간 바울이 혼돈된 감정이 아닌 진리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담대한 바울과 달리 나였다면 극심한 두려움, 공포, 불안, 슬픔이란 감정에 휩싸여 잠시 주님을 잃어버리거나 원망하지 않았으리란 장담을 할 수 없네요.
주일 중등부 분과공부를 마치고 헤롯왕 역을 맡은 학생이 이미 구약에 예언된 사건이고,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인데 억울하다고 토로했습니다. 그 시선으로 본다면 성경 악역 중 가장 억울할 만한 인물이 유다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게 좋을 뻔 하였다는 말을 듣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예정된대로 우리 죄를 십자가 보혈로 대속하려 오신 어린양이 아닙니까.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왜 예수를 파는 악역을 맡게 되었을까요? 단지 은 30전이 탐나서 예수를 팔지는 않았을것 같거든요. 예루살렘 입성할 때 메시아를 외치던 군중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로마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이 원하던 메시아는 자신도 모르는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힘없이 매달려 죽는 예수가 아니라 다윗처럼 강력한 왕권으로 해방시켜줄 구세주가 필요했겠지요.
사실은 내가 바라는 상이 아니면 메시아도 부정하는 죄악이 그 시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 신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동안 나의 의심이기도 했고, 바라는 기도가 속절없이 무너질때면 주님이 나를 떠나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여전히 삶은 예상을 벗어나고, 예측을 벗어날때마다 개인적 감정은 요동치지만, 그럼에도 진리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진심으로 알고 깨닫고 싶다는 소망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