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생모 고용희도 김정숙처럼 우상화하긴 해야는데 두번째내연녀인데다 계급사회 북한에서 쪽바리 소리들으며 천대받는 재일교포 출신이라 잘 언급이 안되는 편
탈북당시 미성년자여서 시설나올때 정착지원금은 받지못하고 모텔 전전하면서 매월 나오는 정부지원금 60만원과 아르바이트로 생계이어갔다고 함
몇년전 15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북한은 우릴 플라스틱 취급한다고 폭로
https://v.daum.net/v/20200705164126148
한 상관은 "진급을 원하지 않느냐"면서 노씨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뇌물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노씨와 같은 젊은 군인들은 조선노동당원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고 한다. 노동당원이 된다는 건 사회적 계층 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씨에겐 공부에 필요한 공책 1권, 펜 1자루를 살 돈도 없었다.
노씨는 2017년 12월 어느 날 아침 탈북을 결심했다. 며칠 전 상관으로부터 쌀과자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난 뒤였다
그는 탈북하던 날 처음으로 북한 인공기 아래를 지나가면서 경례를 거부했다. 그는 남쪽을 향해 가면서 '그 어떤 유혹이 있어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구호가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노씨는 남한 도착 뒤 한국군 병사로부터 "귀순자냐"라는 질문에 난생 처음 듣는 단어라 어리둥절했었다고 전했다.
https://v.daum.net/v/20200705155018314
북한군 내부에서 뇌물은 모든 걸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일부 병사들은 부대 지휘관들에게 월 약 150달러의 뇌물을 바치고 한겨울 경계 근무에서 빠지고, 추가 배식과 방한복을 받는 것은 물론 매주 집으로 전화까지 하는 ‘특혜’를 누린 것으로 알려졌다. 돈이 없던 노씨는 그들을 대신해 영하 40도 밑으로 떨어진 한파 속에서 13시간 경계 근무를 섰다.
부조리도 만연했다. 노씨는 2시간 이내에 사마귀알 100개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들판을 헤매고 다닌 일도 있다. 사마귀알은 상관들이 시장에 한방 재료로 내다 팔기 위한 것이었다. 한번은 한 상관이 다가와 “진급을 원하지 않느냐?”며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뇌물을 주지 못해 남들보다 식사량이 줄자 노씨는 야생 버섯 등을 채취해 먹으며 버텼고, 수개월 만에 체중이 약 40㎏까지 빠졌다.
https://v.daum.net/v/20200705113515212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었던 노씨는 DMZ 부대에서 야생 버섯까지 채취해 먹었다고 한다. 수개월 만에 체중이 약 40㎏까지 빠졌다.
귀순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쌀과자를 훔쳤다’는 누명을 쓴 점이었다. 그 때문에 상사에게 구타를 당하고 ‘나는 나쁜 X입니다’ 하고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2017년 12월 어느 날 그는 DMZ 초소로 가는 척하다가 슬쩍 방향을 바꿨다. 소총 개머리판으로 DMZ 내 북측 철조망을 걷어 올리고 그 밑을 기어 나와 남쪽으로 내달렸다. 가슴까지 차는 물을 건너기도 했다. 내내 ‘지뢰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노씨는 “귀순 당시 소총과 실탄 90발, 수류탄 2개를 지니고 있었다”며 “남쪽으로 넘어온 후 한국군 병사는 ‘귀순자냐’고 물었는데, 귀순자라는 말 자체가 처음 듣는 단어였다”고 회상했다.
현재 대학생인 노씨는 주말에는 웨딩홀 뷔페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든다”며 “그래서 나는 매일 (북의 가족을) 잊으려고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https://v.daum.net/v/20200705114711446
노씨는 한 겨울에 영하 40도 가까이 내려가는 혹한 속에서 13시간동안 경계근무를 서야했다. 하지만 일부 병사들은 부대 지휘관들에게 월 약 150달러의 뇌물을 바치고 빠졌다. 이들은 잠을 더 잘 수있는 특혜를 누리고, 따뜻한 방한복을 입었으며, 인근 시장에 가서 빵을 사오기도 했다. 노씨는 집에 전화 한 통화조차 할 수없었던 반면, 뇌물을 준 병사들은 매주 집에 전화를 걸었다.
상사들은 그에게 집에 전화를 걸어 돈을 가져올 것을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고 있는 그는 그런 말을 꺼낼 수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군사분계선 넘어 걸려있는 남한 군인들의 사진을 보면서 "저 사람들의 삶은 다를까"란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