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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오복음 21,33-43.45-46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를 죽이려하다 팔아넘깁니다. 1독서 내용입니다. 훗날 형들은 "우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주지 않았지 ᆢ"(창세 42,21)라고 고백하지요.
존경하는 스승으로 모시고 삼년을 살았는데 배반하고 팔아넘깁니다.
질투로 친형제를 죽이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탐욕으로 배반하고 죽이며,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거짓과 폭력을 행사하는 역사는 거듭거듭 되풀이 됩니다.
나는 예외일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신약 성경의 독특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대상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부터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쉽게 알수 있듯이 비유에서 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주인이 애써 일군 포도밭은 하느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소작인은 종교지도자들이겠지요.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뜻따라 살아가는 소출을 거두도록 지도자들에게 당신 종들을 보내시지만 그들은 거듭 죽이고 급기야 아들까지 죽이는 슬픈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반역의 역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당신의 아드님마저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이 사랑과 자비는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사순절은 이 사랑을 알아듣고 그분께로 돌아서는 회심의 시간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3월2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21,33-43.45-46
어쩌면 성체의 적을 만드는 교리교육?
오늘 복음은 ‘못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와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포도밭 주인 외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죽일 수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그분이 우리에게 없애려고 하시는 고통의 원인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입니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죠.
이 참새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았던 새라는 것을 몰랐나요? 그리고 참새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참새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3월 20일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사람을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새는 다른 야생동물들과 달리 사람들의 집 근처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생동물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꺼리지만, 참새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참새의 자연적인 적들로부터 참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에게는 뱀, 족제비, 매와 같은 자연적인 적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호막처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을 둘러보면, 참새들이 지붕 밑에서 둥지를 틀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또한, 농지와 같은 환경은 참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중요한 장소인데, 사람들은 자연적인 적들을 차단하고 집짓기를 쉽게 만들어 주며, 먹이를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참새가 우리와 함께 살며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본의 나가노현의 산악지대는 원래 참새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지 않게 되면서 참새들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참새는 때때로 모여서 곡식을 쪼아먹기도 합니다.
농부들에게는 마치 쌀 도둑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참새가 사라지면 농업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합니다.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농업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1958년, 마오쩌둥 주석이 쌀 수확량 감소를 보고하며 “쌀 이삭을 쪼아먹는 참새는
해로운 새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베이징의 모든 농부와 노동자들이 참새를 없애는 작전을 시작했죠.
그 결과, 2억 마리 이상의 참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고 쌀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4,0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참새를 잡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참새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참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참새의 날'이 존재하는 이유죠.
참새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가까운 이웃이지만, 매우 경계하고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그 이웃은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이웃인 참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참새를 해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새와 함께 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참새와 함께하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존재들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 알아봄, 스브스뉴스, 유튜브]
예수님은 인간에게 이 참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 싫어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예전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저의 경험으로 알아보자면, 바로 이 세 가지 물음이었습니다.
1.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
2.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3.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머니가 의심될 때 다른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또한 사랑으로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도 자신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존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때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뭐 하고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는 내가 사제가 되어야 하는지, 세상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를 때였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것이 어머니가 주는 ‘밥’입니다.
젖을 먹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밥을 통해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밥을 통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여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그러나 내가 진짜 누구인지, 내가 진짜 사랑받는 존재인지,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짜 만들고 낳으신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부모는 나에게 다시 생명을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 창조자가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당신 ‘밥’을 주시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입니다.
저는 구역 판공을 하며 냉담자들을 만나 면담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하나같은 특징은 그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 곧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체의 적이 되는 교리교육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왜 참새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성체가 주는 효과를 제대로 이해시켜야 합니다.
냉담자들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교회에서 오늘과 같은 포도밭 소작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21,33-43.45-46
창세기 37,3-4.12-13ㄷ.17ㄹ-28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집단적 악과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를 통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동생 요셉의 모습에 형들은 질투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고, 요셉은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는 동생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집단적 악이 결정적으로 발동됩니다.
평소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악의가 동시에 표출된 것입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기 37장 19~29절)
형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요셉이 꾼 특별한 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창세기 37장 3~4절)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
(창세기 37장 7절)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분기탱천하기 시작하였고, 큰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들끓었고,
마침내 집단적인 광기와 폭력성으로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요셉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이집트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세옹지마’라고, 남의 나라 땅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요셉은 대제국의 제2인자로 우뚝 서게 되고, 후에 대기근으로 굶어죽게 생긴 가족들을 살리게 되는 드라마틱한 대반전 스토리를 엮어갑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봐도 집단적인 악, 집단적인 광기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왔습니다.
600만 명이 넘는 유다인 대학살,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전쟁들은 집단적 악의 결과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백성은 아직도 집단적 악의 난동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이에나 떼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선량한 국민의 삶을 힘겹게 하는 검찰 집단, 기레기 집단, 국민 민폐당,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요셉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이 남아있는 개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던 르우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창세기 37장 21~22절)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악이 더 큰 악으로 확산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일말의 양심입니다.
거대 악을 목격하고서도, 그 악으로 인해 드러나는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악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강론>
(2025. 3. 21. 금)(마태 21,33-43.45-46)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사랑 받고 있는.>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4-40)”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43).”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면,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있다가 빼앗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자격을 얻은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경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표현으로는 유대교가 받은 은총이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갈 것이라는 경고인데, 뜻을 생각하면, 이 경고는 유대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되고, 또 각 개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실제로 유대교는 메시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누리고 있던 은총을 잃었고, 그 은총이 예수님을 믿는 종교, 즉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구원의 은총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종교라면, 예수님을 믿는 종교답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특권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2) 우리는 하느님의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7ㄷ).”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소작인’으로 표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자녀답게 살지 않고 충실하지 않은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구약시대 때에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였다가 신약시대가 되어서야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뀐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약시대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았을 뿐입니다.>
소작인은, 남의 밭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소작료를 내는 사람이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밭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소작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거둔 소출과 그 밭을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밭은 곧 자녀의 밭이고,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 자신의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3) 실제 상황에서는 비유의 표현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못 알아보고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죽였습니다(요한 16,2).
박해자 시절의 바오로 사도도 진심으로 하느님께 충성하려고 그랬고,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실제 상황과 비유의 표현에 그런 차이가 있긴 한데, 결과만 놓고 보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안 믿고, 죽인 것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한 일입니다.
<모르고 그랬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했습니다.
나중에라도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