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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위한 계획
습 3:8-13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9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습 3:8-13 / 그러므로 예루살렘아, 너희는 내가 너희의 죄악을 고발하는 증인으로 나서는 날까지 기다려라!' 여호와의 말씀이시다. `내가 뭇백성들을 모으고 뭇 나라들을 집결시켜서 나의 분노를 너희에게 쏟아 붓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나의 이글거리는 분노를 모두 쏟겠다. 나의 질투의 불꽃 속에서 너희의 온 땅이 소멸될 것이다.' 9) [이방인들의 전향]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때가 되면, 내가 뭇 민족들의 생각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더 이상 어떤 우상의 이름도 부르지 않도록 하겠다. 그들은 모두 입술이 정화되어 여호와의 이름만을 부르며 한결같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10) 남쪽으로 구스의 끝에서부터 북쪽의 가장 먼 곳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그들이 모두 예물을 가지고 내게로 올 것이다. 11) [정화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아, 너희가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너희가 더 이상 내게 대항하여 반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오면, 내가 교만하게 뻐기는 자들을 너희 가운데서 제거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거룩한 산 위에서 더 이상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2) 그때에는 내가 짓눌리고 가난한 사람들만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남겨 놓아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하겠다.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전혀 불법을 행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입 속에는 속이는 혀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요히 평화롭게 살고 안전하게 누워서 잘 것이며 그들을 놀라게 할 원수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의 죄악상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게 되어 열국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8)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일어나 벌할 때까지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서시는 것은 친히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욥 31:14; 시 76:9; 사 28:21; 렘 2:27). 이는 유다의 죄악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3:1-2). 이 심판은 유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이며(욜 3:2), 이때는 여호와께서 심판을 위해 열국을 모으실 것입니다(욜 3:1-2; 2:12-17; 슥 12:2-3; 14:2; 마 24:21). 이러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며 분노하시는지를 온 세상이 알게 합니다.
열방의 구원(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방이 하나님을 깨닫고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이 땅위의 부정한 것을 멸하신 후, 우상의 이름을 부르던 열방의 입술을 정결케 하십니다(시 16:4; 호 2:17-19). 그리고 정결한 입술을 갖게 된 자들은 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사 19:21-23; 렘 32:37-41; 계 11:15-18). 여기서 우리는 이방민족들까지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겔 18:23; 딤전 2:4).
나를 섬기게 하리니(10-13) 모든 심판이 지난 후 하나님께 구하는 백성들은 구스 강 건너편에서 예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여기서 ‘구스’는 에디오피아를 뜻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라를 상징하기 위해 언급되었습니다(2:12; 사 18:1). 이는 땅 끝에 있는 모든 백성들까지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릴 메시야 시대의 예언이기도 합니다(사 5:26; 24:14-16 ;45:22; 49:6; 52:10). 또한 그들 중에 교만한 자들이 다 제거되어 죄 때문에 수치를 당하게 될 일이 없을 것이며(말 4:1), 곤고하고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하여 보호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항상 겸손한 삶을 지속해야 합니다(사 57:15). 또 하나님께서는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이들을 보호하시고, 아무런 부족함과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평강을 누리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시 23:1-6; 사 60:21; 미 5:4; 7:14).
적용: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당신 삶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감사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중국 내지 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신자가 되는데 몇 년이 필요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램프의 심지는 얼마 동안 타고 빛을 발합니까?" 테일러 목사가 이렇게 반문하자 청년은 "그야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테일러 목사는 청년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의 빛이 그 영혼에서 타오르게 된답니다.”
< 설 교 >
그루터기
습 3:9-13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스바냐는 주전 7세기, 유다 왕 요시야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북방의 강자였던 앗시리아는 멸망을 앞두고 있었고, 바벨론은 아직 역사의 무대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인간이 마련한 안전장치가 무용지물이 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역사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습1:12)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충고를 들을 생각도 없고,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수직의 중심이 무너지면 인간 세상은 전장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지도자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였고, 재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거만했고,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총체적 난관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나라가 온통 쓰레기더미로 변했습니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겨 나옵니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은 판을 갈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혁명의 꿈은 그렇게 잉태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얼굴만 바꾸는 혁명은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혁명의 열기가 환멸로 바뀌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듯 하나님은 하나하나 무너진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착수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역하는 나라들, 공의와 자비를 버리고 힘의 논리와 폭력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으십니다. 스바냐는 그 날 온 땅에 불이 붙는 것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은 악한 이들은 물론이고 선한 사람들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 불은 파괴하는 불이기도 하지만, 정화하는 불이기도 합니다. 마치 용광로가 불순물을 걸러주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함께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인간애가 깨어나기도 합니다. 고통은 자기 초월의 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희망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 깃든 빛을 봅니다.
∙말의 회복
불로 역사를 정화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 때에는 내가 뭇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3:9). 말이 살아야 역사가 삽니다. 말이 혼탁할 때 사회의 토대인 신뢰는 허물어집니다. 불교도 인간이 말로 짓는 죄가 중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입으로 짓는 죄를 ‘구업口業’이라 하는 데, 거짓말과 조작 그리고 허언을 일삼는 망어(妄語), 남을 비방하거나 이간질하는 말인 악구(惡口), 달콤하고 듣기 좋지만 실은 상대방의 마음을 해치거나 명예를 손상시키는 말인 기어(綺語)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회복을 말의 신실함을 회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말을 다루는 직업인들, 즉 종교인, 언론인, 교사, 작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올바른 말, 살리는 말, 참된 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 어떤 이들이 한 말을 ‘팩트 체크’ 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은 참 우울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입술이 깨끗해진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 말은 그들이 더 이상 제국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강제, 지배, 독점이 아닙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전에 무심히 불렀던 찬양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사랑하며 섬기리”.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흉과 허물을 보기보다는 그들 속에 잠재된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호명해주고, 지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 곧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냉소주의적이었던 나다나엘에게서 거짓이 없는 참 사람을 보셨습니다. 입술이 깨끗해진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의 길에 접어든 이들일수록 타인에 대해 냉혹하고, 비판적입니다. 자기-의가 강해서 남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불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늘 화를 내고, 성난 표정을 짓고, 부정적인 말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요즘 들어 예수님께서 위선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고 하신 말씀이 자꾸 떠오릅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마23:13)
선교신학자 호켄다이크는 “선교는 매력의 감염“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염’이라는 단어는 ‘다른 풍습이 옮아서 물이 듦‘ 혹은 ‘병원체가 몸 안에 들어옴’을 뜻하는 말로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지만 ‘매력의 감염’이라는 말은 참 산뜻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합니다. 겉꾸민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하나님의 현존을 상기시킬 때 매력의 감염이 일어납니다. 믿지 않는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들을 보고 매력을 느끼기보다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면 참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바냐는 이렇게 매력적인 이들을 보며 세상 곳곳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평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하여 자랑을 일삼는 이들을 제거하십니다. 자기 힘에 도취되어 들떠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아낄 줄 모르던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않으십니다(출34:7). 하지만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돋아나는 새싹처럼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만해 한용운은 ‘알 수 없어요’라는 시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의 단초로 그루터기처럼 남겨두신 이들은 백향목처럼 우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온순하고 겸손한 백성‘입니다. 사실 이 번역은 조금 유감입니다. 어떤 사람의 품성을 나타내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남겨두시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아니이’aniy’)과 ‘비참한 사람들‘(‘댈dal‘)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민초들, 즉 뽑히고 또 뽑혀도 기어코 다시 몸을 일으키는 잡초와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법적 보호도 받지 못했고, 착취와 억압의 희생양이 되곤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출애굽 공동체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어주시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러주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남을 억울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출22:21-22). 실패와 서러움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낮은 자리에 선 이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여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충남 홍성에는 풀무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는 ‘위대한 평민’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현주 목사는 위대한 평민을 나름대로 이렇게 정의합니다. “태산처럼 높은 뜻을 들판처럼 낮은 자리에서 삶으로 실현하는 사람”(홍순명,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 첫째 묶음, 부키, 2003, p.9에 나오는 추천의 글 중에서). 어떻게 보면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을 정의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땅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헌신하라고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는 이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밑바닥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땅으로 쏟아지는 기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 곧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로 부름받은 이들은 악을 멀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악이고,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남을 속이는 것이 거짓입니다. 악과 거짓을 미워하는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단초입니다. 요즘 우리는 국제질서의 냉혹함에 놀라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경계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단을 고착화함으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 합니다. 세상을 떠도는 난민들은 설 곳이 없습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꿈이 부질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기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평화를 만드시는 주님의 삶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탄원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기도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되는 법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301호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부서진 번개불/까맣게 속이 타는 빛의 씨알들/처럼//왜 자꾸만/기도가 하늘에서 쏟아질까/이 작은 방에//쓰리고 아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뼈 마디마디 울리는 기도들이/하늘도 되돌려주는 기도들이//이젠 세상으로 흩어질 밖에 없어라/어두워 오는 하늘 아래/파아란 횃불로 타오르려고”.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향해 바치는 기도가 오히려 우리에게 쏟아진다니 말입니다. 하늘이 기도를 우리에게 되돌려줍니다. 우리가 바로 기도의 응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면서 꿈꾸는 세상을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세력에 항거해야 합니다. 생명을 해치는 사람과 제도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의 표지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교회는 더불어 사는 기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도 빛의 알갱이가 되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반딧불이 하나하나는 미약하지만 반딧불이들이 모여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일 때 우리는 시원의 세계를 꿈꾸게 됩니다. 어두운 세상에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보호를 받을지니라
습 3:9-13 / 백장흠 목사
재난이 생겼습니다. 재난중에는 사람이 잘못하여 생긴 인재가 있고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천재가 있습니다. 지난번 태풍15호 ‘루사’가 우리나라를 할퀴고 갔습니다. 1959년 사상 최악의 피해를 낸 사라호 이후에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고, 이 나라에 마치 전쟁을 치룬 것 같은 비참한 모습을 남겨주었습니다. 인명 피해도 많았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실종된 아내와 어머니들이 제발 시체라도 찾아서 내 손으로 장례라도 치뤄 주었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짓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 집니다.
경제적인 손실이 8조원을 넘는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인재만이 아니라 천재입니다. 재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시련도 축복도 하나님의 섭리 중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섭리 중에 선하게 인도하시고 축복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스바냐’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감추셨다’ 라는 말이고, 이 예언서의 기록은 주전 640년에서 609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스뱌냐 서는 두 개의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날에 내리는 심판과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약속입니다. 1:1-3:9절까지는 심판이오, 3:10-20까지는 구원입니다. 심판이 재앙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심판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미련하고 우둔한 백성은 심판을 심판으로, 재앙을 재앙으로 알지 못합니다.
1. 재난이 왔습니다. 재난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되지 않도록 경고 시스템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우리가 성경역사를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광야생활 가운데서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필요한대로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원망하였습니다. 불평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다른 이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하여 주시는 경고가 있습니다. ‘원망하지 말라’ 라는 경고입니다(고전10:10).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당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이 왔다 하더라도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라고 하시면서 ‘시험이 와도 원망하지 말라 또한 피할 길을 주시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고전10:13) 원망하고 불평하면 그게 습관이 됩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 우리는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좋은 습관을 갖도록 하여야 합니다.
현실적인 경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재난이 우연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지난해 9․11 뉴욕의 태러사건으로 인명,재산피해가 있었습니다. 팬타콘이 파괴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교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었습니다. 오만불손하고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며 사랑하지 않고 분쟁과 싸움을 일삼았습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십니다. 재난이 개인적으로 올 때나 재앙이 국가적으로 왔을 때 교만하지 않았나,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지 깨달아야 합니다. 러시아 정부가 첨단 과학기술로 날씨를 조정했다가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맑은 날씨를 만드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즉, 지난 9월1일 모스코바 창건 855주년 기념에 300만 시민이 창가하는 기념행사를 위해 비가 오지 않도록 비구름을 몰아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모스코바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로 심한 연무에 시달립니다. 최근 30년이래 최악의 스모그 현상이 1주일 째 계속되어 기관지, 호흡기 계통과 안과 질환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답니다. 인간의 지능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면 커다란 재앙을 가져 옵니다.
이번에 우리나라에 재난이 왔습니다. 재앙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재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인들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재난입니다. 교만했습니다. 그들에게 깨달을 수 있게 하십니다. 근자에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여졌습니다. 이미 6년 전 영국의 한 연구소에서 복제 양 돌리가 태어났습니다. 생명과학이 눈부시게 발달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쌍둥이 송아지를 복제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사람의 유전자를 지닌 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바벨탑의 교만입니다. 혼잡이 생겼습니다. 이 나라에 하나님이 축복이 왔습니다. 보릿고개가 무언지 아세요? 우리 고향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러다가 이 나라에 연속되는 풍년을 허락하시었습니다. ‘쌀이 남아서 짐승의 사료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그러기 보다는 ‘북한에 보내자’ 라고 할만큼 축복 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적자지수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교만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재난을 주신 겁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존귀히 여기신다고 하였습니다(잠15:33).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였습니다(시10:17).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잠16:5) 교만하였을 때 재난이 왔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은 영적인 병입니다. 흔히 공주병, 왕자병 그럽니다. 공주병이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교만병입니다. 공주병의 특징이 바로 교만입니다. 특권의식과 우월감에서 나오는 병입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라는 말을 아실 겁니다. 지위나 명성이 높을수록 그에 알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내 멋대로 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지위나 자리는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기가 할 일이 무언지도 모르고 거드름만 피웁니다. 이런 사람을 다른 이들이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재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재난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원하지 아니한 실패를 맛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실패에는 여러가지입니다. 사업의 실패, 자녀교육의 실패, 사랑의 실패, 건강관리의 실패 등 수없이 많습니다. 실패나 고난이 왔을 때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좋을 수도 있습니다. 왜요? 기회입니다. 회개 할 기회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외치라’ 그러십니다. 이에 요나는 불순종하고 니느웨 가 아닌 다시스로 갑니다. 요나에게 실패가 왔습니다. 그가 탄 배는 파선의 위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말하는 태풍이 불어옵니다. 요나서를 보세요. 그들은 얼마나 신속하게 움직였습니까? 원인을 찾고 방법을 발견하고 원인의 사람을 찾자는 겁니다. 바로 요나였습니다. 그 요나를 던져버립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자기가 범죄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결과는 요나도 살고 니느웨도 살게 되었습니다.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재난이 지난 후에는 축복입니다. 재난을 기회로 삼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난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함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에 몰래 들어가 포도를 따 먹고 있었는데 포도밭 주인이 이를 알고 달려 왔습니다. 도둑은 당황한 가운데 주인 몰래 따 놓은 포도를 옷 속에 감추었습니다. “내 포도밭에서 그 동안 포도를 훔쳐 먹은 게 네 놈이로구나” 하고 주인이 추궁을 하자 아니라고 시치미를 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포도송이에는 실뱀이 한 마리 얽혀 있었습니다. 그 뱀은 설설 기어 다니면서 도둑의 배를 물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픔을 견딜 수가 없어 뱀을 털어 내 놓았어야 했는데 자기를 감추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견디다가 드디어 뱀이 물어서 독에 의하여 죽고 말았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폴타르크의 영웅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죄를 숨기기 위하여 거짓말 한다면 이는 이중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재난이나 고난이 왔을 때에는 회개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첫째, 입술이 깨끗하여야 합니다. 9절
입술이 깨끗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운 말을 쓴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 시비가 벌어집니까? 자기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이게 볼펜입니까? 만년필 입니까? 아내가 말하기를 “이게 만년필이다.” 그러면 “그래요”, 만년필로 하면 될 것을 “아니다, 볼펜이요. 아니 볼펜도 몰라보고 무식하게” 그러면 부부싸움이 됩니다.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것, 이게 마음을 비운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 즉, 자기주장을 버려야 합니다. 소유도 그렇습니다. 꼭 내 것이다.
노인 세 분이 아주 친한 사이입니다. 세 분이 모여서 우리도 지금까지 친구가 되어 한 번도 다투거나 싸운 일이 없었는데 남들처럼 싸워도 보고 다투기도 해야 정이 더 드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맞아. 한 번 싸워 보자구” 그렇게 합의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A라는 노인이 B라는 노인의 지갑을 갖고 “이거 내 것이야” 그러니까 C라는 친구가 “자네 억지 쓰는군” 그러니까 A라는 친구가 “그게 자네 것이라구?” 그러면 “자네가 가져” 그럽니다. 싸울 수가 없게 됩니다. 내 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아니하는데 무슨 싸움이 생깁니까? 어떤 이들은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입술이 깨끗하다는 말은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근자에 성공에 대하여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쌍 기억(ᄁ) 시작되는 여덟가지 덕목을 제시합니다. 즉 1) 꿈 2) 끈 3) 끼 4) 꼴 5) 꾀 6) 낌 7) 깡 8) 끝 입니다. 조금 설명을 하면 1. 꿈입니다. 비젼이 있고 목표 의식을 가지라는 겁니다. 2) 끈입니다. 이는 끈, 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끈을 만들려면 인간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은 ‘적군도 아군도 아닌 연합군을 만들어라’ 그런 말입니다.
3) 끼입니다. 프로정신, 직업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번 해보고 그만 두는 게 아니라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4) 꼴입니다. 생긴대로 살면 꼴값한다고 하는 것 같이 매력적인 모습을 갖추라는 겁니다. 5) 꾀입니다. 지혜로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6) 낌입니다. 낌새를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 같이 민감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7) 깡입니다. 근성과 집착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8) 끝입니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살아온 이들입니다. 누구라도 진실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임시응변으로 적당하게 거짓말도 하고 앞에서는 그럴 듯 하게 좋은 말 하고 뒤에서는 전혀 반대의 자세를 갖는 사람은, 임시는 남을 이용하여 유익을 얻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아니합니다. 입술이 깨끗하여야 합니다. 진실하여야 합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월요일 아침에 택시를 타고 먼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운전기사에게 요금을 큰 돈으로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 생각에 깊이 골똘하고 있다가 거스름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거스름 돈이 훨씬 많이 더 왔습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아, 하나님이 나의 사정을 아시고 돈을 쓰라고 주시는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합니다. ‘아니야. 진실하지 못한 내가 무슨 목사야.’ 목사님이 내리면서 “기사양반, 아까 나에게 거스름돈을 더 주셨어요.” 그러면서 남은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때 기사가 하는 말이 “잘못 거스름 돈을 준 게 아니라 사실 제가 목사님의 교회에 지난번에 갔었습니다. 정직 이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도 시험해 봅니다. 입술이 깨끗해야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보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롬10:14) 자식이 아닌데 어찌 아버지라고 하겠습니까? 요즈음 비위 좋은 사람은 남의 아버지를 보고도 아버님 그럽니다. 그런데 어떤 며느리는 자기 시아버지는 아버님이라는 말로 부르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자꾸 부르세요. 연습하면서 불러야 합니다. 부른다는 말은 믿기에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주여” 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는 “아버지” 그럽니다. 이게 나의 삶의 현장에서도 “주여”가 있어야 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 중에 의심 많은 도마가 있었습니다. 도마가 좋지 못한 제자의 모습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입관념 입니다. 요한11:16에 보면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가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가지 말자고 말릴 때 도마는 “예수와 함께 죽으러 가자”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셨을 때 내 손으로 예수의 못 자국을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의심하였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였습니까? 사실확인 하고 믿겠다는 데 무엇이 잘못입니까? 그러다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네 손으로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라” 하셨을 때 도마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요20:28)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이니다’ 이게 고백입니다. 주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순간에 이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러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부름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랑하는 이는 어떤 경우에도 이름을 잊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구원하여 주십니다. 벌이 무서워 하는 일보다 사랑으로 하는 일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전도하라고 할 때에 의무감을 갖게 되면 부담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영혼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그렇게 의미가 있고 보람 됩니다. 사랑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어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십니다. 부르는 것은 기도 입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어렵습니까? 환란입니까? 재난입니까?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 때 보호의 손길이 임합니다. 기도하여 손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도움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해결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섬기는 이는 보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슬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목적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겁니다. 왜 사는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되는대로 남이 하는대로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시간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어디에서든지 섬기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 보세요. 삶이 달라질 겁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내가 처한 장소에서 대접해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 보세요. 평화가 있고 행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섬기세요.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보호하십니다. 물질로 섬기십시다. 젊은 노동자 부부가 여행 계획을 세워놓고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는 저축하였습니다. 왜? 그들이 가고 싶었던 곳에 여행을 가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바로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데 목사님이 인도네시아 선교적 과업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선교에 필요한 비용과 그들이 저축한 돈의 금액이 일치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목사님을 방문하고 그 돈을 인도네시아 선교비로 바쳤습니다. 그 순간 부부는 너무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잠언3:9을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였습니다.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질보다 더 귀한 게 있습니다.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이란 육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부터 입니다. 행위와 마음은 일체입니다. 마음에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섬기려는 자세가 되어 있으면 우리 아버지는 그를 반드시 보호하십니다. 말로도 섬길 수 있습니다. 위해주는 말을 하세요. 주님을 위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가 손해 보는가’를 계산해 보면서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섬김의 극치는 사랑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나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나라의 자녀 출산이 일본은 133명, 미국은 213명, 영국은 164명인데 우리나라는 이들보다 더 적다는 겁니다.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유는 우리 부부가 부담없이 살겠다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섬기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희생하느냐는 것이지요. 이기주의에는 섬김이 있을 리가 없고 섬김이 없는 사회는 삭막하기만 합니다.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재난이 없어야 합니다. 재난은 하나님이 막아 주셔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보호하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는 입술이 깨끗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삽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과 몸 그리고 입술, 주어진 물질로 하나님을 섬깁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복된 그리스도 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스바냐 3:12-13 / 이한규 목사
< 남은 자가 되라 >
본문에는 성도를 들뜨게 하는 표현이 나온다. 12절의 ‘남겨두리니’라는 표현과 13절에 ‘남은 자’라는 표현이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남겨두시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요시아 왕 때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들려진 말씀이다. 요시아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은 선한 왕이 아니었다.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사회적 혼란이 심했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요시아가 8세에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리고 사회는 뒤숭숭하고 권력자들이 백성을 수탈해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남은 자’가 있었다. 남은 자가 있다면 공동체에 희망도 있다. 즉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신실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회복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 하나님은 남은 자의 하나님과 남겨두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남은 자가 그루터기가 되어 다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통해 멋지게 이방 선지자들을 물리쳤지만 악의 세력은 꺾일 줄 몰랐고 백성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서지 않고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눈치를 보며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렸다. 그때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쳐서 몸과 마음이 탈진한 채 탄식했다. “하나님!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그때 하나님이 말씀했다.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남은 자 칠 천을 예비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믿으라. 아직도 바른 길을 추구하는 하나님이 남겨두신 신실한 사람이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를 만난다. 너무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이 신실한 성도를 남겨두셨고 최악의 경우에 남은 자가 없어도 하나님이 나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심을 잊지 말라. 중요한 것은 내가 남은 자가 되는 것이다.
<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
남은 자가 되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스바냐 당시에 예루살렘이 패역하고 더럽고 포악한 성읍이 된 것은 사람들의 도덕성 타락도 문제였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잘못된 리더 탓이 컸다. 당시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사자처럼 백성들에게 호통치고 윽박질렀고 재판장들은 왜곡된 판결로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는 백성의 살을 잔인하게 남김없이 뜯어먹는 악행을 했다.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하게 사탕 발린 말과 공포를 조장하는 거짓 예언과 가짜 뉴스로 백성을 미혹해 영혼과 물질과 노동력을 탈취했고 제사장들은 형식적인 제사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했다. 그때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의를 나타내셨지만 불의한 자들은 수치스럽게 계속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공의의 하나님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나라들을 심판하고 황폐하게 만드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는 도전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소외감이 없다. 소외감은 하나님을 멀리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 하나님께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기도는 나갈 때의 자물쇠와 들어갈 때의 열쇠다. 기도 응답이 더뎌도 실망하지 말라. 더디 이뤄질 때 크게 이뤄진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하나님께 나아가라. 선명한 삶과 선명한 지혜는 하루의 첫 시간에 기도하면서 배양된다. 사람 앞에 나서는 시간은 좀 더 줄이고 하나님 앞에 앉는 시간은 좀 더 늘리라.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면 눈을 비비고 엄마아빠 침대로 오듯이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라. 하나님은 신비한 잠을 통해 상처와 피로를 씻어주고 욕심을 제거해 빈 마음으로 만든다. 그래서 하루의 첫 시간은 하나님과 대화하기가 가장 좋고 하나님의 주파수를 맞추기도 가장 유용한 시간이다. 아침에 이슬과 함께 풀을 뜯게 하면 소가 튼튼해지듯이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면 영혼도 건강해지고 어디서든지 오래도록 남는 자가 된다.
하나님과 함께 노래합시다
스바냐 3:14-17 / 배 혁 목사
오늘 말씀을 보면, 스바냐 선지자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전심으로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자고 합니다. 사람들이 기쁜 일이 있을 때에 흔한 표현이 노래부르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시상을 할 때에 그 나라의 국가가 연주됩니다. 그 때에 그 나라 사람들이 기쁨속에서 함께 노래를 부를 때에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바냐가 말하는 노래는 단순히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서 부르는 노래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양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스바냐 당시에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은 기뻐하며 노래를 부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두렵고 힘빠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스바냐서의 시작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멸망의 예언들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멸망의 두려움 속에 있지 않겠습니까? 쳐들어 오는 강한 적들로 인해서 그들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바냐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네 손을 늘어 뜨리지 말라” 고 합니다.
'손을 늘어뜨린다' 는 것은 손에 힘이 빠져서 축 늘어진 모습을 말합니다. 힘이 나면 주먹을 불끈 쥡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과 팔이 축늘어지게 됩니다. 이 때 그들은 노래 부를 힘도 없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부른 다면 구슬픈 슬픔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는 아주 역설적이게도 그들에게 전심으로 기뻐하며 노래를 하자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속에 기쁜 노래만 부를 일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적인 때에도 전심으로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의 암담한 현실을 허락하시긴 하셨지만, 앞으로 기뻐할 만한 일들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기쁨의 일들을 알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무서워하거나 무기력하게 있지 말고, 전심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노래하자고 합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거나,손에 힘이 빠져 축늘어지는 일들이 있으십니까? 그럴 때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분은, 우리를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절망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루살렘 백성들이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바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기뻐할 이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할 때에 기쁘십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에 기뻐합니다. 또한 어떤 분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함께 있으면 기뻐합니다. 애완동물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하게 되면 기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기뻐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다고 합니까?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한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중심에 왕으로 모시고, 그의 통치가운데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현재 환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의 자리에서 밖으로 밀어내며 소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우상을 그들 가운데 두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거룩을 원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이방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보다, 우상과 함께 있는 것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단절할 수 없으니까 그저 한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그 중심에는 우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므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곧 앞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되고 기쁨의 관계가 될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 하나님은 곧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고 그 분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내가 원하는 욕심이나 성취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는 못하지만, 세상으로 마음이 더 쏠리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기뻐해야 할 관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그 분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구원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애굽이나 다른 나라를 구원자로 의지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들이 상대해야 할 가장 큰 대적자는 자신들의 죄 였습니다.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은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께서 네 형벌을 제거하셨다”으니 기뻐노래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은 그 일을 통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형벌이 제거되고 구원이 이르게 되기 떄문입니다.
9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지만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나의 죄에 대한 형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 때에도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드릴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형벌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정결케 하셔서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망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를 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형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 형벌속에는 나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죄로 인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그냥 보지 않습니다. 형벌하시고 께끗케 하셔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원수를 쫓아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의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쓰신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악한 세력들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힘이 있어서 스스로 그들을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셔서 그들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들, 원수와 같은 것들이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사로잡혀 있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할 때에, 하나님은 나의 대적자들을 멸하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노래하는 것도,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어 주셨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자되심을 믿고 원수들과 대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리쳐 주십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고 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원수를 물리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구원의 이름, 원수를 물리치는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원수를 대적할 때에 우리에게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로 탄식하고 슬픔가운데 살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반대입니다. 절망가운데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노래하도록 만드십니다. 지금은 대적들이 두렵고 손에 힘이 없어지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원수를 쫓아내시고 구원해 줄테니 기뻐하며 노래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전능자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떠한 어둠과 절망속에서도 구원해 주시는 용사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를 믿을 때에 우리는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우리가 기뻐하며 노래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잠잠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뜨거운 불과 같이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 사랑은 잠잠해서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은 대체로 요란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아무일 아닌듯이 자녀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해주십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지출합니다. 자녀들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이러한 것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것이 너무 평범하고 잠잠해서 사랑인지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을 생각할 때에,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과 같이 강렬하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잠잠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조용히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호흡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살아가기에 필요한 양식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원수를 막아주시고,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용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잠잠하신 사랑이 우리를 지금까지 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형벌에 처하시는 것도, 그 뒤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벌을 당할 때에는 그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은 징벌 뒤에 숨겨지 끊임없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잠잠하신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할 만한 영적인 민감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 노래할 수 있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노래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유다는 그동안 하나님을 참 슬프게 만드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시고 구원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기뻐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회복의 기쁨이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로 인해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고 하십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의 하나님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로 인해서 기뻐하심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가 나로 인해서 기뻐한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자녀는 부모에게 커다란 기쁨의 이유입니다. 때로는 자녀가 뭘 하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가 부모에게 의미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때로 성령을 탄식케 해드리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목숨을 주시면서까지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삶 중심에 두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십니다.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노래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이 되심을 우리가 깨닫고 기뻐 노래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해 노래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기뻐 노래하는 관계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들마다 추구하는 기쁨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기쁨으로 삼습니다. 육신적인 즐거움을 기쁨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하는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스바냐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심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노래하라고 합니다. 남유다 백성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죄악가운데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고, 또한 이스라엘을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과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고난과 환란이 많지만 그 때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때에, 하나님 또한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노래하시는 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함께 평생 노래하면서 살아가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