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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래저래 바빠서 못들오다 이렇게 밤 늦게 들어와보니 이러한 글이 있군요. 제 첫번째 글을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곳이 신학적 논쟁을 하는 자리가 아닌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신학을 논할 수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는 경건은 들어 알아도 개혁신학을 지지하시는 분이 영성이라는 말씀을 쓰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오히려 Pastor Oh님께서 좋아하시고 님께서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유진피터슨 같은 영성신학을 하시는 분이 쓰시는 말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잘 아시는데 겸손하게 이야기 하셨겠지만 기독교강요를 읽고 개혁교회를 꿈꾸는 분이 섭리를 모르시다니요, 그리고 바르트 문제도요. 이런 것을 따지고 논쟁을 하자면 끝이 없겠죠.
저는 개혁주의 신학에 관심이 있어 몇자 공부했다고 아는 척 하려고 애초부터 이마고데이님글에 반박글 단 것이 아닙니다. 삯꾼도 많고 거짓신학 변질된 신학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한 타협과 변질 포용들이 오늘날 Pastor Oh또는 오늘날 교회들의 슬픈 현실을 만들게 된 장본인 아닙니니까? 참된개혁을 하시는데 장로교의 성도라면 으로 오직성경과 우리가 오직성경에 입각하여 장로교회와 개혁주의 교회들이 보편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로 개혁하셔야죠. 그 외의 것도 개혁을 위한다면 무조건 쓸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건 좀 위험한 것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만 제대로 알아도 그 고백서의 성경적 근거만 제대로 안다면 사랑의 교회 가운데 참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참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성도라도 꿰뚫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교회에서 거의 안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있어요, 목사님 본인들의 오류가 들어나서도 그렇고 장사를 못하니 교인들도 떠날테니까요. 물론 어제 넘 바쁘기도 하고 힘들었고 논쟁을 할 마음도 없어 제가 신앙고백서들과 기독교강요만 나열한 이유는 바로 그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도 없는 이상한 글을 써서 올린 것은 저의 큰 잘못이니 여러분께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대로 성도로서 살길 소망하며 사랑의 교회도 그렇게 개혁되길 소망하는 마음 입니다. 제가 잘 아시는 분들과 저의 가족의 일원은 아직 마당에 나가시고 있기에 그렇고요, 이 곳에 제가 거쳐간 순장님들의 이름들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참 반가웠습니다. 앞으로 이마고데이님만으로 충분하시다고 하시니 글에 댓글도 안달고 오류지적도 안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타교회 성도라 자격도 없고 아직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 그저 보편교회의 성도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계속해서 자라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예배드리길 소망하며 또한 사랑의 교회가 여러분들을 통해서 참된 개혁을 이루어지게 되길 기도만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개혁주의 신학을 접한 후 한국 목사님들 중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목사님이신 김명도 박사님의 글로 능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된 뜻을 전달하지 못한 제 마음을 대신 전하겠습니다.
<종교 개혁 496 주년> 을 맞으며
제2의 종교개혁의 필요성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종교개혁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교회가 바른 길을 잃고 성직자들은 교리 면이나 도덕면이나 윤리
면에서 극도로 타락되어 있었고, 일반 성도들은 진리와 비 진리를 구분할 능력도 없이 교회에서 지시하는 대로 맹종(盲從) 할
뿐이었다. 오늘의 교계와 꼭 같은 사정이었다. 오늘의 기독교가 바로 그러하다. 많은 목사들이 거짓을 가르치고 일반 교인들은
그것을 좋게 여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례미야 시대도 그러했고
(? 5:30) 지금도 그렇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다반사가 된 요늘의 기독교 풍토에서
평신도를 깨우쳐 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 하나님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셨다. 아벨을 둑인 가인은 하나님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묻는 말에 “내가 형제를 지키는 자 입니까? 나는 모릅니다” 라고 아주 무책임한 말을 했다. 이는 잘
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한 제체들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 돌보아 양육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나던 무렵, 교회는 온갖 비 성경적인 방법으로 성도들의 재산을 갈취하여 교회당을 크게 짓고 교회의 재산을
증식해 나갔다. 당시의 성경은 Jerome 이 번역한 “불가타 판”(The Vulgate Version) 라틴어
성경으로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성도에게는 금물이었다. 설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행해 졌고, 말씀을 맡은
성직자들은 권위만 내 세울 뿐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일반 성도들은 성경에 무식한 성맹 (聖盲)들이었다. 이런 타락한 교회의
제도를 바로 고쳐서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1517년 10월 31일 낮 12시 독일 Wittenberg
(비텐베르크) 성당에서 일어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이었다. 그로부터 495 년이
흘렀다. 앞으로 5년 뒤인 2017년에는 “종교개혁 500 주념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린다. 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들
종교개혁 가들의 가르침과 오늘의 기독교를 비교해 보자.
종교개혁은 많은 피를 요구했고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의 무자비한 핍박과 학살에 귀한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로마
천주교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 성경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흘린 피 값으로 얻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들의 고귀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Scotland 의 St. Andrews 성당 앞에서 천주교 추기경
David Beaton 이 조소 (嘲笑)하는 가운데 그 성당 앞 인도(人道)에서 벌어진 Scotland 최초의 약관
25세의 순교자 Patrick Hamilton (1503-1528)의 화형을 잊을 길 없다. 이어서 20 미터 떨어진 같은
도로에서 같은 방법으로 순교당한 George Wishart(1513-1546)도 잊을 길 없고, 영국 Oxford 대학 교정에서
Mary 여왕에게 순교당한 Nicholas Ridley (1500-1555), Hugh Latimore, (1485-1555),
Cambridge 대학의 Thomas Cranmer (1489-1556) 같은 순교자 가 없었다면 개신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기교 교계는 이들에 과한 언급이나 서적에는 관심이 없고 Henri Nouwen 이나 Thomas
Keating, Pierre Teilhard de Chardin, Brian McLaren, Helen Schucman 등의
책에만 몰두하는 패역한 세상을 맞고 있다. Schucman 의 A Course in Miracles 라는 책이 교회에서 주일 학교
교재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끓어오르는 의분(義憤,indignation) 을 금할 수 없다. .
종교개혁 가들의 주창은 1) 하나님의 전제주권, 2) 성경의 절대적 권위, 그리고
3) 성경의 생활화 등 세 가지를 삶의 철학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그들의 motto는 1.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2. Sola Fide(오직 믿음), 3. Sola Gratia(오직 은혜), 4.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5.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에게 영광) 등이었다. 이 다섯 가지에 대해서 천주교와 종교개혁
가들이 서로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천주교 신부들에게 이 다섯 가지를 “sola” 라는 말을 빼고 물으면 모두 긍정한다.
그러나 “오직”이란 말이 들어가면 모두 주먹을 쥐고 “이단”(heresy)이라고 공격해 온다. 천주교는 성경의 권위, 믿음,
은혜, 그리스도, 하나님에게 영광 등을 믿지만 성경적 의미와는 다르게 믿는다.
로마천주교는 <SOLA ECCLESIA, 오직 교회> 라고 외쳤다. 성경이 우선이 아니고 교회가 우선이라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란 <교황 Pope>의 권위를 말한다 (ex cathedra).
교황은 무오하며 성경도 교황이 해석한대로 믿어야한다고 가르친다.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이 서로 다를 때는 교황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 개념 (稱義槪念) 을 보자.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만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경적인 칭의의 사상이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유형교회인 그들의 천주교에 속해야
되며 천주교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친다. 구원을 받고저 하는 자는 천주교의 유형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영세(세례)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필수라고 하면서 수세중생설 (受洗重生說, Baptismal Regeneration)을 가르쳤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들이 믿는 Baltimore Catechism 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
종교개혁 가들은 이를 반박,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짐을 강조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어떤
공로를 세워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해 주셔서(엡1:4)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엡 2:8)
되어 진다는 독력구원(獨力救援, monergism) 을 가르쳤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협력구원(synergism)을 가르친다.
즉 그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우리가 세우는 공로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만일 사람이 자기
개인을 구원할 공로보다 더 많은 공로를 세우면 그 공로는 <여공 餘功 Supererogation> 이 되어 교회에
<예치,預置, deposit)> 해 두고 다른 사람에게 그 공로가 전가되어 그 사람의 구원에 도움을 준다고 가르친다.
이른바
“여공의 교리”이다. 사람의 공로는 구원에 어떤 방식으로도 가산되지 않는다.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안에서만 (in Christ
alone),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by grace alone),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 오직 그 믿음을 통해서
(through faith alone) 이루어 진다.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의, 즉
그의 능동적 순종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택한자를 대신하여 완전히 지켜주신) 과 수동적 순종 (죄값은 사망이니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 받을 죽음을 대신하여 친히 죽어주신) 으로 이룩한 “의” 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은 우리를 죄없다고 인정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중세 천년이나 제2차 바티칸 공회 (1962-1965) 이후나 천주교의 다른 것은
태무(殆無)하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음 백성에게 전가되고 죄인의 죄는 예수에게 전가되어 (이중전가, 二重轉嫁, double imputation)
으로 우리를 대속해 주셨다. 여기에 우리의 공로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공로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의로워?다는
말은 우리의 죄가 육적으로 모두 갑자기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가 있기는 있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그 피가 우리의 추한 죄를 모두 덮었으니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덮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고 (대속의 근거),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받아 들임을 보시고 (대속의 수단)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해주시는 것” 이다. 이것이 "dikaiow"(다카이오오) 의 의미이다. We are counted justified by His grace though admittedly we still do sin.
칭의(justification) 이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죄 없다고 법적으로 선언하시는 은혜이다. 세상 나라의 대법원장이
어떤 피고인을 무죄라고 판정하면 그 누구도 이의를 말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다” 고
선언 (forensic declaration) 하면 로마인서 8:33-34에서 말하는 것 처럼 “의롭다고 하신 이는 하나님이니
누가 우리를 송사 하리오 이렇게 해서 구원을 얻은 성도를 하나님은 끝까지 구원해 주신다. 성경은 로마인서 8장 39에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게 끊을 자가 없다” 고 말하기도 하고 요한복음 6장37절에서는
“내게 오는 자를 내어 쫓지 않으리라” 고 하며, 요한복음 10:28-29에서는 “우리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뺏을 자가 없다” 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여기에 성도의 궁극적
인내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가 있다. 예수를 믿다가 나중에 신앙을 배반하고
죽는 사람은 요한일서 2:19에서 설명해주듯 처음서부터 불신자였는데 “신앙인” 인 척
위장했던 “사이비 신자” 이다. 그러므로 입으로 신앙을 말하는 모든 사람 (all professing
Christians" 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이 중생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중생은 성령으로 순간적으로 되어 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화는 일생을 두고 지속한다
성화는 과정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 라고 종교개혁 가들을 성경적으로 바로 가르쳤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마리아, Virgin Mary> 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고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라고 가르쳤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다고
하는 소위 “동정녀무후수태설, Immaculate Conception of Virgin Mary" 라는 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평생을 동정녀로 살다 죽었고 지금은 승천 (Assumption of Virgin Mary) 했다고 가르친다.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회 (Vatican II, 1962-1965)> 에서도 <연옥의 교리> 와 함께 이 모든
교리들이 재확인 되었다. Vatican 공회는 매년 열리는 것이 아니고 여러해 만에
한번 씩 열리곤 한다. 제1차 바티칸 공회는 1860년대에 있었다.
그러므로 한 편에는 <바로 믿자> 는 종교개혁 가들과 또 다른 한 편에는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인 교리를 고집하는 천주교와
오랫동안 피눈물 나는 싸움이 있었다. 특히 1572년 8월 23일 저녁부터 24일 해 뜰 무렵까지 천주교의 명절인 <성
바돌로메오의 날> 에 프랑스 전국에서 칼빈을 따르는 개신교 성직자들과 일반 성도들 2 만 여명 (어떤 사학가는
20만명으로 추정) 이 천주교인인 프랑스 Catharine 대왕대비에게 무참히 순교당하는 끔찍한 대 학살 사건 (본 튤립교육
선교회 사이트 초기 화면에서 “크리스챤의 시사마당” 란을 클릭하여
“오늘의 배도는 주님 재림의 징조인가?” 란 참고) 은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이다.
그날 프랑스 황실은 찰스 9세의 여동생 마가렛 (Margaret) 이 나바르 공 (Duke of Navare> 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서 많은 위그노족의 대표자들, 다시 말하면 칼빈을 따르는 개신교의 지도자들을 많이 초청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악한 프랑스의 카사린 대왕대비는 위그노 족(the Huguenots)의 지도자 콜리니 (Coligny) 를 죽이고
이를 조사하려고 하는 세력이 무서워서 개신교도를 모두 대량 학살해 버렸다. 학자에 따라서는, 2만, 10만 20만 각각 계산이
다르다, 상당히 많은 개신교 (칼빈의 개혁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성도들을 ‘위그노 족’이라고 하는데 (Huguenots) 이들이
대량 살해 당함)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영국 Scotland의 St. Andrews에서는 George Wishart (1513-46, John Knox 가 호위하던
상사) 와 Patrick Hamilton (1503-1528)이 St. Andrews 성당 앞에서 천주교 St. Andrews
교구를 담당하고 있던 David Beaton 천주교 추기경이 보는 가운데 장작 덤이 위에서 화형에 처해졌다(burned at
the stake). 영국 Oxford 대학 교정에서는 Hugh Latimore 와 Nicholas Ridley 등
Cambridge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종교개혁을 가르친다는 죄목으로 Oxford 대학으로 끌려와서 Oxford 대학
학생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의도로 바로 Oxford 대학 교학처 건물 앞 교정에서 1555년에 화형(火刑) 당했는데 지금도 그들이
화형당하여 순교했던 자리에는 그들이 화형 당했던 모습을 그대로 담은 청동색(靑銅色) 동상이 서 있어 보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종교개혁을 도운 영국 Edward VI의 고문으로 있던 Thomas Cranmer 교수 (1489-1556) 는 Hugh
Latimore, (1485-1555) 와 Nicholas Ridley (1500-1555) 가 화형당하는 모습을 보도록
강요당했고, 도 그 다음해인 1556 년3월21일에 같은 Oxford 대학의 교정에서 Cranmer 자신이 화형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누리는 참 신앙의 자유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고 실로 많은 사람들이 홀린 피의 댓가임을 알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는가? 미신 같은 천주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이렇게 얻어진 개혁주의 신앙이 얼마나 귀한가? 지금
천주교는 WCC 를 통해서 지상의 모든 백성을 천주교로 끌어드릴 술책을 쓰고 있다. 개신교 목사들 (J.I.Packer,
Charles Colson 등) 이 천주교에 놀아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1994년에 만들어진 <ECT,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라는 “개신교 천주교 협력 선교 기구” 를 참고할 것).
Colson 목사는 몇년전 소천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룩한 종교개혁이 요즘에 와서는 힘을 잃어갈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교회안에서 분쟁이
생긴다. 사탄의 전술이다. 교인들간에 싸운다. 불행한 일이다. 교단이 갈라진다. 신학교가 갈라진다. 무엇이
진리인가? 여기저기에서 <제2의 종교개혁> 을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다.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입으로는
외치지만 앞에 나서는 사람은 없다. 종교개혁 사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나 종교개혁 사상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종교개혁의 내용을 모르는, 비교적 신학이 약한 사람들이다.
요즘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신학교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목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의
기본인 성경원어 즉 헬라어 (Greek) 나 히브리어 (Hebrew) 는 이미 과목이 폐지된 지 오래다. 혹 원어를 강의한다고
해도 형식일 뿐 성경을 읽을 정도로 철저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신학교는 <안일주의>와 <적당주의>로 흘러가고
어려운 성경 원어 공부를 기피하는 학생들의 비위맞추기에 바쁘다. 필자는 근 30년간 여러 신학교에 강의하면서 이런 사실을
뻐저리게 느꼈다. 문제는 심각하다.
오늘의 신학교와 교회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가? Martin Luther 나 John Calvin 이나 Francis
Turretin 이 무덤에서 나와서 오늘 타락일로의 교회와 신학교를 본다면 통곡할 것이 분명하다. 오늘 미국에서
Spiritual Formation 을 안 가르치는 학교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Spiritual Formation 이
무엇인가? Contemplative Spirituality 를 말한다. 옛 신비주의를 도입하며 도양신비주의를 기독교에 접목하자는
것이다. Eugene Peterson 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이에 가담한다. 미국의 모 ‘신학교 인준기관“ 에서는 방침을
세워 Spiritual Formation 을 교과과정 (curriculum) 에 반드시 넣지 않으면 인준을 해 주지
않는다. 사회 전반이 보이지 않은 무서운 손에 놀아나고 있다. 그래서 필자가 가르치는 역사가 오래된 모 신학교는 고의적으로
인준기관에 가입하지 않는다. 잘 하는 일이다.
원어를 모르고 무슨 재주로 성경을 바로 가르칠 수 있는가? 이래서 이단들이 창궐한다. 원어를 모른 채,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 기에는 너도 나도 성경 원어 공부에 열중했다. 문예부흥이 일어날 무렵 남부 유럽 즉 이태리
스페인, 포튜갈 등에서는 문학, 미술, 회화에 집중했지만 북 구라파 (Northern Europe) 에서는 성경 원어공부에 중점을
두었다. 결과 문예부흥 (Renaissance) 직후 독일에서는 Reuchlin 이 <히브리어 사전)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오늘의 히브리어 사전은 모두 그에게 힘입은바가 크다. William Tyndale 은 감옥에 수감 중 간수가 “도와줄
일이 없는가?” 라고 묻자 그 간수에게 “히브리어 사전을 차입해 주시오” 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의 목회자들과 그때의 종교
개혁가들의 차이이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오늘의 목회자들을 어떻게 보실까?
또한 요즘은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 하나로 가르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 고 가르치는 신학교가 날로 늘어가고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이 그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하는
독일의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에 속한 학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복사한
목사들이 상상외로 많다. 18세기의 <종교사학파>가 그러했다. 그들은 기독교도 <원시 종교>의 하나로
취급하면서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바벨론 신화 집> (神話集) 인 Gilgamesh 라는 책을 참고하여
모세가 아닌 어떤 다른 학자가 편집하여 창세기를 기록했다고 가르친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지 않은 독일의 타락한 신학자들의 엉터리
인본주의 신학이다. 이들이 모두 기독교를 빙자한 “목사” 들이며, <신학박사> 이며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 모두 어디에 가 있을까 궁금하다. 천당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중간치기는 없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독일의 신학계는 세계의 신학의 흐름을 주름 잡았다. 그릇된 신학은 거의 독일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에 병균(病菌)을 옮겨 놓았다. 맨 먼저 병균에 감염된 곳이 New York 의 Union 신학교의
Charles A. Briggs 교수였다. 그는 <성경해석에 고등비평을 도입해야한다> 고 부임하면서 첫날부터 그렇게
주장했다. 그 결과 학교에는 분쟁이 일어났고 드디어 Union 신학교는 노회에서 탈퇴했다. 물론 이런 신 신학(新神學)은 그
후에 Princeton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Princeton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교수들이 대거 학교를 이탈하게 된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종교개혁가인 요한 칼빈은 평생에 많은 책을 썼고 많은 설교를 했고 많은 강의를 했다. 그는 “나는 너무 바빠서 하늘의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을 지경이라“ 고 말한 적이 있을 만큼 늘 사역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저작 중에는 Psychopannychia
(1534) 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가 처음 쓴 책이다. 그 후 그는 1536년에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 강요”를 7장으로 간단히
정리해서 발표했고, 그로부터 23년 후 다시 그 책을 수정하여 총67장으로 구성된 4 권짜리 방대한 “기독교 강요”를 Latin
어로 완성하여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틀을 잡았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Theodore Beza 가 오른 팔처럼 칼빈을 도왔고
칼빈이 55세에 세상을 떠난 후에는 Francis Turretin (1619년의 “Dort 신경” 초안을 작성한 Benedict
Turretin 의 아들) 이 누구보다도 칼빈주의 를 가장 정확히 정리하여 가장 널리 전파했는데 이런 노력은 Turretin의
불휴의 명작인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3권짜리에서 잘 나타난다. 그후 모든 조직신학 책들은
하나같이 Turretin 의 책을 참고하여 저술되었다. 그의 이 명저는 지금 P&R에서 $130에 팔리고 있지만
신학생이나 목회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며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칼빈을 안다고 할 수 없다. 평신도도 읽어야 한다. 물론
Herman
Bavinck 의 Reformed Dogmatics 4권도 중요하다 한국에서 근래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바빙크의 개혁주의 교의학” 이다 참으로 sine qua non (필수) 서적이다.
문제의 “Psycopannychia” 라는 책은 “영혼수면설, Soul Sleep Doctrine"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오늘의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의 교리를 비판한 책이다. 칼빈은 많은 책을 썼고, 주석 책도 많이 썼지만
,그 중에서 3 가지 중요한 논문이 있는데 1. Reply to Sadoleto (1539) 라는 논문은 Geneva에서
사역하면서 쓴 것이고 천주교의 추기경인 Sadoleto 가 Geneva는 로마 천주교에 복종하라고 한 명령에 반박하여 쓴 글이다.
2.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1543) 은 종교개혁가인 Martin Bucer 의
요청으로 Charles V 황제에게 바치기 위한 논문이었다 3. The True Method of Giving Peace to
Christendom and Reforming the Church (1548) 라는 논문도 천주교가 개신교를 압박하면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천주교에 복종하라는 내용의 명령을 내린데 대한 반발로 작성된 논문이다. 모두 magnum opus (걸작) 이다.
이 세 가지 논문이나 그가 쓴 수많은 저작에 나타난 칼빈의 사상은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칼빈의 굳은 신념이고
이런 다섯 가지를 구현하려고 제네바에서 명문 제네바 아카데미 (Academy in Geneva, 오늘은 Universite de
Geneve 로 승격) 를 세워 칼빈 자신이 몸에 27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끝가지 Geneva 의 Cathedral de
St. Pierre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55세에 하나님 앞으로 갔다. 그의 마지막 말씀은 “나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509-1564). 그의 무덤에는 얼마동안 묘비가 없었는데 너무도 그를 찾는 성도들이 많아서
당국은 나중에 JC 라는 두 글자가 들어있는 나무패를 무덤에 세웠으나 오늘에는 500 년 비바람에 그 표지조차 희미하다고
한다. 그의 생애를 오늘의 오만 방자(傲慢放恣)하고 목에 힘을 주는 “사이비 성직자들” 과 비교해 보라. 무엇을 느끼는가?
<칼빈의 5가지 굳은 신념>이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신앙문제에서는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라는 것. 2. 교회는 성경에서 명시한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 (이것이 필가가 늘
신학교 강의실에서 강조하는 Regular Principle of Worship 이다) 3.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오직 은혜로만 되어 진다는 것, 4.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두 가지 성례 즉 세례와 성찬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5. 교회가 성경적 목회자와 성경적 교육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 등 다섯 가지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마지막 다섯 번째 항목, 즉 “교회는 성경적 목회자” 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교회가 타락하고 이단이 창궐하는
원인은 교회마다 “미자격 목사들, 함량미달의 목사들” 이 편만하여 목회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타락하면 교회가
결단나고 교회가 제구실을 못하면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고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진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경우를
보아 알 수 있는 진리이다. Pompey의 마지막 날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임한다. 소돔을 멸하신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지금도 타락에 타락을 거듭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죄악된 무리를 심판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이제 이 다섯 가지를 오늘의 기독교와 비교해 보도록 하자.
1. 성도의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이다.
개혁주의의 특징은 성경중심이다. 개혁주의 라고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전제주권> 이다. 성경은 성직자만의 전용물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 나라말 (vernacular) 로 번역해서
읽어야 한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성경이외에 전통을 중요시하여 성경과 전통을 대등 시 하는데 로마 천주교의 교황만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으며 교황의 성경해석은 절대 무오 하여 모든 성도들이 비판 없이 따라야 한다고 천주교는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종교개혁 가들은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다. 교황이 성경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황위에 있다는 것을 알자. 교황도
성경에 복중해햐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성경은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이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성경대로 살도록 애쓴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칼빈이 쓴 Genevan Catechism (제네바 요리문답) 에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마음이 있으며
성경을 읽고 마음속에 말씀이 뿌리가 박혀 우리 일상생활에 신앙의 열매가 맺혀지고 말씀에 홈빡 젖게 되면 그 말씀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하여 성경의 권위를 격하 (格下) 하려든다.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받지
아니한다. 대학에서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보다는 하나의 수양서적으로 생각하는 교수들이 점점 늘어만 간다. David
Noebel 의 역작 <Understanding the Times, 시대를 알자> 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보면 미국
대학의 80%가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 (Agnostics) 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그들이 받은 <직통계시> 가 성경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지 않고
성경을 그들이 받은 계시나 환상으로 풀려고 한다. 그들은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며 그들이 받는 계시나 환상도 하늘에서
온다고 믿고 그것들이 성경과 대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성경>을 외쳤던 종교개혁가들의 생각을 뒤
엎으려한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이란 말은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Holy Writ) 을 포함한다. 이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데 그 계시는 종료되었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충분한 내용이 다 들어 있어서 더하지도 감하지도 말라고 가르친다(계 22:18-19; WCF 1:1).
요즘의 성도는 성경을 연구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단회적(單回的, once for all) 인 계시로 주신
무오하고 정확한 <마지막 말씀, The Final Word> 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유전이나 사람들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환상이나 계시와 병행해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며 항상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통해서 바른 뜻을 찾는다>. 이런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는 말씀을 사랑하여 늘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성경대로 살자> 는 것이 율법주의 (Legalism) 가 아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 이라고 성경은 말 한다 (시 119:105). <율법주의> 란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요 14장 15, 21, 23,24 절 등에서 말씀을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요이 6절, 요일 5:3 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오늘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지만 성경대로 살기를
기피하는 경향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대로 살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2, 예배에 관하여
중세의 문제는 예배 형태였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지시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면 예배를 받지
아니하시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중세에서 천주교가 제 멋대로 사람의 방법으로 온갖
미신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드렸듯, 오늘에도 역시 기독교의 문제는 예배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어찌 예배뿐이랴 만 오늘의 예배를
하나님이 과연 받으실까 하고 생각해 본다.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아무렇게나 인간중심으로
<사람들 기분에 맞게 드려지는> 형식적인 예배가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라면 시간 낭비일뿐더러 제3계명에 명시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되게 일컫는 죄> 를 범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 문답 제56문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이뇨?” 대답은 이렇다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사람의 형벌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다. 무서운 말이다. 대체로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전혀 모른 채 기분대로 예배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칼빈 당시 즉 16세기의 천주교의 예배는 성경에 없는, 사람이 고안한 미신적인 의식을 도입하여 사람들이 제멋대로 겉으로 형식에
치우쳐 예배를 드렸다. 천주교의 성직자들이 제멋대로 예배를 인도했으며 이상한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가르쳤다. 칼빈은 예배에
관하여 말하기를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명시된 대로 만 드려야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대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무리 사람들에게 말해도 설득하기 어렵다. 흔히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어떤 형식으로든지
열심히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에서 지시하지 아니한 다른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에게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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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부분의 교회의 예배를 보라. 예배하는 자들의 열심이 그처럼 대단하니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며 하나님에게 영광 되는
예배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에게 <영광> 이 되려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셔야하고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려면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가 되어야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의 법대로 (성경에 지시한대로) 예배해야 하다. 이것이 개혁주의
예배관이다.
오늘의 예배는 몇 몇 미국의 정통적 교단을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 교회가 음악, 연극, 연예를 중심한 <극장 같은
분위기> 로 변해 버렸다. 본 튤립교육선교회를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최근에 회원 가입한 한 성도는 그가 출석하던 교회가
전과 달리 최근에 와서 <극장으로 변해 버렸다> 고 하면서 그 교회를 떠나 미국의 <정통장로교회 OPC>로
이명 했다. 필자는 그분의 처사를 나무랄 이유가 없었다 성도가 언제 교회를 떠나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울 때” 그런 교회를 떠나야한다.
요즘은 성경말씀대로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도하고, 성경말씀대로 설교하면 별로 <재미가 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말씀중심으로 살아야 하건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씀 중심의 생활을 싫어한다.
말씀보다도 우선 <내 기분> 이다. “<내 기분대로 드리는 예배> 가 우선순위 첫째이다.“ “교리는
소용없다.“ “예배순서는 별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풍토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이 고안해 낸 예배가 성경의 진리를
대신하고 있다. <비정상> 이 <정상> 이 되어 버렸다.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도 모두 감각이 마비되어 잘못을 잘못으로 지적할 능력조차 상실했다. 이런 신앙상태에서 마귀의 침입은
자연스럽게 침투하여 갖가지 이단들이 발생한다.
중세와 똑 같은 현상이 지금 우리들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려야 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리려면 성경에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예배를 드려야한다. 이것이 종교개혁 가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이었다. 진리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대체로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3. 구원문제
마틴 루터가 지옥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어 희열에 넘쳐 종교개혁을 시작한 동기가 무엇인가?
그는 송곳으로 몸도 찔러 보았다 그러나 죄지을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또한 Constantine 황제의 어머니 Helena 가
로마에 세운 St. Lateran Church 의 Scala Sancta(거룩한 계단) 를 맨 몸으로 속옷 바람에 오르락내리락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죄 지을 마음을 없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서 1:17을 읽으면서 “사람이 의로워 지는 것은
믿음으로 되어 진다”는 말씀을 읽고 새로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어 1517년 10월 31일에 그 놀라운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구원 문제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다. 구원문제를 바로 알려면 우선 우리의 죄가 얼마나
중하며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가를 알아야 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한다. 영원한 죽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진다는 말이다. 칼빈은 그것을 알았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이룩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imputation)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외롭다고 보아 주시는 은혜> 를 입은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We are counted as
righteous before our Holy God without our own merit of any kind).
그러나 이와 같은 중요한 구원의 교리가 오늘은 잘못 전해지고 있다. 막연하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기도 하고 ”나를 따라서 하시오“ 하고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앵무새처럼 따라하게 하고는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자신 만만하게 그의 ”구원을 선언하는“ 거짓 전도자들도 있다. 몇 마디 말을 따라하면 구원이
저절로 오는 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교파에서는 새로 출석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교회의 교인들이 둘러서서 “오 예수여, 오 예수여 오 예수여 오 예수여”를
반복하라고 한다. 처음엔 어색하여 거부감이 들지만 하도 극성스럽게 졸라대니 “오 예수여” 라고 한 마디 내 뱉으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 만족하여 물러간다. 참으로 이상한 전도방법이다. <오 예수여> 한 마디만 하면 그
사람이 중생했건 말건 구원 얻었다고 생각한다. 신학을 도모지 모르는 사람들의 소행이다.
이런 사기성 신학이 판을 치고 있건만 성도들은 성경에 무식하니 아무런 비판도 반항도 하지 않는다. 이런 행패는 독 버슷처럼 펴져
나가고 교인들은 독약을 마시고 있다. 영혼들이 병들어 간다. 불한당에게 매를 맞아 넘어진 영혼을 보고 모두 그냥 지나간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 참으로 이상한 신앙풍토이다. 청교도 시절에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그들은 바른 목사를 모시는 것이 평생에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았다. 오늘 그런 신앙이 어디 있는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주어도
사람을 잘 웃기면 그것으로 족하다. 교리가 생명보다 중하건만 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직자와 교회는 타락 일로이다.
불행히도 오늘의 교계에는 신학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비성경적 사이비 집단이 독버섯처럼 창궐한다. 근자에
교회에서 나오는 전도지를 보면 복음의 성격은 모호한 채 <사랑> 만 강조한다. UPCUSA 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 The Confession of 1967> 가 그렇다. 죄와 형벌에 관한 말보다 <화해>와
<사랑> 이라는 단어뿐이다. 요즘 Postmodernism 시대의 특징은 바로 rapprochement
(라프로쉬망) 이다. “누가 무엇을 해도 모두 이해하고 사랑하고 수용하며 남이 무슨 짓을 해도 남을 비판하지 말고 서로
관용하자“ 는 <상호호혜주의 相互互惠主義> 가 몇 년 전에 신학계에 새로 등장한 Rapprochement 철학이며 다른
말로는 <political correctness> 라고 한다. 이런 퇴폐적
세기말적 패륜적인 가르침은 프랑스 Sorbonne 대학의 석좌 교수였던 Michel Foucault를 비롯해서 그의 추종자 Richard Rotty, 또 Jacques Derrida 등을 통해서 널리 펴져 나간다.
Foucault 는 그의 책 Madness and Civilization (狂氣와 文明) 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펴 나갔는데 동성연애자인 그는 AIDS 로 죽었다.
이런 사상이 지금 어느 곳 할 것 없이 기독교에 깊숙이 파급되어 있어서 좀처럼 고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지금의 현상유지가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안일에 젖어 살아간다. 아주 놀라운 것은 심지어
개혁주의를 남보다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나 도르트 신경 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이런 오류에 빠지고
있다. 그러므로 "All confessing Christians are not Christians" 라는 말이 오늘처럼 실감
있게 입증되는 때는 기독교 역사 2000년에 들어본 적이 없다. 분명 큰 배교(背敎, apostasy) 가 일어나고
있다. 요즘의 기독교의 특징은 전에 없던 큰 배교(Apostasy)인데 전에 성경대로 믿던 유명한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대거
성경에서 떠난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영국의 John R. Stott, Billy Graham, Gregory Boyd, Clark H. Pinnock
등이 모두 이전과 달라졌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유명 목사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어야한다” 는 가르침이 편만하고 있고
대형교회가 그렇게 가르치니 군소교회들이 모두 비판 없이 따라간다는 슬픈 현상 앞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혼합주의와
뉴에이지, 메이슨교, 종교다원주의, 샤마니즘 모두를 수용하는 WCC 를 지지하며 한국에 까지 불러드린 목사들도 있지
않은가? 무서운 세상이다. 목사들도 믿지 못할 세상이 되었다. 요즘은 평신도가 목사보다 똑똑해야 살아 남는다. 그리고 바로
믿으려는 성도나 목사들에게는 무서운 핍박이 불어닥친다. 앞으로의 성도는 믿음을 지키려면 반드시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영국의 성공회 의 제2인자로 성공회의 모든 업무를 총관장하는 Rewan Willams 라는 Archbishop of
Canterbery (캔터베리 대주교) 가 최근에 히피가 쓴 책을 적극 추천했는데 그 책의 내용은 “교회 예배에서 진부한 찬송가
보다는 Beatles 들이 작사 하고 작곡한 노래가 더 적당하고 따라서 권할만하다” 는 것인데 이는 Rick Warren 목사가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 라는 책 영문판 285면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이런 책을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추천했다.
성직자의 배도는 끝이 안 보인다.
Richard Foster 목사 (전 Azusa 대학교수) 는 그의 책 Celebration of Discipline 이라는 책
(HarperSanFrancisco, 1988) 의 p.21에서 가장 비성경적인 뉴에이지 운동가 Thomas Merton 을
인용하며 신비주의자 Meister Eckhart 를 인용하면서 (p.40) 말하기를 “기도할 때는 손바닥을 위로 하여 기도하라‘
라고 가르친다 (pp.28,31). 성경 어디에 기도할 때 손바닥을 위로하고 기도하라 고 가르치는가? 이런 사람이 뻐젓이 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어 교인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멀리 한국의 사이비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를
한국에까지 초청해서 세마나를 인도하도록 하고 그 세미나에는 목회자 수천명이 운집한다. 이 무서운 죄를 어찌 하나님 앞에
감당하려는가? 근자에는 서울의 큰 교회가 천주교와 합동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그 다음 주일 설교는 후안무치하게 ”오직
믿음으로“ 라고 설교한다니 참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지 않은가? 요즘의 특징은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점이다. 하나님의 ”절대 거룩하심“ 을 인정하지 않는 풍조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
4. 성례식
중세에는 7가지 성례가 예배의 중심이었다. 천주교의 성례는 미사, 영세, 고해, 견진. 혼인
신품, 종부 등 일곱 가지 이다.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성경에 없는 것들로 사람이 만든 것들이다. 칼빈은 이런 것들을 우상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례식은 마태복음 28:19의 세례와 고린도전서 11:23절 이하에서 명령한 성찬식 등 두 가지뿐이다.
성례식은 말씀과 함께 <은혜의 방편>이다. 은혜의 방편은 두 가지인데 <말씀> 과 <성례식>
이다. 성례식을 일년이 다 가도 한 번도 하지 않는 교회도 있고, 성례식을 해도 말씀이 없는 교회도 있고 성례식, 특히 성찬식에
준비 없이 참여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다. 성찬식의 중요성과 의의를 모르는 증거이다. 천주교에서는 성찬식에 참여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찬식을 통해서는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할 뿐이다.
성찬식에도 Zwingli 의 <기념설>이나 천주교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 혹은
루터교의 <공존설 혹은 공재설 (consubstatiation)> 등으로 이해하는 교회가 있지만 개혁주의는 <영적
임재설 (혹은 신비설)>을 믿는다. 성찬의 요소들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스럽게 참예 자들에게 임한다고
믿는다. 개신교 중에는 성례식이 아주 없는 교회도 있는데 이는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標識) 인 <말씀의 바른
선포>, <성례의 바른 집례>, <권징의 바른 행사> 등에 위배된다.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이고, 성례식을 바로 행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이고, 권징을 바로 행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이다, 샤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참
교회는 아니다. 성경에 순종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 표지를 가지고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참교회
“true church" 인 것이다.
성찬식도 개방 식 (Open Communion Service) 가 있고, 폐쇄 식 성찬 (Closed Communion
Service) 가 있고 또한 통제식 성찬 (Restricted Communion Service) 가 있다. 이 중에서
Calvin은 <Restricted Communion Service> 를 택했다. 이유는 개혁주의를 믿는 성도는 다른
교회에 출석해도 오늘 우리 교회에서 같이 성찬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아무나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개혁주의를 믿는 성도들,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같이 성찬에 첨예해야 한다.
5. 교회의 직분자
중세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천주교는 사람이 만든 온갖 이상한 미신적인 교리로 사람들의신앙 양심을 속박했다. 그리고 교회는
권세가 대단하여 교인들에게 마치 폭군적 자세로 임했다. 연보를 많이 하지 않거나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면 가차 없이 결혼 주례를
거부하거나 죽은 자의 매장을 거부했다. 칼빈은 이런 교회의 폭력성을 근절하며 참 교회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또한 로마
천주교에는 두 계급이 있는데 “가르치는 교회, teaching church" 와 ”배우는 교회, learning church"
이다. 가르치는 교회는 물론 교황의 지시를 받는 사제들이고 배우는 교회는 양같이 순한 일반 성도들이다. 칼빈은 이것을
고치려했다. 교회에서 목사와 교사의 구분을 성경대로 바로 세우려고 목사 장로 ,교사 집사 등 네 가지로 교회의 직원 제도를
성경대로 바로 잡아 놓았다.
<바른 교훈을 하지 않는 자는 참 목사가 아니라> 고 Calvin 은 여기 저기 그의 저서에서 말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을 보라. 목사님들 중에 많은 분들이 말씀에 착념하기 보다는 세속에 물들어있다. 행정과 상담과 오락을 지도하는 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을 막론하고 그 많은 신학교들을 보라.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목사나 교사를 양성하기보다 “인기 있는 교회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가? 신문에 나는 광고는 “지도자
양성” 일색이다. 말씀중심의 목회자가 아쉽다.
은혜의 방편이 말씀과 성례라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씀은 은혜를 받는 핵심이다.
말씀이 없이 교회는 존속할 필요가 없다. 말씀이 없는 성례식은 무의미하다. 말씀이 없는 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말씀이 정말
<은혜의 방편> 이라면 종교개혁 가들의 가르침이 바르다. <말씀을 맡은 목사들>은 세상의 농담이나 만담이나
웃기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착념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래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종교개혁 때 종교개혁 가들이 말씀을 바로 전파하여 그 말씀의 힘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수 백년동안 그 말할 수
없는 험난한 핍박을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하면서도 오늘까지 굳건히 신앙을 지켜오지 않았던가? 그 힘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말씀에서 나온다. 오늘의 “목사” 가 아닌 “지도자”들은 말씀보다 “교회성장” 에 더욱 열을 올린다. 눈에 보이는 큰
대형 교회 건물, 수 천명 혹은 수 만명이 모이는 교세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러기위해서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그들이 교회에
계속 출석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귓맛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다. Robert Schuller
가 그의 “교회성장 학교” 에 들어오는 신입생에게 인사하는 말, “교회 성장을 원하면 교회에서 죄 이야기를 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씀을 빙자한 <인위적인 교회성장> 이 아니라 신실히 전하는 말씀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 진다. 어느 길인가?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만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었더면 내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 니라"
(갈라디아 1:10).“
<성경대로 믿자>는 개혁주의가 공격을 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교회는 항상 사탄의 세력에게 공격을 받아왔고
지금도 공격당하고 앞으로도 주님 재림 때 까지 계속 공격, 아니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가혹한 공격을 당할 것이다. 지금의
공격은 문화적 타락으로 인하여 극히 자연스러운 공격인데 실상은 이런 <문화적 타락의 공격> 이 더욱 무섭고 위험하다.
문화의 타락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므로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풍조를 아무 생각이나
비판 없이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마치 전신을 마취당한 사람처럼 아무 느낌이 없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다. 이때야 말로 사탄이 작전을
펴기에 가장 좋은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도처에서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들이 넘어진다.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에서 말한다. 교회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사 이비 기독교인들이
방조하며 옛날 중세처럼 개혁주의 신앙가들을 지금도 핍박한다. 오늘 진정한 개혁주의 목사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는가? 미국의
경우는 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동료 교역자에게 핍박을 당하고 조롱을 당한다. 이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이상한 풍토이다.
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 주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낮 12시 독일 한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던 Martin Luther 가 신학박사가 되어 신학을 강의하던 그의 Wittenberg 성당의
정문에 95개조의 논문을 게재하여 (사진 참조) 교회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던 날인데 그로부터 상당히
많은 세월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참 신앙을 위하여 싸우다가 피를 흘리기도 하고 혹은 순교하여 얻은 개신교의 개혁주의가
지금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교회는 성경관, 구원관, 성령론, 교회론에서 모두 빗나간다. 이렇게 빗나가는 기독교를 개혁주의 신앙으로 바로 잡으려는 것이 본
<튤립 교육 선교회> 와 <튤립 신학 연구원> 의 목적이요 사명이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허울 좋은 여자들의
“악세사리” 가 아니다. 개혁주의는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혹은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며 혹은 칼에 맞아 죽으며, 혹은 사자에게
먹혀 죽임을 당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순교자들의 기도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들은 성경대로 믿기 위해서 육신의 생명을 바쳤다.
오늘 그런 신앙가가 어디 있는가? 우리 TULIP 선교회는 이 미지막 때에 마지막 횟불을 밝혀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으며, 지금은 분명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은 어쩌면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 개혁주의자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그 영광의 날을 위해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힘 있게 전진에 전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Pro Regnum Christi !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종교개혁과 장로교의 상징은 <post tenebras lux>, 즉 “어두움이 지나면 빛이 온다“ 이다.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비추자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자. -“종교개혁 496 주년을 맞으며” 끝-
글: 김명도 교수 (10/27/2013)
사진 설명: 1517년 10월 31일 정오 독일 Wittenberg 성당 정문에 “개혁 95개 조항” 의
논문을 못 박는 종교개혁가 Martin Luther.
첫댓글 아멘, 아멘~!!
이제 이곳에서 lintaro4님의 개혁의 불쏘시개를 시작으로 하여 한국교회의 영적 대 각성의 불길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어떤 개혁을 말씀하시는지요? 그러니까 lintaro4님은 신학적 관심에서 그의 글들을 쓴 것이 아니라, 이곳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는 건가요? 만약 lintaro4님이 그런 의도가 아니고 순수한 신학적 이유였다면, tel님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겁니다.
님께선 눈으로 글은 읽되 마음에선 오독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듯 하군요.
저는 린타로님의 글에서 이 곳과 한국교회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열심을 느꼈고 그 것에 대한 격려를 하는겁니다.
어이 없네요 인트로님이 무슨 한국교회 운운하시기까지 사랑의교회도 떠나서 다른 교회에 다니시는 분인데 그냥 그 교회에서 하실 말씀하시면서 한국교회를 위해 힘쓰시라고 하시고요
혼란을 부추기시는 님의 정체성에 더 의심이 가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교회상 게시판에나
글 좀 올리시지요 남의 설교비평과 신학적 관점이 아니라 ㅠㅠ
다른교회라,.. 사랑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공 교회의 머리되심을 부정하는 말로 들립니다.
잠시 사랑님의 머리를 차갑게 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바람직한 교회상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시간이 허락치 않아 컴퓨터 앞에 장시간 앉아있을 여건이 안 됨을 이해해 주십시오.
곧 여건이 갖춰지길 소망합니다.
님은 바겁하시군요 때를 맞춰서 등장해서 혼란을 부추기시는 의도를 탓하는 겁니다 님은 계속해서 예전의 님의 댓글도 그렇구요 마당으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사랑의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얘기 하시지요 그렇지 않고 인트로님의 글이 신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을 올리시는 것에 동감을 표하는 것은 님이 우리교회 교인도 아니면서 구경꾼으로 훈수 두는 거나 마찬가지십니다
님, 이리 들이받고 저리 발길질 하고 좀 바쁘십니다. 짐작에 의한 단정적인 비난의 표현으로 흠을 뜯지 않는 것이 댓글의 예의 아닐까요? "마음에선 오독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듯", "님의 머리를 차갑게 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 이런 표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 없이는 글이 써지지 않으십니까? 바람직한 교회상에 관한 글 기대합니다.
그동안 서로의 논쟁에 대해 다 이해하고 판단했습니다
저같은 평생 주부의 길을 걷고있는 아줌마는
어렵고 심오한 글들은 이해가 잘안되고
지금 집중해야하는 중차대한일이 자꾸
흐려지는 우를 범합니다
모든것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너무나
고생하시는 갱신위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인데 한분한분의 도움과 손길이
필요한 이때에 실질적인 손길이 절실합니다
im쌤님의 수려하고 명쾌한 글로 이해하고 만족합니다
limtaro4님 부디 타교회 계시더라도 우리를위해 기도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처음 린타로4님의 글들을 읽고 O의 사기성설교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이마고데이님을 흔들고 불필요한 피로감을 주어 정신적으로 괴롭히려는 공작 같아보였습니다 저는 린타로4님보다 신학적 배경은 더 없는 사람입니다~ 조금더 님의 글을 더 읽어보니 그런이유는 아닌듯하여 린타로님의 의도를 오해한듯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솨마르님은
이마고데이님 만으로 충분하다고 한말은 아니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무슨 이마고데이님이 예수님도 아니고 우리가 ㅁㄱㅂ도 아니고 ... 의도는 심사숙고해서 이마고님과 다른 의견은 개인적으로 따로 생각을 정확히 주고 받은 다음에 잘못된 부분은 그후에 반박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의도가 건강한 논쟁은 우리를 더욱 건강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어떤방법으로하느냐에 따라 의도가 오해되어질수도 있으므로 조심하는것이 좋을거 같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들때 우리가 서로서로 보둠고 배려해주었으면합니다
동의합니다. 제 생각 보다 더 앞선 생각이시군요. 이럴 때 뭐라 그러지요? 뭐 보다 해석이 좋다? 감사합니다, limtaro4님이 Imagodei님을 언급한 글이길래 저도 Imagodei만님을 말한 것입니다. 또 limtaro4님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효과도 만들어 지지 않았으면 했고요. 그래서 이 글에 대한 답을 본글로도 올렸습니다. 교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도 되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요? 개인적인 지적의 말은 많이 조심해야겠습니다. 바다바람님은 사태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해 좀 심한 표현이 나온 것 같습니다. 바라는 것이 같다면 쪽지로 서로 오해를 풀고 화목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솨마르님 감사합니다.
지금보니 제 댓글이 린타로님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씀드리는 것에 집중되어 의미가 정확하지 않고 모호하게 표현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킬수도 있었네요
아래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솨마르님이 이런 일에 신경쓰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본의아니게 솨마르님이 중재자로 나서게끔 만들었네요. 허허 넘기지 못한 저의 속쫍은 마음때문인거 같아 살짝 자책의 마음도 드네요.
하여간 오늘 일은 솨마르님 말마따나 요즘 사태에 대한 경계심과 예민함때문으로 저도 이해하겠습니다.
솨마르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댓글은 요즘 많이 안달았지만 글쓰시는 분과 솨마르님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실망하고 돌아서는성도들의 아픔을 아우르며 어떻게하면 마음을 모아 이 난국을 이겨나가야 할 것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자칫하면 신학적 학문의 자기자랑이 아닌가하는 오해의 소지가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입니다
예배처소가 우선입니다 저는 70이 내일 모래인 사람입니다 추위에 약합니다
'신학적 학문의 자기자랑'은 없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신학적 학문'으로 비판되어지는 글들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러루한 표현을 사용할 수 밖에 없겠지요. 더구나 이곳에서 합의된 목표를 향해 앞 장서서 애쓰는 분들의 힘을 빼는 것에 대해서는요. 저 자신 어쩔 수 없이 '나'를 내보여야 하는 글들에 대해 스스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변명삼아 말씀 드립니다. 추위에 떨지 않고 크리스마스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limtaro4님!!!
새벽시간에 얼마나 고뇌하고 마음에 성령님의 간섭하심으로 힘들게 글을 쓰셨을까하고 안스럽네요.우리모두는 한성령님의 간섭을 받고있는 한지체들입니다. 다만 그동안은 이마고데이님의 글로 위로를 받다가 갑자기 논쟁하듯 lim님의 글이 갑자기 뛰어들듯저희의 정신이 잠시 멍해서 그랬나봐요. 하지만 칼빈과 복음주의에 충실하자는 님말에 당연히 박수도 보냅니다. 가족들도(사랑의 교회의 마당교인)이시고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관심있게 시간투자와 말씀투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넘 섭섭해마시고 충만한 하루되세요.
전 님이 몹시 불쌍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계속적으로 본인이 처음에 올린 글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한다고 생각해요 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떠나셨으면 거기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고 그굣에서 님이 주장하는 웨스트민스트 소교리 문답의 중요성을 주장하시고 거기에 맞도록 교회를 세워가십시요 이마고데이님의 설교비평에 대해 한 마디도 비평하지 않으시면서 그분이 인용한 신학자들의 어떤 관점의 문제점만을 가지고 고집하시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닌듯합니다 진리와 진실은 짧고 분명합니다 쇠마르님의 글에 대해 다시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 긴 누구의 글을 옮긴 것도 님이 몹시 논쟁을 좋아하시는 분임을 느끼게 합니다 ㅠㅠ
종달새56,tel9787,어느새련가 이자들 과거 글 한번 올린적도 없는 자들이 댓글로 논쟁을 부추기는걸 보니 ㅇ 떨거지들의 새로운 작전을 시작했나보군요.이제 그만 하고 본래 놀던 ㅁㄱㅂ으로 가세요.
바다바람님 조금 많이 불쾌하네요
저를 O의 떨거지라고 표현하다니
저를 아는 사랑넷사람들은 결코 그런말하지 않은겁니다 필력이 딸려 글을 쓰진 못하고 최근 댓글을 많이 쓰진 않았지만 가끔씩 남긴말들을 발견하면 전혀 아닌걸 알게 될겁니다
제글을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논쟁을 부추기는것이 아니라 린타로님을 배려존중하며 말하지만 심사숙고 신중해달라고 예의바르게 부탁하는 말로 들리진안나요? 린타로님이 어떤분인지는 모르지만 ㅁㄱㅂ이 아니라고 확정 안되었으면 이정도의 예의를 차릴줄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꼭 누군가에게 눈도장 찍으면서 활동해야 하나요?
제 연락처 쪽지남기겠습니다.
사랑넷에서 별 큰일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O의 떨거지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도록 님께서 이해실지는 모르겠지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런 것이 글로만 대할 때의 단점이고, 친o파들이 사용하는 몰염치하고 간교한 수단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한 예민함인 것 같습니다. 저들은 이곳에서 분란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 뿐 아니라 책동합니다. 조금만 서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느새련가님 불쾌하실 것 충분히 이해됩니다. 모두 모두 형제 사랑을 키웁시다.
지금 솨마르님의 의도가 잘 안와닿네요.
바다바람님이 저때문에 불쾌하시는게 이해된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시기상의 예민함으로 인한 바다바람님의 의도를 제가 이해하라는 말인지...
저도 제 댓글로 인해 여러사람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솨마르님처럼 사랑넷에서 적절한 때에 적절한 제안을 하신분들에게는.
그리고 뿐만아니리 많은 사람을 깨우치는 이마로데이님을 피곤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려는 그 어떤 사람들이 있다면 그사람들은 미워합니다. 그러나 아무사람이나 O의 떨거지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가 된다는 것을 조금 염두해었으면 합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급히 쓰느라 호칭이 틀렸네요. 물론 어느새련가님이 불쾌하실 것이 이해된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가능하면 개인적인 지적이나 권고나 제안은 쪽지로 해주길 제안한 것입니다. 아무리 확실한 저들의 책동 글에 대해서라도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이런 과정을 통해 이 방이 좀 더 화목한 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예민했나 봅니다.정식으로 사과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아침 출근하며 저를 O의 떨**라고 표현한것을 보며 무척 흥분했습니다. ~
ㅁㄱㅂ의 맹순종과 자신들만의 고집을 신앙으로 가장하는 무리를 보며 저또한 답답해하기도했고
또 교회에서 제가 봉사하는 곳에서는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사랑넷을 가리켜
사탄의 무리라고 나무랄때도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큰 예배당이나 거짓인생O인지 아니면 한국교회와 하나님의 진리말씀순종인지) 교회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기회가 되면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나 ''예수님을 마음으로 부터 배반하는 ㅁㄱㅂ''에 나름의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있는데 제가 ㅁㄱㅂ의 O의 떨**라니요..
하여간..... 바다바람니이 저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보니 제가 이른 아침에는 너무 모호하게 댓글을 달아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싶긴 합니다. ~
출근을 앞두고 급히 쓴거라 지금보니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네요.
그리고 물론 이해합니다. 사실 저도 ㅁㄱㅂ이 혹시 불필요한곳에 피로감을 느끼게 하려고 흔들지는 않나 걱정스러웠던 참이었거든요.
평안하십시오
동일한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분들끼리는 결국은 오해가 풀리고 화해가 되어 다시 하나가 되네요. 저도 표현에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내일 어디서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주일에배를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논쟁할 때 언제 어떻게하는것, 조심스럽게 하자는 말은 린타로4님께 정중한 마음으로 드린 말이었습니다. ~
그런데 솨마르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누구나에게 생각해볼말이니까 라고 생각하겠습니다. ~
‘영성‘에 관해섭니다.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의미와 신학적 의미를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사용한 영성이라는 용어는 영성신학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보다 보편적 의미의 영성이라는 단어를 말합니다. 혹시 이 글들을 보셨나요? ‘왜 칼빈의 영성은 리바이벌 되지 않는가’ ‘기독교(개혁주의) 영성의 현주소’. 둘 다 개혁주의에 속한 분들이 쓰신 글들이니까, 영성이라는 단어를 영성신학과만 연결하지는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섭리’에 관해섭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제5장이 섭리 이지요? 5장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의 섭리로 자기 교회를 돌보시며, 모든 일들을 교회에 유익이 되게 처리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기에, 즉 하나님은 ㅅㄹㅇ교회에도 유익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기에 지금 교회를 바로 세우시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들어 사용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도 알기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모르는 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어찌하여’를 외쳐대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를 몰라 하나님께 울부짓고, 항의 하고 심지어는 눈이 너무 깨끗하니까 악을 못 보는시거지요? 그러니까 이 불쌍한 백성들을 방관하시는거죠?하고 비꼬기까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일하실 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안
타까워하는 약한 인간의 모습이고 하박국 선지자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느끼며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없어도’를 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르트’에 관해섭니다.
바르트에 관해서는 저도 정말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예정론을 가지고 바르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요, 그에 관한, 그의 글들을 읽으며 혼란스럽던 것이 에베소서 2:8에서 ‘믿음 조차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은혜로 갖게 된 것이면 칼빈의 예정론이고, 은혜를 받은 후 우리가 우리의 손을 뻗어 우리의 의지(또는 행위)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칼 바르트의 예정론인 것 같다’
로 정리하면서 더 이상 파고 드는 것을 멈췄습니다.
바르트에 관해서는 천주교에도 구원이 있는가에 관한 묵상 결과인 다음의 말로 마치겠습니다. 천주교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천주교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혹시 이 말에 동의가 되시나요? 아니라면 아마 님의 처음 글에서 존 비비어에 관해 쓰신 것도 저와 이런 차이에서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덕분에 옛날 노트들을 뒤져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목록에 추가 되는 것을 하지 않으려다 보니 댓글이 너무 깁니다. 죄송합니다.
개인글은 쪽지로 해주시지...아니면 .....그냥 답답하네요
교회개혁이라는 의미로 은근슬쩍 사랑넷을 포함시키려는듯 하고 댓글을 유도하여 논란을 야기시키는군요. 정체가 불분명한
분들이 이렇게 일부 학자들의 글을 이렇게 중차대한 시기에 장문으로 올리도록 허락할 필요가 있나요. 관리자님 삭제 부탁드립니다.
lintaro4 님!
무대위에서는 등장할 인물들이 작은 역할이라도 본인의 역할이 있을 때만 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작은 역할 하나도 모든 것을 망치게 합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요. 좀더 시간이 흐른 후에 등장해 주세요. 글을 써놓고 시간이 없어 실수했다? 이게 말이됩니까? 글을 써서 저장하고 수정하여 올리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아내분이 그랬다면서요. 당신일이나 잘 하라구요. 그리고 시간도 없으신분이라면서요. 저도 아내분의 의견에 한표합니다.
섬김에 감사드립니다
Lintaro4님, 공유해 김명도교수님의 긴 글은 꼼꼼히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되는 부문이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단편단편으로 말씀하시는 님의 Argument는 제가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대신 김교수님의 긴 글을 꼼꼼히 읽어도 어떤 부문에서 imagodei님의 오목 설교 비평과 상충이 되는 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신학 지식이 부족하여 어떤 신학자의 이름과 그 분을 찬성/반대/인용하는 것 만으로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이유에서 그렇다고 설명을 해주셔야 이해합니다.) 또한 refer하신 김교수님의 글에서도 본 회퍼나, 토저 목사님이 어떤 신학적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만 없는 것이 아니라 거명조차 없습니다.
또한, 제가 기억하는 imagodei님의 비평은 본 회퍼 혹은 토저 목사님 같은 분의 권위있는(?) 사상에 의존했던 것보다는 잘못된 인용이나 상충되는 인용 등을 밝히신 것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하지 못한 의도로 흔들어 보시려고 한 것이 아니시라면 (정말로 이런 의도가 아니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술적인 오해와 특정 신학자/목사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로 시작된 논란일 수 있으니, 최초의 발단이 된 설교비평에 대한 의견을 적절하게 정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12.13 19:21
오늘 오전은 중요한 일이 있었어서 빠진 몇 가지를 보충합니다. 본글로 올리면 좋겠는데, 싫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댓글로 올리겠습니다.(어차피 올리신 글이고 댓글이니까 다른 분들은 내용에 관한 의견만 올리시고, 이런 나눔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은 참아주시기바랍니다.)
이미 쓴 것처럼 저도 교리나 여러 신앙고백서에 관한 교육은 필수적이라 생각하며, 먼저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신학을 논할 수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라는 말에 대한 답입니다.
처음 올리신 글이 신학적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신학적 토론을 위한 것이라면 토론의 주제를 좀 더 명확히 하셔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토론 뒤에 ?를
부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뒤에 나오는 ‘영성, 섭리, 비르트’에 집중했습니다. 저에 대한 얘기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의미있는 얘기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반가웠습니다. 뒷 부분의 글들은 동의되는 것들인 것 같아 대각선으로 읽었고요.
뒤에 올리신 김명도 교수님의 긴 글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예의인 것 같아 제 의견을 추가합니다. 저는 그 글을 이미 접했고, 대강의 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 첫 인상은 별로 호감가지 않는 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좀 독선적인 표현들을 자신의 주장을 위한 알리바이로 내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님이 내세우시는 알리바이 몇 가지입니다. 이것들만 쓰니 별
로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언급하는 이유는 김교수님의 글의 강도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이 우선이 아니고 교회가 우선이라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2. “오직”이란 말이 들어가면 모두 주먹을 쥐고 “이단”(heresy)이라고 공격
3. 원어를 모르고 무슨 재주로 성경을 바로 가르칠 수 있는가?
4. “개혁 95개 조항”
5. 정문에 95개조의 논문을 게재하여 (사진 참조) 교회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
댓글이라 길게 쓰지 못해 내용은 쪽지로 보내겠습니다. 이 다음의 계속 되는 얘기는 개인적으로 주고 받아도 좋겠습니다. 관중이 있으면 좀 더 재미있긴 하
지요? 그래도 야구 보러 온 사람들 앞에서 축구하면 안 되겠지요.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별도의 방을 여기에 또는 밴드에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답변을 올리는 예의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겠습니다. 종교개혁에 관한 내용은 물론 대부분 동의합니다. 단지 유사한 주제의 글들은 여럿 있었기에, 첫 인상으로 만들어진 비호감으로 인해 이 글을 정확히 읽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비본질적인 것이 중요한 주장을 약화시키면 안 되겠지요? 그 분의 개혁주의적인 신앙관은 존중하며 깊이 받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