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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의 대가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전혜영 옮김
글항아리|532쪽|2만2000원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일어나든 국민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
대선 후보가 한 말이 아니다. 법정에 선 피고인, 그것도 동포를 1만2000여명이나 학살한 범인이 이렇게 말했다.
크메르루주 집권 기간(1975~1979) 중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인근의 S-21 교도소장으로 1만2000여명을 학살한 범인 두크(70)의 재판을 기록한 논픽션이다. 프랑스 저널리스트로 르완다, 보스니아 등의 전범 재판을 취재해온 저자는 2009년 3월부터 2010년 7월까지 진행된 국제재판 과정을 슬로모션을 돌리듯이 묘사한다. 법정 구석구석의 풍경부터 피고인, 증인, 재판관, 변호사, 검사의 심리 상태까지 치밀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괴물로 변한 한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완벽한 모범생
중국계 캄보디아인으로 수학 교사 출신인 피고는 완벽한 학생, 교사였다. 공부를 잘했을 뿐 아니라 친구들의 공부를 도와줬으며 교사로 임용된 후에는 학생들에게 공짜로 과외를 시켜줬다. 시간을 엄수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임무를 완수하는 성실함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 사범학교 재학 중 공산주의에 매료돼 마르크스·레닌도 아닌 마오쩌둥주의에 빠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엘리트에 충성심, 열정 그리고 극우정권에 의한 투옥 경력까지 두루 갖춘 그가 크메르루주 정권에 의해 S-21 교도소장으로 발탁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그 4년이 문제였다.
재판을 받고 있는 두크(가운데 서 있는 사람). 그는 교묘히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지만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의 죄상이 한 꺼풀씩 벗겨졌다. /글항아리 제공 ◇살인 공장 S-21 교도소
S-21은 일단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수감자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반역한 사실과 공모자를 자백해야 했다. 원하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전기 고문, 손톱 뽑기, 물 먹이기, 채찍질, 배설물 먹이기까지 고문이 이어졌다. 말로 협박하는 '차가운 팀', 고문하는 '뜨거운 팀', 양쪽을 섞은 '저작(咀嚼)팀'이 교대하며 자백을 끌어냈다. 일단 자백을 마치면 구덩이로 끌고 가 굴대로 목을 내리친다. 피해자 유가족들이 "가스로 죽인 아우슈비츠가 차라리 낫다"고 울부짖는 야만의 현장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총지휘한 것이 두크였다. 그는 '자백을 받아내는 대가(大家)'였다.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이상은 현실에서 지옥을 만들었고, 그 현장에서도 두크는 가장 '효율적'으로 배신자를 가려내고 처단한 모범생이었다. 그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진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 베트남군의 침공 때 야반도주하느라, 꼼꼼히 정리해 놓은 엄청난 양의 자백 서류를 그대로 남겨두고 말았던 것이다.
◇이상한 재판
재판은 맥 빠진 채 진행되는 듯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붕괴 후 개신교 선교사로 위장해 지내다 1999년 체포돼 10년 후인 2009년 국제재판에 회부된 두크는 초장에 자신의 혐의를 실토하는 것 같았다. 첫 공판 때부터 "제가 1만20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데 함께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30년 전 사건을 재생했다. 피해자들의 가물가물하는 기억을 바로잡기도 하고, 혐의를 부인하는 부하에겐 "코끼리를 바구니로 가릴 수 없다"는 속담까지 들먹이며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거듭 "중형을 선고받더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백의 대가'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위에서 시킨 일"로 교묘하게 발뺌했다. 고문이나 사형 현장에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직접 죄수를 때린 적이 있는데, 그중 한 건은 "맞고 나서야 자백한 죄수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검사 측에 의해 징역 40년이 구형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99년부터 10년 하고도 6개월, 18일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이제 풀어주시길 간곡히 요청합니다." 하지만 법정은 그에게 30년 형을 선고했다. 두크는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으나 올 2월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자백의 대가>
노정태 자유기고가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을 점령한 캄푸치아 공산당, 일명 크메르 루주는, 당시 프놈펜에 살고 있던 1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모두 도시 바깥으로 내보내 농업 및 농업에 필요한 관계 공사 등에 종사하게 했다. 역사상 전례 없는 반 산업화, 농업화 실험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대략 당시의 캄보디아 인구 600만 중 3분의 1가량, 즉 20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도시에서 쫓겨나는 과정에서 죽고, 도시 바깥에서 굶어죽고, 강제 노동을 당하다가 죽고, 숙청당하는 등, 죽을 이유도 죽일 이유도 많았다.
캄푸치아 공산당은 이른바 '배신자', '반동분자'를 찾아내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전국 주요 거점에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고, 특히 자신들의 정당인 크메르 루주의 내부 숙청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정치 경찰 본부와 죽음의 수용소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곳"(98쪽), 즉 S-21 수용소가 만들어진 것이다.
<자백의 대가>(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전혜영 옮김, 글항아리 펴냄)는 1975년 크메르 루주의 캄보디아 장악 이후, 1979년까지 그들이 운영한 정치범 수용소 겸 학살 시설인 뚜엉 슬렝 교도소, 일명 S-21의 교도소장으로 근무한 한 남자의 재판에 대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깡 켁 이우(Kaing Guek Eav)'였지만, 그는 혁명군에 들어가면서부터 '두크(Duch)'라는 이름을 썼다. 두크는 4년간 S-21의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대략 1만2000여 명의 고문, 학대, 살인에 대한 최종 책임자라는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았다. 수학 교사 출신이었던 그는 집요하게 문서를 만들었고 보관했지만, 베트남군이 쳐들어올 때 그것들을 파기하지 못했다. 몇몇 예술가들에게 죄수들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한 것 또한, 그가 이 끔찍한 집단 학살에 연루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덫이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다른 매체의 서평을 통해 이미 충분히 접한 내용이다.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동남아시아 국가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무려 1만2000명을 죽여 놓고도 뻔뻔스럽게 스스로를 변호하는 '자백의 대가(大家)'. 범죄의 실체는 뚜렷하고 피해자들은 분노에 몸을 떨지만, 정작 가해자는 스스로의 죄책을 인정하는 듯 인정하지 않으며 법정을 우롱하는 모습. 나치 독일에 루돌프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에는 두크가 있다! 어찌 인간이 이토록 잔인하고 뻔뻔할 수 있을까!
<자백의 대가>를 쓴 프랑스 저널리스트 티에리 크루벨리에가 의도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휴머니즘적 분노와 각성이다. 그는 '두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일을 진두지휘한 한 남자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훑어 내려간다. 태어날 때는 깡 켁 이우였던 소년이 어떻게 '임 치우'라는 중국식 이름을 얻었는지,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왜 스스로를 '두크'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존재와 조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 책은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한국의 독자로서, 나는 저자의 의도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이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생겨나는 의문에 대답하고자 인터넷을 검색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몇몇 표현에 대한 당혹스러움은 모종의 분노로 향해갔다.
'휴머니즘'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자백의 대가>는 훌륭한 법정 다큐, 혹은 표지에 써 있는 문구처럼 "차라리 스릴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그 책을 그렇게 '쉽게' 읽어낼 수만은 없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오랜 역사를 이 지면에서 다 거론할 수는 없으니, 논의에 필요한 최소한의 사실만을 몇 개 꼽아보자.
첫째, 1953년 독립하기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캄보디아는 약 70여 년간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지금도 그 나라의 식자층, 지배층은 프랑스에서 유학한다. 폴 포트를 포함하여, 크메르 루주의 핵심 인사들도 모두 프랑스 유학파였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상류층은 프랑스어로 글을 쓰고 읽고 말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둘째, 1945년 독립을 선언한 후 1980년대까지 주변의 강대국과 끝없는 전쟁을 벌이며 독립을 쟁취한 월맹, 현재의 베트남과 달리, 캄보디아는 1953년 외교를 통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인정받았고, 이후로도 끝없이 미국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셋째, 크메르 루주가 월맹군에 의해 프놈펜에서 축출된 1979년 이후로도, 그들은 밀림으로 숨어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했고, 결국 캄보디아의 내전은 1999년에야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크메르 루주의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70년대의 일이지만, 그것을 처벌하기 위한 국제 재판소가 설립된 것은 2006년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들은 밀림에서 무장 투쟁을 하고, 체포되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 가담자 중 두크는 법정에서 심판받게 된 첫 번째 피고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재판에 수많은 이들의 눈과 귀가 쏠렸을 것이고, <자백의 대가>를 쓴 티에리 크루벨리에 역시 20세기 냉전의 시대에 벌어진 전쟁 범죄를 21세기에 처벌하는 이 웃지 못 할 역사적 비극의 현장을 찾았을 것이다.
요약해 보자. 식민 지배를 당했던 국가에서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 그것을 취재하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니라, 그 나라를 식민 통치했던 모국의 저널리스트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에서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지 않고 대신 미국이나 일본의 군사 개입으로 정권을 잃고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온 저널리스트가 그 모습을 보며 책을 썼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의 몇몇 대목을 읽어보도록 하자.
법정에 출두한 또 다른 증인은 현재 벼농사를 짓는 농민으로 다른 증인들이 입었던 회색 웃옷을 입었다.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크메르인의 미소였다. 노로돔 시아누크가 예전에 고용한 프랑스 출신 고문의 기록을 잠깐 예로 들어보겠다.
크메르인이 짓는 미소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감추는 효과가 탁월하다. 극동 아시아인에게 미소는 예의를 갖추는 가면과도 같다. 그래서 상대를 관찰할 때나 축하 인사를 할 때 또는 서로 신경전을 벌일 때 겉으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 미소라는 가면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그어놓은 무관심과 중의성, 친절의 장벽일 때가 더 많다. 이곳에서 미소를 대화하고 싶다는 의사로 오해하면 안 된다. 캄보디아인이 당신에게 보내는 미소는 정반대로 당신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당신이 건넨 경솔한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시이며, 본인 역시 당신에게 질문할 마음이 없다는 신호와도 같다. 갑자기 끼어든 당신에게 동요하고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다. (152쪽)
나는 21세기에 누군가가,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식민주의자의 식민주의적인 시각을, 반박이나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프란츠 파농의 명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펴냄)을 떠올려 보자. 파농은 백인들이 '검둥이의 미소'라고 말하는 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어느 광고에 쓰였을 듯한, 유독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아이 맛있어'라고 웃는 그 흑인의 미소. 흑인들은 백인들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검둥이의 미소'를 보여준다.
하지만 백인들은 '검둥이의 미소' 아래에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검둥이의 본심', 혹은 '검둥이의 길고 굵은 성기'를 두려워한다. '검둥이'들이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 그들은 백인들을 때려죽일 것이다. '검둥이'들이 성기를 드러내는 순간 백인 여자들은 모두 그 길고 굵은 물건이 제공하는 쾌락의 노예가 될 것이다, 등등….
이렇듯 치열한 식민주의적 인식 체계 비판이 등장한 것이 1952년의 일이다. 말하자면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도 전이다. 하지만, 21세기까지 이어지는 20세기의 비극을 취재하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는, 여전히 식민 시대의 '백인'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고, 그에 대해 일말의 반성적 고찰을 하지도 않는 듯하다.
가령 이런 부분은 또 어떤가?
캄보디아에서 공개 질의에 참여한 외국인은 장소가 정보를 공유하는 토론장이든 기자 회견장이나 심문이 이루어지는 법정이든 독특한 하루를 보낸다. 당황스러울 수도 있고, 짜증나거나 반대로 유쾌하게 웃어넘기는 이도 있다. 바로 캄보디아인의 독특한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것은 반복하기다. 내가 처음 참여한 기자 회견장에서 한 캄보디아 기자가 나 다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내가 방금한 질문을 그대로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반복해서 물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 동료 기자를 몇 초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본 기억이 있다.
서양인에게 시간은 선형으로 흘러가지만 세상의 이쪽 부분에서는 시간이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고의 원도 갈수록 겹치고 또 겹치며 발전한다. (190쪽)
소송이 시작된 후 49일째 되던 날에도 한 캄보디아 판사가 증인에게 죄수들이 어떤 방식으로 구금되었으며 샤워는 어떻게 했는지, 생리적인 욕구를 어떻게 해결했으며 무엇을 먹었는지 등등 예전에 했던 질문들을 되풀이했다. 결국 대다수의 외국인은 이 충격적인 문화 차이를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1쪽)
나는 두크와 크메르 루주 학살자들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포함하여 캄보디아 사람들 전체가, 이렇듯 '백인 관찰자'의 젠체하는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 대체 '정의 실현'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동남아시아는 뿌리 깊은 불교 문화권이지만, 프랑스의 70여 년 식민 통치와 뒤이어진 끝없는 내전으로 인해 산업이 발전하지 못했고, 그 탓에 '직선적 시간관'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인권 침해, 탄압, 대량 학살 등에 프랑스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른바 '호치민 루트'라고 불리던 월맹군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미국이 캄보디아 영토에 대량 폭격을 가했고, 그 결과 크메르 루주는 민심을 수습하며 어렵지 않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의 범죄가 모두 미국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비극은 인류의 비극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캄보디아인 스스로의 손에 의해 해결될 때 그나마 최선의 결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요컨대 캄보디아의 비극은 전적으로 프랑스가 만든 것도 아니고 프랑스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그것도 인권과 정의를 위해 펜을 든 저널리스트가, 마치 당연한 일이었고 추가적인 반성이나 고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건으로 취급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두크를 포함하여, 크메르 루주의 핵심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프랑스 유학파였다. 그렇다고 해서 크메르 루주의 범죄가 프랑스의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는 그런 사실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 혹은 찝찝함도 느끼지 않는다.
"캄보디아인들은 1년에 두 번 프놈펜의 해방을 기린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의 해방인지 알면 두 날의 특징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295쪽)다는 문장을 접하면, 독자는 당연히 첫 번째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 등장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말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4월 17일로 캄보디아가 론 놀 정권을 몰아내고 제국주의, 봉건주의, 군사 독재 정치에서 해방된 날이다." (295쪽)
참고로 론 놀 정권은 미국을 등에 업고 있었다. 저자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미제'로부터의 독립이 캄보디아인들의 첫 번째 독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캄보디아인, 특히 저자와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있는 캄보디아의 식자층 혹은 지배층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도 오래도록 식민 지배를 받은 끝에, 이후 계속되는 폭격과 학살에 지쳐버린 캄보디아인의 머릿속에서 프랑스는 '지배 국가'가 아니라 일종의 '후견국'으로 승격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 그 식민지를 지배했던 나라의 지식인이 이런 말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심정은 결코 즐겁지 않다. 나는 캄보디아인이 아니지만, 프랑스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 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부에서 벌어진 이 비극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반드시 장애물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프랑스인이므로 프랑스에 주어진 문화적 자산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그 결과가 아무리 끔찍했다 하더라도, 크메르 루주의 이 학살극은 어떤 '이념'을 향한 '혁명'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에리 크루벨리에는 프랑스에서의 '혁명'과 프랑스의 구 식민지에서 발생한 '혁명'을 다소 다른 방식으로 평가한다. 역시나 그놈의 '위트'를 곁들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S-21에서 사망한 죄수를 모두 헤아려보는 것은 캄보디아 공산당의 숙청 역사를 꿰뚫어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철학자 레몽 아롱은 진지함과 아이러니를 교묘하게 섞으며 이와 같이 말했다.
"단일 정당으로 이뤄진 정부가 숙청 작업을 하는 것은 매우 평범한 현상이에요. 프랑스 내각의 위기도 어떤 면에서 보면 이에 비교할 수 있는 사태라 할 수 있죠." (310쪽)
여기서 "프랑스 내각의 위기"를 들먹이는 것은 진지함과 아이러니를 뒤섞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뻔뻔스럽거나 역사적 사실에 무지한 태도에 가깝다. 프랑스는 최초의 시민혁명을 일으킨 나라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혁명적 숙청을 단행한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사를 직접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로베스피에르와 당통과 마라와 생쥐스트 등 그 숱한 혁명가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모함하고 시기하고 음해하고 단두대에 보내 목을 잘라 버리면서, '혁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핏빛 자욱한 것인지 몸소 시범을 보였다. 결국 '황제' 나폴레옹이 등극하기까지 그 피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프랑스인들이 직접 시범을 보인, '혁명'의 역사다.
물론 방금 한 말은 비아냥거림이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보며, 이념을 인간의 세상에 온전히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하여 '근본적'인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특히 프랑스인인 저자에게는 없지 않았다. 폴 포트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공부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크메르 루주, 프랑스 혁명, 더 나아가 '이념을 세상에 끼얹는' 바로 그 행위 자체에 대해 이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 '백인의 가면'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크메르인들이 "크메르인의 미소"를, 즉 그들만의 가면을 쓰고 있다고 야유한다. 그러한 시각이 식민주의적이고, 백인 중심적이며, 인종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 사람의 저자로서 너무도 게으르고 안이한 태도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를 역사화함으로써 보편적인 시각을 획득하는 대신, 역사 속의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이 반성적으로 고찰하지 않는 제국주의적 시선 속에 안주해버릴 따름이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이 책을 보는 나의 '선입견'이 사라질 수 있는 그 순간이 도래하기를 고대했다. 내가 너무 식민주의의 피해자 의식에 빠져서, 좋은 책을 나쁘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재판의 말미에 이르러 두크가 선임한 캄보디아인 변호사 까 사웃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피고인인 두크의 무죄를 주장하지는 말고, 선처를 구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변호사들끼리 합의가 되어있었지만, 캄보디아 변호사인 까 사웃은 그것을 어긴다. 두크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그에게 명령을 내리던 자들은 재판을 받지 않았는데, 왜 중간 관리자인 두크가 제일 먼저 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논리로 무죄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 장면을 목격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일을 계기로 두크에게 가차 없는 징벌을 내려야 한다는 피해자들의 열망은 더욱 샘솟았다. 이렇게 의뢰인 자신과 동료 변호사가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온 변호사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변호를 할 수 있을까? (490쪽)
까 사웃은 웬일인지 물러서지 않았다. 첫 번째 배신이 있은 지 이틀 만에 프랑수아 루는 두 번째 배신을 당했다. 2년 동안 함께한 동료 변호사가 다시 그를 가격한 것이다. 이 캄보디아라는 나라는 우정을 유지하는 데 결코 녹록치 않은 땅이 틀림없는 것 같다. (509쪽)
나는 정말 궁금하다. 이 책을 읽은 캄보디아의 지식인들은, 이른바 '자존감'에 상처를 받지 않나? 만약 저자가 법정에서 벌어진 사실이 그런 걸 뭐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되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바로 그런 불가해하고 모순적인 상황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성은 프랑스의 것이고, 비이성과 몰상식과 몰염치와 뱅글뱅글 돌아버리는 순환적 시간관은 캄보디아의 것이다. 그리하여 "제대로 변호"를 하러 프랑스에서 오신 프랑수아 루 변호사는 최후 변론의 장소에 '프랑스 정신의 상징'을 영상으로 소환한다.
"저는 91년 하고도 6개월을 산 사람입니다." 그 증인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자는 호들갑스럽게도 "유머 감각과 신중함이 동시에 엿보이는 한 노인"(516쪽)이라고 그 최후의 증인을 소개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투사인 그 남자가 크메르 루주의 범죄 현장과 이번 소송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는 나치 수용소에 강제 수용된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외교관의 길을 걷고 무수한 인권보호 활동에 열정적이고도 절대 물러남 없이 앞장섰던 그가 여기 무슨 일로 등장한 것일까?" (509쪽)
그 남자는 <분노하라>(임희근 옮김, 돌베게)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테판 에셀이다. 그 유명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용사를 불러낸 프랑수아 루 변호사는, 알프레드 드 비니의 시를 그가 낭송하게 함으로써 본인의 최후 변론을 마무리 짓는다. 프랑스 법정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좋은 변호'로 인정되나보다 싶기도 한데,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튼 "스테판 에셀의 몇 마디 말에 시를 두고 벌인 논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520쪽)췄고, 대신 "인간 공동체를 위한 시라는 위상만 남"(같은 곳)았지만, 30년 형이 선고되자 "두크는 판결에 강한 반감을 표했다."(521쪽)
그 모습을 보며 저자는 마지막 코멘트를 덧붙인다.
"아쉽게도 시는 자유인에게만 빛을 발할 수 있나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책의 저자에게 시를 낭송해준 후 30년 형을 선고해보고 싶어졌다. 과연 그는 그 순간에도 시의 광휘를 알아보는 자유인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까?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에 어느 정도 친숙하고, 캄보디아 내전에 촉각을 기울였던 사람들, 가령 프랑스의 지식인을 상정해보자. 그들에게 <자백의 대가>는 두크라는 이름으로 불린 어떤 학살 기술자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를 빼곡하게 담고 있는 법정 스릴러에 가까울 것이다.
한편, 캄보디아의 역사를 거의 모르는 사람에게 이 책은 일종의 충격적 입문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비록 국내에는 관련 서적이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지만, 아무튼 우리가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할 때, 월남에 파병 간 '김 상사'는 바로 이런 지옥의 정글을 헤치고 다녔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적어도 내게 이 책은,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해주었다. 20세기 냉전 시대의 학살에 대한 재판을 21세기에 하는 것도 비극적인데, 그 재판을 보며 책을 쓰는 한 프랑스인은 여전히 19세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마저도 식상하게 느껴지는 요즘, 자신의 천진난만한, '디폴트'로 설정되어 있는 백인 중심주의적 시각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이런 책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하지만 '백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세상은 이런 곳 아닌가. 그 당연한 진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자백의 대가>는 저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류가 진정한 자유, 평등, 박애에 도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자백하고 있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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