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네, 마드리드에서 만난 스페인 화풍
파리 사람들은 스페인 회화에 매우 호감을 나타냈습니다. 프랑스의 문학과 회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는 스페인 문화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대표적 문학 작품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1547-1616)의 『돈 키호테 Don Quixote』는 17세기 중반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래 모든 학생의 애독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문학에 깊숙이 자리 잡은 작품으로 『돈 후안 Don Juan』도 꼽을 수 있는데 이것은 1630년 스페인의 극작가 티르소 드 몰리나Tirso de Mollina에 의해 처음으로 드라마로 각색되었습니다. 티르소 드 몰리나는 1601년에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방탕을 상징하는 가공의 인물 돈 후안은 원래 민간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티르소가 1630년에 쓴 비극 『세비야의 호색가 El burlador de Sevilla』에서 문학적 주인공으로 처음 선을 보였습니다. 17세기에 돈 후안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순회공연 배우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 중 몇몇은 이것을 팬터마임의 주제로 삼아 프랑스에서 공연했습니다.
알프레드 드 무세, 테오필 고티에, 외젠 들라크루아 모두 스페인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작품은 대중적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직접 스페인으로 가서 그곳 화풍을 익혔고 고티에도 1845년에 스페인을 다녀왔습니다. 파리에도 루브르 뮤지엄에 스페인 회화가 있었고 화가들이 그곳에서 벨라스케스를 포함하여 많은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화풍을 익혔습니다. 루브르는 새로운 스페인 회화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이 소장하던 스페인 회화가 파리에서는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한 해 전 스페인을 방문한 자차리 아스트뤽은 마네에게 스페인에 가면 어디어디를 가봐야 한다고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마네는 1865년 8월 마드리드를 방문했는데 더울 때라서 여행하기에 적당하지 않았고 시설이 매우 불편하여 열흘을 지낸 후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음식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또 콜레라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확산되고 있어 청결치 못한 곳에 오래 머물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아스트뤽은 “에두아르! 에두아르!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아름다운 나라에서 음식물 때문에 서둘러 돌아오다니!”라며 탄식했습니다.
마네는 자신이 묵는 호텔 식당에서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1838-1927)를 만났습니다. 마네가 마드리드에 도착하고 이틀 후 팡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는 “내가 마드리드에 도착하던 날 미술에 관심이 많고 또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프랑스인을 만났네. 그래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네”라고 적었습니다.
마네의 <테오도르 뒤레의 초상 Portrait of Théodore Duret>, 1868, 유화, 43-35cm.
뒤레는 1867년에 1867년의 『프랑스 화가들 Les Peintres Francais en 1867』을 출간하면서 마네의 작품에 관한 평론을 썼습니다. 마네가 호의적인 평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작품을 주겠다고 하자 뒤레는 담례로 코냑 한 상자를 보내면서 잘 보이지 않도록 어두운 부분에 화가의 서명을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사란들이 이름을 보고 편견을 가지는 데 불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네는 이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뒤레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밝은 곳에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뒤레는 당시 스물일곱 살로 가족의 코냑 사업을 이어받아 운영하던 사업가로 포르투칼과 스페인을 정기적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그는 파리에 안주한 후 공화당 계열의 신문 발행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미술 평론가로 활동했습니다. 뒤레가 마네의 일대기를 썼으므로 우리는 마드리드 여행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레는 “자연히 우리는 매일 프라도 뮤지엄으로 향하게 되었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앞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 우리는 투우경기를 몇 차례 관람했으며 … 톨레도로 가서 대성당과 엘 그레코의 그림을 관람했다”고 적었습니다.
뒤레의 말대로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투우경기를 즐겼으며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17세기 유럽 회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벨라스케스Veláquez(1599-1660)의 작품을 관람하고 감동받았습니다.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팡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즐기는 기쁨을 자네와 함께 나누지 못해 유감이네. 실은 벨라스케스가 이 여행의 목적이나 다름없네. 마드리드의 뮤지엄을 차지하고 있는 나름대로 표현력이 훌륭하다고 하는 화가들은 손재주꾼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만, 벨라스케스는 확실히 화가들 중의 화가일세. 그는 나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해주네.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전신 초상화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네. 공주 그림만 그의 것이네.
…
난 또 고야의 작품을 보았네. 그가 맹목적으로 베낀 스승 벨라스케스 이후 가장 주목되는 화가이며, 나름대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니까. 뮤지엄에 소장된 벨라스케스식의 초상화 2점을 보았네. 물론 벨라스케스의 것만 못했지. 솔직히 말해서 여태까지 내가 본 고야의 작품은 만족스럽지 않네. …
마드리드는 보고 즐길 것들이 많다네. 프라도 뮤지엄과 매혹적인 산책길에는 만틸라를 두른 스페인풍의 여인들이 즐비하네. 길에서 만나는 독특한 옷차림들 … 투우사들 역시 야릇한 이 도시의 옷을 걸치고 있네.”
마네는 아스트뤽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본 것이며, 사실 이는 스페인까지 여행을 하게 된 유일한 이유이도 합니다. 그는 화가 중의 화가이며 내게는 전혀 놀랄 만하지 않았소. 회화에 대한 나의 이상이 그에게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나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들을 보는 순간 희망과 자신감으로 들떴소. 난 리베라와 무릴로의 작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소. 그들은 이류에 불과하니까. 벨라스케스 다음으로 내게 감동을 준 사람은 엘 그레코와 고야였소.”(1865. 9. 17)
마네의 <투우 장면 Bull-Fighting Scene>, 1865-66, 유화, 90-110cm.
할스의 <빌렘 코이망스의 초상 Portait of Willem Coymans>, 1645, 유화, 77-63cm.
마네의 <경의를 표하는 토레로 Toreo Saluting>, 1866, 유화, 171-113cm.
스페인 여행 후에 마네가 그린 투우 시리즈 가운데 한 점입니다. 투우사 외엔 아무것도 없는 배경이 그해에 그린 <피리 부는 소년>과 유사합니다. 뒤레가 이 작품을 1870년에 1,200프랑에 구입했으며, 1894년에 10,500프랑에 팔았습니다.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Le Fifre>, 1866, 유화, 162-97cm.
배경을 어둡게 했으므로 피리 부는 소년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바지의 외곽선을 힘 있게 강조함으로써 소년의 다리가 더욱 튼튼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외곽선의 붓질은 일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서예처럼 나타났습니다. 마네는 동양의 서예로부터 일격의 붓놀림으로 이러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손과 발을 제외하면 그림자가 없고, 청색, 백색, 적색의 미묘함이 두드러집니다. 마네가 한 번에 소년 기병을 그린 것 같지는 않고 아들 레옹으로 하여금 포즈를 취하게 해서 완성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 이 작품이 1866년 살롱에서 낙선하자 에밀 졸라가 이 작품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Christ on the Cross>, 1631-32, 유화, 248-169cm.
마네는 파리로 돌아와 시인 샤를 보들레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벨라스케스가 화가들 가운데 최고의 화가라면서 그의 작품 마흔 점 가량 봤는데 모두 걸작이었다고 감탄했습니다.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스케치한 투우장면을 파리에서 완성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가 1865년 10월에 그린 <투우 장면 Bull-Fighting Scene>을 포함하여 세 점 모두에서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검정색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색을 조화시키는 기교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말대로 “마드리드의 화가들과 17세기 홀랜드의 대가 할스를 생각”하며 고안한 방법이었습니다. 스페인 화풍에 대한 관심이 네덜란드의 화가 할스Frans Hals(1581?-1666)의 화풍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어느 누구도 할스가 스페인에 속한다는 나의 신념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할스는 메헬렘(16세기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도시) 사람이니까”라고 했습니다.
마네의 <비극배우 The Tragic Actor>, 1865, 유화, 185-110cm.
벨라스케스의 <바라돌리드의 파블리오스 Pablillos de Valladolid>, 1632년경, 유화, 209-123cm.
마네는 1865년 가을 <비극배우 The Tragic Actor>를 그렸는데 벨라스케스의 <바라돌리드의 파블리오스 Pablillos de Valladolid>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 배경에 아무것도 삽입하지 않고 공허한 빈 여백을 남긴 채 모델을 그린 것입니다. 그는 이 그림과 6개월 후에 그린 <피리 부는 소년>을 1866년의 살롱에 출품했지만 모두 낙선했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에는 벨라스케스의 영향뿐 아니라 일본 회화방법도 혼용되었습니다. 마네는 벨라스케스로부터 배경을 없애고 여백을 어두운 색으로 칠해 환상적 요소로 사용하는 기교를 익혔으며 일본 화가들로부터는 단순한 구성이 오히려 주제를 힘 있게 해준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은 벨라스케스의 모델처럼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비잔틴의 성상과도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년의 발뒤꿈치에 약간의 그림자를 그려 넣어 단지 빛의 방향과 깊이만을 관람자가 알게 했습니다. 회화의 양식이 주제보다 더욱 중요함을 시사했는데 이는 에밀 졸라가 마네의 작품에서 지적한 점이기도 합니다.
조국의 영광을 위해 전쟁터로 나갈 준비가 된 <피리 부는 소년>의 모델은 궁전을 지키는 소년 기병이었습니다. 기병대 대장 레조슨이 소년을 마네의 화실로 데리고 왔습니다. 소년의 모습이 <화실에서의 오찬>에 묘사된 레옹과 흡사한 데가 있는데 옆으로 벌어진 귀, 넓적한 코, 검은 눈이 그러합니다. <화실에서의 오찬>에 나타난 레옹의 눈은 별로 검지 않지만 <비누방울 부는 소년>에서의 레옹의 눈은 검습니다. 그가 소년을 모델로 그릴 때 청순함과 남자다움을 강조했음이 특기할 만합니다. 르누아르가 1883년에 마네의 방법으로 <피리 부는 소년>을 드로잉 했습니다.
르누아르의 <마네식으로 드로잉한 ‘피리 부는 소년’ Drawing After Manet's 'The Fifer'>, 1883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낙선하자 에밀 졸라는 『레벤느망 L’Evenement』에서 이 작품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졸라는 일곱 편의 글을 기고했는데, 살롱의 심사위원 28명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비난하고 이 글들을 나중에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당시 스물여섯 살의 졸라는 마네에 관해 적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올해의 낙선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회색 배경에 기병모와 붉은색 바지를 차려입은 작은 키의 모델이 두드러져 보인다. 소년은 우리를 향한 채 피리를 불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이 나를 위해 그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마네의 재능이 정확하고 간결한 필치로 이 작품에서 실현되었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 마네의 그림에는 꾸밈이 없다. 그는 부분에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인물에 불필요한 덧칠을 하지 않는다. … 그의 그림에는 단단하고 튼튼한 부분들이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졸라는 이듬해 마네의 예술을 다룬 『변론과 설명』을 간행했으며, 자신의 미학적 견해이기도 한 이 책에서 자연주의 예찬론을 폈습니다. 그는 마네의 장점으로 “정확성과 간결성”을 꼽았습니다.
“그렇게 간결한 필치로 그와 같은 힘 있는 미적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마네는 루브르에서 쿠르베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강인한 기질을 타고난 모든 화가들의 전당에 나란히 봉헌되어야 한다.”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 뮤지엄에 영원히 소장되어야 한다는 졸라의 주장은 화가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임에 틀림없습니다. 마네에게 졸라야말로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우군 중의 우군이었습니다. 졸라는 마네의 작품 값이 50년 내에 15배, 20배 그 이상으로 오를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마네는 졸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졸라 선생,
당신과 같이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옹호를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또 기쁜가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만나 악수를 청하고 싶은데 어디를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장려한 글인지요! 수없이 감사드립니다.
5월 4일자 『레벤느망』에 실린 당신의 글은 대단히 빼어나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신과 대화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어디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바드 카페에 매일 가는데 5시 반에서 7시 사이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곧 만나기 바라며 나의 진정한 감사의 표시를 받아주기 바랍니다.
에두아르 마네”(1866. 5. 7)
8개월 후 졸라는 마네에 관한 글을 또 발표했는데 거의 6만자의 단어를 사용한 장문이었습니다. 그는 단 한번 마네의 화실을 방문했지만 화실에서 다음 해에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신작을 포함해서 한쪽에 쌓아둔 많은 작품들을 보고 감동받아 쓴 것입니다. 졸라는 마네의 개성과 기교에 관해서만 언급한 게 아니라 그의 예술론까지도 상세하게 거론했습니다.
마네의 작품에 대한 졸라의 비평은 1860년대 프랑스 회화의 미학적 스캔들이었습니다. 전통 형식을 존중한 쿠르베의 사실주의 그림은 평온을 열망한 대중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마네는 전통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마네의 작품에는 명암의 단계는 나타나 있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없으며 색의 대비와 부서진 형태, 즉흥적인 붓질이 관람자에게 편안함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과거에 볼 수 없던 요소였습니다. 졸라가 이 점을 높이 평가했고, 1866년 살롱 평론에서 사실주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실재를 기질에 종속시킨다고 선언한 나에게는 리얼리스트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진실을 그린다면 나는 갈채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성과 생명을 그린다면 나는 한층 더 갈채를 보낼 것이다. …
대중은 한 폭의 그림에서 목이나 가슴을 조르는 주제를 보면서도 예술가에게는 눈물과 웃음밖에 요구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예술작품이란 역으로 말해 개성이다. 예술가들에게 내가 요구하는 것은 감미로운 환상이나 무서운 악몽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여 달라는 것이며, 강렬하고 각별한 정신 및 자연을 자기 손 안에 폭넓게 꼭 잡고 자신이 그곳에서 본 것을 우리 눈앞에 그대로 이식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시인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1885-1961)는 『미술비평사 History of Art Criticism』(1964)에서 “에밀 졸라의 말은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인습에 대항하는 그리고 한 단계 더 강렬한 주관주의란 명칭으로 사실주의 자체에 대항하는 ‘간략한 고소장’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졸라는 마네에 관해 적었습니다.
“마네의 재능은 단순성과 정확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시 그의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의 기묘한 성질에 당면한 그는 현실에 대해서 일대일로 심문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기존 과학이나 과거의 경험을 거부하고 예술을 그 시작에서, 즉 대상의 정확한 관찰로부터 끌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마네는 용감하게 정면으로 어떤 주제를 향해 대결하여 이 주제를 폭넓은 덩어리들로 격렬한 대립 속에서 보면서 그가 본 대로 개개의 대상을 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