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믿습니까?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그 무엇, 모든 경험의 주체이자 유일한 목격자, ‘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 무엇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우선 흔히 자기, ‘나’로 동일시하는 육체를 살펴봅시다. 육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주체로서의 자기, ‘나’가 있음의 느낌은 변하지 않습니다. 육체 역시 이 자기, ‘나’에 의해 경험되고 목격되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 다음, 느낌이나 감정, 생각을 살펴봅시다. 1분 전에는 어떤 느낌, 감정,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느낌, 감정이나 생각과 100% 일치합니까? 아마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느낌, 감정, 생각은 결코 머무르는 바 없이 변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경험자, 목격자로서 자기, ‘나’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요?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이 순간의 단순한 경험, 이 경험의 공간, 경험의 장을 우리는 자기, ‘나’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요?
자기, ‘나’라고 하는 것은 재귀대명사, 1인칭 대명사, 거짓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 이름들이 대신 가리키고 있는 실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단순한 경험 아닌가요?
모양과 색깔이 보입니다. 온갖 소리가 들립니다. 냄새와 맛, 촉감이 느껴집니다. 감정과 생각들이 분별됩니다. 그 대상들은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그 대상들이 변화하는 배경, 공간, 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내용물이 없이 텅 비어 있지만 그 자체로 가득 차 있는 의식, 순수한 의식, 대상 없는 의식, 의식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 동안 이것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요? 당신의 경험을 잘 살펴보십시오. 어떤 대상을 순수하게 아는 이 작용, 이 순수한 앎이 없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만약 이것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예들 들어 깊은 잠속에서는 자기, ‘나’가 없었다면, 그 사실은 누가 안 것입니까?
부모가 나를 낳아 주기 이전에 자기, ‘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른다고요? 바로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드러나 있는 이것이 부모가 나를 낳아 주기 이전의 자기, ‘나’입니다.
이 육신과 개성이 소멸한 뒤에도 여전히 이것일 뿐입니다. 현존, 나 있음, 있는 그대로임, 여여함, 바로 지금 이것...... 이 모든 허망한 이름들이 바로 지금 당장 이 경험, 아무 노력 없이 존재하는 이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결코 밖에서, 타인에게서, 책에서, 스승에게서 얻을 수 없는 유일한 사실, 실재, 진실입니다. 생각을 해서도 얻을 수 없고, 생각을 안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생각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생각을 멈추면 이 미묘한 근원을 색다른 방식으로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자기, ‘나’를 믿고 거기에 순복하십시오. 자기, ‘나’는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바탕, 창조의 근원입니다. 이미 이렇게 있는 자기, ‘나’를 버려두고 허망한 관념 속의 또 다른 진실을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친밀하고, 너무나 평범한 자기. 1분 전, 1시간 전, 1년 전, 10년 전, 100년 전도 이 자기였고, 1분 후, 1시간 후, 1년 후, 10년 후, 100년 후도 이 자기일 뿐입니다. 우리 각자 육체와 개성은 다르지만, 이 자기, 이 ‘나’의 의식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이것은 아무 내용이 없는 순수한 의식, 앎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손가락 하나 들어 보이고, 탁자를 딱! 때리는 행위를 통해 많은 이들이 이 사실, 이 하나를 가리켜 보일 뿐입니다. 물결을 일으켜 언제나 있는 물의 존재를 확인시키려 한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본래 그리 되어 있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이제 그만 헛된 방황을 그치기 바랍니다.
출처 : "이것이 그것이다", 심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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