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어머니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강론>(2023. 9. 15. 금)
(요한 19,25-27)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1)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과 사도단을 완전히 떠난 것은, 예수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마르 14,50),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믿음도 부족하고 용기도 부족했지만, 그래도
‘사랑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성모님과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와 ‘어떤 제자
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까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어 있는 그 제자를
우리 교회는 ‘요한 사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달아나지 않고 예수님 곁에
있었을까? 아니면 달아났다가 되돌아왔을까?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십자가 곁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성모님의
사랑은 다른 네 명의 사랑과는 성격도 다르고 차원도 다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키운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네 명의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함께 겪는 것’입니다.
옆에 함께 있는 것도 분명히 사랑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단순히 옆에 있어 주는 정도를 넘어서 모든 것을 함께 겪는 것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한 것입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성모님의 온 생애는 모든 일을
예수님과 함께 겪은 생애입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픈 일도, 영광스러운 일도......
3)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라고 맹세했습니다(요한 13,37).
물론 나중에 순교함으로써 그 맹세를 지켰지만,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말로만’ 사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대답했습니다(요한 21,15-18).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사랑한다면 행동으로 내 양들을 사랑하여라.”
라는 당부로 해석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행동으로(온 삶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행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생애 전체가 그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즉 교회와 함께
계셔 달라고 어머니께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함께 있어 주기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8-19).”
믿음이 좀 부족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또 승천하신 뒤에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아처럼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제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맺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예수님께서 지키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표현만 보면
어머니를 모셔 달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어머니와 함께 있어라.”, 즉 “어머니를 본받아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신 분이고, 중심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어머니 옆에 함께 있으라고 당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 말고 누구를 본받을 수 있을까?
물론 훌륭하고 거룩하고 위대한 성인 성녀들이 많긴 하지만,
성모님은 ‘첫 자리’에 계신 분이고,
그 모든 성인 성녀들도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면서,
성모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축일 이름이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되어 있어서
성모님의 고통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고통뿐만 아니라 성모님의 생애 전체를 묵상하고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습니다.
‘생애 전체’ 라는 말은, 성모님의 기쁨에 초점을 맞춰서
하는 말입니다.
사실 성모님은 ‘기쁨의 어머니’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
그 기쁨은 슬픔을 초월한, 또는 슬픔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영원하고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슬픔이 아니라 바로 그 기쁨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어머니와 함께 있어라.”,
즉 “어머니를 본받아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