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가 유언처럼 남긴 生前 인터뷰 "박인경 거짓말에 몸이 떨린다" 윤정희 씨가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에게 생전에 털어놓은, 납북미수와 이응노 화백 부인 박인경의 역할 趙甲濟
프랑스 파리에서 79세를 일기로 작고한 배우 윤정희씨 장례가 오는 30일 프랑스 파리 인근의 한 성당에서 치러진다. 유족 측근 등에 따르면, 장례식은 친인척과 知人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되며, 故人의 유해는 화장 후 인근 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그녀는 10여년간 알츠하이머병을 앓다 지난 19일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故人은 300여 편에 출연했으며, 2010년 이창동 감독의 '詩'가 마지막 작품이다. 1977년 여름, 윤정희 씨와 남편 백건우 씨, 그리고 그들의 젖먹이 딸을 유고 자그레브로 유인, 북한공작팀에 넘기려 했던 이응노 화백의 부인 박인경(97세)은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 명예관장이다. 기사를 검색해보면 2019년 3월 한선희 문화체육관광국장이 파리의 박인경 아뜰리에를 방문, "대전방문의 해의 성공적인 추진과 이응노 예술도시 대전만들기 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유명한 여배우 및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노린 납북 미수사건 가담자에게 굽히고 들어간 모습이다. 2015년 3월엔 권선택 대전시장이 파리로 박인경을 찾아가 만났는데 박은 "이응노 작품 보존에 대전시가 적극 지원해주는 데 감사한다"고 했고, 권 시장은 "지원할 일이 생기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윤정희 납북공작 가담자에 대한 정부인사들의 이상한 태도는 국가적 추태이다. 1999년 가을, 파리에 살고 있던 영화배우 尹靜姬(윤정희)씨는 월간조선과 긴 인터뷰를 가졌다. 그해 11월호 月刊朝鮮에 보도된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북 미수사건의 진실과 이응로 화백의 처 朴仁京(박인경)의 역할」이란 기사 속의 「朴仁京씨 인터뷰」를 읽고 『몸이 떨린다』고 말했다. 北(북)과 공모하여 자신을 拉北(납북)하려 했던 朴仁京씨의 거짓말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糊塗(호도)하는 사람이기에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와 윤정희 씨 전화 인터뷰는 이렇게 하여 이뤄졌다. 윤정희 씨는 이렇게 말했다. 『문을 활짝 열고 파리에서 살았던 우리 부부는 납치 미수사건 이후엔 문을 꼭꼭 잠그는 게 버릇이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택시를 탔을 때 운전사가 동양인이면 불안해서 도중에서 내렸습니다. 연주회차 미국에 갈 때면 마중나오는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고 만났습니다. 요즘도 공개된 자리에서 사람 만나기가 두렵습니다. 그 사건 이후 우리 가족이 입은 정신적 피해가 어떠했는지 아마 모를 겁니다.』 22년 전인 1977년 7월, 在佛(재불) 화가 李應魯(이응로)씨의 아내 朴仁京씨가 주선한 연주회에 초청받아 공산국가 유고에 들어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될 뻔했으나 유고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尹靜姬씨에게 「朴仁京」이란 이름은 아직도 감정적 반응을 부르는 모양이었다. 『우리 부부가 겪었던 납치 미수사건의 내용은 그 당시 파리 주재 한국특파원들이 쓴 기사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朴仁京씨는 사건 발생 직후 한국특파원들에게 했던 자신의 말마저도 이번 月刊朝鮮 인터뷰에서 번복했습니다. 그 태도가 놀랍고 두렵기 때문에 새롭게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주위 분들과 상의할 시간을 주십시오.』 며칠 후, 전화 인터뷰에 응한 尹靜姬씨는 「朴仁京씨 인터뷰」 내용 중 사실과 다른 점들을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 지적해 주었다. 尹씨는 『朴씨의 거짓된 모습에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 부부가 겪었던 납치 미수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국민들이 정확히 알 수 있게끔 잘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우종창 기자는 우선 연주회 초청을 받게 된 경위를 물어보았다. 이 초청이 납치를 위한 함정으로 드러났으므로 여기에 관련된 사람이 범인이다. 윤정희 씨는 박인경이 북한정권과 연계되어 자신들을 유인하였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연주회를 주선한 사람은 朴仁京씨입니다. 李應魯 화백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朴씨는 스위스 제일의 甲富로 굉장한 은행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은행가가 자기 별장에 스위스 상류층 인사들과 언론계, 예술계 인사들을 초대해 연주회를 갖는데, 그 사람들에게 남편(白建宇)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좋다고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모차르트 시절부터 별장에서 연주회가 열렸기 때문에 별장 연주회에 초청받는 것은 이상할 게 없습니다. 별장 연주회라면 적어도 2, 3개월 전에 초청하는 게 관행인데 이번 것은 일주일 후에 열린다고 하기에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남편은, 일주일 후라면 시간이 촉박하고 연주 일정도 있고 해서 처음엔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朴仁京씨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말도 안하고 꼼짝없이 앉아 있는 겁니다. 말을 하기 싫을 때 짓는 朴씨 특유의 버릇입니다. 그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우리 부부에게 어머니와 같았던 朴씨가 크게 낙담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우리 부부는 굉장히 어색하고 죄책감을 느껴 응했던 것입니다. 마침 연주회 날이 제 생일과 겹쳐서 생일을 스위스에서 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남편은 朴씨에게 초청자가 누구인지, 연주회 장소는 어디인지 알아야 하므로, 계약서는 아니더라도 초청장은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틀인가 3일 후에, 朴씨가 초청장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朴씨는 핸드백에서 초청장 봉투를 꺼내 살짝 보여주고는 半(반)으로 접어서 집어넣었습니다. 朴씨 말로는, 연주회를 두 번 하는데, 한 번은 나이 많은 부모와 가족 앞에서, 또 한번은 상류층 인사들을 위한 것이며, 두 번의 연주회 모두 스위스 별장에서 열린다고 했습니다. 초청자측에선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쇼팽, 베토벤 등을 듣고 싶다고 했지만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연주곡목은 연주자가 정하겠다고 남편이 말해 주었습니다.』 尹靜姬씨는 『연주자가 초청장을 갖는 것이 당연한데, 朴仁京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초청장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초청장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공개되었을까. 이는 초청 경위 못지 않게 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단서가 된다. 尹靜姬씨 말이다. 『초청장 原本(원본)이 공개된 것은 유고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 안이었습니다. 연주회 장소로 예정된 자그레브 별장에서 탈출한 뒤, 미국 영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사건 경위를 조사한 사람이 크리스텐슨이라는 영사였습니다. 크리스텐슨 영사가 문제의 초청장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朴仁京씨가 핸드백에서 꺼내주었습니다. 크리스텐슨 영사는 그 즉시 초청장을 복사했습니다. 크리스텐슨 영사에게 부탁해 우리도 사본 한 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尹靜姬씨 부부가 입수해, 파리 주재 한국특파원들에게 공개했던 「초청장 사본」은, 초청자 「미하일 파블로비크」가 가공 인물이란 사실을 밝히는 주요 단서가 되었다. 尹靜姬씨는 『연주회 초청은 우리 부부를 해외로 유인하기 위한 일련의 시나리오 아래 계획된 것 같다』며 그 근거로 『朴仁京씨가 스위스 연주회 초청 전에 두 차례에 걸쳐 해외 여행을 제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연주회 件(건)을 이야기하기 두 달 전쯤, 朴씨는 우리 부부에게 같이 코르시카로 여행가자고 권유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배된 엘바섬 옆에 있는 프랑스 남단의 섬, 코르시카의 경치가 기가 막히는데 그곳에 李화백의 조카 이희세씨의 별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별장에서 우리 부부와 함께 며칠을 보내고 싶다는 거였어요. 이 제의를 거절하니까 두 번째로 스위스 살레에 있는 산 속의 한 별장을 자기가 잘 안다고 하면서 경치가 아주 아름답고 공기가 맑은 곳인데 그곳으로 같이 여행가자고 권했습니다. 이것도 응하지 않았죠. 그 다음에 이야기한 것이 스위스 연주회 초청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파리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이희세씨 형편에, 코르시카 섬에 별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나, 형편이 넉넉지 않은 朴씨가 스위스 별장을 안다고 하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로 보입니다. 만일, 그때 朴씨 제의에 응해 코르시카 섬에 갔으면 탈출이 어려워 파리로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尹靜姬씨는 『朴仁京씨가 북한 공작원과 연계된 고리란 사실을 확신한 것은 무사히 파리 집에 도착한 직후』라고 말했다. 尹씨의 말이다. 『파리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순간, 이제는 살았다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 같이 온 朴씨가 자꾸만 자기 집으로 가겠다고 우겼어요. 그래서 제가 「李선생님도 시골에 가시고 집에 안 계시다는데 아무도 없는 무서운 집에 왜 가려고 하십니까.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무사 귀환도 자축할 겸 저희 집에서 스테이크나 구워먹고 같이 지내시지요」라고 말렸습니다. 그럼에도 朴씨는 「집에 개가 혼자 있는데 개밥을 줘야 한다」 「꽃에 물을 줘야 된다」 「문 밖에 우편물이 쌓여 있으니 치워야 한다」 하며 집에 갈 핑계를 댔습니다. 예정된 연주회 여행 때문에 며칠 동안 집을 비우기로 한 사람의 행동치고는 너무나 엉뚱했어요. 연주회가 엉망이 되었으므로 스위스에 살고 있다는 초청자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항의도 하고, 영문을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닙니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의,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고는 자기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朴씨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순간, 정말 이상하다는 느낌이 옵디다. 등이 오싹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등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는 것을 남편도 그때 처음 느꼈답니다. 그때야말로 진짜 무서움이 어떤 것인지 절감했습니다. 남편과 소파에 앉아 朴씨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차분히 되짚어보니까 의심 투성이였습니다.』 李應魯씨와 4者 對面 尹靜姬씨가 제기한 의심들은 다음과 같다. ▲유고 자그레브 공항에 내려 출국 심사대로 걸어나갈 때 갑자기 朴씨가 『비행기 속에 스웨터를 놓고 내렸다』며 한참 동안 지체해 다른 승객들이 다 나간 뒤 맨끝으로 공항을 나온 점 ▲연주회 장소로 예정된 유고 자그레브 별장에서 동양인 남자의 제지를 뿌리치고 택시에 올라 탈출할 때 납치라고 직감한 尹씨 부부는 안전한 미국 대사관으로 가자고 했으나 朴씨는 북한의 조선민항기가 착륙해 있는 자그레브 공항으로 가자고 주장한 점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의 보호를 받은 뒤부터 朴씨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입을 다물고 혼자 행동한 점 ▲미국 영사의 도움으로 자그레브 펠리스 호텔에 하루 밤을 묵을 때 朴씨가 독방을 사용하겠다고 고집했고, 북한 공작원이 이른 새벽에 객실 문을 두드렸을 때 『청소부가 왔다』며 문을 열어주려고 한 점 등이다. 이러한 의심들을 풀기 위해 尹씨는 朴仁京씨 집에 전화를 걸었었다. 尹씨의 말이다. 『첫 말이 「집에 와서 목욕을 하고나니 이렇게 편안하고 피곤이 다 풀린다」는 겁니다. 웃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날은 밤이 늦어 다음날 오전에 저희 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난 자리에서, 「朴선생님은 우리의 결혼을 주선했고 우리가 어머님처럼 여기는 분이지만 지금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의심을 풀어달라」고 말하고, 의심나는 점들을 물어보았습니다. 朴씨는 「그건 난 몰랐고」 「그랬었나?」 「그건 그게 아니고」하며 말을 돌리는 거예요. 그래서 파리 교외에 있다는 李應魯 화백을 불러 달라고 말했습니다. 朴씨는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어요. 얼렁뚱당 넘어가서는 안되겠다 싶어 朴씨에게 핸드백 속에 들어있는 수첩을 달라고 하여 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 시간반쯤 후, 李화백이 아들 隆世(융세)하고 우리 집에 왔습니다. 朴仁京씨가 먼저 얘기를 시작했죠. 유고에서 있었던 일을 朴씨가 빙빙 돌려가며 얘기하기에 남편이 朴씨 말을 가로막고 설명을 하려는데 李화백이 제지하면서 朴씨를 향해 「아니, 비행기타고 스위스에 가면서 왜 나한테는 이야기도 안했어」라고 했습니다. 李화백은 저희들이 스위스 연주회에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진짜 모르는 것 같았어요. 남편이 유고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니까 李화백은 옆에 앉아 있는 朴仁京씨를 손으로 가리키며 「내가 들어도 자네가 간첩이네」라고 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때 李화백은 굉장히 기분 나빠했습니다. 우리가 스위스에 연주 여행 간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서운했고, 자신의 아내를 우리가 의심하는 것에 기분이 나빴던 것 같았습니다. 李화백은 「내가 그 애들을 잘 아니까 야단을 쳐주지」라고 말했죠. 李화백이 북한 사람과 그렇게 친한 줄은 우리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제가 「공산주의는 몰라도 金日成(김일성)은 무조건 싫다」고 말했더니 옆에 앉아 있던 융세가 「미자(尹靜姬씨의 본명이 손미자임) 누나는 金日成 사상도 모르면서 왜 신경질적인 반응이냐」고 대들었어요. 융세는 자기 어머니와 우리 부부를 파리 공항까지 태워줘, 연주회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 저를 잘 따르고 예의도 바른 융세까지 열을 내니, 서로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李화백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고….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대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남편이 「어쨌든 이 일은 미국 프랑스 유고 한국 북한이 연관된 국제적인 사건이므로 감출 수가 없다. 우리가 겪은 일을 대사관에 보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李화백은 「가자」하고 고함치며 식구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李화백은 저희 집에 전화를 걸어, 「너희들이 무슨 조작을 해서 내 마누라를 욕보게 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겁니다. 그래서 「사모님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건 李화백은 怒氣(노기)를 가라앉히고 「대사관에 신고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일 아침 10시에 대사관에 신고하러 갑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尹靜姬씨는 파리에 무사히 도착한 후, 유고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준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 크리스텐슨으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이 전화에서 크리스텐슨 영사는 『나는 그 여자(朴仁京씨)가 의심스러운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했다고 尹씨는 전했다. 尹靜姬씨는 자신들의 납치 미수사건에 북한 공작원이 개입돼 있다는 증거로 다음을 들었다. 『연주회 예정지인 유고 자그레브 별장에서 마주친 남자는 동양인이라고 보도되었지만 골격으로 봐서 한국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키에 마흔이 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두번째 증거는 우리 부부가 투숙했던 유고 자그레브 펠리스 호텔 방에 새벽같이 나타나 문을 두드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우리 방에 전화를 건 크리스텐슨 영사는 「북한인으로 생각되는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복도에 서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 소란중에 우리 짐을 가지러 온 호텔 벨보이도 「문을 두드린 사람들은 이틀 전에 이 호텔에서 파티를 가진 북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종창 기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한 파리특파원은 『朴씨가 한국 대사관에 출두하지 않은 사정은 이해한다 치더라도 그 당시 기자들과의 인터뷰까지 회피한 점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파리특파원 출신은 그러나 朴씨가 月刊朝鮮과 인터뷰에서 『나는 납치(미수)라는 것을 인정 안했어요. 그후 얼마 있다가 최은희씨와 신상옥씨가 실종되고 납치당했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 사건도 납치(미수)라는 것을 인정했어요』라고 언급한 점은 주목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朴씨는 이 사건을 처음에는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다가 얼마 후 남편 李應魯 화백과 함께 『한국 정부에 의한 제2의 東伯林 사건』이라고 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납치 미수사건 발생 17년 만인 1994년 1월 초, 서울에서 열린 李應魯 화백 5주기展(전) 때에 첫 입국한 朴씨는 그후 수시로 한국에 드나들고 있다. 올해 들어 방문 횟수가 부쩍 늘었고, 朴씨가 참석하는 행사는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1999년 5월11일부터 光州(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5·18 사건 19주기 기념전에 李화백의 작품과 함께 光州를 방문한 朴씨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기간중에 朴씨는 이화여대 미술학부 1회 졸업 동기생들과 함께 서울 청담동 조선화랑에서 「우리들의 50년 세월」이란 전시회를 가졌다. 李應魯 화백의 프랑스 제자들을 데리고 李화백이 日帝(일제)시대 때 그림을 그렸던 충남 예산 수덕사 부근의 「수덕여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朴씨는 李화백 작품의 국내 판매권자인 가나화랑의 도움을 얻어 국내에 「고암기념사업회」도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신문과 방송의 인터뷰에도 응해, 자신은 尹靜姬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렇지만 한국일보 논설고문 金聖佑씨가 「박인경씨의 경우」라는 칼럼을 통해, 국민들이 忘却(망각)하고 있던 朴씨의 22년 전 역할과 그 이후 행적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한 이후, 정보기관에서는 朴씨의 활동을 추적하고 있다. 朴씨를 잘 아는 국내 인사들은 『정보기관 수사관들이 찾아와 朴씨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물어보았다』고 말했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朴仁京씨는 東伯林 사건에 연루돼 처벌을 받았고, 그후엔 尹靜姬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으나, 朴씨가 우리 정부의 수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尹靜姬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의 진상은 수사가 진전되지 않았다. 그후 화합차원에서 朴씨의 한국 입국이 허용됐기 때문에 朴씨가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다. 朴씨가 프랑스 시민이기 때문에 본인이 한국 수사기관의 수사에 응하지 않으면 납치 미수사건을 수사할 명분도 없다. 그러나 朴씨가 조총련이나 北과 연계되었다는 새로운 첩보가 포착되면 수사가 가능하다. 현재 朴씨의 신분은 내사대상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朴씨의 최근 행적 가운데 특이한 것은 李應魯 화백의 그림을 상당히 많이 처분하고 있는 점이라고 말했다. 朴씨가 이렇게 해서 확보한 현금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朴仁京씨가 소유하고 있는 1만 점이 넘는 李應魯 화백의 그림은 주로 한국, 일본, 미국, 대만 등지에서 팔리고 있다. 한국에서의 판매권은 가나화랑이 독점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조총련계였다가 최근에 전향한 여자 畵商(화상)이 판매권을 갖고 있다. 가나화랑 李皓宰(이호재) 대표는 『기념사업회에 필요한 자금은 李화백의 그림 판매대금으로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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