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큰 기도를 한 사람
윌리엄 케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꿈과 소망없이 살아가던 윌리엄 케리는 예수님을 믿고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 가게 자기 자리 앞에다 세계 지도와 세 가지 표어를 적은 종이를 붙여놓고는 자신의 인생을 하루 하루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 큰 비전을 가지라 ( Great Vision )
- 큰 기도를 하라 ( Great Pray )
- 큰 기대를 걸라 ( Great Expect)
남의 구두 수선 가게에서 수선이나 하는 사람이 꿈을 품어봤자 수선 가게 하나 정도 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윌리엄 케리의 꿈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세계 지도를 품에 넣고 그 당시 아무도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후원자도 없었습니다. 아내까지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선교의 아버지, 선교의 원조 윌리엄 케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의뢰하는 자를 돌보심 /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미국의 백화점 왕 J.C.Penney의 성공 일화이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업에 투신했으나 심한 재정난으로 죽으려고까지 했었고, 미시간주 베틀크릭에 있는 격리병원에 수용되었었다. 어느 날 아침 낙망하고 좌절한 그에게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맥없이 그곳을 찾아갔더니 어떤 건물 특별실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매우 친숙한 찬송 "너 근심 걱정 말아라"가 불려지고 있었다. 그찬송은 그의 마음에 큰 확신을 갖게 했다. 그는 외치기 시작했다. "사랑하
는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좀 돌봐 주십시요." 그후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 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마비된 심령으로 풀이 죽어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마음으로 나왔다."고 하였다.
*손때 묻은 벽돌 한 장
레이몬드 릴리라는 난폭하고 악한 흑인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사는 거치장스럽고 꼴보기 싫은 존재이기에 목사를 때려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벽돌을 한장 싸들고 교회에 들어갔다. 목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설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릴리 청년의 마음을 다루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벽돌로 목사의 머리를 치겠다고 들어간 그는 그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치게 되었고 그 자리가 릴리 청년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발견한 놀라운 은혜의 자리가 되었다.
수년 후에 세계의 최대 자선병원인 시카고의 쿡크 카운티병원에는 가난한 가운데 질병에 시달리거나 죽어가는 수천의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목사가 한 명 있게 되었다. 이 흑인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의 흑인 릴리 목사'로 불리운 과거의 릴리 청년이었던 것이다.
릴리 목사가 하늘 나라에 간 장례식의 예배당에는 손때가 묻은 벽돌 한장이 전시되어 보는 사람마다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고 한다. 괴롭건 즐겁건 어느 때나 자기와 같은 살인자를 구원하시고 은혜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마워, 레이몬드 릴리가 밤마다 어루만지며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그 벽돌이었던 것이다.
[하늘의 창문]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언제나 슬픈 일, 낭패와 실망당할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아 갑니다.
그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적극적인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먼저 하나님의 율법 책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면 형통의 축복 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과 세상을 보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만이 보이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환경만이 보이기 때문에 낭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바라보고 주야로 묵상하고 행하면 절망을 극 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을 때 인간은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 방주에는 천장 가까이에 창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이 창일하는 바다와 풍랑을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려고 창문을 천장 가까이에 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환경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 환경에 억압되어 믿음이 약해지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고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하늘의 창문을 바라보면 하늘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쏟아져 강하고 담대한 신념이 생겨 우리 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마음의 자세를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인도하심의 섭리
리빙스턴은 원래 중국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프리카로 보내셨고, 그곳에서 그는 선교사 탐험가 의료전도사로서 봉사케 했다. 알렉산더 매케이도 마다카스카르에서 일하기 위해 준비하다, 우간다로 보내져 세계에서 가장 놀랄만한 선교사업중의 하나를 개척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캐리는 남태평양으로 가려다가 인도로 부르심받아 수많은 대중에게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보급하였다.
[하나님께서 왜 길을 막으실까] 하고 의아해 하지만 지나보면 인도하심의 섭리였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은혜로 사는 삶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살면 그것은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살고 인본주의로 사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품에 안겨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의지해서 살면 , 그때로부터는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돌보9 주심을 통해서 살고 하 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십니다. 흥하는 것도, 망하는 것도, 성하는 것도, 쇠하는 것도 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일3萱 주님의 손에 완전히 맡깁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십니다. 요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 혹은 풍랑을, 혹은 물고기를, 혹은 박 넝쿨을, 혹은 벌레 한 마리를, 혹은 동물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도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혜속 새 출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실패를 반추 함으로 불안과 공포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불안과 공포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릅니다. 이러므로 과거의 실패를 반추하면, 불안과 공포에 뒤따르는 고통으로 인해 현재의 삶은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문 에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킴 과거로 돌려버리고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출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을 비롯한 갖가지 신경성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과거1에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릴 줄 알아 야 합니다. 다리밑에 흐르는 물은 어제의 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어제의 사람이 되어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고통당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입은 그 자리에 예수 1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용서와 축복과 치료를 가득 채워 놓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실패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에 올라 가셔서 우리 대신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히시고 하늘과 땅 사이에4 몸 찢기시고 피흘리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고 과거 나에게 미운 짓을 한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분노에서 해방을 얻고, 과거의 실패를 청산함으로써 공포에서 해방을 얻는 사람 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 출발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 기다리는 은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고 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마는 인생에게 기다리는 훈련을 시킨 후에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무슨 일이든지 참고 기다리는 자는 가장 좋은 것을 얻는 복된 자리를 지키는 자이다.
인내심이 없으면 감사할 일도 적다. 현대는 무엇이든지 빨라야 하고 즉석에서 되어야 한다. 더욱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참고 기다린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먹는 음식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곡식을 절구에 찧어서 쌀을 만들고 반찬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음식을 먹었다. 요즘 만들어진 것들을 적당하게 사서 상에 올리면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삶의 편리 앞에 인생이 가장 귀한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도적질 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인생이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잃어 버리는 것은 인생의 모든 축복을 다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기다림 없이 귀한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보라! 어느 것 하나라도 기다림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자녀를 얻기 위해 어머니는 열달 동안 기다리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기다림의 날들을 새워야 한다. 목재를 얻기 위해서는 수 십 년 세월이 지나야 하고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달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냥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사람에게 인내의 고귀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기다림에서 열매를 얻도록 하신 줄 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것을 얻을 수 있다.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고 주님의 재림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은 마음 가짐으로 기다리라고 하셨다. 결국 인생의 구원은 기다림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기다리느냐로 판가름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끝까지 기다리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또 야고보 사도는 기다리는 자가 상을 얻는다고 했으며 인내가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일에서 어떤 결과가 축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 결과를 이루어 가는 과정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한 그릇의 밥이 결과라면 그 밥을 얻기 까지의 과정도 축복이라는 말이다.
인생은 여러가지 아름다운 목적을 세워 놓고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참고 때로는 희생하면서 그 목적을 얻어야 그 목적이 아름다운 것이다. 주님은 심지 않은 데서 가꾸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의 노력없이 얻어지는 부요나 자기의 기다림 없이 얻어지는 삶이 얼마나 자기 영혼을 어둡게 하는가를 인식 하면서 살아야 한다.
기다리는 것은 참는 것이다. 인생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문제는 기다리는 것보다 더 좋은 해답을 얻기가 어렵다. 인생이 먹고 사는 모든 재료들이 기다림에서 얻은 것들 뿐이니 기다리는 생활에 성공해야 신앙 생활도 성공 한다.
* 피니를 인도하신 하나님
청년 변호사였던 그는 어느 날, 뉴욕 주의 어느 마을에 있는 자기 법률 사무소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는데, 주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피니야, 네가 지금 하는 일이 끝나면 무엇을 하려느냐?"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간판을 내걸고 변호사 개업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려느냐?"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부자가 되렵니다." "그 다음에는?" "은퇴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죽겠지요." "그 다음에는?" 이제 피니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젊은 피니는 반 마일 떨어진 숲으로 달려갔습니다.
기도하면서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을 맛보지 않고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오랜 투쟁 끝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영원히 그를 기뻐하겠노라는 높은 뜻을 간직한 채 저녁에 숲을 나왔습니다. 위대한 설교자요, 전도자인 피니와 같이 세상의 시험에서 건짐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대한 기독교 작가 가운데 한사람인 보함은 자기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다음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직 청년이었을 때에 나는 친구의 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집에 처음 갔었고, 그 친구는 나에게 응접실 건너편에 있는 방은 출입금지의 방이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무도 그 방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그의 말을 따라서 나는 그 방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나는 잠이 깨었는데 그때 출입금지의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래서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니 그 방의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침대 위에 한 어린 소년이 누워 있었다. 그 소년은 정신병으로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이 누운 침대 앞에 친구의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년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그때 흐느끼면서 정신이상인 자기 아들에게 속삭이던 그 어머니의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고 너에게 생명을 주었다. 나는 너에게 먹을 것도 주며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있단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 어머니의 고민은 사랑 없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고민이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으나 자식은 아직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일방적인 사랑의 고민을 그 어머니는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고민도 사랑의 고민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계약관계를 맺은 백성 이상이었다. 계약대로 한다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포기하고 우상과 음행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이 온전할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손을 벌리고 계신다. 이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고민이다. 당신은 진정 하나님의 고민을 함께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하는 하나님의 탄식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고독의 자리
시대가 어려운 시대일수록 하나님은 성도를 특별한 방법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그 하나님의 방법은 성도를 고독의 울타리에 숨겨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 우리 성도에게도 이와 같이 나타날 때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성도에게 고독의 깊은 자리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우리가 볼 때에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많이 있다. 교회가 어렵고 성도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울 때 하나님은 성도를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분리시켜 놓으시고 그 한 사람 한사람을 친히 교육하시고 계시하시고 그 마음에 소망을 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의 밧모섬이 그러했다. 사도 바울의 로마 옥중이 그러했다. 지금 중공이나 북한에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역시 고독의 깊은 자리에서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얻고 친히 하나님에게 길리움을 받는 이 고독의 방법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독의 자리에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버림받은 아픔을 느꼈지만 참 성도는 이때가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고 하나님의 방문을 받았으며 하나님게 깊이 헌신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의도적으로 고독의 자리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려서 나를 외롭게 만든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떠나가므로 나를 고독의 자리로 인도하신다. 가까운 사람이 나를 배신하므로 내가 고독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병 때문에 때로는 실패 때문에 때로는 환경으로서 고독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잊어 버리신 때인줄 잘못 알기 쉽다. 그러나 고독의 장소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장소요 하나님이 이 시대로 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지혜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독의 자리는 버림받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장소인 것이다. 기도생활은 이러한 자리를 만들어 준다. 홀로 엎드린 기도 생활은 곧 고독의 장소이면서 하나님과 만나는 축복의 장소이다. 은밀한 봉사생활은 곧 고독의 장소이다. 그러나 은밀한 봉사 생활은 그 내면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축복이 담겨져 있다. 은밀한 구제도 그 은밀한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고독의 자리에 나아 가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만 알고 나만 아는 그러한 고독의 자리로 나아 오기를 기다리신다. 고독은 성도에게 만남과 은총의 장소이다. 존번연은 감옥의 깊은 고독에서 천로역정을 얻었다. 존밀톤은 실명의 깊은 고독에서 실락원을 얻었다. 다미엔은 절해고도 몰로카이에서 성자가 되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홀로 있으면서 계시록을 받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