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훤당 연보(寒暄堂 年譜) - 景賢錄에서 1454년(단종 2년 갑술) 5월25일 을해일(乙亥日) 무인시(戊寅時)에 선생이 한경(漢京) 정릉동(貞陵洞=지금의 貞洞) 사제(私第)에서 나셨다, 이름은 효동(孝童)이었다. [선생과 젖을 같이 먹은 사내아들 한 사람은 길러지지 못하였고, 선생과 동복(同腹)으로 난 형제가 모두 12인인데 다만 선생만이 성장하였다.] 1455년(세조 원년 을해) 선생나이 2세 1456년(세조 2년 병자) 선생나이 3세
1472년(성종3년 임진) 선생나이 19세. 이 해에 선생이 합천군 야료현 말곡 남교동(陜川郡 冶爐縣 末谷 藍橋洞)에 사는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집에 장가들었다. 선생의 장인(外舅) 사맹(司猛) 박부군(朴府君)은 절제사(節制使)인 유성(柳星)의 아들이요, 검판윤(檢判尹)인 가권(可權)의 손자다. 대대로 성주(星州) 가천(伽川)에 살았으며, 부인도 그 집에서 생장하였다. 선생이 종종 왕래하였는데,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의 집과 서로 이웃이었다.
선생이 장가들고 부인이 아직 시집오기 전에 조그만 서재(書齋)를 박씨(朴氏)의 집 옆 개천 건너의 작은 바위[바위의 이름은 지동地東이다] 아래 짓고 한훤당(寒暄堂)의 호를 붙였으니, 선생의 시(詩) ‘서회(書懷)’에 『두서너겹의 연파요 몇 겹의 산[數頃煙波數疊山]이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이미 여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또 가야산(伽倻山)에 왕래하며 글을 읽었다. 내원사(內院寺)에서 가장 오래 계셨으니,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시에 『듣건데 김공(金公)이 집지어 살던 곳이라니, 가야산이 응당 무이산이리라[聞說金公棲築處倻山應是武夷山].』 한 것은 참으로 헛말이 아니다.[서재 寒暄堂은 후에 화재에 타버렸다]
1473년(성종4년 계사) 선생나이 20세. 이 해에 딸을 낳았다. 자라서 남부참봉(南部參奉)인 진주(晋州) 하박(河珀)에게 출가하였다.[아들이 없었다.] 1474년(성종5년 갑오) 선생나이 21세 이 해 늦은 봄에 점필재(佔畢齋)가 김(金), 곽(郭) 두 수재(秀才)에게 답하는 시(詩)가 있는데 [김(金)은 선생이요, 곽(郭)은 이름은 승화(承華)다.] 『궁벽한 곳에서 무슨 다행으로 이 사람을 만난 것이냐[窮荒何幸遇斯人].』하였으니, 이 때에 선생이 처음으로 점필재의 문하(門下)에 갔던 것이다.
1475년(성종 6년 을미) 선생나이 22세. 이 해에 딸을 낳았는데 자라서 훈련원정(訓練院正)인 성주(星州) 이장배(李長培)에게 출가하였으니, 선생의 친구인 승언(承彦)의 아들이다. [아들은 운남(雲南), 딸은 신순미(申順美)에게 출가하였다.] 늦은 봄에 점필재가 무비(無比)라는 중에게 준 시(詩)가 있는데, 그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나이가 75세인 중이 우리의 무리인 김대유(金大猷), 신정지(申珽之)와 함께 두류산(頭流山*註1)에 올라 천왕봉(天王峯)에서 자는데, 다리 힘이 매우 건강하여 정지(珽之) 등도 따라가지 못하였다.』하였다. 그 후 정미년(丁未年)의 남추강(南秋江)으 지리록(智異錄)에 이르기를. 『천왕봉(天王峯) 당(堂*註2) 안에 우인(友人) 김대유(金大猷) 등의 이름이 현판 위에 스여져 있었다.』 하였다. 1476년(성종 7년 병신) 선생나이 23세 1477년(성종 8년 정유) 선생나이 24세, 이 해 5월에 선생이 이 생원(李生員) 승언(承彦), 원 참봉(參奉) 개(槩), 이 생원(李生員) 철균(鐵均), 곽 진사(郭進士) 승화(承華), 주 수제(周秀才) 윤창(允昌)과 더불어 선산향교(善山鄕校)에 모여서 경전(經傳)을 토론하였다. 이 때 점필재 김 선생이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있었는데, 종종 그에게 가서 묻고 변론(辯論)하기를 수개월 동안이나 하였다. 헤어질 때 점필재가 시를 지은 것이 있는데 7월에 지은 것이다.
1478년(성종 9년 무술) 선생나이 25세, 12월에 아들 언숙(彦塾)이 출생하였다, 자(字)는 사훈(士訓)이다. 선생의 음(蔭)으로 전력부위(展力副尉)에 보(補)하였다. [아들 대(垈)는 동부참봉(東部參奉)이고 딸은 권적(權績)에게 출가하였다.] 지지당 김맹성(止止堂 (金孟性)에게 올린 두 절귀(絶句)가 있다. 대저 선생의 시문(詩文)으로서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젊을 때 지은 것이요, 만년(晩年)에 학문이 이루어진 후에는 아마 다시 문장(文章)을 짓는 일에 뜻을 두지 않은 듯하다. 1479년(성종10년 기해) 선생나이 26세 1480년(성종11년 경자) 선생나이 27세, 이 해에 생원시(生員試)에서 3등(等) 제32위로 합격하였다. 이 해에 원각사(圓覺寺*註3)의 중이 불상(佛像)을 몰래 돌려 놓고, 『불상이 저절로 돌아섰다.』고 선전하여 남녀(男女)들이 물결처럼 몰려들었다. 대간(臺諫)이 번갈아 글을 올려 최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선생이 소(疏)를 올려 그 간사한 정상(情狀)을 철저히 추궁하여 시가(市街)에서 사형(死刑) 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6월16일 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답이 없었다.
아들 언상(彦庠)이 출생하였다. 생원(生員) 시럼에 합격하고 음(蔭)으로 벼슬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아들 입(立)은 생원에 합격하여 음으로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에 이르렀고, 뒤에 나이가 많아져서 관계(官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었다. 수(壽)는 87세 이르렀다.]
1481년(성종12년 신축) 선생나이 28세 1482년(성종13년 임인) 선생나이 29세, 점필재(佔畢齋)가 선생에게 화답한 시(詩) 다섯 편이 있는데, 이 해 4월에 지은 것이다. 9월에 딸이 났다. 자라서 우리 할아버지(*註4)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증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 左承旨) 휘(諱*註5) 응상(應祥)에게 시집왔다. [아들 세 사람을 낳았는데, 맏은 우리 선고(先考) 휘(諱) 사중(思中)이요, 다음은 사성(思誠)이요, 그 다음은 사경(思敬)이다.]
1483년(성종14년 계묘) 선생나이 30세, 선생이 《소학(小學)》을 점필재의 문하에서 배우면서부터 한결 같이 이것으로 자기 몸을 다스려, 일찍이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소학》 읽는 아이[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느냐.]하였다. 나이 30세가 된 후에야 비로소 다른 글을 읽었고, 후진(後進)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쇄소[灑掃]의 예절을 행하고 6예(藝)의 학(學)을 닦는 자가 앞뒤에 꽉 찼었다. [추강(秋江)의 《냉화(冷話)와 사우록(師友錄)에서]
1484년(성종15년 갑진) 선생나이 31세, 아들 언서(彦序)가 출생하였다. 자질이 단정하고 준수(俊秀)하며 맑고 민첩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1485년(성종16년 을사) 선생나이 32세, 이 해 4월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고 《금강록(金剛錄)》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에 『송라암(松蘿庵) 벽 위에 친구인 대유(大猷)와 덕우(德優=辛永禧의 字)의 이름이 있었다.』하였으니, 선생이 송도(松都)에 가서 논 것도 이미 이 해보다 전에 있었던 것이다.
1486년(성종17 병오) 선생나이 33세, 점필재가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여 실시한 일이 없으므로 선생이 시(詩)를 지어 올려 이를 풍자하였더니, 점필재가 좋아하지 아니하여 그의 화답한 시에 상당히 불만을 나타내었다. 이로부터 선생이 점필재와 갈라졌다.
1487년(성종18 정미) 선생나이 34세, 시월에 딸이 출생하였다. 자라서 사인(士人*註6) 진주(晋州) 강문숙(姜文淑)에게 시집갔으니, 선생의 문인(門人)인 진사(進士) 흔(訢)의 아들이다. 얼마 후에 혼자 되었는데, 아름다운 덕과 착한 행실이 가정에 가득하였으니, 사람들이 『여자로서 선생의 풍(風)을 물려받은 분이다.』하였다. 수(壽)는 86세 였다. [유복자(遺腹子) 개(漑)가 있었는데, 유학(儒學)을 공부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였다.] 12월12일에 선생이 사용부군(司勇府君)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죽을 먹고 슬피 울어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몸소 오설리(烏舌里) 보로동(甫老洞)의 언덕에 땅을 정하여 장사지내고,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모든 것을 《가례(家禮)》의 예절대로 따랐다. 효성이 지극하여 향리(鄕里)를 감화시켰다. 1488년(성종19 무신) 선생나이 35세, 1489년(성종20 기유) 선생나이 36세, 선생이 상복(喪服)을 벗었다. 어머님을 섬기는데 날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머리를 빗고 낯을 씻고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여 먼저 가묘(家廟)에 배례(拜禮)하고 다음에 어머님께 문안(問安)하고 나와, 서재(書齋)에 가서 흙으로 빚어 만든 소상처럼, 가만히 꿇어앉아서 강론(講論)하다가 그치었다.
1490년(성종21 경술) 선생나이 37세, 어머님을 받들고 서울로 들어온 것이 이 해였을 것이다. 1491년(성종22 신해) 선생나이 38세, 6월에 아들 언학(彦學)이 출생하다. [아들 두 사람이 있으니 익(翊)과 욱(昱)이다.] (효령대군의 증손자)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이 추강 남효온과 함께 선생이 글을 읽는 성남(城南)의 별서(別墅)에 방문한 것이 이 해였을 것이다.
1492년(성종23 임자) 선생나이 39세, 일찍이 추강과 절교하였는데, 그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서 문병하니 추강이 거절하고 보지 않으려 하였다. 선생은 곧 문을 밀치고 바로 그 침실 안으로 들어가니, 추강이 몸을 돌려 벽을 향하고 보비 아니하였다. 선생이 손수 이불을 들고 그 피부를 어루만져 보니 수척함이 너무 심하므로, 선생이 깊이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며 조용히 영결(永訣)하고 물러나왔다. 추강은 끝내 말 한마디도 응답하지 않았다. 얼마 안가서 추강은 세상을 떠났다.
1493년(성종24 계축) 선생나이 40세, 성종(成宗)이 유일(遺逸)을 천거(薦擧)하도록 명하였다. 딸이 출생하였다. 자라서 충의위(忠義衛) 동래(東萊) 정성린(鄭成璘)에게 시집갔다. [딸 넷을 낳았는데 맏은 이 양(李讓)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하인범(河仁範)에게, 다음은 송관(宋瓘)에게, 다음은 하계옥(河啓沃)에게 시집갔다.]
(정종대왕의 고손자) 명양부정(鳴陽副正) 이현손(李賢孫)이, 선생이 어머님을 모시고 현풍(玄風)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는 시(詩)에, 『성광(醒狂)=李深源)은 구학(舊壑)에 늙는데 추강은 영원히 그만이로다.』하였으니, 선생이 어머님을 모시고 현풍(玄風)으로 돌아온 것은 이 해에 해당할 것이다.
1494년(성종25 갑인) 선생나이 41세, 여름에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선생의 행의(行義)를 임금께 아뢰어 남부참봉(南部參奉)을 제수(除授)하였다. 이 해 12월에 성종(成宗)께서 세상을 떠났다.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된 것이 이 해였으니, 비여천(非汝川)에서 서로 만난 것도 마땅히 이 해 이후에 있었을 것이다. 이 때에 선생이 현풍에 있었은즉, 그가 현풍과의 중간 지점에 와서 만났던 것이다.
1495년(연산1 을묘) 선생나이 42세, 10월에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으로 옮겼고, 얼마후에 이조(吏曹)에서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6품직(品職)에 승진하였다. 1496년(연산2 병진) 선생나이 43세, 봄에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 겨울에 김포현(金浦懸)에 옥사(獄事)가 있어, 명령을 받들어 가서 국문(鞠問)하였다. 1497년(연산3 정사) 선생나이 44세, 봄에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겼는데 옥송(獄訟)을 판결함이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오니 모두 공정함에 복종하였으며, 모든 행동이 법칙에 합치되며, 문부(文簿)를 처리하기 위하여 당(堂)에 오를 적에 동작하는 것이 법도가 있어서, 아무리 바쁠 때라도 조금도 어긴 적이 없었다.
1498년(연산4 무오) 선생나이 45세, 7월에 사옥(史獄)이 일어났다. 선생은 『점필재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맺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나라의 정치를 비난하고 시국을 비방(誹謗)하였다.』하여 곤장 80개를 치고 평안도 희천군(熙川郡)에부처(付處)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할 때에 이극돈(李克墩)이 당상(堂上)이 되었다. 과거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에 논행(論劾)을 거듭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에 사초(史草*註7)를 보니 자기의 나쁜 일을 매우 자세히 써 넣었고, 또 세조(世祖) 때의 사실을 기록하는데 점필재가 「의제(義帝)를 조상한 글 조의제문(吊義帝文*註8)을 기재한 것을 보고는, 드디어 유자광(柳子光)과 모의(謀議)하고 화(禍)를 일으켰는데, 당시의 재상(宰相)도 이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었다. 차비문(差備門*註9)으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아뢰니, 연산군(燕山君)은 항상 문사(文士)들에게 구속을 받아 나쁜 짓을 마음대로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한 번 분풀이를 하고 싶었으나 그 흠점을 못 잡고 있던 중, 유자광이 아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얽어서 죄를 만들어, 점필재는 대역(大逆*註10)으로 논죄하여 즉시 부관참시(副管斬屍*註11)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악인(惡人)과 편이 되어 서로 부동(附同)하였다는 죄로소 극형(極刑)에 처(處)하고,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은 서로 전해 알린 죄로서 안율(按律*註12)하고,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과 종실(宗室) 무풍부정총(茂豊副正摠) 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했고, 강경서(姜景叙),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는 알면서 고발하지 않았다 하여 모두 논죄(論罪)하여 먼곳으로 귀양보내고,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이黿), 이주(李胄),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姜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과 선생(金宏弼)은 모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경중(輕重)을 나누어서 논죄(論罪)하여, 혹은(極邊)에, 혹은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게 하고, 모두 봉수(烽燧*註13)와 정로간(庭爐干*註14)의 역사(役事)에 배정하였다. 1499년(연산4 기미) 선생나이 46세,
1500년(연산6 경신) 선생나이 47세, 여름에 비가 오지 않고 천둥이 일어나 대궐 문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억울한 옥사(獄事)를 처결할 것을 명하고, 또 평안도에 부처시킨 조사(朝士=朝官)을 양남(兩南*註15)에 옮겨 배치하게 하여, 선생은 죄를 감등(減等)해서 순천부(順天府)로 옮겨 귀양보내어, 북문(北門) 밖에서, 우거(寓居)하였다. 이 때 화기(禍機)를 예측할 수 없이 위급하였는데, 선생이 태연하게 대처하여 평상시의 지조(志操)를 변하지 않았다. 1501년(연산7 신유) 선생나이 48세, 1502년(연산8 임술) 선생나이 49세, 순천부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이름을 옥천(玉川)이라 한다. 수석(水石)이 맑고 기이하며 고목나무가 삐죽삐죽하였다.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또한 같이 귀양가 있었는데, 그 언덕에다 돌을 포개어 대(臺)를 만들고 왕래하면서 시(詩)와 술로 즐기는 장소를 만들었다. 선생도 때때로 혼자 가서 거닐었으나, 시(詩)를 짓는 것은 일삼지 않았다. 1503년(연산9 계해) 선생나이 50세, 겨울에 조위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그 초상을 맡아 치러주고, 또 글을 지어 제사지냈다. 1504년(연산10 갑자) 선생나이 51세, 9월에 사화가 재차 일어나서 무오당인(戊午黨人)에게 죄를 더 주도록 명하였다. 10월 초1일에 화(禍)가 선생이 귀양살이하는 곳에 미쳤다. 이 날에 선생이 죽으라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듣고, 즉시 목욕을 하고 관대를 바로 하고 나가면서 신색(神色)이 변하지 않았다. 우연히 신이 벗겨졌으므로 다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으니, 나이가 51세였다. 아들 언숙(彦塾), 언상(彦庠), 언학(彦學) 과 사위 하박(河泊), 이장배(李長培), 정응상(鄭應祥) 등이 관을 모시어 현풍 오설리 보로동(玄風烏舌里甫老洞)의 선영(先塋)이 있는 동쪽이 1리(里) 거리의 산 유좌(酉坐) 묘향(卯向)의 땅에 장사지내었다. 집은 적몰(籍沒)을 당하고 여러 아들은 나뉘어 귀양갔는데, 언숙(彦塾)은 하동(河東)으로, 언상(彦庠)은 사천(泗川)으로 귀양가고, 언학(彦學)은 어리기 때문에 면하였다. 병인(丙寅)년에 반정(反正)됨에 모두 놓여서 돌아왔다.
1506년(중종원년 병인) 이 해 9월2일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 해 9월 초이레에 선생의 어머님 한씨(韓氏)가 세상을 떠났다.
*註1-두류산(頭流山) : 지리산의 다른 이름. 백두산의 산맥이 흘러왔다는 뜻. *註2-당(堂) : 산위에 있는 신당(神堂) 임. *註3-원각사(圓覺寺) : 세조가 창건한 절인데, 현재 탑동공원에 원각사 탑(塔)과 비(碑)가 남아 있음 *註4-우리 할아버지 : 경현속록의 편찬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조부이며 선생의 셋째 셋째 사위. *註5-諱 : 정구(鄭逑)가 자기의 조부(祖父)의 이름을 바로 쓰기가 미안하여 휘(諱)라 한 것임. *註6-士人 : 사족으로 벼슬하지 못한 사람 *註7-史草 : 국사(國史)의 편찬에 있어서 사관(史官) 몇 사람이 본 대로 들은 대로 써서 사관(史館)에 올려서 감추어 두는 것을 사초(史草)라 한다. 임금이 죽은 뒤에 그 실록(實錄)을 편찬할 때에믄 실무(實務)를 보는 낭청(郎廳)이 있고, 그것을 지휘하는 당상(堂上)이 있어서, 감추었던 사초(史草)를 꺼내어 실록을 편찬함. *註8-吊義帝文 : 초(楚) 나라 장수 항양(項梁)이 처음 진(秦)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에, 초나라의 왕손(王孫)을 찾아서 왕으로 삼았더니, 항우(項羽)가 진(秦)을 멸하고는 초왕(楚王)을 높여서 의제(義帝)라 하였다가, 몰래 장수를 보내어 쳐죽였다. 점필재가 의제를 조상하는 글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지어서 단종(端宗)을 의제(義帝)에 비하고 세조(世祖)를 초(楚) 나라 의제(義帝)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하였다는 혐의를 받은 것임. *註9-差備門 : 대궐 안에 제신들이 임금을 뵈올 때 출입하는 문. *註10-大逆 :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 때에 과거에 올라 뒤에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까지 지냈으면서, 세조(世祖)를 역적에 비(比)한 조의제문(吊義帝文)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에게 전하여, 김일손이 그 글을 사초(史草)에 싣고 충분(忠憤)의 뜻이라 하였으므로, 김종직(金宗直)은 세조에 대한 대역이란 것임.
*註11-副管斬屍 : 역적이 생전에 형을 받지 않고 죽었을 때 무덤을 파서 관을 부수고 시체의 목을 베는 것을 부관참시라 함. *註12-按律 : 본시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처단한다는 말인데, 대개는 극형에 처하는 경우 이 문구(文句)를 씀. *註13-烽燧 : 국가의 유사시에 산에서 켜는 봉화(烽火) *註14-庭爐干 : 관청에서 밤에 모임이 있을 때에 뜰에 불을 피우는 것인데, 귀양간 죄인에게 봉수와 이것 두 가지의 천한 일을 맡기기도 함. *註15-兩南 : 전라도(全羅道)를 호남(湖南)이라 하는데 호(湖)는 김제(金提)의 벽골제(碧骨提)를 이른 것이라 하고, 경상도(慶尙道)를 영남(嶺南)이라 하는데 영(嶺)은 문경(聞慶)의 조령(鳥嶺)을 말한 것임. 본 블로그에 등록된 대다수의 많은 자료들은 인터넷 여러 사이트에서 수집하여 모은 자료임으로 저작권 및 권리는 만든이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저작권 및 초상권 사생활 침해로 사료되는 자료시는 본 블로그 주인에게 신고 또는 댓글로 연락 주시면 [삭제요청]시는 확인 즉시 바로 삭제 하겠습니다. [출처] 한훤당 연보(寒暄堂 年譜) - 景賢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