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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루카 4,24ㄴ-30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사람이 진실 앞에서 보이는 가장 솔직한 반응은 ‘분노’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진 상처나 수치를 찌릅니다.
루카 복음 4장 2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의 종교심과 신앙 안에 감춰진 교만을 정확히 찔러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큰 죄가 되었길래,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쳐 죽이려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단지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사렙타에 있는 이방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났고,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신앙적 특권의식을 건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왜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안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적 모욕처럼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와 직결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속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곧,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이 오히려 더 격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날 것 같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가리려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깊은 상실과 용서, 그리고 분노의 여정을 그립니다.
아들이 유괴되어 사망한 깊은 슬픔 속에서 신애는 지역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을 통해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저는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와 혼란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용서하려 했던 사람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분노와 상처가 드러납니다.
이는 그녀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에 자기 분노의 탓을 돌리며 화를 내고 죄를 이어갑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부터 분노는 자기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다른 일을 하시지 않고 그저 진리를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십니다.
비난받는 표적이 되면서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볼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보고 자기를 고칠 것인지, 그냥 화만 낼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에서 돌아설 사람들은 분노가 날 때 자기 죄를 보는 이들입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나온 엔도 슈사쿠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했지만,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기에 종종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의 삶과 기독교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일본은 그에게 매우 세속적이고 불교와 신도 중심의 문화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엔도는 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무신론적인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깊이 탐구하며,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신의 침묵이 고통을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통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중반,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심각한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병원(Waseda University Hospital)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결핵은 당시에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입원한 시기인 1956년부터 약 1년간 그는 병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병원에서의 시간이 엔도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입원 후, 엔도는 신에 대한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왜 신은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도 침묵하시는가?"
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서 그는 신의 침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죄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 속에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 고통 속에서 점차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신은 나와 함께 고통받고 계셨다”라는 깨달음은 그에게 깊은 영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분노와 상처가 사실 신을 떠나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고, 그분의 침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를 드러내기 위한 신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엔도는 회심 후, 자신의 작품『침묵(Silence)』에서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신앙의 회복을
풀어냅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고난을 다룬 작품으로, "침묵"이라는 주제 속에 신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는 회심 후, "내가 신을 믿지 않으려 할 때, 그 신을 향한 분노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분노가 결국 내 죄를 드러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을 거부하려 했던 자신을, 오히려 신의 뜻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분노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회개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었고, 엔도는 그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통해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처음엔 분노가 일었지만, 그 말이 나를 위한 진리였음을 깨달았을 때, 삶은 변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이 불편하더라도, 분노를 넘어 성찰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그 칼날은 우리를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어 새 생명을 위한 수술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4일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4,24-30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길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 속에 강력히 각인된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자부심을 지닌다는 것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택받지 못한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이민족들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 동물 중에서도 개로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혈주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입고 다니던 복장부터 남달랐습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웠으며 치렁치렁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옷 여기저기 성구갑이라고 성경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달고 다녔는데, 그것을 마치 큰 자랑거리, 훈장처럼 여겼습니다.
성구갑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인지 알아? 라고 외치는 표시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작스레 공식 석상에 섰던 한 장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습니다.
그냥 편안한 복장으로 출연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그가 입고 나온 군복 전면이 가관이었습니다.
그간 받은 훈장이란 훈장은 다 달고 나왔습니다.
그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 옛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자부심 가득한 유다인들을 절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 플레이 앞에 참지 않으십니다.
거침없이 당신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가감 없이 쏟아놓으십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이 말씀 끝에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동물도 아닌데, 예수님을 슬슬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합세해서 그분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일종의 살인미수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살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실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시국 앞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창궐하는 이 순간, 또 다른 예언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고,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처절한 기 싸움이 하루빨리 종식되는, 그래서 화해와 일치, 기쁨과 평화의 날이 빨리 다가오길 큰 목소리로 간구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월요일 강론>
(2025. 3. 24. 월)(루카 4,24ㄴ-30)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 시민이고,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4-30).”
1)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일’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만 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인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하고, 이스라엘로 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시자, 유대인들은
“너희는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는다.” 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
유대교의 법입니다(마르 14,64).
2)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지만, 유대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아들은 것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인류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시메온 예언자의 찬미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따라서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28,19),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애쓰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4.16-19).”
이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한 가족입니다.
5) 26절의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는 말씀은,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또 27절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말씀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엘리사
예언자에게 가서 치유의 은총을 간청했다는 뜻입니다.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특별히 더 편애하시는 분도 아니고, 누구를 차별대우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라고 권고합니다(야고 4,8).
이 말은, 하느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가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고,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항상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