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있는 시조 묘를 새롭게 단장하다
한식차례/2014 갑오년
한식차례가 파 대종회의 중시조 삼대 설단의 제향이 있어서 우리 집 제사는 다음 주로 순연되었기에 오늘은 괴산으로 참사를 갔다.
우리 문화 류문은 시조부터 7대가 외아들로 내려오다 7세에서 아들이 둘이 생겨서 갑 파,7파와 을 파 8파로 구분한다. 그리고 9세서 아들이 7명이 된다, 우리 문평군 파는 큰아들의 5자이다. 3자에서 풍산 류씨가, 4자에서 서산 류씨가, 5자에서 선산 류씨가, 6자에서 전주 류씨가, 7자에서 진주 류씨가 분봉된다.
형님이 분봉해가면 문제가 없는데 우리 집은 작은집이 선산 류 씨로 분봉해가는 바람에 10세,11세, 12세 할아버지를 분봉 받는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분봉이기에 형님이 그쪽으로 가던지 아니면 문화류문으로 있으려면 3대 조고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고약한 일이 발생한다.
묘소가 10세는 광양 율곡, 11세는 광양 백운산 옥룡동에, 12세는 순천에 묘가 있으니 전라도 광주 광산구와 순천사이 사신 모양이다.
우리 13세 조고부터 옥산면 수락리 무중굴에서 세거를 하는데 처갓집이 오창의 구안동 장인이 김사겸이고 신안동이 된 처삼촌은 김사형인고로, 순천까지 가기가 머니, 중간지접에서 눌러 앉고 후세에 미암일기로 유명한 류희춘 때 분봉이 된 모양인데 조선말까지는 그런대로 내왕이 있던 모양이나, 족보는 각기 만들어 보관했다. 철도가 놓이고 증조가 선산을 방문 후 상호간의 의견충돌과 자존심 대립으로 상면을 않게 된다.
그래서 빼앗긴 할아버지 3대의 설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것이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인데 못 살 때 만든 조약한 시설을 50여년 쓰다, 1990년대에 아버지가 주선하여 다시 설단을 만들고 석상도 큰 것을 붙여서 만들어 실용화를 꾀한 것을 오늘 귀향 후 처음 참사한다.
그런데 이북의 시조묘소와 재실사진이 족보에만 있었는데 재실과 경사 루는 화재로 소실되고 묘소도 관리가 안 되다, 재일동포 류기환씨가 이북을 민간교류 차원에서 방문하여 김정은을 설득하여 2013년에 잘 만들고 북한 보전유적 1777호 비각을 1778호로 발굴하고, 조선중앙동신에 보도된 사진첩을 오늘 받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
그것도 통 크게 북한은 왕 급인 능이라 호칭을 주었다.
류기환씨는 순수 사재로 이북에 수십억을 쾌척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도 이것을 승인한 것을 보면 문중으로서는 큰 복을 할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북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인용하면
사회과학원 력사 학자들이 황해남도 삼천군 달천리에서 문화 류씨의 시조묘 유적을 새로 발굴하였다. 크게 15개 본을 가진 류씨 가운데서 첫 번째가 문화 류씨이다. 이 문화 류씨에서 많은 류씨가 가지쳐 나왔다.
모든 류씨의 원조상이라고 하는 문화 류씨의 시조는 고려의 통일 위업에 크게 이바지한 류차달로서 그는 고려 공신이었다.
력사 기록에는 류차달의 무덤을 류씨의 첫 조상무덤이라는 뜻에서<류릉>이라고 하였다.
중략 새로 발굴된 문화 류씨 시조묘유적은 이미 국가보존대상으로 정식 등록되었다
2014.0406.
첫댓글 네 그렇군요. 저도 晉州柳氏 입니다. 그렇니깐 柳氏 1대 시조가 류차달 이다 이말이죠...묘소가 북한에 있군요. 잘보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초우님! 함자가 없고 아호나 필명이 초우신가 봅니다. 저는 청주에 600여년 세거한 문평군파의 60대 초반이나 웃 사진에 나보다 젊은이는 한 사람 뿐아니, 이제는 우리도 종사나 제향이나 가승에 조금씩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